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 진보교육학

사회과 교육과정에 대한 간단한 비판(정치 영역)

그 동안 제가 너무 많은 일을 하느라 거의 포스팅을 하지 못했습니다. 거의 일주일째 새 포스팅이 없는데도 늘 100회 이상의 히트수가 나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오늘은 그 동안 했던 일들의 작은 결실중 하나를 공개합니다. 사실 저는 요즘 기존의 제도권 교과서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은 버렸습니다. 그건 그저 저의 물질적 기반을 위해 해 둘 뿐입니다(돈벌이의 어려운 표현^^) 저의 실제 꿈은 제도권 교과서를 대체하는 새로운 교과서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제도권 교육과정에 대한 문제제기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전교조가 이런 일을 할 수 있기를 늘 기다려 왔지만, 전교조 기다리다 내가 늙어 죽겠습니다. 그래서 전교조는 저 뒤에 남아 있으라 하고 뜻 맡는 몇몇 분들과 먼저 튀어 나갑니다.

1. 정 치

 

1.1. 제도권 교육과정 분석과 문제제기

 

개정 7차 교육과정에서는 ‘정치’ 과목을 1) 정치 현상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지식을 습득하고, 2) 이를 바탕으로 공동체 생활의 원리를 파악하며, 3) 정치 생활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민주 시민의 자질을 함양하기 위해 개설된 과목이라고 명기하고 있다.

결국 “정치현상에 대한 학문적 지식과 정치현상에 대한 고찰(탐구)→ 정보 획득, 탐구 능력 및 의사결정 능력 함양→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민주 시민의 태도.” 로 요약되며, 능동적 참여의 태도는 명백히 종속변인이며 정치에 대한 학문적 지식과 인지영역이 독립변인이 된다.

그렇다면 어떤 지식? 다음의 표를 보면 정치학의 개론서적 지식과 정치현상에 대한 정보습득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 구성표를 보면 마치 이러한 내용들이 투입되면 민주시민으로서 능동적 참여의 태도가 산출될 것 같이 느껴진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여기에서 우리의 두 가지 문제의식이 출발한다.

영 역

내용 요소

민주 정치의 발전

정치의 의미와 기능/ 정치적 권위와 정통성/ 민주 정치의 발전 과정 민주주의의 이념과 유형/ 정치 문화와 정치 사회화/우리나라 민주 정치의 특성과 과제

국민의 권리와 의무

헌법의 정치적 의의/ 국민 주권과 입헌주의의 원리/ 우리나라 헌법의 기본 원리/ 국민의 정치적 권리의 내용과 한계/우리나라 국민의 정치적 의무/국민 주권 실현의 과제

국가의 조직과 통치

국가와 정부/우리나라의 정부 형태/국회와 입법부/대통령과 행정부/법원과 사법부/민주주의와 지방 자치의 발전 과제

정치 과정과 참여

정치 과정/정치 참여의 의의와 유형/이익 집단과 시민 단체의 정치 참여/정당과 정당 정치/선거와 투표/여론/우리나라 정치 참여의 현실과 과제

국제 사회와 정치

국제 사회의 특성과 변화/국제 사회의 행위 주체/국제 사회의 협력과 갈등 /국제 사회의 여러 문제/우리나라의 외교 정책과 과제/민족 통일의 과제

 

Q1 여기에 투입되는 지식과 정보는 과연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민주시민의 태도를 길러낼 수 있는 원재료로서 정당한 것들인가?

 

어떤 지식과 정보도 일의적인 상태로 투입될 경우에는 능동적 참여가 아니라 순응적 태도만을 만들 뿐이다. 특히 정치학에서 사용된 개념들은 일의적인 경우가 거의 없다. 그런데 교과서에서는 이것들을 철저히 일의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를테면 국민주권 같은 매우 다의적이고 역동적인 개념은 교묘하게 선거절차 속으로 축소되고 고정되고 있다. 이것은 교묘한 이데올로기 장치로 보아야 한다. 이런 교육을 받으면 학생들은 정치를 일의적 개념들로 구성된 객관물로 바라보게 된다. 법칙에 의해 움직이는 객관물에 대해 시민이 할 수 있는 일은 그것에 거스르지 않는 것 뿐이다.

 

Q2 보다 근본적으로 능동적 참여 경험(간접적인 경험이라도) 없이 인지적인 조작만으로 민주시민의 태도가 길러질 수 있는가?

  

결국 이런 상태에서 학생들이 습득하게 될 참여 방법은 법에 호소하는 것, 그리고 선거에 참여하거나 합법적인 단체에 가입하고 진정하는 것 외에는 남지 않는다. 정권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 같은 역동적인 참여는 애초에 배제되고 있다.

 

Q3. 정치의 주체는 시민 뿐인가?

 

이건 보다 심각한 물음이다. 지금 이 교육과정은 정치의 주체로서 사회계약의 테두리 내에 있는 사람들만을 상정하고 있다. 이는 명백히 홉스 -로크- 루소의 전통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홉스는 사회계약 외부의 사람들을 ‘다중’이라 부르며 두려워했다. 그러나 그들이 왜 계약에서 배제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이 교과서의 ‘시민’이라는 말 속에는 다분히 질서와 계약에 순응하기로 서약한 사람들의 함의를 담고 있다. 그것을 거부하여 스스로 외부자가 되거나 배제되고 소외된 사람들은 그렇다면 어떤 권리의 주체도 아닌가? 아감벤, 랑시에르 등은 오히려 그들에게서 정치적인 것을 찾고 있지 않은가?

 

Q4. 국가는 갈등 없이 움직이는 시계장치인가?

 

저 교과서에서 상정하고 있는 정치 모델에서 국가기구는 매우 중립적이다. 어떤 것이 투입되느냐에 따라 산출이 결정되며 국가 자체는 순수 객관적 기계장치같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국가가 그렇게 보이는 것 자체가 실상은 갈등속의 역동적 균형이 아닐까? 그리고 이 갈등 속에서 국가 기구는 그야말로 통치기구로 작동하는 것이 아닐까?

