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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고전 읽기 -경제학 철학 노트(7)

원문) 우리는 하나의 정치경제학적 사실, 노동자의 그의 생산의 소외에서 출발하였다. 우리는 이 사실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소외된, 외화된 노동. 우리는 이 개념을 분석하였고, 그에 따라 단순히 하나의 정치경제학적 사실을 분석하였다.
이제 더 나아가 소외된, 외화된 노동이라는 개념이 현실 속에서 어떻게 표현되고 서술되어야만 하는지 살펴보자.

읽기) 지금까지 마르크스는 순전 경제학 범주 내에서 생산과정, 즉 노동을 분석했다. 그리고 그것을 소외된, 외화된 노동으로 정식화하였다. 그렇다면 이제 이것을 경제학이 아니라 현실의 언어로, 일상적인 현상으로 어떻게 서술해야 할까?

원문) 노동의 생산물이 나에게 낯선 것이고 나에게 낯선 힘으로 대립한다면 그것은 누구에게 속하는 것일까?
나 자신의 활동이 나에게 속하지 않으며, 낯선 활동, 강요된 활동이라면 그것은 누구에게 속하는 것인가? 나 이외의 다른 존재에게. 이 존재는 누구일까?
신들일까? 물론 고대에는, 예를 들면 이집트, 인도, 멕시코의 신전건축과 같이 주요 생산이 신에 대한 봉사로 나타날 뿐만 아니라 그 생산물은 신들에게 귀속되었다. 그러나 신들만 노동의 주인이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마찬가지로 자연도 결코 아니었다. 그리고 인간이 자신의 노동을 통해 자연에 숙달되면 숙달될수록 신들의 기적이 산업의 기적에 의해 불필요한 것이 될수록, 인간이 이러한 힘들의 보존을 위해 생산의 기쁨과 생산물의 향유를 포기해야 하다니 이 무슨 모순이란 말인가?

읽기) 이제부터 아주 단순하고 쉬워진다. 노동의 생산물이 나에게 낯선것이 된다면, 내가 만든 생산물이 나에게 대립한다면, 생산물이 스스로 생물이 되어 활동하지 않는 다음에야, 다른 누군가의 것, 다른 누군가에게 속하는 것이 될 것이다. 내가 하고 있는 활동, 노동이 내가 하는 일 같지 않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분명 다른 누군가에게 속하는 것, 즉 내가 다른 누군가를 위해 하는 일일 것이다. 이건 당연하다. 그렇다면 아주 간단한 문제, 내 생산물은 누구에게 속하며, 나의 노동은 누구를 위한 노동인가?
고대에는 신을 위해 그런 일들을 했다. 이것이 포이어바흐의 이론이다. 인간은 자신의 유적인 힘을 신으로 만들었고, 급기야 사진의 긍정적인 힘과 노동을 신에게 돌렸다. 앙코르왓 같은 거대한 건축물을 보면 존재하지 않는 신이 얼마나 많은 인간의 노동력을 가져갔는지, 마야, 아즈텍 같은 경우에는 심지어 살아있는 인간을 제물로 챙겨갔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다. 산업의 기적, 즉 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라 인간은 신에게 자신을 바치지 않는다. 신으로부터 해방! 종교개혁, 칼뱅주의는 바로 신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일하라는 선언이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분명 오늘날 일부 광신도를 제외하면 신을 위해 일하지 않고, 신에게 자신과 그 생산물을 바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한결 여유롭고, 더 풍성해야 하는데, 이게 웬일인가? 자본주의, 후기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떤 면에서는 중세인들보다도 여유가 없다. 그리고 생산, 노동은 점점 고역이 되고있다. 이게 무슨 역설인가?

원문) 노동과 노동의 생산물이 귀속되는, 노동이 그것에게 봉사하며, 노동의 생산물을 향유하는 낯선 존재는 오로지 인간 자신일수밖에 없다. 노동의 생산물이 노동자에게 속하지 않고 낯선 힘으로 그에게 대립한다면, 이는 그 생산물이 노동자 이외의 다른 인간에게 속함으로써만 가능하다.
그의 활동이 그에게 고통이라면, 다른 사람에게는 향유이고, 생활의 기쁨일수밖에 없다. 신들도 자연도 아닌 오직 인간 자신만이 인간을 지배하는 이런 낯선 힘일 수 있다.

읽기) 자, 이제 신은 빼자. 신이 빠졌는데도 불구하고 생산물, 노동이 노동하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다른 사람의 것일수 밖에 없다. 음, 여기에 대해서는 마르크스가 뒤르켐이 제시한 "출현적 현상"으로서 사회, 그리고 하나의 사물로서 "사회적 사실"이라는 개념, 즉 구조주의적 개념을 개발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보니, 내가 빼앗긴다면 누군가가 빼앗는 것이라는 단순한 논리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하여 나의 고통은 너의 기쁨의 관계로 제시하고 있다. 어쨌든 여기서 마르크스는 소외론에서 착취론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보면 된다.

원문) 자기 자신에 대한 인간의 관계는 다른 인간에 대한 그의 관계를 통해서 비로소 그에게 대상적이고 현실적이라는, 앞서 제시한 명제를 좀 더 살펴보자. 따라서 인간이 낯설고 적대적이며, 강력한, 그에게 독립적인 대상으로서 그의 노동의 생산물, 그의 대상화된 노동에 관계할 때, 이 관계는 다른 사람이 낯설고 적대적이며, 강력한, 그에게 독립적인 대상의 주인임을 암시한다. 만약 그가 부자유스러운 것으로서 자신의 고유한 활동에 관계하고 있다면, 이는 그가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는 지배, 강제, 질곡 아래에서의 활동과 관계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 그리고 자연으로부터의 모든 인간의 자기 소외는 인간이 자신과 자연을 자신과 구별되는 다른 사람에게 위치시키는 관계 속에서 나타난다. 그런 까닭에 종교적인 자기 소외는 필연적으로 사제에 대한 평신도의 관계 속에서, 또는 여기서는 영적인 세계가 문제이므로 중보자 등에 대한 평신도의 관계 속에서 나타난다. 실천적이고 현실적인 세계에서 자기 소외는 다른 사람에 대한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관계를 통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 소외가 생겨나는 매개는 그 자체로 실제적이다. 그러므로 소외된 노동을 통해서 인간은 그 자신과 낯설고 적대적인 힘인 생산 대상의 관계를 만들어 놓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 자신의 생산과 자신의 생산물에 대해 맺고 있는 관계, 그리고 그가 이러한 다른 사람과 맺고 있는 관계도 만들어 놓는다. 그가 자기 자신의 생산을 그의 현실성 박탈로, 그의 형벌로, 그가 자기 자신의 생산물을 상실로, 그에게 속하지 않는 생산물로 만들어 놓는 만큼, 그는 생산과 생산물에 대한 생산하지 않는 사람의 지배를 만들어 놓는다. 그가 자기 자신의 활동을 자신에게서 소외시키듯이, 그는 낯선 사람이 그 자신의 것이 아닌 활동을 획득하게 한다.

