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 철학

사랑, 그 지독한 혼란

제목은 이렇게 썼지만, 이 글은 울리히 벡의 유명한 책 이름이 아니다. 물론 그 책 내용을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우연찮게 얼추 맞아들어가는 내용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사랑이라는 말에 참 인색하다. 그 한마디만 하면 상황을 모면할 수 있는 순간에도 "사랑해"라는 말을 기어코 삼킨다. 비유가 좀 건방지지만 공자 역시 "인"이 무엇이냐는 제자들의 질문에 한사코 에둘러 대답했었다. 공자가 인에 대해 딱 부러지는 설명을 하지 않은 까닭은 인이란 실천 속에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이지 어떤 형이상학적 실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형이상학적 실체로 바꾸어 놓은 주자는 공자의 길에서 정말 한참 벗어난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사랑이라는 말을 쉽게 입에 담지 않는 것도, 그것은 실천을 통해 드러나는 원리지 그 자체로 규정될수 있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사랑한다면 할 수 있는 여러가지 행동들"은 할 수 있어도 "사랑 할"수는 없다. 너를 위해 이런저런 일들을 해 줄수는 있어도 "사랑" 그 자체는 할 수 없다. 따라서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니 나는 "사랑 해"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같은 이유로 "사랑 해"라는 말을 들어도 믿지 않는다. 그건 다만 "난 지금 기분 좋아"라는 말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경험적으로 제시할 수 없는 한 "사랑 해"라는 말은 공허하다. 오히려 진정 사랑한다면 사랑에 기반한 여러가지 실천과 배려, 서로간의 관계를 우호적이고 행복하게 만들려는 구체적인 실천과 배려가 있어야 할 것이다.

내가 기분 쫗을 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며 심지어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내가 기분이 나쁘고, 상황이 어렵고, 고통스러울때 그것을 꾹 참고 내색하지 않으며 도리어 상대방을 배려해주려는 마음은 사랑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성자는 모든 사람에게 그리 대하고 나같은 범인은 특정한 사람에게 그리 대한다. 

공자는 인이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 했다. 예수도 이웃을 사랑하라 했다. 공자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충서를, 즉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가짐을 갖되, 그게 일시적이거나 변덕스럽지 않고 일관되게 이어지는 것을 행한다고 했다. 예수도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은 결국 도덕의 황금율, 즉 네가 원하는 바를 타인에게도 주라는 것으로 귀결시켰다.

그런데 이런 마음이 자연적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마음은 자연상태에서 만들어지기 어려울 것 같다. 맹자는 사단이라는 마음의 단서가 있다고 했지만 그건 맹자의 희망사항인 것으로 보인다. 이런 마음, 사랑의 마음, 충서의 마음은 훈련되고 교육되어야 만들어진다. 그래서 시서예악이 필요한 것이다. 즉 예절이라는 규범을 따르며 음악과 시의 교양으로 육성되어야 하고, 서의 지식을 바탕해야 하는 마음인 것이다. 즉, '앎' 으로 다듬어지지 않은 사랑은 장자가 말하듯 "새를 키우는데 내가 좋아하는 술과 고기를 주어 결국 굶겨 죽이는"격이 될 것이다.
 
결국 사랑이란 "내가 원하는 바를 상대에게도 행하되, 그것을 상대의 상황과 현재 상황에 맞게 해주는 것"이다. 이는 달리 표현하면 "내가 원하는 바를 알고, 상대가 원하는 바를 안 뒤, 그 실행 가능성을 고려하여 상대방이 원하는 바를 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원하는 바와 상대가 원하는 바, 그리고 실행 가능한 상황이 서로 다를 수 있다. 따라서 이는 교섭하고 조정되어야 한다. 즉 사랑은 "내가 원하는 바와 상대방이 원하는 바를 실행 가능한 맥락에서 일치시킬 수 있도록 상호 교섭하는 것"이다. 사랑은 교섭인 것이다.

원칙적으로 사랑은 상대가 원하는 바를 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독심술을 하지 않는 한 상대가 원하는 바를 알 수 없다. 따라서 우선 자신과 상대의 보편성(이게 칸트 윤리학의 기본이 된다)을 가정하여 내가 원하는 바를 기준으로 상대가 원하는 바를 추론한다. 이게 근대적 사랑의 패러다임이다. 그러나 여기서 유아론적 독단, 근대적 주체성의 폐단이 나타난다. 국민들을 사랑한 로베스피에르는 자신이 원하는 바에 비추어 귀족들과 반대파를 죽였다.