 

1.2. 무엇을 할 것인가?

 

기존의 교과서와 동일한 수준의 규모와 내용범위를 담고 있는 형태이면서, 그 구성과 내용을 다음과 같이 대체하는 새로운 교과서를 개발한다. 이 교과서는 내신용으로는 별 도움이 안 될지 몰라도, 정치를 제대로 이해하고 나아가 정치학의 최신동향을 이해하는데는 도움이 될 것이다.

 

①정치적(Political)인 것의 실제를 포착할 수 있도록 한다.

지금의 정치교육과정은 너무도 정적이다. 그러나 정치적인 것은 기본적으로 시끄러운 것이다. 아렌트가 말했듯이 정치는 노동, 작업, 행위 중 행위의 차원이며, 행위는 기본적으로 차이, 다양성의 드러냄에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서로의 차이와 다양성을 분출하는 속에서 공통적인 것을 찾아가는 역동적 과정으로서 정치. 이렇게 바라 볼 때 정치와 행정의 차이가 포착된다.

 

②민주주의를 구성적(Constructive)인 개념으로 포착할 수 있도록 한다.

민주주의는 어떤 제도나 법규로 환원될 수 없다. 현행 교과서는 민주주의를 몇몇 특정한 선거제도나 대의제로 환원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일종의 이념형이다. 민주주의를 어떤 제도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규범적 차원으로 파악함으로써 여러 나라의 정치, 혹은 한 나라의 과거와 현재를 민주화의 관점에서 비교할 수 있게 된다.

 

③독재와 전체주의를 가르치자.

현재 교과서는 독재, 전체주의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민주주의 만큼이나 독재, 전체주의, 파시즘의 이념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현재 우리 사회에 어떤 부분이 민주적이며 어떤 부분이 전체주의적인지 비판적으로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④정치 기구 등에 대한 정보는 직간접적인 경험 속에서 터득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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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정변증법 | 2009/06/18 23:12 | 트랙백 | 덧글(6)

진보진영은 '사교육 탓'을 넘어야 한다

 

 

지난 포스팅에서 저 빈칸의 ?들 속에 학업성취의 가장 중요한 변인들이 숨어 있을 것이며, 그것을 찾는 것이 교육학자, 사회학자의 과제일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교육학자, 사회학자들이 게으름뱅이가 아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는 많은 이론들이 나와 있다. 그 중 가장 흔하게 거론되는 것이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와 학업성취도의 관계에 대한 연구들이다.

그러나 사회경제적 지위와 학업성취도가 상당한 상관관계를 보여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메카니즘을 밝히지 않는 한 분석적 가치도 적을 뿐 아니라,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도 않는다. 사회경제적 지위가 비슷한 정도의 상류층 학생들 간에도 상당한 수준의 학업성취도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이에 삽입되는 매개변인이 사교육이다. 다음의 보도 내용이 그 가장 전형적인 주장이다.


....권영길
민주노동당 의원은 24일 서울 11개 지역교육청의 과목별 기초학력 미달 비율과 무료급식 지원자 비율의 상관관계를 분석해 보니 상관계수가 평균 0.75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특히 사교육 의존도가 높은 영어와 수학의 경우, 학년이 올라갈수록 상관계수가 커지는 것으로 분석됐다. 권영길 의원은 “이번 조사 결과는 학년이 올라갈수록 소득에 따른 교육격차가 공고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며 “저소득층에 대한 집중 지원이 교육격차 해소의 첫 걸음이라는 것이 다시 한 번 확인된 셈”이라고 말했다.....(한겨레, 2월 24일)


이 주장을 따라가게 되면 다음과 같은 모형을 얻게 된다.

 

 

 

이게 진보진영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모형이다. 한마디로 부잣집이 자녀 교육에 더 많은 투자를 하며, 특히 많은 사교육을 하기 때문에 학업성취도가 높다는 것이다. 이번 민주노동당의 발표도, 진보신당의 논평도 다 이런 취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물론 학업성취도 격차를 교사들의 노력부족으로 몰아가면서 교원평가를 강행하려는 안병만 장관의 단순무식한 논리에 대해 학업성취도는 SES에서 결정난다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주장이 도리어 신자유주의를 도와준다는 것이다. 즉, 안병만은 병맛을 만들수 있어도, 이주호에게는 얼씨구나 하며 어시스트를 해준 격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형적인 우파들은 학업성취도를 순전히 개인의 노력탓으로 보는 자유주의를 견지하겠지만, 신자유주의는 빈부차가 학력차로 나타난다는 좌파들의 견해를 거부하지 않고 공유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가 괜히 '신'이 아니다. 이주호는 2004년부터 시종일관 "빈부교육격차 해소, 교육평등을 위해 평준화를 해체해야 한다."는 역설을 주장하고 다닌 인물이다. 아마, 그들은 이 모형을 거부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거침없이 명제를 펼쳐나갈 것이다.

 

1. 부유층은 사교육비를 투자하기 때문에 자녀가 성적이 높다.

2. 빈곤층은 사교육비를 투자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녀 성적이 낮다.

3. 따라서 평등의 관점에서 빈곤층도 부유층 만큼 사교육비를 투자할 수 있게 해야한다.

4. 그 방법은 교사들의 노동을 강화하여 빈곤층이 학교에서 학원 다니는 효과를 얻게 하는 것이다.

5. 교사들의 노동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학교간, 그리고 학교와 학원 사이의 경쟁을 조장해야 한다.

 

이 명제들 중 1,2 번은 전통적인 좌파의 주장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자연스럽게 4,5번을 도출해 내는 것이다. 이게 신자유주의의 무서움이다. 이걸 반박하다 보면 좌파는 자가당착에 빠지게 된다. 부유층이 사교육 등 더 많은 교육투자를 하기 때문에 빈곤층이 뒤처지지 않게 정책적 뒷받침을 하라는 요구를 줄기차게 하면서도 이른바 공교육 강화방안을 통해 학교를 학교+학원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정책은 반대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좌파는 1,2번의 전제를 고집해서는 안된다.