읽기) 즉, 소외된 노동은 다른 누군가가 그 노동의 주인임을 보여준다. 그것이 소외된 노동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사실 이 부분은 마르크스의 독창적 아이디어라기 보다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에 나오는 유명한 '주인과 노예의 비유'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주인과 노예의 비유를 포이어바흐의 유물론과 연결지음으로써 독특한 결론을 얻은 것이다.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비유는 존재론적이다. 실제 주인과 노예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이라기 보다는 존재론을 설명하기 위한 비유인 것이다. 그 내용은 자립적 의식인 주인은 스스로를 주체로 확인하는 의식이면서 동시에 노예인 비자립적 의식을 통해서 자신을 의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즉, 주인이 자신의 자유를 의식하기 위해 그 대립물, 자유롭지 못한 사람, 노예에 비추어서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헤겔은 이를 지양되어야 할 분열로 보며, 소외로 본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이를 의식에 대한 비유가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로 돌려 놓았다. 그리고 이를 자립적 의식, 주인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비자립적 의식, 노예의 입장에서 바라본 것이다. 비자립적 존재, 노예, 그리고 노동자는 자신의 비자립성을 앞에서 제시한 소외의 형태로 경험한다. 죽도록 일을 하는데, 그 결과물은 자기에게 속하지 않는다. 일하는 주체는 자신인데, 그 일, 그 활동이 자신을 고통스럽게 한다. 그리고 인류라는 말을 알고 있는데, 자신은 그 구성원이 아닌것 같다. 더욱 기가 막힌것은 열심히 일하면 일할수록 자신을 옥죄는 그런 고통스런 현상은 더 강화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현상에 불과하다. 그 현상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자기 아닌 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노동을, 자신의 노동생산물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소외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향유가, 헤겔식의 말을 빌리면, 자신의 소외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존재의 확인, 자아실현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헤겔의 주인-노예 변증법의 그 다음 이야기를 전개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이 관계가 주인에게도 부정적인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주인의 경우 자신의 존재를 확증하기 위한 거울이 천하디 천한 노예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도리어 주인이 노예에게 의존적인 관계가 된다. 노예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다 해서 주인이 자아실현을 하지는 않는다. 반면 노예는 직접 자연에 자기 힘을 가해 노동을 함으로써 자아실현을 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이 대목을 거부하는 것으로 보인다. 노예는 자연에 자기 힘을 가해 자아실현을 할 수 있을런지 모르지만, 근대 산업 노동자는 그 마저도 불가능하다. 생산수단이 자연이 아니라 이미 다른 누군가의 소유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주인이 자아실현이 불가능하다는 헤겔의 정식도 거부하지는 않는다. 결국 자본주의는 자본가와 노동자 모두가 소외되는 그런 체계로 규정될수밖에 없다.
스탈린주의자들과 결국은 스탈린을 정당화한 알뛰세르는 마르크스의 이 책, 경제학철학 초고를 거부했다. 그리고 소외론은 관념론적 마르크스, 잉여가치론이 진정한 마르크스라고 분리하였다. 그러나 이 대목은 그들의 해석이 잘못되었음을 보여준다. 소외론과 착취론(잉여가치론)은 한 몸인 것이다. 그것은 현상과 본질의 관계에 있다. 착취로 인해 소외가 발생하며, 다시 이 소외가 그 착취관계를 강화하는 것이다.
어쨌든 여기서 마르크스는 자신의 평생을 지배하는 방법론을 획득했다. 그것은 현상을 먼저 관찰하고, 그 현상들의 관계를 기술한 뒤, 그 이면에 숨어있는 본질을 추적하는 것이다. 그것을 그는 나중에 정치경제학비판 서설에서 "추상에서 구체"라는 용어로 정식화 하였다. 그러나 이 문헌에서는 그러한 마르크스의 방법론의 정수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추상적인 수준에서 논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방향은 분명히 보이고 있다.

by 부정변증법 | 2008/11/05 09:45 | 마르크스 읽기 | 트랙백 | 덧글(0)

마르크스 원전 읽기 -경제학 철학 노트 (5)

원문) 인간은 그가 실천적으로도 이론적으로도 유(類)를, 다른 사물의 유와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의 유를 자신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뿐만아니라, 현재의 생동적인 유로서 자기 자신에게 관계한다는 점에서, 보편적인, 따라서 자유로운 존재로서 자기 자신에게 관계한다는점에서 하나의 유적 존재다.


읽기)이제 노동 과정에서 소외의 세번째 특징이 나타난다. 그런데 이 부분은 이 문헌 전체에서 헤겔 철학에 대해 장광설로 비판하고 있는절대지에 대한 부분과 더불어 가장 사변적이고 난해한 부분이다. 우선 유(Gattung. Genus)라는 용어부터 당혹스럽다. 이용어는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에서 기원한 용어다. 유(genus)는 몇몇 개념들을 포괄하는 상위 개념이 되면서도 그 고유한 속성을가지고 있는, 즉 다른 유와 구별될 수 있는 그런 개념이다. 유의 하위개념들이 종(specy)다. 즉 이런 저런 인종들이있으며, 이들을 포괄하는 인류가 있는 것이다. 인류는 한 사람이 다른 자연과 구별되는 가장 보편적인 범주다. 즉 갑돌이,을돌이를 추상하면 한국인, 일본인, 다시 추상하면 황인종, 백인종, 그리고 그것을 더 추상하면 인류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여기서 더 추상하면 그냥 동물이 된다. 따라서 여기서 유라고 함은 한 사람을 동물과 구별하도록 하는 가장 보편적인 특징을 지닌 그런 집합 혹은 그런 속성이 된다.