여기서 하버마스의 서로주체성이 나올 순서가 된다. 사랑은 물론 상대가 원하는 바를 해 주는 것이지만 그것을 나를 기준으로 유추할 수는 없다. 따라서 사랑의 기준은 나도 남도 아닌 나와 남 사이에 존재하게 된다. 그것은 소통의 장이다. 결국 사랑이란 "의사소통"하려는 것이다. "의사소통"을 통해 서로 상대가 원하는 것을 알고자 하며, 그것을 행하고자 하는 것이 사랑이다.
 
따라서 "사랑한다"고 말하지 말라. "사랑하다"는 어떤 관념도 대표하지 못하기에 공허한 말이다. 다만 매 순간 매 순간 상대가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소통하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리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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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정변증법 | 2009/12/14 09:28 | 철학, 사회학 탐구 | 트랙백 | 덧글(2)

마르크스 강독 - 포이어바하에 대한 테제 3번

원문)
3

인간이 환경과 교육의 산물이며 따라서 인간의 변화는 환경과 교육의 변화라는 유물론의 학설은 인간이 환경을 변화시키며 교육자 자신이 교육받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따라서 이 학설은 사회를 두 부문―그 중 한부분은 다른 한 부분보다 더 우월하게 된다 ―으로 나눌 수밖에 없다. 환경의 변혁과 인간 활동 혹은 자기변혁의 일치는 오직 '혁명적 실천'으로서만 파악되고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The materialist doctrine that men are products of circumstances and upbringing, and that, therefore, changed men are products of changed circumstances and changed upbringing, forgets that it is men who change circumstances and that the educator must himself be educated. Hence this doctrine is bound to divide society into two parts, one of which is superior to society. The coincidence of the changing of circumstances and of human activity or self-change [Selbstveränderung] can be conceived and rationally understood only as revolutionary practice.

읽기) 여기서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하를 위시한 그 때 까지의 유물론의 공통된 결함을 다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개요는 테제2번과 동일하게 인간을 활동의 주체로 파악하지 못하고 다만 객체로, 수동적인 수용자로 파악했다는 점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이전까지의 유물론은 인간은 자신이 살고 있는 환경과 받아 온 교육(양육이라고 직역해야 하지만 양육, 훈육, 학습을 포괄하는 의미에서 교육으로 옮겼습니다)의 결과물로 보았습니다. 이건 사실 오늘날에도 많은 좌파들이 자주 빠지는 함정이며, 스탈린 시대 교과서의 '반영론(의식은 물질의 반영이다)'에서 극적으로 표현되기도 했습니다.

사실 여기서 마르크스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인간은 환경의 영향을 받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환경에 영향을 주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인간이 환경을 좌지우지 하는 것은 아니며, 다만 환경과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상호 변화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이 어떤 교육을 받았느냐에 따라 크게 영향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교육을 담당하는 교육자 또한 사람이며 그 과정에서 영향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망각하면 인간은 환경에 수동적으로 영향받고, 인간은 교육받은 대로 만들어진다는 그릇된 생각이 발생됩니다. 그렇다면 환경을 더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또 교육을 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지도한다는 전제적인 발상으로는 한 걸음 남은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과거 소비에트에서 마르크스의 사상을 마치 유물론인 것처럼 몰아 붙인 까닭이며, 변증법을 사유의 방법이 아니라 마치 자연의 존재법칙인 것처럼 호도한 까닭입니다. 이렇게 유물론적 측면이 기계적으로 강조될때 "법칙을 먼저 알고 있는" 지도자 동지의 자리가 마련되는 것입니다.