사실 SES, 사교육 가설은 경험적으로 타당하지 않은 가설임이 여러차례 증명되었다. 고집불통 한국 학부모들은 잘 믿지 않지만, 한국교육개발원에서 김양분 이라는 연구원이 조사한 결과들만 훑어봐도 사교육이 성적을 올린다는 것은 그리 신뢰할만하지 못한 속설에 불과하다. 특히 사교육 효과는 상위권 학생들의 경우 더욱 의미 없어진다.


아래의 그림을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이 그림은 말도 많고 탈도 많던 김광억 외(2004)의 ‘누가 서울대에 들어오는가?’에 나오는 강남지역 학생들의 서울평균 대비 서울대 입학 비율이다.

85년부터 강남지역 학생들은 서울지역 평균보다 1.5배~2배 서울대학에 더 많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비중은 85년과 87년에 절정을 이루었다가, 93년을 계기로 조금씩 내려앉고 있다. 그러나 어느 정도 범위 내에서 항상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87년은 사교육이 절대적으로 금지되었던 시절이다. 그 시절에는 사교육을 받으면 퇴학을 당하고, 학원이라고는 사대문 안에 가야 재수생 학원이 있었다. 93년은 사교육의 고삐가 풀리기 시작한 해다. 그때부터 속셈학원이란 이름을 빙자한 보습학원들이 퍼지기 시작했다. 따라서 만약 사교육원인이라면 강남지역의 서울대 입학 비율은 93년을 계기로 비약적으로 증가했어야 했다. 그러나 학원이야 있건 없건 그 비율은 큰 차이가 없고, 도리어 학원이 없던 시절에 더 높기까지 하다. (물론 80년대에도 대학생 몰래 과외가 성행하지 않았느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지만, 과외받는 학생들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고, 그것도 서울대를 노리는 학생들 보다는 좀 처지는 학생들 쪽이 많았다.)

 

 

사실 SES가 높은 집단이 서울대에 입학하는 비율이 점점 높아지는 것은 사실이다. 아래 그림을 보면 고소득직군 아버지를 둔 학생이 서울대에 입학하는 비율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앞의 강남의 사례를 보았듯이 그게 꼭 사교육 때문만은 아니다. 그렇다고 사교육이 전혀 효과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아무래도 학교공부에 조금이라도 +@를 하는 것이니 성적을 깎아먹기야 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 기울기가 완만할 것이란 의미다.

 

 

사실 사회현상이란 무 자르듯이 어떤 변인 한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경제학, 경영학자들은 그런 만행을 잘 저지른다. 노동운동가나 좌파정치인들도 이런 오류를 자주 범한다. 하지만, 사회학자, 인류학자는 훨씬 더 신중하다. 위의 그래프를 설명할 수 있는 가설도 여러 개를 세울 수 있다. 그리고 이 결과는 이 가설들의 상호작용으로 일어난 것으로 볼 것이다. 그러면서 이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또 다른 가설들을 탐색할 것이다. 요컨대 사회학에서는 새 이론이 나오면 옛 이론을 논박하지 않는다. 다만 그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측면으로 첨가된다(바로 이게 얼른 봐서는 잘 구별되지 않는, 사회학이론과 사회철학의 차이다. 사회학자는 논박에 관심이 없다.)
 

1. 과외금지 해제로 고소득직군에서 자녀에게 사교육을 시켰다.

2. 문민정부의 등장으로 고소득직군이 자녀의 학력과 출세의 상관관계가 더 높아질 것으로 기대했다.

3. 민주화, 개방화, 그리고 지식정보화로 인해 전문직의 수 자체가 증가하였고, 교육받은 엘리트들이 고소득직군으로 대거 진입하였다.

 

그렇다면 사교육 말고도 SES가 높은 가정의 어떤 특성들이 학생들의 학업 성취도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에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진보진영은 사교육이 아니라 이런 특성들의 혜택을 빈곤층 자녀도 누릴수 있도록 정책을 펴야 한다. 특히 대지주, 부동산 부자, 기업 소유자로 대표되던 부유층에는 없고, 93년부터 그 비중이 늘어난 지식노동자, 전문직종사자에게는 있는 그 무엇을 찾아야 한다. 

 

바로 여기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변인이 동기(motivation)다. 동기는 행동을 촉발하며, 행동을 지속시키며, 행동의 강렬함을 결정하는 심리적 기제다. 동기는 인간을 의지를 가진 존재, 의욕하는 존재로 본다면 반드시 전제해야 하는 전제다. 이는 기계론적 인간관을 거부한다는 윤리적 의미에서 뿐 아니라, 실제 심리학과 생리학의 과학적 발견결과와도 일치하는 이론이다. 반면 경쟁을 붙이면 공부 잘 한다는 논리는 인간을 단순한 자극-반응의 기계로 보는 매우 위험한 인간관에 기초해 있다. 인간은 객관적 상황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상황이 어떻든 간에 스스로 하고자 할때 한다. 그리고 스스로 하고자 해서 할 때 그 결과가 가장 훌륭함은 당연한 것이다. 따라서 학업성취도에 대한 모형은 ‘동기(학습동기)’를 중심으로 재편되어야 한다.