유적 존재라 함은 자신이 바로 그런 분류에 포함되고 있음을 의식하는 존재를 말한다. 포이어바흐는 오직 인간만이 자신이 인류임을 의식한다고 보았다. 즉, 인간만이 인간성 자체를 의식할수 있고, 이런저런 속성을 가졌기에 자신이 동물과 구별된다고 의식한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유적존재다. 사실 이 유적존재라는 용어는 이후형이상학적 개념으로 마르크스 자신에게 배격되며, 다시 사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으로는(다른 논문에서 밝히겠지만) 이유적존재로서 인간 개념을 포기한 것은 마르크스 이론의 큰 헛점을 남기게 된다.


원문)유적생활은 동물에게뿐 아니라 인간에게도 물질적으로 우선 인간이 비유기적 자연에 의해 생활한다는 것에서 성립하지만, 인간은동물보다 보편적이며, 그가 그것에 의해 생활하는 비유기적 자연의 범위도 더 보편적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식물, 동물, 암석,공기, 빛 등은 한편으로는 과학의 대상이며, 한편으로는 예술의 대상이다: 이들은 인간이 향유하고 소화하기 위해 제일 먼저 마련해두어야 하는 인간 정신의 비유기적 자연, 정신적인 생활수단이다. 이론적 관점에서 보면 이들은 인간의식의 일부분을 형성하며,실천적 관점에서 보면 이들은 인간의 생활과 활동의 일부분을 형성한다. 이러한 자연생산물이 식품, 연료, 의복, 주거 등의 어떤형식으로 나타나든 간에 인간은 물질적으로 이러한 자연생산물에 의해 생활한다. 인간의 보편성은 실천적으로 자연이 (ⅰ) 직접적인 생활수단인 한에서,(ⅱ) 인간의 생명활동의 소재와 대상과 도구인 한에서 자연 전체를 그의 비유기적 육체로 만드는 바로 그 보편성 속에서 나타난다.자연은 그 자체가 인간의 육체가 아닌 한 인간의 비유기적 신체다. 인간이 자연적 수단에 의해 살아간다는 것은 인간이 죽지 않기위해 끝없이 자연과의 상호작용 속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육체적·정신적 생활이 자연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인간 역시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에, 자연은 스스로에 의존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읽기) 이건 변증법적인 사유가 들어가 있어서 단답식 교육을 받은 우리가 이해하기 무척 어려운 문장이다. 먼저 비유기적 자연이라는 말은 그냥 물질이라고 옮겨도무방하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 살펴보자.선 유적 생활을 하기 위해서 존재는 자신을 보편적인 '유'로서 인식해야 함은 앞에서보았다. 그런데 이 인식은 자신의 '유'의 반대편, 즉 그 반정립을 통해서만 정립될 수 있다. 개별 존재 역시 즉자적 존재에서대자적 존재, 즉 "그저 있음"이 아니라 "무엇에 대하여 있음"이 될때 인식이 가능하듯이 보편적 존재, 즉 유적 존재 역시"무엇에 대하여 있음"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 "무엇" 역시 보편적이라야 함은 물론이다. 즉 나는 연필 한자루, 책상하나를 쥐고 있다. 나는 교감 아무개와 싸운다. 그런데 나는 내가 보다 보편적인 존재임을 안다. 나는 학자로서 문방구를사용하며, 교사로서 관리자와 싸운다. 더 보편적이 되면 나는 한국인으로서 한반도에 살며, 노동자로서 국가에 고용되어 있다.보다시피 주체의 보편성이 상승되면, 거기에 대상이 되는 것(혹은 그 부정)의 보편성도 상승된다. 여기까지는 아직 '종'의수준이다. 이제 '유'의 수준까지 가면  "나는 인류로서 자연에 살고 있다"수준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을 "인류"로 볼수 있는 것은 그가 접하는 각종 사물들을 총체적인 "자연"으로 보편화시킬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연을 두 가지 방식으로 상대한다. 하나는 자신의 직접적인 생존 수단으로, 즉 구체적인 식량, 도구 등등으로, 다른 하나는 보편적인 자연으로.


이보편적인 자연은 인간 "주체"와 관계를 맺는 전체적이고 보편적인 자연이다. 각종 물질은 이런저런 과정을 통해 주체 내부로들어오면 육체가 되며, 밖으로 나가면 자연이 된다. 이렇게 인간은 자신과 자연이 대립되었으면서도 동시에 통일되어 있음을 알며,궁극적으로 모두 자연임을 안다.


이거, 풀이 하는 게 아니라 더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 같은데, 이걸 변증법 abc로 다시 풀어보자.


1)A라는 존재가 있다. 그런데 이 존재는 그저 있는 것만으로는 존재가 아니다. 2)그리하여 이 존재는 자신의 대립물인 B를정립한다. 즉 부정이 일어난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서 A는 자신이 존재하기 위해 B라는 타자, 부정에 의존해야 하는 사항에처한다. 즉 소외가 일어났다. 3) 그러나 이 소외는 A가 자신과 B모두 그들을 모두 그 내부의 계기들로 포괄할수 있는 '알파벳'이라는 더 보편적인 존재의 부분임을 깨달으면서 해소된다. 이게 지양이다.물론 여기서 끝나는게 아니다. '알파벳'은 '한글'과 대립한다. 그리고 같은 과정을 통해 이 대립은 '문자'에 포함됨으로써해소된다... 등등.


이제 이걸 인간과 자연으로 가져가 보자.1) 나는 인류다. 인류는 혼자 뻘쭘히 인류가 아니라 다른 비유기적자연과 구별되는 한 인류다. 2) 그런데 나는 인류로 존재하기위해 저 비유기적자연에 의존해야 한다. 이로써 비유기적 자연은 나에게 대립물로, 낯선 것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비유기적 자연은나에게 흡수되면 육체가 되고, 내 육체는 밖으로 나가면 비유기적 자연이 된다. 그러니 나와 비유기적 자연은 모두 대자연의 순환의 한 고리씩인 것이다. 3)이리하여 인간은인류 역시 자연의 한 부분이며 외적 자연이라고 생각했던 비유기적 자연과 더불어 하나인 것이다. 이렇게 해서 소외가 해소된다.


아직도 이해가 안된다면 이렇게 생각해 보자. 한 인간은 자신의 대립물, 자신의 대상, 그가 상대하는 세계의 보편성의 수준만큼 보편적 인간이 된다. 그가 상대하는 의식하는 세계가, 이 사람, 저 사람, 이 물건, 저 물건인 사람과, 그가 상대하고 의식하는 세계가 자연계, 인류, 우주인 사람의수준은 다른 것이다. 더 나아가 자신이 바로 이 인류, 자연계의 불가분의 한 고리임을 인식하고 의식하는 인간은 어떨겠는가?인간은 유일하게 한 개체이자 동시에 이런 보편적 존재를 의식할 수 있는 동물이다.


