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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가지고 다녀야 한다는 결심을 굳혀주는 차 없는 날

며칠 전에 차 없는 날이라는 행사를 했다.

이건 뭐 우리나라에서 만든 게 아니라 세계적인 행사라고 하니까 전시성 행사 운운할 일은 아닌 것 같다. 문제는 차 없는 날을 이용해서 앞으로 차를 줄일 수 있느냐, 그런 전략을 가지고 이 행사를 하느냐의 문제다.

차 없는 날은 차를 가지고 나가는 대신 자전거나 도보를 이용하자는 결심을 시키는 날이 아니다. 그것은 비현실적이다. 오히려 차 없는 날은 이 참에 승용차 대신 공공교통수단(나는 대중교통수단이란 말을 싫어한다. 대중에는 어느정도 경멸적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에)

물론 전반적으로 차가 줄어들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되는 날이라야지 특정 구간에 차를 c통제하고 그곳의 차도를 산책로로 사용하는 행사를 하는 날이 되어서도 안된다. 말하자면 차 없는 날 행사는 공공교통수단의 홍보기간이자 일종의 특판기간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만만하지가 않았다. 사실은 이 정부가 그럴 의지가 없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우선 차량의 감소는 26%에 불과했다. 이 수치는 자발적 참여자 약간 수에 마지못해 억지로 참여한 공무원과 공공기관 종사자들 때문에 나온 수치일 것이다. 그래서 관공서가 밀집된 과천이나 세종로 일대의 교통혼잡은 확실히 많이 해소되었다.

문제는 이렇게 줄어든 26%의 자가 운전자들이 이 날을 계기로 공공교통수단이나 자전거 혹은 도보를 이용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판단을 내리게 하는 계기로 이 날이 활용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날만 26% 감소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20% 정도의 교통량 감소를 기대할 수 있고, 이런식으로 교통량을 계속 줄여나갈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결과는 그 반대일것 같다. 자가 운전자가 26% 줄어들었다는 것은 공공교통수단 이용자가 그만큼 늘었다는 의미다. 그리고 평소에도 지옥같은 열악함의 상징이었던 공공교통수단의 이용환경은 이날 하루 완전히 지옥 이상의 그 무엇이 되었다. 이런 경험을 한바탕 한 자가운전자들은 다음날 기필코 차를 몰고 출근할 것이다. "이러니 내가 차를 가지고 다니지!"하는 확신을 가진체. 그리고 이렇게 하루 아주 열악해진 공공교통수단에 치를 떤 뚜벅이족들은 "내 더러워서 차를 뽑아야지 이거 원"이런 결심을 굳히게 될 것이다. 결국 이 날은 앞으로 자동차 출근족을 줄이는 날이 아니라 더 늘리는 날이 되고 만 것이다. 실제로 이 날 행사를 계기로 승용차 출근을 포기하기로 결심했다는 사람은 손에 손을 꼽는다.

사실 이런 행사가 있는 날은 공공교통수단의 프로모션이 가능한 날이다. 그 프로모션은 아홉시까지 차비 공짜 이런 수준이라서는 안된다. 타이페이, 홍콩 같은 서울의 아시아 경쟁도시들에서는 차를 가지고 다니는 것이 오히려 어리석게 느껴질 정도로 공공교통수단에 투자를 많이 한다. 아주 작은 배려들 - 예를 들면 환승역에서 이리저리 다니지 않고 바로 반대편 플랫폼에서 갈아타도록 하고 다음 열차 도착 예정시각을 초단위로 (200초전, 190초전 이렇게) 알려주고, 그 촘촘한 지하철 배차간격으로 기다린다는 느낌도 별로 없는- 을 경험하면 그 다음에도 계속 웬만하면 공공교통수단을 이용하게 되는 것이다.

자동차 없는 날.... 정말 자동차를 줄이고 싶으면 이런 거 하는 대신, 해가 갈수록 점점 띄엄 띄엄 다녀서 이제는 플랫폼에서 목이 빠질 정도로 기다려야 하는 지하철 배차간격이나 96년 수준으로 되돌려 놓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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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정변증법 | 2009/09/25 08:31 | 사회에 대해 생각하기 | 트랙백(1) | 덧글(16)

각하, 자출족 말고 뚜출족 어때요?

대통령께서 자출족(자전거로 출근하는 족)을 선언하셨다고 한다. 며칠이나 갈런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유치한 언론 플레이만큼은 이제 그만했으면 한다. 이 분의 전국자전거도로네트워크 계획의 황당함은 차치하고(대도시 시내 자전거 도로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없는..(.http://club.cyworld.com/club/main/club_main.asp?club_id=52627621.), 또 저 자건거가 얼마짜리다 논란은 차치하고 "청와대 경내에서 종종 자전거를 이용하는 것"이 과연 자랑거리가 될까?