(이후부터는 연구 시간이 필요합니다.^^ 오래 기다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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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정변증법 | 2009/02/25 19:59 | 교육에 대해 생각하기 | 트랙백 | 덧글(28)

실천교육학서설 1장,2장


실천교육학 수립을 위하여


인간의 본성 안에 있는 여러 힘을 순수한 인간의 지혜로까지 두루 높여 길러 주는 일, 이것이야말로 가장 미천한 계층의 사람들에게도 기해야 할 교육의 일반 목표다 -페스탈로치-

 

1. 서론: 한국 공교육 그 기묘한 허약함

 

지금 한국의 공교육계는 기묘한 상황에 있다. 해마다 수능이 국가적 행사로 치러지고 교육부장관 인선이 가장 어려운 인선으로 꼽히고, 국가 예산의 가장 많은 부분을 교육비가 탕진하고 있다. 수치상으로는 가히 교육공화국이라 불릴 만하다. 드러커(Drucker, ) 조차 자신의 지식 사회론의 대표적 사례로 순전 교육의 힘만으로 경제대국에 올라선 한국의 사례를 들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여행 안내서인 론리 플래닛의 한국편에서도 ‘교육을 중요시하고 교사들을 존경하는 사회전통이 한국의 큰 장점’이라고 명시되어있다. 튼튼하고 우수한 공교육. 미국이나 캐나다에서 이른바 교육개혁안에 반드시 포함되는 문구는 “한국처럼, 일본처럼!”이었다. 그리고 그 일본조차도 최근 이른바 유도리 교육을 포기하며 “한국처럼!”을 외치고 있다. 이렇게 세계 공교육의 모범(!)이 되어버린 한국의 공교육은 엉뚱하게도 자신감을 잃어버렸으며 담론적·정책적 능력의 엄청난 취약함을 천하에 공개한 가련한 모습이다.

특히 공교육을 총괄하는 교육인적자원부(이하 교육당국)의 모습은 줏대없고 비겁하다. 국가교육과정을 단순 문제풀이 연습으로 해체하여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리는 반칙에 불과한 입시 사교육의 횡포 앞에 속수무책이며, 실체도 불문명한 학부모 단체의 이기적 요구 앞에 우왕좌왕하는 교육부는 교원들 앞에서만 일체의 소통도 불허하는 권위적 모습으로 권력의 자존심을 세운다. 그 많은 교육 관료와 교육학 연구자들은 교육계가 아니라 경제계에서 쏟아져 나오는 부당한 간섭과 비판에 대해서도 어떠한 단호한 대응도 보여주지 못했다.

그러나 교육민주화 선언 이후 21년이 지난 현재 교육운동 진영은 이러한 교육당국과 교육학 진영을 비웃을 자격도 없는 무기력한 모습이다. 이 한심한 교육당국에게조차 의제를 선점당한 체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것이 교육운동 진영의 현재 모습이기 때문이다. 결국 교육당국과 교육운동 진영은 서로 대립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허약하기 그지없는 한국 교육계의 부끄러운 모습을 그대로 내보이는 동전의 양면이다.

교육의 힘은 투입되는 자금이나 열정, 혹은 종사하는 사람들의 수에 있는 것이 아니다. 교육의 힘은 사회 구성원의 생산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주는가에 있다. 물론 그 영향은 순기능적인 것이라야 하며, 만약 역기능이라면 교육운동이 일어나서 이를 바로잡게 된다.

1970년대까지 한국 공교육은 시급한 근대화와 인적자원의 확보라는 역할을 나름대로 수행한 강력한 힘이었다. 그 획일성과 냉전 파쇼성을 아무리 비판하더라도 혹은 오늘날 한국경제의 성장을 미국 자본주의의 쇼윈도였기 때문이라고 폄하하고 싶더라도, 교육이 경제 성장과 민주화 혁명의 토대가 되는 인력 양성에 기여했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냉전시기 독재정권이 집중적인 공교육과 산업개발로 결국은 자신들을 거꾸러뜨릴 전사들을 양성하는 변증법은 이미 세계 민주화 운동의 역사에서 여실히 증명된 바다. 그러니 공교육의 보편화 정도가 높은 한국이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을 정치, 경제적으로 삽시간에 추월하여 멀리 달아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물론 이는 1980년대부터 강고하게 일어선 교육민주화 운동의 끊임없고 강력한 문제제기와 투쟁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한국의 공교육은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유의미한 경험을 하지 못하고 지루한 시간을 보내며, 기업들은 학교가 더 이상 인재를 공급해주지 못한다고, 즉 세금 낭비라며 아우성이다. 그렇다고 공교육이 도야나 도덕성 함양에 기여하는 것도 아니다. 2007년 현재 한국의 공교육은 아무 의미 없이, 혹은 의미에 비해 비용은 너무도 큰, 단지 돈 먹는 하마에 불과하다. 심지어 공교육에 종사하는 교사조차 자녀들을 사교육에 맡기거나 외국으로 보내는 모습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교육을 백년지대계라 부르는 나라, 심지어는 ‘론리 플래닛’에서도 교육을 중시하고 교사를 존경하는 나라로 기록된 나라, 그래서 국가가 책임지고 교육을 맡아 웬만한 나라의 총 GDP보다도 더 많은 교육 예산을 쓰는 나라, 세계에서 교사에 대한 대우가 가장 좋은 나라, 그래서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인재가 교직으로 진출하는 나라, 더군다나 세계에서 가장 끈질기고 강고한 교육운동의 맥이 20년 넘게 이어져 온 나라. 이런 대한민국의 공교육이 지금 겪고 있는 이런 치욕적인 상황은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 공교육 허약성의 원인: 교육을 수단화 한 교육과 교육운동

 

2.1. 한국 공교육의 획일화의 힘과 교육의 수단화

 

한국 공교육이 힘을 가지고 경탄과 칭송의 대상이 되었던 시기가 1970년대였음을, 그리고 천덕꾸러기가 된 시기가 1990년대 후반 이후부터임을 유념하자. 이 두 시기를 결정짓는 가장 중대한 사회적 변화는 무엇인가? 전자는 산업화고 후자는 정보화다.