원문)소외된 노동은 인간에게서 (1)자연을 소외시키고, (2)자기 자신, 인간 고유의 활동적 기능, 인간의 생명활동을 소외시킴으로써,인간에게서 유를 소외시킨다. 소외된 노동은 인간에게 유적 생활을 개인 생활의 수단으로 만든다. 첫째로 소외된 노동은 유적생활과개인생활을 소외시키고, 둘째로 추상 속에 있는 후자를 마찬가지로 추상화되고 소외된 형식 속에 있는 전자의 목적으로 삼는다. 그까닭은 첫째, 인간에게 노동, 생명활동, 생산적 생활 자체가 욕구, 육체적 생존을 유지하려는 욕구를 충족시키는 수단으로서만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생산적 생활은 유적 생활이다. 그것은 생활을 생성하는 생활이다. 생명활동의 방식 속에는 어떤 종의성격 전체, 그의 유적 성격이 놓여 있으며, 자유로운 의식적 활동은 인간의 유적 성격이다. 생활 자체는 생활의 수단으로서만나타난다.


읽기)그렇다면 소외된 노동이 어찌하여 인간을 유로부터 소외시킨다는 것일까? 우선 인간에게서 인류로서의 활동을 소외시킴으로써다. 이문단은 매우 복잡하게 기술되었지만 실은 아주 단순한 내용이다. 요약하면 이렇다. 인간은 활동한다. 인간의 활동에는 두 종류가있다. 하나는 개별 존재로서의 활동이며 다른 하나는 인류로서의 활동이다. 즉 개인적인 욕구와 충동을 충족시키는 활동, 그리고인류로서 자신의 유적 존재를 의식하며 하는 활동이다. 이 중 전자는 단지 생존하고 순간적인 욕구를 충족하는 활동이다. 따라서그때 그때의 활동이며 파편적인 활동이다.  후자는 인류의 생활방식 자체를 만들어가는 활동이다. 이 활동은 여러 파편적 활동을보편화하여 바라보는 활동이다. 노동은 단지 생존수단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방식도 생산하는 활동이다. 즉, 단지 먹이 획득이아니라 먹이 획득 방법을 만들어내고 적용하는 과정이 노동인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생존, 즉 생명유지를 위한 활동 속에서 이미노동이라는 자신의 유적 성격이 드러나는 존재다. 그러나 소외된 노동은 이런 활동을 단지 육체적 생존 유지의 수단으로 만들어버린다. 즉 이 속에서 인간은 자연, 외적 세계를 그때 그때의 생존 수단으로서만 접하게 된다. 이로써 인간은 노동을 하면서 점점자신을 "인류", "유적 존재"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이는 인간을 동물로 만든다는 것이다. 동물이 어쨌길래?


원문)동물은 자신의 생명활동과 직접적으로 하나다. 동물은 자신의 생명활동과 구별되지 않는다. 동물은 생명활동이다. 인간은 자신의생명활동 자체를 자신의 의욕과 의식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는 의식된 생명활동을 가진다. 인간이 직접적으로 그것에 융합되는 규정은없다. 의식된 생명활동은 인간을 동물적인 생명활동과 직접적으로 구별한다. 바로 이 때문에 인간은 하나의 유적 존재이다. 또는인간이 하나의 유적 존재이기 때문에 그는 의식적 존재일 뿐이며, 다시 말해 그의 고유한 생활은 그에게 대상이다. 바로 이 때문에그의 활동은 자유로운 활동이다. 소외된 노동은 이 관계를 전도시키고, 바로 인간은 의식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의 생명활동,자신의 존재의 본질을 단지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 만든다.


읽기) 마르크스는 동물과 인간의 결정적인 차이를 자기내 존재와 대자적 존재로 본다. 이는 나중에 하이데거와 사르트르에게 그대로 계승된다.하이데거는 오직 인간만(존재한다면 천사나 신도) 자연계의 대자적 존재라고 본다. 이 의미는 자신의 활동을 의식하는 존재, 자기자신을 의식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존재, 즉 자기 바깥으로 나가서 자기를 인식할수 있는 존재다. 동물은 본능적으로 생멸활동을하지만, 자신이 생명활동을 하고 있음을 알지 못한다. 즉 동물은 자신의 생명활동 그 자체다. (물론 이런 인간 규정은 최근,일부 영장류와 돌고래가 자아의식을 가지고 있음이 확인됨으로써 지지받기 어려워졌다. 하지만 이는 영장류와 돌고래를 사람 대접을하면 될 일이다). 이는 훗날 허버트 미드가 "I"와 "me"분립 이론을 수립하는 초석이 된다.  이제 "유적존재"라는 모호한 용어가 "생명활동을 의식하는 존재"로 "활동하는 자신을 의식하는 존재"로 보다 분명해진다. 이로써인간은 그의 활동, 그의 생활을 자신의 대상으로 삼을수 있는 존재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그의 활동, 그의 생활을 통제할수 있는 존재이며, 따라서 "자유로운 존재"다. 이런 의미를 알아야 엄격한 생활을 하던 고대 스파르타인이 자신들을"자유로운"존재라고 자부한 이유를 납득할수 있게 된다. 확실히 스파르타인은 충동과 욕망에 휘둘리는 그리고 그 충동과 욕망을의식하지 못하는 현대인들보다 자유로웠다.

그런데, 소외된 노동은 인간이 하루의 대부분을 원하지 않는 일을 할수밖에 없게 만들며, 그 이유가 겨우 "생존수단을 얻기위함"이다. 이로써 인간은 "생명활동"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끌려가게 된다. 그런데 인간은 의식적인 존재이기 때문에자신이 생존 수단을 얻기 위해 자신의 생명활동을 그 도구로 사용함을 안다. "목구멍이 포동청이다"라는 말을 하면서. 이건동물보다 곱절로 비참한 것이 아닐까? 일벌들이 자신의 "일함"을 의식한다면 어떻게 될까?

by 부정변증법 | 2008/10/30 12:23 | 마르크스 읽기 | 트랙백 | 덧글(0)

마르크스고전읽기 -경제학 철학 수고(4)

원문) 그러면 노동의 외화는 어디에서 성립하는가?

