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 탈근대

세상이 이렇게 바뀐 것이죠...

청소를 하다가 문득 바라본 거실의 한 벽입니다. 정리 하다 정리 하다 끝내 포기한 공간, 나의 음반장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근사하게 CD장도 맞추고 하는데, 이런저런 나무 책장들 재활용해서 저렇게 엉성하게 쌓아 무져 놓았습니다. 몇 해 전 부터는 장수 세는 것도, 또 누구의 어떤 음반이 있는지 정리하는 것도 포기했습니다. 그냥 잡히는 대로 듣고 뭐 그러고 삽니다.
그러다가 MP3 플레이어를 사용하기 위해 저 시디들을 야금야금 엠피스리 파일로 압축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 작업을 거의 마쳤을때, 그만 허무해 지고 말았습니다. 저 시디 무더기가 바로 아래 사진에 있는 책 한권보다 훨씬 작은 외장하드 하나에 쏙 들어가 버렸기 때문입니다. 아니, 사실 그러고도 저장 공간이 많이 남았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실감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저의 절친한 사람이 자기 아들이 음악을 좋아한다고 하기에 저 하드를 복사 시켜 주었는데, 30분 걸렸습니다. 클래식 음악은 작곡가 사망한지 꽤 되기 때문에 저작권 무관합니다. 아, 물론 연주자에 대해서는 저작권이 적용되지만, 나는 엠피스리로 옮기면서 어떤 연주자가 녹음한 몇년도 판인지 따위의 정보는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관심도 없고, 그럴 시간도 없으니까요. 또 발터 벤야민의 "수집가 푹스씨"라는 글을 읽고서 "몇년에 나온 누구의 몇번째 판"어쩌고 하면서 수집하는 것이 자본주의 물신숭배에 포획되는 첩경임을 깨닫고 집어치웠습니다. 음악은 그저 들어서 좋으면 그만이죠. 그게 희귀한 연주인지 아닌지 알게 뭡니까?
어쨌든 한 음악 매니아가 수십년에 걸쳐 수집한 시디들이 단 삼십분만에 공유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만약 내가 푹스씨의 수집가적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다면 이 귀한 것을 공유할 마음이 없었겠죠. 하지만 막상 해 보니 이토록 쉬운 일이라 아무리 막으려 해도 막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죠.

즉, 지식정보재는 실물자산과 달리 애시당초 배타적인 소유가 불가능한 공유재인 것입니다. 지식정보화와 자본주의가 모순관계에 있음을 깨닫는 순간이었습니다.

문득, 저 음반들이 달랑 저 하드 하나로 압축되는 세상에서 교사란 어떤 존재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작금의 교육문제의 근원은 거기에 있는 게 아닐까요? 어쩌면 훌륭한 지식을 가진 선생님을 전국의 모든 학생이 공유하는 게 당연한게 아닐까요? 그게 꼭 우리학교가 아니라도 말입니다. 그런데 어떤 교사든 서로 특출난 부분이 다를테니 결국 각 선생님들의 가장 좋은 면을 널리 공유함으로써 하나의 거대한 이상적인 교사망(?)을 만들 수 있는게 아닐까요? 이러거나 저러거나 결국 물리적으로 시간적으로 구획을 나누어 놓은 학교라는 틀은 저 시디장에 시디 꽂아놓고 나 혼자 듣던 시절에나 통하는 교육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교사는 무엇을 주는 존재가 되어야 할까요? 비유하자면 엠피스리 파일이 주지 못하고 실제 공연에 가야만 얻을 수 있는 그 무엇이겠죠? 그것은 한 공간에서 같은 주제에 대해 흥미를 공유하고 있다는 그 생생함 말입니다. 그런데 현재 학교는 어쩌면 팬들이 어떤 사람들이 오거나 관계없이 시간표에 따라 록 팬들 앞에서 클래식을 연주하고, 클래식 팬들 앞에서 메탈을 연주하는 공연장이 아닐까요?

여러가지로 복잡합니다.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로 가야할까요? 우리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 또 주어야 하는 존재일까요?


이글루스 가든 - 자유로운 아이들, 아름다운 교육을...

by 부정변증법 | 2009/08/02 22:35 | 교육에 대해 생각하기 | 트랙백(1) | 덧글(17)

근대성, 그게 뭘까?