이는 20여년의 짧은 시간동안 산업화와 정보화가 압축적으로 발생한 한국사회의 변동속도를 보여준다. 한국사회는 산업화의 최후발주자로 경주장에 진입하였지만 불과 20년만에 선두주자로 정보화 트랙에 진입했다. 문제는 산업화의 도구로 맹활약한 한국 공교육의 모든 제도와 행위가 고착되어가는 상황에서 별안간 탈근대, 정보화의 시대가 도래 했다는 것이다. 이런 급변하는 시대에 거대한 근대적 몸집을 가진 공교육 체계, 즉 학교 체계는 미처 적응하지 못하고 시대의 미아가 되고 말았다. 근대의 힘이 필요했던 시기에 국력을 기울여 구축한 거대한 학교 체제는 그 자체 사회로부터 독립적인 사물이 되었으며, 사회변동에도 불구하고 변화를 거부하는 낡은 괴물이 되어버렸다.

사실 이는 공교육의, 학교의 자업자득이다. 압축적 근대화 산업화를 위해 한국의 공교육은 다원성 보다는 획일성과 표준화에 의존하였으며, 그 결과 학교는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해 교육을 한갓 수단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완성과 문화의 전승이라는 교육의 본질적 부분은 형식적이거나 부차적으로만 다루어졌다. 물론 한국사회는 근대 공교육의 압축적이고 폭발적인 효험을 보았지만, 그 댓가로 압축적이고 폭발적인 폐해에 마주서 있다.

 

2.1.1. 공교육의 본질: 획일화와 표준화

획일화 하는 근대의 힘으로서 공교육, 그리고 그 핵심 집행기구인 학교는 근대의 소산이며 근대성의 강제 수단이다. 교육의 회일적 수단화는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이는 개별적 인간으로서의 인격도야를 통해 가난한 아이들을 비참함으로부터 구출하고자 했던 페스탈로치(Pestalozzi)의 시도가 엉뚱하게 ‘국민교육’의 형태로 계승되면서 잉태된 씨앗이다. 국민교육은 인간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국민을 키운다. 페스탈로치는 고아와 빈민을 교육하여 스스로 사람구실을 하도록 만드는 것을 소망했지만, 국가가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은 활용 불가능 상태였던 고아와 빈민들을 활용 가능한 인력으로 만듦으로써 국민의 수를 늘려주었기 때문이다.

국민은 그 수가 몇 명이 되었든 한 사람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국민교육에는 획일화와 표준화의 힘이 작용한다. 이는 표준화된 공정에 의해 집산적 생산방식을 취한 근대 산업의 구조가 교육에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교육과정이 표준화되고, 교사들이 표준화되고, 표준화된 학교 체제에서 표준화된 수업이 행해지고 최종적으로 표준화된 평가가 실시되었다. 교사와 학생의 관계 속에서 자연스러운 학생의 내면을 일깨우는 교육이 아니라 표준화된 내용과 절차를 내리먹이고 몰개성적 국민의 생산이 보편화되었다.

국민교육의 정착은 교육자를 교육학자와 교사, 즉 기획하는 자와 실행하는 자로 분리하였다. 원래 교육학자는 교육자와 분리되지 않았다. 에라스무스, 코메니우스, 페스탈로치, 헤르바르트 등 교육학의 역사를 빛내는 학자들은 그 자신 교육자이기도 했다. 그들의 교육학은 그들의 교육실천의 기록과 체계화의 결과였다. 그러나 근대 국민교육은 교사들마다 교육내용과 교육학을 나름대로 개발하는 무질서를 용납할 수 없다. 획일화된 교육내용과 획일화된 교육과정이 표준화된 진도표에 의해 진행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것들의 개발 즉 교육학은 중앙집권화 되어야 한다. 이렇게 되면서 직업적 교육학자가 등장하게 되었으며, 이후 교사는 이들이 제시한 표준화된 교육학을 그저 수행하는 존재로 전락하고, 과연 교사들이 표준화된 교육학을 수행하고 있는지 여부를 검사하는 장학사라는 직업도 등장하게 되었다.

한국 역시 이 흐름이 계속되어 교육부 관료들, 교·사대 교수들, 평가원·개발원 연구원들로 구성된 제도권 교육학, 즉 교육체계의 진영이 교육의 세세한 부분까지 결정한다. 교사는 사실상 교육학이라는 이미 완결된 기능체계를 훈련받음으로써 학교라는 공장에 투입될 수 있는 숙련 기능공으로 간주되었다.

교육체계에 의해 자행된 이러한 획일화와 표준화의 가장 큰 문제는 교육을 다른 무엇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근대 공교육에서 학생의 개인적 성장은 고려되지 않는다. 공교육의 목표는 미리 결정된 어떤 특정한 인간상에 개개의 학생들을 최대한 가깝게 접근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교육학은 이를 가장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한 일종의 공학이 되었다. 그 목표가 독재체제의 유지든, 산업노동자든 아니면 지식노동자의 생산이든 간에 교육은 그것에 도달하기 위한 기능적 수단으로서만 의미를 가진다. 20세기 이후 교육학, 특히 미국의 교육학이 철학적 성격을 벗어나 철저히 공학적 방향을 지향한 것은 이런 흐름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현상이다. 또 한국 교육학이 거의 일방적으로 미국의 교육학을 수입하고 있는 것도 이와 같은 흐름이다. 교육학이 공학이 되면 교사는 노동자가 되며 학생은 재료가 된다.

 

2.1.2. 획일화 하는 힘으로서 교육운동: 교육과 교육운동의 분리

 

이런 획일적인 교육에 대한 반기, 교육 그 자체를 되살리기 위한 움직임이 19세기말부터 일어났다. 이를 통칭 ‘교육운동’이라고 하자. 교육운동은 교육학에 의해 주어진 교과서 주어진 교육과정을 거부하고 스스로 구체적인 실제 교육활동과 결합하여 그 자체로 교육학이 되고자 하였다.