읽기) 우선 이 문헌헌에 무차별적으로 사용되는 외화, 소외 두 용어를 좀 정리해야겠다. 이 둘은 각기 alienation 과 estrangement 의 번역이다. 이 중 하나는 헤겔의 용어고 다른 하나는 포이어바흐의 용어다. 헤겔의 용어는 이렇다. 원래 정신이 있다. 그런데 이 정신은 스스로를 인식하지 못한다. 이 상태는 그저 있는 상태이며 자신이 있음도 알지 못하는 상태다. 자신이 있음을 인식하려면 자신을 비출 대상이 있어야 한다. 즉, "무언가에 대하여, 무엇"이 되어야 자신의 있음을 알게된다. 이리하여 유명한 대자적 존재라는 말이 나온다. 이로써 정신은 자신의 대상인 외부세계를 만들어낸다. 여기에서 최초의 외화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정신과 그 외부세계는 한몸에서 난 두 현상이지만, 이를 모르는 정신은 그 외부세계에 비추어 본 자신이 실제 자신과 "동일한지"에 대해 확신하지 못한다. 이로써 정신은 "정신"과 "외부세계, 대상"으로 분열되고, 이를 다시 하나로 만들기 위한 기나긴 여정이 시작된다. 이로써 원래 하나라야 마땅한 존재가 자신을 분열된 것으로 파악하는 현상, 자신에게 속한 것을 타자로써 파악하는 현상이 계속된다. 이것이 alienation이다.

소외는 포이어바흐의 용어다. 포이어바흐는 인간이 신을 만들고, 그 신에게 자신의 모든 힘과 좋은 점을 부여한다고 본다. 그리하여 마침내 신은 인간 자신의 산물이 아니라 인간에게 아주 낯선 대상이 되어 인간 앞에 군림한다. 이로써 인간은 자신의 산물인 신의 지배를 받으며, 신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주변화된다. 이것이 인간의 estrangemnet다. 보다시피 결국 이 두 용어를 구별할 이유가 없어보인다. 이 문헌을 처음 번역한 강유원 선생이 이 두용어를 외화, 소외로 번역한 관례를 따랐지만, 그냥 다 '소외'로 읽어도 무방할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마르크스는 노동 과정속에서 일어나는 소외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원문) 첫째, 노동이 노동자에게 외적이라는 것, 즉 노동이 노동자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 그런 까닭에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 속에서 스스로를 긍정하지 않고 부정하며, 행복을 느끼지 않고 불행을 느끼며, 자유롭고 육체적이며 정신적인 에너지를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육체를 소모시키고 그의 정신을 황폐화시킨다. 그런 까닭에 노동자는 노동의 외부에서야 비로소 자기 곁에 있다고 느끼고, 노동 안에서는 이방인이라고 느낀다. 노동하지 않을 때는 집에 있는 것처럼 편안하고, 노동할 때에는 편안하지 않다. 그런 까닭에 그의 노동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강요된, 강제노동이다. 그런 까닭에 노동은 욕구의 충족이 아니라 노동 바깥에 있는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 노동의 낯설음은 어떠한 물질적인 혹은 그 밖의 강제도 존재하지 않게 되자마자, 노동이 마치 역병처럼 기피된다는 것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읽기) 가장 먼저,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이 자신의 적성, 소질, 희망과 무관한 일이라는 현실에 직면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억지로 일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더 기가 막힌 것은 그 일의 결과 자신의 어떤 바람직한 능력이나 특성의 향상이 없다는 것이다. 억지로 죽도록 일했지만, 일하기 전이나 뒤나 자신의 진보와 향상이 없다면 한 마디로 시간낭비 아닌가? 이는 특히 육체노동이 사라진 오늘날 더욱 심각하다. 차라리 중세식 농업노동은 근육과 체력이라도 길렀지만, 오늘날의 노동은 고도의 분업화로 인해 아무리 많이 하더라도 아주 세분화된 단순한 작업에만 숙달될 뿐, 어떤 가치 있는 능력이 향상되지 않는다. 그러니 편협한 마음, 균형잡히지 않은 육체, 국소부위의 신체 손상 등이 노동의 결과다. 그러니 항상 휴식은 달콤하고 일요일은 행복하고 월요일은 마음이 무겁다. 인간은 항상 노동하지 않기를 꿈꾸며, 심지어 노동하는 순간에도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하는 이유는 "먹고살기 위해서", 즉 생존수단을 얻기 위해서다. 이로써 노동은 수단이 된다. 노동의 목적은 노동을 통해 충족하게 될 욕구가 아니라, 노동의 결과 받게 될 임금을 통해 충족하게 될 욕구다. 즉 노동을 하는 목적과 실제 노동과는 무관하다. 그러니 자발적으로 열심히 일할 노동자는 없다. 그래서 강제가 사라지면 노동도 사라진다. 계약한 노동시간을 떼우고 월급만 받을수 있으면 그만이지, 그 노동의 결과야 어찌되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런 의미에서 자신의 노동 결과물에 고도의 관심을 기울였던 기술자, 장인과 근대의 노동자는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쉬는 것보다 일하는 것이 더 편하다"라고 말했던 모차르트의 말은 오늘날 점점 먼 이상이 되어가고 있다. 도리어 "월급이 나오고 보는 사람이 없다면 되도록 놀고싶다"는 것이 오늘날의 노동자다. 당연하지 않은가? 내가 원한 일도, 내가 발전하고 계발되는 일도 아닌데다, 하면할수록 나의 심신을 망치는 일인데, 왜 자발적으로 하겠는가?

원문) 외적인 노동, 인간이 스스로를 외화하는 노동은 자기희생이며, 고행이다. 마지막으로 노동자에 대한 노동의 외재성은 노동이 노동자 자신의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것이라는 것, 노동이 그에게 속하지 않는다는 것, 그가 노동에서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속한다는 것에서 나타난다. 종교에서 인간적인 상상력, 인간적인 두뇌, 인간적인 심정의 자기 활동이 개인에게 독립되어, 즉 낯선 신적인 또는 악마적인 활동으로서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듯이 노동자의 활동 역시 자기 활동이 아니다. 노동자의 활동은 다른 사람에게 속하며 노동자 자신의 상실이다.