우연히 옛날에 어느 카페에 작성했던 글을 발견했습니다. 요즘 그 카페에 자주 안가고, 카페가 거의 죽어 있는지라, 글을 살리기 위해 이리 옮겨 옵니다. 어떤 분이 "근대성이 대체 뭡니까? 간단히 설명해 주세요"하길래 간단히 주절거려 본겁니다. 맞게 본건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근대성

 

전근대성과 비교될때는 좋은 뜻 같았는데, 요즘에는 거의 만악의 근원처럼 난타당하고 있죠? 이게 이른바 계몽의 변증법입니다. 인간이 인위적으로 무엇인가를 개량하더라도 다시 그것이 새로운 질곡이 되는. 지금은 봉건성을 타파한 근대성이 다시 질곡이 되어 있는 시기죠. 근대성의 특징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잘 설명이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할 수 있는데 까지.

 

 

추상적인 시공간, 그리고 주체

근대의 출발은 종교, 형이상학적 세계관의 붕괴와 함께 시작됩니다. 종교가 무너지자 우리의 삶을 지탱해줄 불변의 기준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시간, 공간,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지각의 형식으로 지니고 있는 '주체'입니다. 시간과 공간은 동일한 불변의 기준이 되고, '나'는 추상적이고 고정된 주체성이 됩니다. 즉 각각 다른 권재원, 송대헌이 아니라 '인간주체'라는 안정된 기반이 필요한 것입니다.

 

계량성(합리성)

고정된 시공간, 그리고 주체는 측정가능하게 됩니다. 이것을 마르크스는 탁월하게 사용가치 대신 교환가치가 전면에 등장하는 현상으로 기술했습니다. 화폐는 이 모든것들을 측정하는 고정된 기준이 됩니다. 사실 근대 초기 사람들은 이것을 환영했습니다. 이른바 "합리화"의 과정입니다. 실제로 이렇게 존재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동일 기준에 의해 측정함으로써 인류는 참으로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계산 가능하다는 것은 법칙화 하고 통제 가능하다는 것.....하지만 그것은 새로운 고통을 안겨 주었으니  

 

동일성(질의 소멸)

그 고통은 바로 동일성입니다. 근대의 과학과 문명은 법칙에 기반합니다.법칙은 수학에 근거하고 이는 수치화 가능함을 근거하고, 수치화가 가능하다 함은 각각의 개체가 단지 양적 차이만 있는 것으로 즉 질적 차이가 소멸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사과 네개 이렇게 말할때 이 사과, 저 사과는 의미 없습니다. 혹은 사람 두명 그럴때 권재원, 송대헌은 의미 없습니다. 이게 좀 더 나아가면 인력감축 20%, 교사증원 240명이라든지....그럼 이때 바로 추상화된 주체가 상정됩니다. 교사증원 240명 이럴때는 권재원도 송대헌도 아닌 보편적인 교사의 속성을 가진 추상적인 교사가 계산되는 것입니다.

 

만약 이 추상적 교사의 속성에서 벗어나는 교사가 있다면? 이것은 위협이 되므로 강제로 동일화 시켜야 합니다. 원래 동일성은 개념과 그 개념이 대표하는 사물이 일치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즉 교사라는 개념과 실제 존재하는 교사가 일치해야 한다는 것인데, 만약 일치하지 않으면? 모조리 일치시키려는 압력이 작용합니다. 이게 근대 조직의 핵심인 관료제의 힘, 체계의 힘입니다. 우리나라 축구선수중에 누구보다도 더 영웅대접 받아야 할 안정환이 한번도 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이렇게 수난을 겪는 이유도 "축구선수"라는 추상적 개념의 속성을 너무 많이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자본론'에 보면 "오늘날 인간은 모두 동일한 노동력으로 계산된다."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래서 "1000만 노동자 총단결로 노동악법 철폐하자!" 같은 구호가 오히려 위험하다는 것이며, 근대성에 오히려 포섭된 구호가 되는 것입니다. 1000만명이 모두 동일한 노동력이 되는것, 그것이야 말로 자본주의의 판타지입니다. 근대사상은 이 동일성에서 벗어나는 것을 적대적인것으로 파악합니다. 그게 바로 변증법에서 자주 말하는 "모순자"입니다.