이는 헤르바르트적 전통에 반기를 든 독일의 헤르만 리츠(Herman Lietz), 구스타프 뷔네켄(Gustav Wyneken)의 ‘전원 기숙학교’, 루돌프 슈타이너(Rudolf Steiner)의 ‘자유 발도르프 학교’, 교육학자들의 폄하와 비판에도 불구하고 교육실천가들에게 각광을 받으며 확산된 마리아 몬테소리(Maria Montessori) 학교 그리고 존 듀이(John Dewey)의 ‘실험학교’ 같은 형태로 나타났다. 이들의 지향하는 바는 서로 달랐지만 과학적이고 추상적으로 미리 결정된 교육과정과 교과를 거부하고 직접 교육을 담당하는 교사와 공부하는 학생이 만나는 현장에서 교육과정과 교과를 생성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즉 이들의 운동은 그 자체 교육 실천이며 동시에 새로운 교육학의 창시였다. 물론 제도권 교육학은 이들과 끊임없이 대립하지만 이들의 문제제기는 지속적으로 계승·발전되어 유럽과 미국 교육이 획일화되지 않고 계속 창의적 힘을 공급받는 터전이 되고 있다. 최근 신자유주의의 맹공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저항의 힘을 간직하고 있는 서방세계의 교육계에는 이러한 교육운동의 전통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교육운동은 이러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교육이자 교육학으로서 제기된 교육운동의 뿌리는 일본제국주의의 집요한 공략으로 뿌리 뽑혔다.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뿌리도 해방이후 이념갈등, 전쟁, 박정희의 교원노조 파괴와 함께 소멸되었다. 사립학교조차 고유의 건학이념과 교육과정을 고수하지 못하고 사실상 완전히 공교육이 되어버렸다.

1980년대 이후 다시 일어난 교육운동 역시 교육으로서의 운동이 아니라 민주화 운동의 한 부분으로서 등장하였으며, 교육운동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교사운동에 더 가까웠다. 19080년대 이후의 교육운동은 교육이 민족적 민중적 문제가 해결된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는데 복무하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즉 교육 내용에 민족적이고 민중적인 방향성을 부여하고자 하였다. 교육은 또다시 수단이 되었다. 교육운동에서 교육은 민족해방이나 민중민주로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고, 그나마 결정적 수단도 아니었다.

심지어 일부 교육운동가들은 정치, 사회의식 없이 오직 교육에만 매진했던 이른바 참스승과 성실한 교사들의 몰의식성, 몰 역사성을 비웃거나 비판했으며, 교육방법의 개선, 학생-교사 관계의 재정립, 그 외 각종 교실상황의 개선보다는 교육제도, 교육내용의 개혁에 더 많은 정력을 기울였다. 지배구조를 재생산하는 착취 기계로서 교육을 개조하여 해방의 도구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아래 어느 여고생의 호소문은 교육운동 진영이 기존의 제도권 교육학 진영과 근본적으로 동일한 세력임을 보여준다.

 

지난번 총선에서 이른바 진보세력이 국회의 과반수를 차지했고, 그래서인지 제가 다니는 학교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어요. 진보적 사고에 동조하지 않으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됩니다…일부 선생님들은 보수세력을 혐오하고, 이라크 전쟁의 부당성과 미국의 非도덕성을 비난합니다. 제 친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정부의 개혁론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친구들의 이런 생각에 대해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민주」와 「개혁」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경제」와 「국민화합」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학생은 부도덕한 사람으로 매도되고 있습니다.


결국 교육학 진영과 마찬가지로 교육운동 역시 획일화 하는 힘으로 작용하고 말았다. 다만 획일화된 목적이 다를 뿐이다. 실제로 교육청만큼이나 경직되어있는 교육운동 진영의 조직과 문화는 이 획일화의 무서움을 보여주는 사례다. 목적 달성을 보다 효율적으로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희생할 수 있다는 이 포괄의 변증법, 그리고 획일적으로 주조해낸 교육내용을 일선 교사들에게 내리먹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교육학과 교육운동은 사이 나쁜 쌍둥이가 되고 말았다. 이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모두 근대화의 강철새장에 불과하다는 막스베버의 우울한 예언의 한 단면이다.

2.1.3. 획일화 하는 힘으로서 교육 입신양명

 

교육학과 교육운동이 망각하고 있던 사실중 하나는 교육대상, 즉 학생, 그리고 학생을 대변하는 학부모 역시 나름의 교육관이 있고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의 특수성이다. 유럽이나 미국의 경우는 정부가 주도하여 민중의 아이들을 거리에서, 공장, 농장에서, 다리 밑에서 학교로 끌고 왔지만 한국의 아이들은(학부모들은) 제 발로 학교로 몰려왔다.

그러나 이 역시 교육의 도구주의에 불과했다. 한국의 전통적인 “배움=입신양명”의 공식이 작동한 것이다. “책 속에 녹이 있다”라는 권학문은 이 정신의 가장 정수를 보여준다. 이 입신양명 정신은 맹목성을 특징으로 한다. 입신양명은 사회에서 널리 좋은 이름을 날리는 것이지만 사회의 종류를 따지지 않는다. 따라서 체질적으로 현 사회에 순응적이다. 만약 지금 시대가 일제치하라면 조선 총독부에서라도 벼슬을 해야 한다! 이는 일본의 식민지 교육이 큰 저항 없이 정착할 수 있었던 이유다. 조선의 민중들은 입신양명을 위해 그 내용에 동의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식민교육을 받았고 그 내용을 외었고, 시험을 쳤다. 교육 내용은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체제 내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4지선다형 문제를 통해 반공이데올로기 시험문제를 풀고 그 점수로 등수를 매기던 70년대에 극치를 이룬 교육 도구주의다. 이것을 공부하는 목적은 학생 개인의 입신양명이었다. 그 누구도 반공이데올로기를 의미 있게 생각하지 않았으며, 단지 시험문제의 재료로 활용될 뿐이었다. 사실상 내용 그 자체는 아무 의미 없었던 것이다.

수십 년에 걸쳐 반공이데올로기 교육을 그토록 열심히 실시했던 한국에 이렇게 자생적 좌파들이생겨나고 제도권에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는 것이야 말로 반공이데올로기 교육이 얼마나 무용지물이었나 하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다. 그리고 그 힘은 반공이데올로기 교육을 거부한 교사들의 용기가 아니라 이것 역시 점수를 따기 위한 도구로 받아들인 학생들의 이기주의에 있었다.