구글 어스로 아무리 비틀어 봐도 청와대 경내에서 이동거리는 최장 1Km 가 채 안되는 거리다. 그럼 여태까지 자건거가 아니라 차를 타고 저 거리를 출근했단 말인가? 내 기억에 노대통령은 걸어 갔고, 김영삼 대통령은 숫제 뛰어다녔던 거리로 알고 있다. 그걸 자전거 바퀴질 몇번 하면서 나도 친환경족이라면서 생색을 내고 있다.

그러는 동안에 국립공원 봉우리 봉우리 마다 케이블카가 박히게 생겼다. 지리산에서 대통령에게 탄원서가 배달되었다.
http://news.nate.com/view/20090812n01233
이건 알고 있으려나? 거들떠나 보려나?


나는 저 분이 평소에 잘 걸어다니는 분으로 알고 있다. 아주 활동적이고 운동에 능하고 빠르게 이리 저리 걸어다니는 분으로 알고 있다. 필경 청와대에서도 걸어 다녔을 것이다. 그 뚜벅거림이 바로 친환경이다. 그걸 선전하면 되는거다. 왜 걸어다니다 말고 난데없이 자전거를 끌고 나와서 사진이나 찍고 그러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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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정변증법 | 2009/08/15 17:00 | 트랙백 | 덧글(14)

슈퍼사이즈 미 -미국 진보진영의 힘을 느끼다

슈퍼사이즈 미는 모건 스펄록 감독이 2004년 선댄스 영화제에 출품한 이래 전 세계에 폭발적인 반향을 일으킨 다큐멘터리다. 소재도 그렇고 그 유쾌한 터치와 재담도 그렇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고 집요한 이슈 추적능력도 그렇고, 참으로 뛰어난 작품이다.

작품 자체는 아주 단순하다. 패스트푸드가 얼마나 유해한지 확인하기 위해 직접 30일간 다른 음식을 중단하고 패스트푸드만 먹으면서 스스로의 신체 변화를 필름으로 담겠다는것.

이 작품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는 이미 여러 블로그나 기사에서 다루어졌으니 이 정도로 해 두자. 여기는 사회교사이자 사회학강사의 블로그니까, 이 영화를 통해 획득하거나 확장된 사회학적 상상력에 대해서만 한번 읊어보려고 한다.
 






















우선 제일 먼저 제목의 탁월함이다. 표면적으로 이 제목은 맥도날드에서 제공하는 초대형 음식 사이즈를 의미한다. 실제로 모건 스펄록은 슈퍼사이즈 버거, 콜라, 프렌치프라이를 먹다가, 그 엄청난 양에 질려서 구토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런데 이게 과연 단지 햄버거 사이즈에 대해서 말하려 하는 것일까? 여기에는 고도의 은유가 있다. 그것은 뭐든지 슈퍼사이즈를 추구하는 미국 문명에 대한 조롱과 경고가 숨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의 프롤로그에서는 "미국에서는 뭐든지 크다. 차도 크고, 집도 크고, 그리고 사람도 크다."라고 말하며 시작하는 것이다. "크게 보다 더 크게"를 추구하는 사회는 "끊임없는 확장과 증식"을 생명력으로 삼고 있는 자본이 물질적으로 구현된 것에 다름 아니다. 자본주의 최대의 미덕은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편익"을 뽑는 것이다. 그런데 맥도날드의 슈퍼사이즈는 보통사이즈에서 단 돈 69센트만 더 내면 두배 더 큰 햄버거를 먹을 수 있다. 이거야 말로 자본주의의 미덕이 가장 제대로 발휘된 사례가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경제학 교과서가 그토록 강조하는 합리적인 행위자라면 당연히 푼돈 69센트를 더 내고 두배의 편익을 얻으려 할 것이다.

물론 이 시점에서 경제학자들이 딴지를 걸 것이다. "설사 두배의 편익을 보게 될지라도, 한계효용이 체감할 것이기 때문에 충분히 적정한 수준에서 멈출것이다. 따라서 합리적 소비자는 아무리 싸더라도 두배짜리 햄버거를 먹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그러나 바보같은 딴지다. 우선 한계효용이 체감하는만큼 그것은 가격에 반영되어 있다. 단돈 69센트! 햄버거 값을 두배 받는 것이 아니라 단돈 69센트만 받기 때문에 우리의 합리적 소비자는 여전히 두배짜리 뚱뗑이 햄버거를 사먹을 것이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햄버거는 중독된다. 중독! 중독은 합리적 선택을 불가능하게 하는 병리 상태다. 중독은 엉뚱하게도 편익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더 많이 욕망하게 하는, 그리하여 한계수요를 무한하게 증식시키는 그런 상태다. 실상, 자본주의는 합리적 소비보다는 "중독"에 더 많이 의존한다. 자본은 무한히 확장하고자 하며, 무한히 더 많이 판매하려 한다. 그런데 가장 쉽게(비용을 덜 들이고) 가장 많이 팔수 있는 방법은 상대를 중독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적절한 규제가 가해지지 않는다면, 당연히 자본주의는 중독의 사회가 된다. 보라,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은 중독의 부호들이 떠다니는지? 슈퍼사이즈의 햄버거를 "더, 더"하며 먹는 것과, 슈퍼사이즈의 돈덩이, 즉 대박을 향해 "더, 더"하고 달리는 것 사이에 무슨 큰 차이가 있겠는가?