 

 

분절, 그리고 코드화

이건 앞의 내용에서 저절로 파생되어 나옵니다. 모든 존재가 동일화되기 위해서는 되도록 잘게 갈라져야 합니다. 사과와 배는 다른 사물이지만 자꾸자꾸 잘라서 원자가 되면 똑 같아집니다. 근대사회는 인간도 그렇게 만듭니다. 그래서 만들어낸 존재가 바로 "개별 노동자"입니다. 토지,일체의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된 "개별 노동자!". 이는 마치 숫자 하나, 혹은 집합의 원소 하나와 같습니다. 이렇게 분절된 개별주체는 이미 만들어진 체계의 법칙에 따라 배치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배치되면 거기에 맞춰 주체가 조작됩니다. 그걸 코드화라고 합니다.

 

 

반복

이제 남은 것은 무엇일까요? 일체의 개성이 박탈된 한낱 개별노동자가 거대한 체계의 한 부분으로 편입되어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면? 당연히 그것은 법칙의 반복입니다. 이 반복이야 말로 근대성의 가장 사악한 귀결입니다. 항상 정해진, 똑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 그 과정 속에 본인의 사유하는 능력마저 그렇게 코드화 되는 것... 이제 오늘=내일=모레...

 

이 속에서 인간성은 파괴되고, 자신이 인간임도 잊어버립니다. 이게 바로 마르크스가 처음 발견한 근대산업사회의 소외, 물상화, 혹은 아도르노나 루카치가 말한 사물화입니다.

 

 

그럼 요약하면 뭐가 될까요?

합리적 계산과 법칙의 힘(도구적 이성)을 사용할 수 있게 된 인간이 오히려 그 노예가 되어 개성을 박탈당하고 동일한 노동력으로 계산되어 각종 기계에 편입되어 법칙에 따라 동일한 일을 반복하는 삶, 그리고 거기에 걸맞게 주체를 재편하는 각종 체계가 정밀하게 작동하는 세상. 대략 이런게 근대성이 되겠습니다.

 

아직도 더 할 말이 많지만, 여기에 책을 쓸 수는 없어서 요 정도 해 둡니다.



이글루스 가든 - 맑스공부하기

by 부정변증법 | 2008/11/25 22:12 | 철학, 사회학 탐구 | 트랙백 | 덧글(8)

네그리, 하트의 "제국"읽기 (2)

이제 본문으로 들어갑니다.

 1편 현재의 정치적 구성

 

1 세계 질서

 

네그리는 국제법, 국제법적 기관의 탄생과정을 의미있게 고찰합니다. 이는 마치 뒤르켐이 어떤 사회의 집합의식의 반영이 그 사회의 법률에 나타난다고 보았던 것과 같습니다. 만약 세계 질서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형식이든 사법적 형태로 표현된다는 것입니다. 다만 네그리는 다음의 두 가지를 관념으로 거부합니다.

1) 현재의 질서가 근본적으로 이질적인 지구적 세력들의 상호 작용에 의해 자생적으로 생겨났다는 관념: 즉 현재의 질서는 저절로 생긴것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구성된 것입니다.

2) 지구적 세력들에 초월적 단일 권력과 중심이 있다는 관념: 지구적 질서는 네트워크이기 때문에 과거 계선조직 같은 식으로는 파악될수 없다는 것입니다.

 

국제 연합(UN)

 

흔히 미국의 세계 지배도구로 격하되어 온 국제연합을 네그리는 의미 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것의 실제 영향력과 무관하게 이러한 틀이 만들어진 과정과 역동을 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수백년을 거슬러 30년 전쟁을 살펴봅니다.

30년 전쟁은 어떤 의미에서 최초의 세계대전입니다. 이는 국제적 질서가 내포하고 있는 위험성이 그대로 발현된 사건입니다. 특히 양차 세계대전이라는 미증유의 재앙은 국제 질서가 내포하고 있는 위험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계기가 됩니다. 이에 2차 대전 막바지 유엔의 탄생은 국제적international 질서 관념의 한계를 드러내고 그것을 넘어 지구적global 질서라는 새로운 관념으로 나아가는 정점이 됩니다. 국제적 사법 구조에서 지구적 사법 구조로 전환: 여기서 국제적이란 문자 그대로 nation간의 관계입니다. 지구적이라 함은 nation의 경계와 무관한 초국적 차원입니다. 즉 국가간의 협약이 아니라 ‘지구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미 독일의 위대한 법철학자인 한스 켈젠이 1920년대에 각 국가의 사법 구성체와 헌법의 최고 근원으로 국제 사법 체계를 제안했습니다. 즉, 민족국가만으로는 권리 개념 실현에 장애가 되니까, 즉 정당성의 근거로 이미 불충분하니까, 국제적 질서화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종교가 위력을 상실한 근대 유럽에서 한동안 법과 도덕의 신성한 후광의 역할은 민족이 담당했습니다. 이 과정 속에서 잡다한 공동체들이 민족단위로 통합되고, 혹은 오스트리아나 터키 제국같은 중세적 국가는 민족단위로 해체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20세기 들어서면서 민족이 그런 보편적 후광을 감당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에 켈젠은 법과 도덕의 최종적인 근거로서 모든 국가를 포괄하는 국제헌법을 제안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네그리는 칸트의 후손(?)인 켈젠의 어쩔수 없는 관념론적 한계를 지적합니다. 즉 “체계의 형식적 구축 및 타당성을 체계를 조직하는 물질적 구조와 독립적인 것으로 생각” 했다는 것입니다. “그 구조는 물리적으로 실존하고 조직되어야만” 합니다.