읽기) 사정이 이러하니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노동을 강제받아야 하며, 온갖 감시장치를 통해 땡땡이를 치지 못하도록 통제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노동의 결과, 그 생산물을 통해 이득을 보는 존재가 노동자 자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을 판매했고, 그 댓가로 임금을 받았다. 그러니 그 노동은 근무시간 동안은 노동자의 것이 아니라 그것을 구입한 사람, 즉 자본가의 것이다. 돈을 받았기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자기 몸이 남의 마음에 따라 남의 목적을 위해 그리고 남이 정해준 시간과 리듬에 따라 일해야 한다는 것은 대단한 고역일수밖에 없다. 차라리 노예는 애초에 자기가 남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노예에게는 어떤 분열도 소외도 있을수 없다. 그러나 노동자, 소위 자유 노동자는 자유 시민이지만, 일하는 시간 동안에는 다른 사람의 소유물처럼 된다. 생각은 자유민인데 몸은 노예다. "나"는 여전이 내것이로되 "나의 활동"은 내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그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는 마치 종교에서 사람들이 자신들의 좋은 활동은 신 덕분, 나뿐 활동은 악마 때문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활동은 대체 어디 있으며, 활동이 모두 남의 것인 자신은 대체 무엇인가? 결국 이는 자신의 상실이다. 노동자는 노동하는 순간부터 자신을 상실하며, 근무시간이 끝나면 그 때 자신으로 돌아온다.

원문) 그런 까닭에 인간(노동자)은 그의 동물적인 기능들, 먹고, 마시고, 생식하는 것에서만, 기껏해야 그의 거주와 의복 등에서만 자발적으로 활동한다고 느끼고, 그의 인간적인 기능들에서는 자신을 동물로 느낀다는 결과가 나온다. 동물적인 것이 인간적인 것으로, 그리고 인간적인 것이 동물적인 것으로 된다.
먹는 것, 마시는 것, 생식하는 것 등은 물론 참으로 인간적인 기능들이다. 그러나 그러한 일들을 인간적인 활동의 다른 영역에서 분리하고 최후의, 유일한 궁극목적으로 만드는 추상에서는 그러한 일들이 동물적이다.

읽기) 여기서 마르크스의 유명한 문장이 등장한다. 하루 중에서 근무하는 시간을 제외한 시간동안 노동자는 무엇을 하는가? 당신들은 무엇을 하는가? 당시 10시간 노동법도 간신히 통과될까 말까한 시절임을 명심하자. 그러면 9시 출근에 8시 퇴근이란 뜻이다. 그럼 남은 시간, 즉 자유 의지로 살수 있는 시간 동안 무엇을 하겠는가? 먹고, 자고, 싸고, 생식한다.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작업장에서 자신이 아니라 남의 것, 즉 가축이나 노예였던 노동자는 간신히 되돌아온 자유시간에는 결국 동물적인 일을 할 시간만 남아있는 것이다. 노동을 한다는 것은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는 매우 중요한 징표다. 그런데 인간은 그 노동 시간동안 가축이다. 먹고, 자고, 싸고, 생식하는 것은 인간의 동물적 속성이다. 그런데 그 시간동안 인간은 자신을 살아있다고 느낀다. 여러분도 생각해 보라. 9시부터 6시까지 사이에 자신이 살아있음을, 가장 활력있는 순간이 언제인지, 학생들이 1교시부터 6교시 까지 사이에 가장 생생하게 살아있는 시간이 언제인지? 그것은 점심시간다. 즉, 먹는 시간이다.
물론 마르크스는 먹고, 마시고, 생식하는 것을 끊고 고차적인 정신세계를 찾아가자는 종교를 설파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나름 가치있는 활동이다. 그러나 그 활동들이 삶의, 그리고 그 많은 시간을 소모하는 노동과 고역의 최종 목적이라면, 그렇다면 그것은 동물적인 활동이다. "목구멍 포도청"때문에 일하는 인간은 동물이다. 그리고 "목구멍을 포도청으로 임명하는"왕국은 동물의 왕국이다.


원문) 우리는 두 가지 측면에서 실천적인 인간 활동의 소외의 행위, 노동을 고찰하였다. (1) 노동자에게 낯선 대상으로서 그리고 노동자를 지배하는 대상으로서 노동의 생산물에 대한 노동자의 관계. 이러한 관계는 동시에 낯설고 그에게 적대적으로 대립하는 세계로서 감성적 외적 자연적 대상에 대한 관계다. (2) 노동의 내부에 있는 생산행위에 대한 노동의 관계. 이러한 관계는 낯설고 노동자에게 속하지 않는 활동, 고통으로서 활동, 무력으로서 힘, 거세로서 생식에 대한 노동자 자신의 관계이며, 이 활동은 노동자 자신과 대립하며, 그에게서 독립적이고 그에게 속하지 않는 활동으로서 노동자 자신의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에너지와 그의 인격적 생명 (도대체 활동 이외의 생명이란 무엇인가?)이다. 앞에서 서술했던 것이 대상의 소외였다면, 이것은 자기 소외다.
우리는 이제 두 개의 규정에서 소외된 노동의 세 번째 규정을 이끌어내야만 한다.

읽기) 이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에서 인간 소외를 두가지 끌어내었다. 하나는 저번에 살펴본 바와 같은 자신의 생산물이 낯선 것이 되고, 도리어 자신을 지배하는 현상이다. 다음은 그 생산을 하는 과정 속에서 노동자가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지 못하는 상황이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 아닌가?"라고 반문할지 모른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다시 되묻는다. "활동을 제외한 생명이란 무엇인가?" 즉 "일을 제외한 삶, 결국 먹는 일만 남은 삶은 무엇인가?" 앞의 것, 즉 노동 생산물이 낯선 것이 되어 도리어 노동자를 지배하는 상황은 대상의 소외, 노동 대상이 남의 것이었기에 비롯된 것이지만, 두번째 소외는 이제, 노동 과정, 노동 시간 동안 노동자 자신이 자신의 것이 아니게 된 상황, 하루 중 가장 인간적이고 활동적인 시간과 능력을 순전 타인에게 내어주고 기껏 먹고, 자고, 생식하는 활동만 자신에게 남겨둔 분열적 상황이다. 이는 노동자와 노동대상의 분열이 아니라 노동자 자신의 분열이다. 이를 마르크스는 자기소외라고 부른다.

이 두 가지 규정에서 마르크스는 다시 세번째 소외를 제시하고자 한다.(다음 시간에)

by 부정변증법 | 2008/10/27 09:44 | 마르크스 읽기 | 트랙백 | 덧글(0)

마르크스 독해 -경제학 철학 수고(3)

원문)  이제 대상화, 노동자의 생산, 그리고 그러한 대상화에서 발생하는 소외, 대상의 상실, 노동자의 생산물의 상실을 더 상세하게 고찰하기로 하자.

노동자는 자연, 감성적인 외부세계 없이는 아무것도 창조 할 수 없다. 그것은 노동자의 노동이 그 안에서 실현되며 활동이 이루어지며, 그것에서 그리고 그것을 매개로 생산하는 소재다.