 마르크스의 인식론은 유물론이라기 보다는 유물론과 관념론의 지양이며, 그것은 바로 이미 정해진 외적 지식의 단순한 습득(유물론적 관점)과 자유 의지를 가지고 실제로 행하는 실천(관념론적 관점)의 결합입니다. 즉 테제1번에서 말했듯 인식론의 변혁적이고 능동적인 측면은 도리어 관념론에서 발전해왔기에 마르크스는 그것을 관념론의 것이라 하여 폐기하는 대신 보존하고, 다시 유물론의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측면과 결합하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리의 객관성은 인식 대상 그 자체, 혹은 인식 과정 혹은 방법론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론과 실천의 결합을 통해 현실 속에서 스스로 입증되어 나가는 데 있는 것입니다. 이는 공교롭게도 수십년 뒤 마르크스의 이 노트를 읽어 봤을 리 없는 미국의 철학자 존 듀이의 인식론과 일맥상통합니다. 듀이 역시 '철학의 재구성'과 '자연과 경험'에서 관념론적 입장과 유물론적 입장을 모두 비판하면서 사고와 실천의 결합으로서 '경험'을 진리의 기준으로 제시한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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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정변증법 | 2009/12/02 09:38 | 마르크스 읽기 | 트랙백 | 덧글(3)

마르크스 강독 - 포이어바하에 관한 테제 2번

정말 오랜만에 마르크스 강독을 올립니다. 요즘 너무 할 일과 읽을 거리가 많은 탓인지 마르크스 다시 읽기가 자꾸 뒤로 밀립니다. 어쩌면 이게 고전의 운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고전은 마치 언제 찾아도 그 자리에 있을 것 같은 오랜 친구처럼 느껴져서 그리 시급하게 느껴지지 않거든요. 하지만 때가 되면 반드시 다시 읽게되는 책, 그게 고전이겠죠. 이제 포이어바하에 관한 테제 2번을 읽어 보겠습니다.


원문)
2

인간의 사유에 객관적인 진리가 부여될 수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는 이론적인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인 문제이다. 인간은 자기 사유의 참됨을, 즉 현실성과 힘, 그의 사유의 차안성을 실천속에서 증명해야 한다. 실천에서 분리된 사유를 놓고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 하는 논쟁은 순전히 스콜라적인 문제이다.

The question whether objective truth can be attributed to human thinking is not a question of theory but is a practical question. Man must prove the truth — i.e. the reality and power, the this-sideness of his thinking in practice. The dispute over the reality or non-reality of thinking that is isolated from practice is a purely scholastic question.

읽기)
이 부분은 훗날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매우 선호했던 부분입니다. 그때 그들은 이 글을 "실천"이라는 부분에 강한 방점을 두어 읽었습니다. 이를 통해 지식인들을 비판하고 현실적인 투쟁을 외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실천을 지나치게 협소하게 파악하여 계급투쟁과 관련한 경제투쟁이나 정치투쟁을 강조한 오류를 범했습니다. 이 글이 '인식론'임을 유념해야 합니다. 그리고 제일 마지막 문장에서 '스콜라'를 대비시킴을 유념해야 합니다.

스콜라 철학은 100% 연역으로 구성된 철학입니다. 실체에 대한 정의로부터 출발하여 인간 만사 모든 것을 세밀하게 논리적으로 연역하는 체계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경향은 이후 독일 관념론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칸트의, 그리고 헤겔의 거대한 철학체계는 순전히 "곰곰히 따져도 말이됨", 즉 논리적인 정합성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이를 비판합니다. 그 거대한 체계가 아무리 꼼꼼하게 짜여 있어도 결국은 인간의 머리속에서 일어난 "사유"에 불과한 것이며, 그 사유가 참인지 거짓인지는 실제로 해 보아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마르크스가 덮어놓고 "실천"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유"는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사유는 "실제로 해 봄" 즉 실천을 염두에 두고 이루어져야 하며, 실천을 통해 검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마르크스의 인식론은 사실상 '이론수립-가설설정-경험적 증거로 검증'이라는 과학적 방법론을 채택하겠다는 선언입니다. 사회과학이 보편화된 오늘날에야 이게 너무 당연한 것이지만, 자연과학이 아니면 모두 철학적 사변에 의존했던 19세기에는 자연계를 대상이 아니라 인간계를 대사으로 과학적 방법으로 탐구한다는 것은 매우 생소한 아이디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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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정변증법 | 2009/11/30 10:47 | 마르크스 읽기 | 트랙백 | 덧글(0)

마르크스 읽기 : 포이어바하에 관한 테제 1번

드디어 여기까지 왔습니다. 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는 사실 저서가 아닙니다. 다만 마르크스가 끄적여 놓은 메모입니다. 포이어바흐의사상을 도구로 삼아 현실을 분석하고 비판하는 극단까지 추구했던 마르크스가 느낀 낭패감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돌파구가 어렴풋이드러난 자기해명적인 글입니다. 이 메모가 작성된 시기는 '독일이데올로기'와 비슷합니다. '독일이데올로기'는 마치 이 메모의후속편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그럼 하나 하나 읽어보겠습니다. 원문은 www.marxists.org 에서 공유된 파일을사용했습니다. 아마 최인호 선생의 번역이 아닐까 싶지만 확인은 못했습니다.