 

이런 점에서 유엔은 물리적으로 실존하고 조직된 최초의 초국적 질서라는 점에서 그 한계에도 분명하고 가치를 가집니다. 그리고 실제 초국적 세계 권력의 헌법화가 진행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네그리는 여기에 대한 두 가지 부적절한 이론적 반응을 지적합니다. 이 부적절한 반응은 모두 일국적 유비 domestic analogy가 방법론적 도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1) 초월적 권력을 낳는 계약 과정 강조하고 지구적 안전 중시하는 홉스적 노선: 즉 안전을 희구하는 개인이 절대군주에게 권력을 이양하듯이 안전을 희구하는 민족들이 어떤 초국적 주권자, 기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가설.

(2) 구성 과정을 활성화하고 초국적 권력을 지지하는 대항 활력에 초점 맞추는 로크적 가설: 즉 야경국가 이상의 횡포를 통제하기 위한 시민사회처럼, 초국적 권력을 견제하는 초국적 시민사회의 구성기획이 필요하다는 가설.

 

그래서 네그리는 일국적 주권을 단지 국제수준으로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사회적 관계의 지구화에 적합한, 어떤 정치권력이 이미 실존하는지 아니면 창조될 수 있을지를 묻고자 합니다. 물론 이는 단지 정치, 사법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세계화와 연관되어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제국입니다.

 

제국의 구성

 

제국은 자본주의적 생산 및 그 세계 시장의 지구화를 배경으로 구성되는 주권입니다. 물론 일국적 수준을 넘어선 자본주의에 대한 논의는 많이 있었지만 네그리는 이들이 모두 현재 상황을 자본주의의 연장으로만 볼 뿐 근본적으로 새로운 상황과 중요한 역사적 전환임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며 거부합니다. 기존의 국제자본주의 관련 이론들은 세계체제론(종속이론: 월러스틴)과 제국주의론(힐퍼딩, 레닌)입니다.

1) 세계 체제론은 자본주의가 처음부터 항상 세계 경제로서 기능했음은 옳게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를 지나치게 보편적으로 보아 현대 자본주의 생산과 지구적 권력 관계에서의 단절이나 전환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2) 제국주의론은 기본적으로 민족국가론입니다. 그리하여 자본주의적 민족국가들이 다른 민족들에 대해 제국주의적 지배를 계속 행사하고 있다고 보며, 현재의 경향들이 단지 제국주의의 완성이라 주장합니다. 흔히 미국의 세계지배전략으로 지구화 경향을 바라본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제국주의론은 열강들의 땅까먹기 경쟁이 이제는 그들의 행동을 결정하는 어떤 하나의 공통적인 권리 관념을 만들어낸 과정을 간과합니다. 즉, 2차세계대전 이전과 이후를 동일하게 본다는 것입니다.

 

네그리가 이렇게 제국의 구성이 지닌 사법적 형상에 특별히 관심 두는 이유는 법학, 정치학 같은 분과 학문적 관심 때문이 아닙니다. 이런 사법적 형상들이 제국 구성 과정의 좋은 지표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최근의 초국적 주권의 징후를 보이는 각종 초국적 사법이 그 정당성의 근원을 정치적, 문화적, 최종적으로 존재론적 문제들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즉 제국의 권력은 삶 권력으로 작용된다는 것입니다. 이를 보다 상세화 하기 위해 먼저 네그리는 ‘제국’ 개념의 계보학을 추적합니다.

