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 청소년
2008/12/10 아나키즘과 청소년 해방 [6]
2008/05/08 어느 여학생이 쓴 양성평등 주장 [4]
2008/05/03 청소년 소설 "아바타"
# by | 2009/03/20 12:02 | 교육에 대해 생각하기 | 트랙백(3) | 덧글(9)
마크 시버스타인Marc Siverstein 지음
오늘날의 사회에서 아동은 독특한 방식으로 억압되어 있지만 이들이 겪는 억압에 대해서는 스스로 진보적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나 급진적인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들일지라도 잘 모르기 일쑤다. 불평등과 강요에 기반해 아동과 성인의 관계가 이뤄진다는 사실은 보통 인종차별이나 성차별 등의 사회적 억압과는 전혀 다른 문제로 받아들여지는데, 그 이유는 아동에 대한 차별이 어떻든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가 하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아동은 경험이 부족하고 아직 미성년이기 때문에 스스로 결정을 내리거나, 자신의 일을 스스로 처리할 능력이 없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인이 아동에 대해 어떤 형태의 권위를 행사하는 것이 정당한 것이라고 믿는다. 개인의 주권과 강요하지 않음, 그리고 자유연합과 상호부조의 원리에 기반하고 있는 아나키즘의 사상은 부모역할론, 교육일반론 그리고 아동육성론 등에서 비권위적 이론을 공식화하는데 중요한 도움을 제공한다. 또한 억압적인 사회를 살아가는 아동들이 해방을 시작하는데 아나키즘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아동이 성장하면서 제일 먼저 경험하는 권위는 부모로부터 나온다. 부모는 아동이 태어난 날로부터 만 18세 또는 19세에 이를 때까지 법적으로 정당화된 보호권을 갖는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권위적이고 위계적인 관점에서 아동과 관계를 맺는다. 부모는 아동을 소유물로 바라보는데, 그래서 아동은 양육되어야 하고, 보호되어야 하며, 적정선을 지켜야 하고, 통제되어야 하며, 규율을 배워야 하고, 선행을 했을 때는 칭찬을 받고 잘못했을 때는 체벌을 받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아나키스트들은 아동에 대한 이런 식의 개념에 반대한다. 왜냐하면 이런 생각은 아동을 부모의 부속물로 바라볼 뿐, 아동 역시 자율적 존재로서 자신의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아나키스트 미하일 바쿠닌은 다음과 같이 간명하게 정리한다.
“아동은 그 누구의 소유물도 아니다. 아동은 부모의 소유물도 아니며, 심지어 사회에 소속된 사회적 소유물도 아니다. 아동은 그저 자신의 미래에 소속될 뿐이다.”
일부 부모들은 핵가족 하에서의 숨막히는 분위기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자식을 과도하게 보호한다’거나 ‘자식을 지나치게 사랑한다’는 식으로 변명을 하기도 한다. 성별화된 질서가 생성되고 강화되는 것이 바로 이런 핵가족 제도다. 권위적인 이데올로기가 다음 세대로 전수되는 것도 바로 이런 핵가족 제도를 통해서다. 핵가족 하에서 성(性)에 대해 금욕적으로 억압한 결과 아동들에게서 신경증적이고 반사회적인 인격적 특성이 생겨나기도 한다. 많은 경우 부모들은 자신이 가진 특정 종교(유대교, 기독교 등)나 정치적 입장(미국에서는 공화당을 지지하는가 또는 민주당을 지지하는가 등)를 자식도 따라야 한다고 강요한다. 유대교 가정에서는 남자아이가 13살이 되면 유대교 성년식인 ‘바 미츠바(Bar Mitzvah)’라는 것을 열어야 한다고 은근히 압박하거나 또는 대놓고 강요하기도 한다. 이는 ‘남자아이가 성인이 된다’는 표시다. 하누카, 크리스마스 등은 아동이 강제로 참여해야 하는 종교적 잔치다. 자신 스스로 종교적, 정치적 신념을 갖도록 하는 기회를 아동은 부여받지 못한다.