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 1번


원문읽기) 이제까지의모든 유물론(포이에르바하의 것을 포함하여)의 주된 결함은 대상, 현실(Wirklichkeit), 감성(Sinnlichkeit)이단지 '객체 또는 관조(Anschauung)'의 형식 하에서만 파악되고, '감성적인 인간 활동, 즉 실천'으로서, 주체적으로파악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활동적' 측면은 유물론과 대립되는 관념론―이것은 물론 현실적이고 감성적인 활동 그 자체는알지 못한다―에 의해 추상적으로 전개되었다.

첫줄부터 아주 난관입니다. 이 글은 마르크스가 남 읽으라고 쓴 글이아니라 철학박사인 자기 혼자, 혹은 기껏해야 자신을 비평할 수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쓴 글이기 대문에 그때까지의 서양철학의흐름은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 읽는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우선 이때까지의 유물론에 주목합니다. 알려진 바와 달리마르크스는 유물론자가 아닙니다.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에 심취한 적은 있으나 그는 "인류 역사의 자연사적 파악"으로 자기 학문을정의했으며, 이는 오늘날 식으로 말하면 "사회과학"입니다.마르크스가 철학의 존재론적 주제인 "유물론""관념론" 논쟁중 유물론의 손을 들었다, 이런 속류적 해석은 버려야 합니다. 이 보다 앞서 발표된 "신성가족"은 "관념론 비판"이라 불러도 될것입니다. 거기서 그는 "천지가 개벽하는 요란한 변화가 오직 머리속에서만 이루어지는"독일의 관념론자를 비판하다 못해 조롱합니다.하지만 그는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 반드시 건너야 하는 불의 강(Feuer Bach)"인 유물론의결함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 이 테제 전반은 유물론(심지어 그토록 존경한 불의 강 까지 포함한) 비판인 것입니다. (여담:비판했지만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에 대한 존경을 철회하지 않습니다. 인터내셔널 창설시 초청까지 할 정도였고, 거절 당했지만기회주의자, 은둔주의자 하며 비난하지도 않았습니다. 조금만 생각이 다르면 수정주의, 개량주의, 이탈자, 배신자 하며 활켜대는훗날 자칭 좌파들의 꼴사나운 모습과 다르죠. 그는 포이어바흐처럼 학술적인 인물은 공경했습니다. 그가 경멸한 사람은 머리는 텅빈채결사투쟁만 외치는 바쿠닌 파, 그리고 운동판에서조차 자리와 명예를 탐하는 라살레류였습니다)
이제까지의 모든 유물론은 저 멀리 그리스의 데모크리투스, 에피쿠루스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아시다시피 고대 그리스 최초의 철학은 세계의기원이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물음은 우리의 인식과정과 관련됩니다. 우리는 감각기관의 자극을 받아 머리속에 표상을 획득함으로써 인식합니다. 이를테면 우리는 돼지저금통을 보지만, 실제는 우리 머리속에 맺힌 돼지저금통의 표상을 보고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표상이 실제 돼지저금통의 반영인가 아니면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관념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따라 전자가 유물론, 후자가 관념론이 됩니다. 좀 더 무리하게 단순화시키면 유물론자는 "이 세상은 우리가 감각지각하는 바 대로의것"이라 주장하는 것이며, 관념론은 "이 세상은 우리 머리속의 관념이 감각자극에 의해 소환, 재구성 된 것"입니다. 이 차이는별 것 아닌것 같지만, 상당합니다. 유물론은 보편성의 근거로 실제 존재를 듭니다. 즉 나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돼지저금통을돼지저금통으로 인식하는 것은, 돼지저금통 그 자체가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만물은 똑 같은 원자들의 합성물이니,어떤 사물이 특정방식으로 인식된다면 그건 그 사물이 그렇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관념론은 그근거로 모든 사람들의 정신의 보편성을 듭니다. 돼지저금통이 어떤 물건인지는 몰라도 그것을 그렇게 인식하게끔 하는 어떤 공통의정신적 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공통의 정신적 요소는 신, 본유관념, 순수이성, 절대정신으로 불려왔습니다. 따라서 진정한인식은 감각지각이 전해주는 그 표상이 아니라 그 공통의 정신적 요소를 인식함에 있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은 감각적으로 보이는바, 그 대로가 아닐수 있습니다. 일체유심조? 그 정도 까지는 아니더라도 말입니다.
따라서 유물론과 관념론은 세계의비참함에 대한 관점도 다릅니다. 비참한 현실은 유물론자에게 비참한 현실일 뿐입니다. 그러나 관념론자에게는 다른 무엇일수있습니다. 생각의 틀만 바꾸면, 혹은 그 현실에 깃든 정신, 신의 선한 의지나 목적만 읽어내면 비참한 현실은 그 이상의 다른무엇입니다. 이런 이유로 마르크스는 관념론이 지배계급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해왔다고 비판했던 것입니다.