 

제국 개념의 기원은 고대 로마로 올라갑니다.(여기서 네그리가 페르시아제국, 알렉산드로스 제국, 중국의 천하와 어떤 근거로 로마 제국을 다르다고 본건지는 모호합니다).

고대의 제국 개념은 사법적 범주들뿐 아니라 보편적 윤리적 가치들을 통합합니다. 제국은 윤리적인 것과 사법적인 것의 일치 및 보편성을 극단으로 밀어붙인다는 점에서 특별한 정치제입니다. 이 점에서 제국은 ‘정당한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권력입니다. 여기서 저는 네그리의 견해가 좀 좁다고 보입니다. 실제로 이런 정치-윤리적 권력은 비단 로마뿐 아니라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제나 중국의 역대 천자들도 마찬가지로 가졌던 권력이기 때문입니다. 하여튼 제국은 권력을 위해서가 아니라(실상은 그렇더라도), “대의”를 위해 다른 민족, 나라를 토벌하는 군대를 일으킬 수 있는 권력이라는 의미는 분명합니다.

이렇게 윤리-정치적 동력을 작동시키는 이러한 사법적 개념은 두 가지 근본적 경향을 포함합니다.

1) 전체 ‘공간’을 덮는 권리 관념: 제국에는 외부가 없습니다. 그 경계 외부는 비인간, 야만으로 간주됩니다. 제국은 “그때까지 알려진 모든 세계”의 주권을 의미합니다. 이 점에서 Empire의 어색한 번역어인 제국보다 동아시아에서 사용한 ‘천하’가 이런 의미를 더 잘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중국은 이 천하의 한 중심의 나라이며, 이를 중심으로 여러 나라들을 포괄하여 천하가 되는 것입니다. 천자는 천하의 통치자지 결코 중국의 통치자가 아닌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이걸 거부하는, 즉 천자의 통치를 거부하는 것은 그 자체로 도덕적 결함이 되며, ‘정당한 전쟁’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2) 모든 ‘시간’을 포괄하는 권리 관념: 원칙적으로 제국은 역사의 종말을 의미합니다. 제국의 상태는 영구적인 평화이자 유토피아로 간주됩니다. 태평성대!

 

네그리는 이런 점에서 걸프전(1차 걸프전)을, 그리고 뒤이은 코소보 전쟁을 예의주시합니다. 이 전쟁들은 분명 그 내막이야 어찌되었든 윤리적인 목적으로 침공을 정당화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전쟁을 윤리적 도구로 내세우는 경향은 세계대전 이후 매우 금기시 되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윤리적 정당화의 최종적인 배경은 걸프전에 참전한 특정 민족국가 수준으로는 제공할 수 없습니다. 이미 어떤 모종의 초국적 권위가 상정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구적(글로벌)체계가 발전되고 있는 것입니다.

 

제국적 권위의 모델

 

여기서 한동안 펼쳐지는 들뢰즈식의 장광설은 생략해도 전체를 이해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아니, 그래야 더 잘 이해됩니다. 그래서 좀 건너 뛰겠습니다.

 

앞에서 고대 제국 관념은 제국이 ‘힘 자체를 기반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힘을 권리와 평화에 기여하는 것으로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을 기반으로 형성된다는 것,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기반으로 성립-구성된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따라서 제국의 첫째 과제는 가치론적이 됩니다. 즉, 그것의 고유한 권력을 지지하는 합의 영역을 확대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고대 제국들은 단지 무력이 아니라 가치의 힘을 세우기 위해 종교와 공식철학에 그토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입니다.

네그리는 로마만 강조하고 있지만, 이미 그 보다 천년 전에 페르시아 제국은 빛과 어둠의 균형처럼 보이던 조로아스터 교를 빛에 의한 어둠의 정벌로 바꿈으로써 이런 정당화를 시도했습니다. 중국의 천자들은 ‘수기치인’, 자신의 도덕적 정당성을 바탕으로 이를 ‘천명’과 연결시키고, 그걸로도 모자라서 각종 신묘한 자연의 징후들과 연결시켰습니다. 가장 근래로는 독일제국이 헤겔의 시대정신을 통해 자신의 권위를 정당화했습니다. 따라서 제국이 하는 전쟁은 단지 전쟁이 아니라 ‘도덕적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불충분합니다. 언제나 예외적으로 개입 요구를 정의할 수 있는 능력은 이런 권위에서 나오지만, 여기에 다양한 방식으로 적용될 수 있는 무력과 도구들을 작동시킬 수 있는 능력이 부여되어야 합니다. 이런 권위의 가장 최소단위가 바로 경찰권입니다. 경찰권은 항상 예외적인 개입을 주장할 수 있는 권력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회상황을 규정할 수 있는 사법권력과 경찰을 배치할 수 있는 물리력이 바로 제국적 권위 모델을 정의하는 두 좌표가 됩니다.