아이가 5살 무렵이 되면 학교에 보내지는데, 이곳은 아나키스트 밥 블랙이 정확하게 지적한 것처럼 ‘아동수용소’라고 부를 만하다. 이런 기관에서 아동은 교사에 의해 주의 깊게 감시를 당한다. 교사는 아동이 ‘의심스러운’ 행동을 할 때마다 보고를 해야 한다. 학교의 목적은 아동이 어떤 식으로든 자유로운 생각이나 개인성의 징후를 보일 때마다 은근하게 또는 명시적으로 제재를 가함으로써 그것을 꺾어놓는 것이다. 아동이 ‘제대로’ 행동을 하지 않을 때는 학생주임에게 보낸다거나, 교무실에 가둬놓는다거나, 정학시킨다거나, 퇴학처분을 내린다거나 또는 낮은 성적을 주는 등의 체벌을 가한다. 사립학교 대부분에서 그리고 많은 공립학교에서도 학생들에게 복장과 두발의 규정이 가해진다. 웃옷은 반드시 가지런히 바지에 넣어야 한다거나 허리띠를 반드시 매야 한다는 식의 조항까지 있을 정도다. 문신을 하거나 머리를 염색하거나 귀걸이나 피어싱을 하거나 또는 기타 다른 방식으로 개인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싶어하는 학생들에게는 학생주임이나 또는 교장이 직접 나서서 호통을 치고 이를 금지시킨다.
학생과 교사의 관계는 노동자와 사장의 관계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사장은 회사를 소유하고, ‘행동 규정’을 마련하며, ‘생산적인 근무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노력한다. 권위자에게 의문을 품고 반문하는 것은 좋지 않은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하며, 학생들의 분노는 학생자치기구나 학교가 인정하는 학생회 등을 통해 조절된다. 이는 거대한 노동조합총연맹(미국의 경우 AFL-CIO 같은 단체)을 통해 노동자들의 분노가 조절되는 것과 유사하다. 학생자치기구가 사소한 개혁을 요구할 수는 있겠지만, 아나키즘이 요구하는 것처럼 학교의 존재 자체에 대해 반문을 제기하고 학교에서 벌어지는 강요와 폭력의 철폐를 요구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학교가 감옥과 얼마나 많은 점에서 닮아 있는가 살펴보는 것도 매우 흥미롭다. 감옥과 학교 모두 다음과 같은 조건들이 적용된다. 권위적인 구조, 복장과 두발 규정, 다른 곳으로 이동할 때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점, 정숙과 질서에 대한 강조, 금지규정을 지키기 위한 단속, 행동에 대한 규제, 문제의 본질적인 해결이 되지 못하는 비본질적인 보상제도, 개인 자율성에 대한 상실, 자유에 대한 억압,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제되는 것 등.
이에 다음과 같은 질문이 나온다. 아동이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이와 같은 특정한 종류의 억압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가장 중요한 점은 가정과 학교 그리고 작업장--학생들은 패스트푸드 점 같은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 최저 임금을 받으며 착취를 경험한다--에서 기존의 질서를 완전히 전복할 수 있는 분위기부터 만들어내는 것이다. 다른 청소년들과 함께 자신이 부모와 성인들로부터 어떤 처우를 받고 있는지, 그것이 부당하지는 않은지 이야기해보자. 계급에 대한 자각은 필수적이다. 아동이나 청소년은 자신이 하나의 독특한 계급으로서 억압을 받는다는 계급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와는 반대로 억압하는 계급은 삶의 조건에 대해 명령을 내린다. 아나키스트들의 국제노동조직인 '세계산업노동자회 IWW(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의 규약 서문을 알기 쉽게 바꿔서 말해보면, 억압하는 계급과 억압받는 계급은 공통점이 하나도 없다.