이 영화 중간에는 마침내 치밀어 오르는 중독성 식욕을 감당하지 못해서 위장 절제술을 받는 남성이 나온다. 이게 괜히 나온 것일까? 너무 많이 먹어서 마침내 죽음의 문턱까지 간 이 사내는, 너무 많이 벌어서(?) 죽음 문턱까지 가는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의 모습과 판박이다. 비만증과 거품경제는 부풀어 오른다는 점에서는 닮은 꼴인 것이다. 결국 위장을 잘라야 비만이 치료되듯이, 부풀어 오른 이 자본주의 경제는 그 위장, 즉 욕구를 끊임없이 생산하는 금융허브를 수술하지 않고서는 끝내 각종 질병과 함께 사망의 길로 치달을 것이다.

글쎄, 모건 스펄록이 여기까지 생각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내가 오버하는 것일수도. 하지만 영화 막판의 대사는 전혀 그렇지 않음을 보여준다. 스펄록은 단호하게 이렇게 말한다. "쓰레기 음식을 팔아서 온 국민을 뚱땡이로 만드는 대신 돈을 갈쿠리로 쓸어담고 있는 식품회사들이 머리에 총맞기 전에 그 짓을 착한 마음 먹고 중단할 성 싶으냐? 결국 소비자들이 뭉쳐서 싸우는 수 밖에 없다. 이건 단지 소비자 운동이 아니라 생사를 건 싸움이다. 당신들이 죽느냐, 아니면 저놈들이 죽느냐?"

스펄록의 메세지는 분명하다. 그는 맥도날드를 반성 시켜서 좀 순한 기업으로 만들 생각 따위는 비웃고 있다. 맥도날드를 더 이상 패스트푸드 기업이 아니게 하던가, 아니면 아예 무덤에 집어 넣어버리던가 둘 중에 하나다. 하지만 그들을 무덤에 집어 넣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맥도날드를 두드려 패서 햄버거를 팔지 못하게 할수는 없다. 즉, 레닌주의 처럼 국가 권력을 이용해서 자본가를 때려잡자 식의 방법은 도리어 더 큰 불행과 억압을 가져올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삶의 방식이 바뀌어야 한다. 덜 먹고, 덜 쓰고, 더 불편하게 사는 대신, 보다 고차적인 곳에서 기쁨을 느낄수 있도록 우리의 욕망의 코드를 완전히 바꾸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앤서니 기든스가 왕왕 강조하던 생활정치이리라. 오늘 저녁 반찬을 뭘 먹을까 선택하는 것조차 이미 정치적인 것이다. 이 영화 속에서 모건 스펄록의 여자친구는 끊임없이 모건의 육식을 비판한다. 그건 단지 식성과 건강의 관점에서 하는 비판이 아니다. 그것은 정치적이다. 이 발칙한 감독이 햄버거만 먹다가 한달만에 11킬로그램의 살이 찐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왜 성조기가 그려진 팬티를 입고 나왔는지, 그리고 맥도날드의 광고문구를 저도 모르게 술술 기억해내는 시민들이 국기에 대한 맹세는 기억하지 못하는 모습을 왜 삽입했는지의 이유가 여기 있다. 덜먹고, 덜쓰고, 덜 욕망하며, 더 나아가 이런 욕망을 끊임없이 자극하는 각종 미디어의 흉계를 꿰뚫어 보아야 하는 것이다. 아, 지성 없는 혁명은 불가능한 것이다.

실제로 그의 다음 작품은 보다 직설적으로 정치적인 "오사마 빈 라덴을 찾아서"다. 하지만 그의 후속작이 슈퍼사이즈 미 보다 더 정치적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당장 무엇을 할 것인가,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를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왕왕 그와 비교되는 마이클 무어는 미국 의료복지 시스템의 처참한 모습을 폭로하고 다른 나라와 비교한다. 하지만 여기에도 행동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슈퍼사이즈 미는 보다 행동 지향적이다. 그리고 단지 식성을 바꾸는 것,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이 얼마나 혁명적이고 정치적인 행동일 수 있는지 보여준다.