원문읽기)포이에르바하는―사유객체와는 현실적으로 구별되는―감성적 객체를 원했다. 그러나 그는 인간활동 자체를 '대상적' 활동으로는 파악하지못했다. 따라서 그는 『기독교의 (Wesen des Christenthums)본질』에서 오직 이론적인 태도만을 참된 인간적태도로 보고, 반면에 실천은 단지 저 불결한 유대적 현상형태 속에서만 파악 하고 고정시켰다. 따라서 그는 ‘혁명적인’,‘실천적·비판적인’ 활동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여기서 감성이라는 단어는 독일 철학의 독특한 용어인 Sinnlichkeit의 번역입니다. 그 의미상으로는 감각과 가깝지만 칸트이래 독일 인식론에서는 완전히 수동적인 감각적 지각이란 있을 수 없다고 봅니다. 여기에는 지각하여 표상을 만들어내는 인간의 정신적인 능력이 개입되기 때문입니다. 즉 외부에서 감각기관을 통해 자극이 들어오면 그것이 우리 정신에서 어떤 표상으로 떠오르게 되는데 이 모든 일련의 과정을 감성적 과정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표상을 개념화하는 과정이 지성적 과정이 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복잡하게 따지지 않고 그냥 감각적이라고 읽어도 큰 무리는 없습니다. 다만 이것은 어떤 개념이나 논리가 개입되지 않고 그 자체로 인식한 것이라는 의미라고 보면 됩니다.


포이어바하는 유물론자이며 관념을 배격했기 때문에 이미 정신에 박혀있는 개념작용인 지성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순수한 감각적 대상, 인간의 관념이 만들어낸 가상이 아니라 실제 존재하는 대상을 원했습니다. 칸트라면 우리가 인식한 것은 감각기관이 들여온 감성적 대상이 아니라 그것을 우리의 지성작용과 판단력을 통해 재구성한 것이라고 말했겠지만, 포이어바하는 그런 정신의 재구성이 아니라 순수한 물적 존재, 즉 감각적 대상을 인식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칸트 관념론의 매우 중요한 고갱이 하나를 버리게 됩니다. 그것은 감각대상을 능동적으로 재구성하는 인간의 주체적인 능력입니다. 순전한 유물론의 입장을 고수한 나머지 포이어바하는 인간의 정신을 다만 감각기관이 전달해주는 물질의 자극을 수용하는 감각수용기로 격하시키고 만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감각세계를 능동적으로 재구성하여 인식하지 못하며, 따라서 거기에 개입하여 어떤 능동적 활동도 하지 못합니다. 다만 세계가 전해주는 그 감각표상을 수용하여 이른바 '객관적'인식을 할 뿐입니다.

따라서 이론적 태도, 즉 외부세계, 자연세계,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태도만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외부세계의 객관성을 무시하고 거기에 주관적으로 개입하려는 태도, 즉 실천적 태도는 돈에 혈안이되고 종교에 미친 유태인들이나 할 일입니다. 따라서 포이어바하에게는 사회의 현상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사회과학적 태도는 인간적인 것이지만, 그 사회에 자신의 주관적인 열망을 투여하여 이를 변혁하려는 사회운동은 매우 불결한 행동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음. 제가 제대로 읽은 건지 모르겠습니다. 많은 질정을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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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정변증법 | 2009/10/09 20:01 | 마르크스 읽기 | 트랙백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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