구체적으로 조그만 방식으로 불복종을 실행에 옮길 수 있다. 예를 들면 국기에 대한 맹세를 거부하거나, 학교가 강요하는 종교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것, 또는 학교에서 내준 숙제를 할 때, 과제의 주제로 청소년 운동의 역사 또는 엠마 골드만이나, 학교에서 아나키스트 동아리를 만들고 반전 티셔츠를 입고 등교했다는 이유로 정학을 당한 15살 학생 케이티 시에라Katie Sierra 등을 택하는 것도 가능하다. 학생들 앞에서 이런 내용을 발표해보자. 이는 노동자들의 작업거부나 태업과 비슷한 방식의 불복종이다. 학교 바깥에서 다른 이들과 대화하고, 책을 읽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등 스스로를 교육시켜보자. 자신의 생각을 담은 전단지를 만들어 친구들에게 나눠주고 학교에 붙일 수도 있다. 혼자서 또는 친구들과 소책자나 잡지를 만들어 학교에 돌릴 수도 있다. 학생들의 수업거부, 동맹휴학 또는 ‘길거리를 되찾자’ 등의 방식도 적용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때 본질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지엽적일 수도 있는 문제들 예를 들어 강제적으로 이뤄지는 야간자율학습이나 두발 규제 등을 다룰 수도 있겠지만, 학생들은 이와 같은 문제들을 접하면서 더욱 급진적이 되어 문제의 뿌리에 다가갈 수 있게 된다.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는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예를 들어 내가 사는 지역의 한 아나키스트 동아리는 근처 개훈련장에 붙어 있던 ‘복종을 가르칩니다’ 라는 문구를 떼어내 한 고등학교에 펄럭이도록 붙여놓았다. 이런 행동은 어느 정도는 성공을 거둘 수 있다. 부모들과 학교 당국은 예전에는 별로 저항을 받지 않고도 지나갔던 것들이 이제는 학생들로부터 저항을 일으키게 된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전에는 자신들이 학생을 감시하고 통제했지만 이제는 자신의 그런 권력이 도전을 받으며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 학생은 전처럼 형태가 없는 한 무리의 온순한 양떼가 아니라 계급의식을 갖고 지성을 갖춘 젊은 청소년들로 조직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젊은이들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고 결정을 내릴 준비가 되어 있으며, 자신에게 명령을 내리는 주인을 영원히 없애나갈 것이다.
아나키즘은 청소년 해방에 있어서 많은 것을 제공할 수 있다. 권위주의에 반대하고 강요와 폭력에 반대하는 아나키즘의 기본 원칙은 청소년이 처해 있는 노예와도 같은 속박상태에서 청소년이 자유로워지는데 강력한 도구가 될 것이다. 청소년의 해방에 있어서 아나키즘은 부모의 강요를 제거하는 것만이 진정한 해방이 아니라는 통찰을 제공한다. 즉 청소년의 해방을 가져올 수 있는 대안을 창조해내야 한다는 점이다. 대안을 창조하는 것이야말로 ‘이중권력 전략’의 좋은 예이다. 새로운 사회는 낡은 사회의 껍질을 벗고서 태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조약골 번역)
# by | 2008/12/10 21:33 | 교육에 대해 생각하기 | 트랙백(1) | 덧글(6)
16살 소녀의 눈으로 바라본 양성평등
풍성중학교 3학년 ***
나는 나이가 들면서 인터넷을 하는 횟수가 부쩍 늘어난 것을 느끼게 되었다. 여느 아이들처럼 학교에서 돌아오기만 하면 첫째로 신발을 벗고, 둘째로 가방을 내팽겨 치고, 세 번째로는 컴퓨터 플러그를 꼽은 뒤, 마지막으로는 발가락으로 본체의 전원을 켜는 것이다. 그러고는 이내 볼일이 보고 싶어지면 화장실에 가는 것처럼 자연스레 정보의 바다로 풍덩! 빠져들게 된다.
인터넷을 켜면 익숙한 초록색 검색 창이 뜨고, 나는 자연스레 형형색색 다양한 색깔과 현란한 움직임으로 내 눈을 간질이는 광고로 눈을 돌리게 된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광고에서는 새로 나온 게임, 승용차, 화장용품, 휴대폰 등을 요란하게 알리고 있고, 그 중에 유독 눈에 들어오는 것은 상품보다 바로 해괴한 옷을 입거나 천 조각으로 보아도 될 만한 옷가지를 걸치고 있는 여성이다.