안토니오 네그리는 "제국"의 시대의 권력은 삶의 내면에 까지 스며들어 인간의 정신을 직접적으로 지배하는 "생체정치"의 장을 열었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모건 스펄록은 그 화답으로 이렇게 "생체정치 시대의 저항"을 보여주고 있는것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영화는 매우 유쾌하고 위트에 가득차 있다는 것이다. 참으로, 참으로 미국의 좌파는 내공이 깊다는 생각을 거듭하게 만든다.

우리나라의 소위 진보진영은 은연중에 미국에는 좌파가 없고, 중도파인 민주당이 좌파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으며, 한국이야 말로 아직도 좌파다운 좌파가 있다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삶의 영역에서 아무 성찰도 해내지 못하는 한국의 좌파는 미국적 기준으로 볼떄 영락없는 꼴통,보수임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미 좌파냐 우파냐는 그가 가두에서 의회에서 무엇을 주장하는가가 아니라 그가 삶의 현장에서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는가에 의해 결정되는 생체정치 시대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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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정변증법 | 2008/12/06 20:41 | 예술의 향기 | 트랙백(1) | 덧글(6)

독일 사민당의 함부르크 강령

독일 사민주의의 가장 최근의 정세관을 반영하는 함부르크 강령이다.
세계화와 정보화에 따른 기술적 변동을 반영하고 있으며, 이렇게 변화된 지평에서 어떻게 사민주의의 원칙인 사회적 약자에 대한 사회적 배려를 지켜나갈것인가에 대한 현실적인 고민이 잘 나타나있다. 매우 긴 문서이기 때문에 서문부분만 본문에 넣고, 나머지는 첨부파일로 대체한다.

서론

 
21세기의 진보와 정의 미래는 새로운 가능성과 엄청난 위험에 동시에 열려있다. 그래서 민주적 방법으로 진보와 사회적 정의를 쟁취하여야 한다. 독일사민당은 자랑스런 민주적 사회주의의 전통 속에서 현실감각과 실천력을 가지고, 21세기의 과제를 밝힐 의무가 있다. 지속적인 평화와 친환경적 삶의 토대 보장을 위한 과제와 자유롭고, 정의로우며, 연대하는 사회를 위한 과제 그리고 출신, 성별 상관없이, 빈곤과 착취, 공포 없이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자결권을 갖도록 하기 위한 과제를 밝힐 의무가 있다.

우리는 평화롭고 정의로운 세계질서를 추구한다. 우리는 강자의 법칙을 극복하기 위한 법의 힘을 지지한다. 사회적 유럽은 우리의 세계화에 대한 대안이 되어야 한다. 인민과 국가, 문명은 공동의 안보와 책임, 연대와 협력을 통해서만 인류와 지구의 생존을 지켜 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속적인 진보와 경제적 역동성, 사회적 정의, 생태적 이성의 조화를 위해 노력한다. 우리는 질적 성장을 통해 빈곤과 착취를 극복하고, 모든 사람에게 복지와 좋은 노동이 제공되도록 할 것이며, 기후변화 위협에도 대처 할 것이다. 이런 일들은 미래 세대를 위해 자연의 삶의 터전을 보호하고, 삶의 질을 개선하기 위해서도 중요하다. 이를 위해 우리는 과학과 기술의 진보를 인류에 봉사하도록 하고자 한다.

우리는 예방하는 사회국가를 발전 시켜, 빈곤을 퇴치하고, 사람들에게 삶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동등한 기회를 열어주고, 공정한 참여를 보장하며, 삶의 위기에 대해 확실한 안전 조치를 취하고자 한다.

우리는 세대간의 연대와 남녀평등을 지지한다. 우리는 가족을 지지하며 우리사회의 최약자에 대해 연대하고자 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건강한 삶과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자고 한다. 우리는 어린이들을 그냥 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연대하는 시민사회의 힘을 지지한다. 우리는 민주적 정치의 힘으로 우리나라의 단결을 강화하고, 소속감을 갖게 하고, 고향을 느낄 수 있게 할 것이다.
 
우리는 독일에서 상호 인정의 문화를 지원하고자 한다. 인간은 존엄성, 문화, 능력을 서로 존중하며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야한다. 우리는 자유 속에 안전이 보장되는 사회 민주적 법치국가를 추구한다.

급변하는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지향점과 전망을 찾고 있다. 우리는 우리사회의 수백만이 우리의 가치와 목표를 공유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우리는 사회민주적 정치를 위해 연대하는 다수를 형성하고자 한다.
 

spd.pdf

by 부정변증법 | 2008/09/15 18:51 | 사회에 대해 생각하기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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