그러나 노동은 스스로 실행할 대상이 없다면 생활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자연은 노동에게 생활수단을 제공하며, 다른 한편으로 자연은 더 좁은 의미의 생활수단, 즉 노동자 자신의 육체적 생존의 수단도 제공한다.


읽기) 마르크스는 소외를 구체적인 인간 활동 과정속에서 찾고자 함으로써 포이어바흐를 넘어선다. 만약 인간이 종교를 만들어서 스스로소외시키고 있다면 그 원인은 만들어진 종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를 만들게 한 인간의 활동 속에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노동을 할수록 소외되고 있다면,  그 원인은노동 개념의 분석이 아니라, 실제 인간의 노동이라는 활동 속에서 찾아야 한다. 이를 위해 마르크스는 노동소외를 구체적인노동활동의 과정을 통해 설명하고자 한다. 이는 유물론적 입장을 취한다는 뜻이다. 그의 유물론 선언은 "노동자는 자연, 감성적인 외부세계 없이는 아무것도 창조 할 수 없다"는 말 속에 나타난다. 인간이 무엇을 창조한다는 것은 감각적으로파악할수 있는 외부세계에 무엇인가를 작용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외적인 자연, 즉 물질적 세계가 없으면 아무것도 창조할 수없다. 작용을 가할 대상이 없는 일은 무의미하다. 따라서 자연이 먼저냐 의식이 먼저냐 하는 문제는 무의미하다. 자연이 존재하지않는다면 도대체 인간의 의식이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작용할 대상이 먼저 있고, 작용해야 할 이유가 있고, 그리고 나서 작용에대한 구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물질적 세계, 즉 자연은 인간 노동의 동기이자, 대상이며, 동시에 노동에 필요한 소재이기도 하다.게다가 자연은 생활수단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생활수단은 두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인간으로서, 즉 살아있는육체로서 존속할수 있는 수단이며, 다른 하나는 생산하는 힘으로서 존속할수 있는 수단이다.

원문)그러므로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을 통해서 더 많은 외부세계, 감성적 자연을 획득할수록 그는 이중적 측면에서 생활수단을 빼앗기는데,첫째 감성적 외부세계가 점점 더 그의 노동에 속하는 대상, 그의 노동의 생활수단이기를 그친다는 것, 둘째, 감성적 외부세계가점점 더 직접적인 의미의 생활수단, 노동자의 육체적 생존을 위한 수단이기를 그친다는 것이다.


읽기) 자연이 두 측면의 생활수단이기 때문에 노동자의 소외도 두 측면에서 나타난다. 노동을 할수록 더욱 상실한다는 것은 단지 갈수록 가난해진다는 의미가 아닌 것이다.

노동자는 노동을 하면 할수록 자기 외부의 세계가 자신이 통제하고 작용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님을 느끼게 된다. 외부 세계는 자신의노동에 속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노동이 외부세계에 속해있는 한 마디에 불과하다. 과거 전원의 농민들이 느꼈을법한 자연에나의 노력을 가해 얻을 수 있는 뿌듯함 같은것은 기대할 수 없다. 또한 자연에서 이런 저런 소재들을 찾아서 노동을 개선할 수있었던 시절도 옛일이 되었다. 노동자는 이미 어디선가 준비된 도구들을 이미 준비된 사용법에 따라 사용해야 한다.

또한 노동자는 노동을 할수록 자신의 외부세계가 삶에 필요한 여러 생존수단의 원천이 아니라 온통 위험과 악의로 가득찬 냉혹하고무정한 세계로 마주섬을 느끼게 된다. 즉 세상이 포도청이 되는 것이다. 이 세상은 내가 살아갈 무대이자, 내가 그 구성원인전체가 아니라 나로 하여금 계속해서 노동하기를 강요하는 포도대장이 된다. 노동자는 포도대장이 요구하는 노동을 해야만 간신히생존에 필요한 수단을 얻는다. 그야말로 자연상태에서 이 세상은 그를 절멸시킬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는 위험의 집합이다."길바닥에 나 앉는다"라는 말에는 "길바닥은 안전하지 않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물먹고,물마시고, 팔을 베고 누웠으니..."자연과의 합일 같은 삶은 허용되지 않는다. 


원문)따라서 이러한 두 가지 측면에 의해 노동자는 그의 대상의 노예가 된다: 먼저 그가 노동의 대상, 즉 노동을 얻는다는 것,다음으로 그가 생존수단을 얻는다는 것. 따라서 그의 대상이 그가 우선 노동자로 그 다음은 육체적 주체로서 존재할 수 있도록허락한다. 이러한 노예상태의 절정은 그가 노동자일 때만 자기 자신을 육체적 주체로서 유지할 수 있으며, 육체적 주체일 때만노동자라는 것이다.


읽기)이 두 측면의 결과는 노동자가 자신이 전혀 통제할 수 없는 외적 대상을 향해 외적 대상이 요구하는 노동을 해야 하는 그런상황이다. 여기서 그 순서가 전도되어 있다. 노동자는 자신의 생존수단을 얻기 위해 그 원천인 외적 세계에 작용을 가하는 것이아니라, 외적 세계에 작용을 가할수 있기 때문에 비로서 생존수단을 얻을수 있게 된다. 즉, 노동자가 아닌 육체적 주체는 생존권을요구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마라!"라는 자본주의의 가장 냉혹한 슬로건이 바로 여기에서 나오는것이다. 그런데 노동의 대상인 외적 세계는 노동자가 통제할 수 없는 대상이 되어 있다. 도리어 외적 세계가 노동자의 노동의가치를 판단한다. 따라서 노동자는 생존수단을 얻으려면  


원문)정치경제학 법칙에 따르면 자신의 대상 속에서 노동자의 소외는 이렇게 표현된다: 노동자는 더 많이 생산할수록 더 적게 소비해야한다. 그가 더 많은 가치를 창조할수록 그는 더 무가치해지고 가치가 없어진다. 그의 생산물이 더 정형화될수록 그는 더욱 기형화된다. 그의 대상이 문명화될수록 그는 더욱 야만화 된다. 노동이 더 강력해질수록 노동자는 더욱 무력해진다. 노동이 더 지능적으로될 수록 노동자는 더욱 어리석어지고 자연의 노예가 된다.