거의 다 벗은 듯한 여성이 대체 왜 이러한 광고에 나오게 되는 것일까? 너무나 풍만해서 옷이 터질 것 같은 가슴과 불가능 할 정도로 기다란 다리를 자랑하는 게임 광고 속 여자 캐릭터는 어떻게 해서 광고 속에 나오게 된 것일까? 나는 그러한 여자를 이미 너무 많이 보아왔기 때문에 처음엔 ‘새삼스레’ 그런 생각까지 하게 되었느냐고 자문했었다. 그러나 생각을 거듭 할수록, 이건 뭔가 잘못되었다 싶었다.
게임 속에서도 그렇지만, 승용차 광고에서도, 주유소 광고에서도 그랬다. 심지어 샤워 용품 광고를 할 때에는 여러 명의 여성이 샤워하는 모습을 발랄하게(?) 표현해내었다. 왜 대체 남자 모델은 거의 쓰지 않는 것일까? 승용차와 거의 다 벗은 여성의 관계는 무엇일까? 샤워 용품 선전은 꼭 여성이 해야만 하는 것일까? 하고 의문을 가져 본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일주일에 두세 번 든 체육 시간에는 주로 피구와 축구, 발야구 등을 했었다. 남자애들은 축구, 여자애들은 피구를 하는 것이 정해진 매뉴얼이었고, 어쩌다 한 번 남녀 혼성으로 발야구를 하곤 했다. 어쩔 때는 ‘보디가드 피구’라는 것을 했는데, 여자애들끼리, 남자애들끼리는 서로 맞출 수 있지만 남자가 여자를 맞추어 아웃시킬 수는 없는, 그래서 남자가 여자를 ‘보호’해 주어야 하는 그러한 피구 게임이었다. 내 기억 속으로는, 그 피구가 결코 재미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왜 하필 남자가 보호 해 주었어야 했을까?’라는 의구심도 적지 않게 든다.
지금도 드라마를 보면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회장님, 사장님인데 여자 회장님도 별로 안 보인다. 그리고 회장과 사장 옆에서 열심히 일하는 비서는 왜 다 여자인 건지! 차를 내오고, 전화를 바꿔주고, 손님을 먼저 대접하고……. ‘남 비서’의 개념은 없는 것일까?
또 있다. 우리 동네에는 잠실고등학교, 잠실여자고등학교 등이 있는데, 잠실고등학교에는 남학생만, 잠실여자고등학교에는 이름처럼 여학생만 다닌다. 그런데, 왜 남학생만 다니는 잠실고등학교는 왜 ‘잠실남자고등학교’라고 이름 붙이지 않는 걸까? 남학생이 다니는 학교가 정상화된 것이고, 여학생들이 다니는 학교는 정상화되지 않아서 ‘여자’라는 단어를 붙인 걸까?
버스를 탈 때 자주 보게 되는 광고에서 모바일 화보를 선전할 때에도 역시 남자 화보는 없었다. 전부 다 여자들이 수영복 입고 해변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들만 넘쳐날 뿐이다.
이 뿐인 줄 아는가? 속담에도,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라는 말이 있다. 나는 이 속담에도 남녀차별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고 생각한다. 남자 셋이 모여도 수다를 잘 떨 수도 있는데 말이다. 어떤 사람은, ‘과학적으로 고음을 낼 때 접시가 잘 깨지고, 그 고음을 내는 것이 남성 보다는 여성이 아무래도 쉽지 않겠느냐? 그것이 남녀 차별이라고 보긴 어렵다. 오히려 그런 생각이 집안일을 여성만의 전유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생각하던데, 나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솔직히 말해서 그 당시에 음파 감지기로 여성들의 목소리와 남성들의 목소리를 비교, 분석해 본 것도 아닐 테고……. 다분히 남성우월주의에 치우쳐서 만들어진 속담 같아, 들을 때마다 속이 상한다.