 

보편적 가치들

 

예외적 개입은 어떤 보편적 가치에 기반해야 가능합니다. 오늘날 초국적 법이, 직간접적으로 민족-국가의 국내법을 관통하고 그 틀을 바꾸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런 초국적 법이 국내법을 아주 강력하게 좌우하는데 이르렀습니다. 즉 어떤 권위가 예외적 개입을 하는 것입니다. 민족국가가 권위의 최후 배경이 아닌 것입니다.

이러한 변형의 가장 중요한 징후는 우선은 강대국의 자의인 것처럼 보입니다. 세계 질서의 지배적 주체들이 인간적인 문제들을 예방하거나 해결하고, 조약을 지키고, 평화를 강요하기 위해서 다른 주체들의 영토들에 개입하는 권리나 의무라고 주장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달리 말해 이는 오늘날 강대국이라 할지라도 자기 권리,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합의에 의해서 정당화되는 초국적 주체의 형태를 빌려 비상사태 혹은 윤리적 원리의 이름으로 개입할 수밖에 없게된 상황을 보여줍니다. 즉, 지구적인 경찰권으로서만 개입이 정당화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대목은 9·11 이전에 쓴 책이라는 한계가 나타난 부분입니다. 2차 걸프전은 이런 경찰역할을 벗어난 미국의 자의적 망동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체첸과 그루지아에서 보여준 러시아의 망동 역시 경찰적 개입과는 거리가 멉니다. 하지만 미국은 2차 걸프전을 계기로 지도력에 큰 상처를 입었고, 결국 공화당의 몰락을 가져왔고, 러시아도 최근 국가 부도위기에서 도통 체면이 서지 않습니다.

 

이제 제국(형성되고 있는 제국)은 자신의 세계 질서 안에 모든 권력관계를 봉합하기 위해 생산적인 네트워크의 지구화를 지지하고 자신의 광범위한 포괄적 가치를 내세움과 동시에 제국의 질서를 위협하는 새로운 야만인들과 반란적 노예들에 대항하여 강력한 경찰 기능을 전개하는 이중의 위치에 섭니다. 제국주의에서는 그 경계선 바깥이 용납됩니다. 그러나 제국의 경계는 보편적인 윤리적 경계입니다. 그 외부는 악으로 규정되고, 야만으로 규정되니, 토벌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제국의 위기가 발생합니다. 그것을 네그리는 부패(오염?)의 제국이라고 부릅니다.

토벌이 일어납니다. 그 토벌은 전쟁입니다. 그 전쟁의 정당성은 보편적 가치에 기반합니다. 그 보편적 가치는 인권, 생태 등 지구적 가치일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제국의 전쟁은, 제국의 지배는 실제 그것이 집행되는 실체 수준에서 자가당착에 빠집니다. 실체와 본질, 효과와 가치가 공통적으로 만족되지 못하는 경우에는 제국이 생성(becoming)이 아니라 부패가 발전합니다.

이라크 전쟁이 그 좋은 예입니다. 이번 오바마의 당선은 부시가 끝내 이라크 전쟁에서 패배했음을 보여줍니다.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측면에서 아프가니스탄까지는 미국의 전쟁이 아니라 제국의 토벌 형식이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이라크 전쟁은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지구적 가치로 정당화를 시도하기 위해 처음에는 ‘대 테러 전쟁’에서 나중에는 ‘독재자 타도, 민주정부 수립’까지 곡예를 부렸지만, 결국 이 전쟁을 가치 정당화시키지 못했습니다. 부시는 철저히 미국의 지도자로 격하되었고, 마침내 정치적으로 거세되었습니다. 마치 비잔티움에만 권력이 미치던 로마 말기의 황제처럼. 이 점에서 오바마는 이율배반적 위치에 서게될겁니다. 온 세계가 그에게 열광하는 것은 제국의 지도자로 보기 때문입니다. 미국인이 열광하는 것은 미국의 국익을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by 부정변증법 | 2008/11/07 13:46 | 철학, 사회학 탐구 | 트랙백 | 덧글(2)

하버마스는 죽은개가 아니다.