읽기) 정치경제학 법칙에 따르면이라는 단서는 조금 애매하다. 오히려 정치경제학 법칙에 은폐된 현실에서는이라고 읽는것이 더 타당할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과 자신의 복지가 반비례하거나 최소한 무관하다는 현실을 경험하게 된다. 노동자가 더욱많이 노동할수록, 그는 근대 기계문명을 더욱 발전시키며, 따라서 노동자는 점점 무가치해진다. 이는 21세기에 더욱 첨예하게나타났다.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수많은 사무직 노동자를 무가치하게 만들고, 다시 프로그래밍 하는 프로그램이 나와서 프로그래머가무가치해지고, 하는 식으로... 오늘날 지식정보노동이란 결국 인간 노동의 필요를 줄이는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기 떄문에, 노동을열심히 할수록 노동자의 가치가 전체적으로 떨어지게 된다는 이 말에 딱 들어맞는다. 

또한 이러한 근대적 노동은 체계적이고 정형화된 분업을 발전시키기 때문에 인간 노동자는 점점 그 속에서 특별한 한 부분에만전문화되게 된다. 그리하여 노동 전체는 점점 고차원적이 되지만, 그럴수록 그 복잡해진 노동 전체를 이해하기 어려워지는 개별노동자들은 그 속에서 노예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 분야를 총괄적으로 알고 행할 수 있었던 장인은 사라진다. 배울 것이 적던시절의 교육자와 배울 총량이 엄청나게 많아진 시절의 교육자를 비교해 보라. 그리하여 나누어 가르치고, 나누어 가르치다보니 나눈부분이 아닌 다른 부분에는 무관심해지고, 결국 교육 전반에 대해서 조망하지 못하게 된 분업화된 교육노동자들을 보라.


원문)정치경제학은 노동자와 생산의 직접적인 관계를 고려하지 않음으로써 노동의 본질 안에 있는 소외를 은폐한다. 노동은 부자를 위해서는경이로운 작품을, 궁전을, 아름다움을 생산하지만, 노동자를 위해서는 헐벗음, 움막, 불구를 생산한다. 그것은 노동을 기계로대치하지만 노동자의 일부를 야만적 노동으로 되돌리며, 나머지는 기계로 만들어 버린다. 그것은 정신을 생산하지만 노동자를 위해서는정신박약과 백치를 생산한다.


읽기)이 부분은 조금 당혹스럽다. 마르크스가 소외의 주 원인으로 제시한 것은 근대 산업의 분업이다. 노동자가 열심히 일할수록 산업이발전하고, 그럴수록 분업은 더욱 정교해지기 때문에 그 한 마디로 전락한 인간은 노동과정의 전체를 알지 못하는 불구가 되며,전반적이고 종합적인 인격과 지식 대신 사회 분업의 한 분야에만 특화된 지적 불구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전체적인 노동의결과물은 문명이고 정신이지만 개별 노동자는 정신박약과 백치만을 받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부자들이 과연 그 댓가로 경이로운작품과 아름다움을 받는 것일까? 여기서 마르크스는 고대 아테네의 부자들과 자본주의의 부자들을 혼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자본주의의부자들은 아름다움과 경이로운 작품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강박적으로 화폐에 집착한다. 하긴, 아무런 사용가치 없이 단지화폐만을 추구하는 자본가 정신에 대해 밝혀지려면 이 글이 작성된 시대로부터 50년이 더 지나 막스 베버가 나와야 했으니마르크스에게 그것을 추궁할 수는 없다. 어쨌든 분업은 자본가 역시 한 마디에 불과한 존재로 만들었다. 자본주의에서 완전한총체성을 갖춘 인간은 없다. 요컨대 자본주의는 부자, 노동자 할 것 없이 모두 불구와 백치로 만든다.


원문)노동의 생산물에 대해 노동이 가지는 직접적인 관계는 노동자와 그의 생산 대상과의 관계다. 생산 대상과 생산 자체에 대한 자산가의관계는 이러한 첫 관계의 결과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것을 확증한다. 우리는 이 다른 측면은 나중에 살펴볼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노동의 본질적인 관계가 무엇인지 묻는다면, 우리는 생산에 대한 노동자의 관계를 묻는 것이다.


읽기) 당연히 어떤 노동과 그 생산물의 관계는 노동자와 그 생산 수단, 생산 대상의 관계다. 이 당연한 것이 정치경제학에서는 사라진다.경제학자의 눈에는 어떤 노동이 있고, 그 결과물인 생산물이 있다. 소위 투입이 있으면 산출이 있는 것이다. 즉 사물과 사물의관계만 나타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실제 과정은 노동자가 재료와 기계를 조작하고 있는 구체적인 노동과정이며, 이 과정은 앞에서살펴본 바와 같이 소외의 과정인 것이다.


원문)우리는 지금까지 하나의 측면, 다시 말해서 자신의 노동의 생산물에 대한 노동자의 관계에서만 노동자의 소외, 외화를 고찰해 왔다.그러나 소외는 생산의 결과에서뿐 아니라 생산의 과정, 생산적 활동 자체의 내부에서도 나타난다. 노동자가 생산 과정 자체에서 자기자신을 소외시키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가 자신의 활동의 생산물에 대해 낯선 것으로 대립할 수 있겠는가? 확실히 생산물은 활동의,생산의 요약일 뿐이다. 그러므로 노동의 생산물이 외화라면 생산 자체는 활동적인 외화, 활동의 외화, 외화의 활동일 수밖에 없다.노동의 대상의 소외 속에는 노동의 활동에서 소외, 외화가 요약되어 있을 뿐이다.


읽기)그리하여 마르크스는 노동 생산물이 노동자를 지배하게 되는 이 기막힌 현실을 더 추적해 들어가기로 한다. 이는 결국 노동과정에서찾아낼 수 밖에 없다. 노동을 할수록 그 생산물이 노동자를 소외시키는 것은 노동과정이 소외의 과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콩을심었으니 콩이 나는 것이다. 노동 생산물이 노동자를 소외시킨다는 것은, 기나긴 소외된 노동 과정의 결과에 불과하다. "노동의 대상의 소외 속에는 노동의 활동에서 소외, 외화가 요약되어 있을 뿐이다." 이 한 문장이 이 문단 전체를 요약하고, 이후이 책 전반을 요약하고 있다. 이리하여 마르크스의 해부용 칼은 공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다. 이상하게 경제학자들은 고용계약,자본투입, 그리고 산출을 말하지만 정작 노동과정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노동에 투입된 돈과 산출된 가치만을 따지기 때문이다.마르크스는 그 이유가 노동과정의 소외를 은폐하기 위함이라고 준엄하게 꾸짖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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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정변증법 | 2008/10/26 21:55 | 마르크스 읽기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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