위의 사례 외에도 양성이 평등하지 못한 예는 참으로 많을 것이다. 회사 내에서도 은근한 차별과 승진에서 제외될 수 있는 것도 그러한 예이다. 회식 자리에서의 성희롱 등도 모두 다……. 십대 아이들이 즐겨 쓰는 속된 단어인 ‘엠창?(뜻은 너희 엄마는 술집에서 일하는 창녀지?)’이라는 말 또한 술집에서 일하는 여자를 어쩌면 짐승보다 낮은 존재로 심히 격하시킨 예이다.
나의 생활에 깊이 뿌리박힌 ‘은근한 양성불평등’을 나를 제외한 아이들은 느끼고 있을까? 앞으로도 이런 양성불평등이 지속된다면, 진정한 사회악의 발전을 직접적으로 야기하게 될 것이다. 양성불평등은 사라져야 한다. 내가 이 나이 때에 이러이러한 불평등을 체험했다는 것을 나의 미래의 아들․딸에게 전해주고 싶지 않으며, 현재 또한 겪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만일 딸아이를 낳게 되어 그 아이가 양성불평등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면 정말 마음이 아플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다른 두 종류의 인간만 있을 뿐, 다른 두 계급의 인간이 있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16살의 나이에 내가 할 수 있으며, 앞으로 할 수 있고,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부분은 무엇일까?
우선, 지금의 엄마․아빠 세대들이 자라나는 자녀에게 올바로 교육시켜야 할 것이다. 남자아이라면 이렇게, 여자아이라면 저렇게 행동하라고 하지도 말고, 남자아이니까 이렇게, 여자아이니까 저렇게 하는 것이 ‘마땅한 거야.’라고 가르치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남자가 남자다운 것, 여자가 여자다운 것을 함부로 정의내릴 수 있는 사람은 이 지구상에 아무도 없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세상에는 다른 두 ‘종류’의 인간만 있을 뿐이다.
또, 학교에서도 여러 방면으로 힘써야 한다. 남성 주의를 여성 주의로 바꾸자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것을 강조해주었으면 한다. 악어와 악어새처럼 말이다. 예를 들어, 보디가드 피구를 할 때에 남자가 여자를 지켜주지도, 반대로 여자가 남자를 지켜주는 것도 아닌 동성끼리는 공격을 할 수 있지만 이성끼리는 공격을 할 수 없는 방법이 바로 그것이다. 이 방법은 요즈음 대부분의 경기에서 행해지고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또한,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이러한 양성평등 글짓기를 보편화시키는 것도 한 방법이라 할 수 있겠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가정과 학교가 몸담고 있는 사회의 역할이다. 한창 자아를 형성할 시기인 십대. 특히 청소년에게 보여 지는 많은 매체부터가 남녀가 평등하다는 것을 느끼게 해 주어야 할 것이다. 벗은 여성의 몸으로 상품을 대신하여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선정적인 방법 말고 진정한 아이디어로 승부하는 광고가 증가하고, 능력 있는 여성의 정당한 승진도 정상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여성이 각종 성범죄에 노출 되어 있는 것도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시급히 아니,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장기적으로 사회를 양성평등으로 이끌어나가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할 것이다. 공익광고협의회에서 자주 광고를 하거나, 양성평등 캠페인을 전국적으로 증가시키는 등 현재 내가 말할 수 없는 많은 해결 방안들이 차고도 넘칠 것이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사회는, 여성과 남성의 색깔이 너무나도 뚜렷하다. 16세의 소녀, 내가 보기에는 이 색깔이 혼합되어 어우러졌으면 좋겠다. 혼합되지 않더라도, 각자의 색깔을 살려 보기 좋게 만드는 보색의 관계처럼, 하늘에는 하얀 구름과 파란 하늘이 어우러져 한껏 멋을 내고 있는 것처럼, 서로 돕고 사는 악어와 악어새처럼, 조각조각 맞아 떨어지는 퍼즐처럼. 남녀가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16세 소녀는 원한다, 소망한다, 그래서 외친다. ‘평등하자’라고.
# by | 2008/05/08 15:40 | 교단 일기 | 트랙백(1) | 덧글(4)
# by | 2008/05/03 19:24 | 예술의 향기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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