요즘 한국에서 나름 좌파입네 하는 그러면서 동시에 지식인입네 하는 사람들의 유행중 하나가 하버마스 개무시하기다. 사실은 프랑크푸르트 학파 전반에 대해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은 무시보다는 무지가 적당한 표현이겠지만, 이런 저런데서 30쪽 정도에 비판이론 뭉쳐놓은 소개글 정도 읽고 대충 알았다고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사물화된 문화의 이데올로기적 억압을 예리하게 분석하였으나, 결국 비관론, 정적주의로 흘렀다." 이 한줄에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프롬, 마르쿠제, 하버마스를 몽땅 집어넣고 다 알았고 이미 극복했다고 여기는 것 같다. 특히 프랑스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포스트구조주의 계열 이론에 집착할수록 그런 경향이 더욱 심해진다. 그들이 그토록 싫어하는 동일성을 프랑크푸르트 학파라는 이름아래 부여하다니, 자기기만이다.

그러나 영미권에서의 저항사상을 리뷰하면 할수록, 아니 프랑스 이외 지역의 저항사상을 리뷰하면 할수록  프랑크푸르트학파, 특히 그 중에서 아도르노와 하버마스의 그림자가 엄청나게 크게 펼쳐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미국 좌파사상의 대부인 프레데렉 제임슨, 사파티스타 전도사인 홀러웨이에게서는 아도르노의 냄새가 펄펄난다. 파울루 프레이리, 마이클 애플, 헨리 지루는 한 눈에 마르쿠제와 하버마스의 영향이 느껴진다. 흔히 들뢰즈 주의자로 오해받는 안토니오 네그리는 실상 본인도 밝혔지만 하버마스에게 많은 빚을 졌으며 하버마스의 취약지점을 푸코의 신체 이론(삶-정치이론), 그리고 마르크스 정치경제학, 스피노자 정치철학으로 채워나간다. 네그리는 비물질노동, 지식정보시대의 토대를 분석한 맑스주의자이자 비판이론가지 결코 탈근대 사상가가 아니다. 

특히 일반론적 철학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회학의 영역에서 세밀하게 작업한 하버마스의 흔적은 나름 진보적인 기획을 모색하려는 모든 영역에서 부딪치게된다. 하버마스는 반드시 흡수해야 할 양분이자, 반드시 넘어야 할 장벽인 것이다. 그런데 많은 들뢰지안(?)들은 하버마스를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회피하고 있다. 회피하는건 좋은데 마치 극복한 것처럼 호도하며, 단순한 몇마디로 맥빠지고 정적주의적인, 그리하여 스승 아도르노의 부정의 힘을 다 까먹은 근대성의 대변자 쯤으로 몰아붙이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대개 다른 프랑스 철학자들 흉내를 내느라 정작 하버마스를 읽지는 않은 경우가 많다.

유명한 프랑스 철학자들(정작 프랑스, 유럽에선 이미 유행이 끝난걸로 보임)중 다른 나라 철학자를 진지하게 읽고 검토한 사람은, 특히 독일 철학을 진지하게 연구한 사람은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료타르(경우에 따라 데리다도) 정도일 것이다. 푸코는 하버마스와 논쟁 도중에 마치 그제서야 알았던 것처럼 "아, 내 생각중 상당부분을 아도르노가 이미 했었군. 그를 진작 읽었더라면 내 수고를 많이 절약했을텐데..."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푸코가 슬그머니 아도르노의 생각을 가져다 썼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어쨌든 푸코는 그런식으로라도 교류를 했다. 그리고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푸코는 하버마스의 취약지점을 보완할수 있는 이론적 도구를 제공할수 있다.어쨌든 결론은 비판이론 저작들을 꼼꼼히 독해하라는 것이다. 특히 하버마스는 그의 핵심개념인 "합리성"을 "교육가능성"과 거의 동의어로 쓰는 만큼 교육운동의 전망을 고민하는 사람은 반드시 숙달되고, 극복해야 하는 이론이다.