입신양명은 국민교육, 해방교육과 함께 또 다른 획일화의 동력으로 작용하였다. 이 획일화는 평가, 엄밀히 말하면 석차로 환원되었다. 투입되는 교육의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최종적으로는 등수 게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최종적인 등수를 제외한 나머지 내용들은 의미를 상실해 버리고 만다. 1936년 현재 일본의 탄압에 할 수 없이 굴복하고 있었던 학생들 보다는 입신양명을 위해 열심히 일본어로 된 텍스트를 외우고 익히는 학생들이 더 많았던 것이다.

이 석차로의 획일화는 수치로 환산된다는 속성 때문에 가장 강력하게 작용하는 획일화 압력으로 작용하였다. 다만 이는 미시세계에서만 작동할 뿐 거시세계에서 작동하지 않았다. 그 결과 교육학과 교육운동 진영에게 포착되지 않았거나 과소평가되었다. 그러나 실제 교육 현장, 교사와 학생을 가장 강력하게 지배한 동력은 바로 이 입신양명의 획일화였다. 이는 반공이데올로기 시대에 학교를 다녀본 사람들의 기억을 들춰보면 금방 입증되는 일이다. 당시 국민윤리 교사들은 북한이나 사회주의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을 가르치면서 “이것이 옳기 때문에”알아두라 했는가 아니면 “대입 시헙에 나오기 때문에” 알아두라 했는가? 그리고 학생들은 그것을 왜 외었는가?

 

2.2. 획일화의 완성과 교육 주체의 정신분열

 

이렇게 교육학, 교육운동, 그리고 교육수요자가 나름대로 교육을 수단으로 삼게 되었다. 이들은 교육이라는 하나의 공통된 목적을 수립하는 대신 날카롭게 분리된 체 서로의 목적을 교육에 강요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교육 주체의 삼분화라고 거칠게 정의하도록 하자.

문제는 직접 교육을 담당하는 교사다. 이들은 교육과 교육학의 분리로 인해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 교육할 권리와 능력을 상실하였다. 이들은 교육과정, 그리고 장학이라는 이름으로 강요되는 획일적 ‘국민교육’의 수행을 강요받고 있다. 한국의 경우는 내용뿐 아니라 세세한 방법까지 강요받고 있다. 교사들은 교육학자와 교육 관료라는 머리가 사용하는 수족이 된다. 그런데 교사는 교육운동의 주체도 되지 못한다. 여기에도 머리에 해당되는 교육운동가들이 따로 있다. 그런데 교육운동가들은 교육학 진영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행위를 한다. 그들은 교육의 내용을 소위 민중적이고 해방적인 것으로 바꾸고자 한다. 여기에 교사들이 교육현장에서 가장 빈번하게 만나게 되는 학생, 그리고 그들의 의견을 대리하는 학부모의 요구가 있다. 그것은 ‘석차’를 높여 입신양명 시켜 달라는 것이다.

결국 교사들은 이 3분법에서 끝내 소외되는 존재로 남는다. 교사들의 선택지는 이 셋 중 누구의 요구를 따를 것인라로 형편없이 축소된다. 그렇다면 이 교사들은 끝내 선택할 것은 무엇일까? 세속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학부모는 가깝고 장학사는 멀다.” 교사들의 최종 선택은 입신양명 교육, 등수 올리기 교육이다. 교사들은 교육학 진영이 요구하는 까다로운 조건들은 형식적인 서류로 대신하고, 교육운동의 요구는 외면함으로써 해결한다. 그러나 촌지와 학교장의 압력으로 형성된 입시 카르텔의 요구와 유혹은 거부하기 어렵다. 이는 왜 교육개혁이 그렇게 이루어지고, 그토록 많이 교육과정이 개정되어도, 또 8000명의 전교조가 거의 10만에 육박할 정도로 성장해도 정작 교실 현장에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지에 대한 해답이다.

그렇다면 교사들은 교육의 근대화로 인해 소외되어 버린 피해자인가? 결코 그렇다고 볼 수 없다. 사실 입시교육은 모든 교육 중에 가장 손쉬운 교육이다. 그리고 입시의 절박성은 이들에게 학생에 대한 막강한 통제권을 부여한다. 교사들은 교육학과 교육운동에게 빼앗긴 자신들의 권리를 훗날의 ‘입신양명’을 미끼로 학생들로부터 탈취하여 보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삼분화 현상은 결국 교육의 수단화에서 비롯되었다. 삼분화에 가담한 그 어떤 집단도 교육 그 자체, 즉 학생의 자연스러운 성장과 발전, 그리고 사회의 진보와 개선을 문제와 고민의 중심에 두지 않았다. 교육학 진영은 교육을 자신들이 구상한 기획을 충실히 수행하는 도구로 삼았다. 그리고 냉전 흔적이 남아있는 한국의 특성상 대개 공식적 교육학은 사회 지배층이 요구하는 내용을 정교화하고 기능화 하여 일선 교사들에게 내리 먹여졌다. 간혹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지만 이 경우에도 학생과 교사가 아니라 교육학자 자신의 취향과 소신이 우선하였다. 교육운동가들 역시 기획한다는 점에서는 교육학자와 동일한 일을 했다. 다만 그들은 그 기획을 지배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민중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학생들조차 자기들에게 교육의 의미가 무엇인지 관심 갖지 않았다. 교육은 어거지로 가해지는 어른들의 억압이거나 입신양명을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그 어느 경우에도 교사들, 그리고 학생들은 주체가 되지 못했으며 교육은 목적이 되지 못했다. 교육을 계급 재생산의 도구로 보든, 해방의 도구로 보든, 아니면 입신양명 혹은 생존의 도구로 보든 목적이 아니라는 점에서 동일하며 따라서 그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학생들을 완전히 조작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동일한 위치에 있다.