그러나 문제는 하버마스가 워낙 자기 생각을 잘 바꾸는 학자라서 읽어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그의 초기 사상인 "정당성의 위기"와 최근 사상인 "탈형이상학적 사유"에서 어떤 공통성을 찾기가 매우 어렵다. 네오 마르크스주의자의 저작인 "이론과 실천"과 90년대 저작인 "사실성과 타당성"역시 그 연결고리를 찾기 어렵다. 스승의 "부정변증법"을 너무 제대로 배웠는지, 하버마스는 좀 아니다 싶으면 자신의 체계나 학설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치는게 거의 특기다. 그 중 필생의 대 전환을 두번했는데 한번은 해석학적 전환, 또 한번은 언어학적 전환이다. 이 과정 속에 마르크스, 베버, 아도르노, 가다머 정도의 뿌리를 갖고 있던 하버마스의 사상은 윈치, 서얼, 오스틴, 뒤르켐, 파슨스, 기든스, 미드, 피아제, 아렌트, 루만 등의 사상을 아우르는 거대한 기획속에 놓이게 된다. 이 거대한 기획은 그의 대표작인 "의사소통행위이론"에 집대성된다. 이 "의사소통행위이론"이야 말로 따라서 19세기의 자본론이 갖고 있던 거대한 사상의 용광로라는 영광스러운 위치를 계승할만한 책인 것이다.

이 책에 대해서는 차차 이야기 하기로 하자, 다만 요즘 하버마스를, 비판이론을  "죽은 개 취급"하는 "한국적인 풍토"가 너무 아쉬워서 몇마디 던지는 것이다. 들뢰즈 혼자 아무리 "변증법을 무너뜨렸다"고 주장해도, 여전히 변증법적 사유는 전세계 진보사상가들의 무기로서 벼려지고 있다. 실상 들뢰즈가 헤겔을 허물었다고 주장하는 것도 의심스럽다. 그런 식의 헤겔비판(동일성으로 몰아붙이기)은 수십년 전에 아도르노가 "부정변증법"에서 거의 가공할만한 공격으로 가루를 내었던 것에 비하면 얌전한 뒷북에 불과하다. 심지어 아도르노는 헤겔의 체계뿐 아니라 실존주의의 "주체"조차 모나드 수준으로 축소된 동일성 체계의 찌꺼기로 몰아내어 버린다. 이 지점을 출발점으로 삼아야 했던 하버마스는 주체, 자아를 폐기하고 상호주관성, 주관적의미연관 등 이미 타자, 세계와 얽힌 행위자를 상정한다. 요즘 유행하는 리좀이니 네트워크니 하는 것들 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하버마스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지배계급을 비판할때 그들이 "내맘이다 어쩔래?"라고 반박할때 그것을 분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르트르나 탈근대 사상에 입각해서 지배질서를 비판할 경우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어렵다. 동일성 거부, 차이 그 자체에서는 어떤 진보적인 우월성을 내세우기 어렵다. 깡패 불러서 아들 복수해준 재벌 회장은 얼마나 파격적인가, 그 역시 차이이며 그는 말할 것이다. "내가 내 꼴리는대로 했다. 고리 탑탑한 도덕으로 날 뭐라하지 마라. 난 내 욕망에 충실했을 뿐이다." 여기에 대해 어떻게 반박하겠는가? 서로 "그래 내맘이다"하고 소리지르는 것 외에? 하버마스는 이런 상황을 봉쇄하기 위해 비판이 출발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자 평생을 작업했던 것이다. 스승의 책 제목처럼 "한줌의 도덕(미니마 모랄리아)"이 필요했던 것이며, 그것을 "말"에서 찾은 것이다. "말을 하는 한", "말이 되는 조건"을 찾게 된다면 "말도 안되는 소리!"하고 외칠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는 대화와 의사소통행위를 구별해야 한다고 경고하지만.... 

"내 맘이다!","내 돈 가지고 내가 하겠다는데?", "그건 당신 생각이고, 이건 내생각이야, 끝." 이렇게 나오는 상대를 끝까지 몰아붙여 분쇄할수 있는 이데올로기 투쟁의 확고한 토대와 무기는 이 어려운 질문들을 회피하는게 아니라, 여기에 직면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설사 그것이 너무 축소되어서 바늘만큼 작아진다 할지라도(사실 그래서 좀 김빠지긴 한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거대한 도깨비방망이보다는 직접 내 손에 잡을수 있는 바늘 하나가 더 날카로운 법이다.

하버마스의 죄라면 폼나고 문학적인 문장이 아니라 보고서같이 정확하고 다소 지루한 문장을 썼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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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정변증법 | 2008/09/18 23:03 | 뉴레프트/탈근대사상 | 트랙백(3)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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