교육학 진영, 교육운동 진영, 입신양명 학부모는 모두 교사와 학생이 생활하는 학교현장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였다. 불행히도 이 영향력은 모두 학교에 그리고 학생에게 일방향적으로 행사되었다. 물론 스스로 가장 강력하다고 믿은 세력은 교육학 진영이었으나, 실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진영은 입신양명 학부모였다. 이 속에서 교사와 학생은 소외되었다.

이는 전교조가 합법화 된 이후 마치 또 하나의 교육청이라도 된 양 일선 학교 조합원들과 분회장들에게 시종일관 관료적인 상명하달의 모습을 보임으로써 증명되었다. 소위 진보적이라는 교육운동가들마저 이렇게 소외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현실은 참으로 기막히고 통탄스러운 일이다.

 


이글루스 가든 - 자유로운 아이들, 아름다운 교육을...

by 부정변증법 | 2008/10/30 18:49 | 교육에 대해 생각하기 | 트랙백 | 덧글(1)

이명박 심판, 전교조 심판이란 말이 나오는 교육감 선거

서울시 교육감 선거운동이 한창이다. 마음속에 점지해둔 후보가 있기는 하지만 선거법 때문에 블로그에 밝히지는 않는다.
다만 이번 교육감 선거의 프레임이 '이명박 심판'과 '전교조 심판'으로 갈라진 현상을 잠시 짚어 본다.

나는 교육자이면서 전교조 조합원이다. 그래서 전교조 심판이라는 말이 듣기 거북한 면이 있지만, 문제는 그것이 프레임으로서 통한다는 것을 더 심각히 받아들인다. 즉 꽤 많은 사람이 전교조가 심판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각종 여론조사 결과 70%에 달하는 이명박 비토 세력들중 상당수가 전교조 심판론에 동의한다는 것이 문제다.
 
무엇이 전교조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이야기 하자면 무척 길것이지만 결정적인 계기는 교원평가 공방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교원평가 공방에서 교원평가 절대반대를 외치면서 졸지에 전교조가 무능하고 부도덕한 교사들까지 감싸 안는 기득권 옹호집단으로 낙인찍혀 버린 것이다.

이건 기가 막힌 노릇이다. 그냥 편하게 살아도 되는데 굳이 더 불편하고, 더 힘들게 그러나 바르게 살자고 그 고생을 하고 만들었던 전교조가 편하고 안이하게 살려는 교사들의 이익집단으로 시민들의 뇌리에 인식되어 버렸다는 것이.... 심지어는 가장 의식있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진보신당에서조차 전교조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는 쉽게 얻어지지 않으며, 진보신당 당원들조차 상당수가 교원평가는 어떤 형태로든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물론 교원평가가 그 다음에 이어질 각종 신자유주의 교육정책 패키지의 신호탄이 될 가능성은 매우 높다. 그런데 아직 오지 않은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을 미리 저지하려다 고질적인 구태, 무사안일, 관료제를 옹호하는 이상한 포지션에 서게 된 전교조는 더욱 안타깝다.

결국은 철학의 부재가 문제를 키운 것이 아닐까? 전교조의 가장 큰 아픔이라면 그 10여년간의 피눈물 나는 투쟁기간동안 이렇다할 "저항의 교육학"을 체계화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기존의 교육학을 "제도권 교육학"이라 부르며 폄하한 것은 좋지만, 그 폄하가 단지 "교직과목 공부 안하기"의 핑계거리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전교조만의 독특한 교육철학, 교수학습이론이 만들어지고 그것에 기반하여 각종 교육과정 시안, 학교모델 등을 끈질기게 요구하는 투쟁이 되었어야 했는데, 늘 갑이 아니라 을의 입장이 되어 반대투쟁에만 몰두했었다.

우리가 부러워하는 핀란드의 경우도 구성주의를 창조적으로 발전시킨 그들만의 독특한 교육철학이 있으며, 그 교육철학을 바탕으로 핀란드식 교육학을 체계적으로 수립했기에 오늘날과 같은 훌륭한 교육이 가능해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전교조 조직 어디를 둘러보아도 공식적으로 교육철학을 교육학을 연구하는 기관이나 팀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조직내 정파다툼에 익숙한 노회한 활동가들이나 아스팔트에서 팔뚝질하는 것 외에는 특기가 없는 싸움닭들이 조직의 지도적 위치에 서 있다. 그 전교조 지도급 활동가들이 각자 자기 학교에서 어떤 교사이며, 어떤 교육을 하는지는 차마 부끄러워 밝히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

아스팔트에서 몸싸움 하는 조합원보다 도서관에서 연구하는 조합원을 더 중히 여기는 풍토도 전혀 정착되어있지 않다. 사실 몸싸움하는 노조는 전교조 말고도 많이 있지 않은가? 전체 노동자계급의 입장에서도 전교조에게 기대하는 모습, 맡았으면 하는 모습은 몸싸움 하는 당찬 투사가 아니라 담론과 이론을 쏟아내는 브레인의 역할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 전교조의 모습은 전투력 후달리는 금속노조다.

아, 사실은 이게 전교조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진보를 말하려면 진보된 세상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야 하고, 비전을 제시하려면 그게 단지 희망사항이나 단지 말빨이 아니라 치열하면서도 체계적인 이론의 뒷받침을 받아야 한다. 진중권이 토론회에서 보수진영을 묵살시키는 것도 그의 말빨 때문이 아니라 그가 이른바 제도권 학문에 대해서도 대단히 풍부한 지식을 가졌기 때문이다.

전교조가 이제라도 신뢰를 회복하고 진정 참교육의 기수로 서려면, "제도권 교육학"에 달통해야 하며, 그 바탕 위에 "새로운 교육학"을 세워야 할 것이다.   

by 부정변증법 | 2008/07/18 08:25 | 교육에 대해 생각하기 | 트랙백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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