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 사회
2009/06/18 사회과 교육과정에 대한 간단한 비판(정치 영역) [6]
2009/01/06 뉴라이트를 분석하자(1) 미국과 유럽 [15]
2008/05/03 중국의 미래, 글쎄요?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는 길동이는 고민이 많습니다. 길동이는 어려서부터 두뇌가 명석하고, 또 공부도 열심히 하여 우리 나라에서 손꼽히는 명문대학에 입학하였습니다. 길동이의 어려서부터의 꿈은 자기가 좋아하는 전자공학 분야의 기업에서 일하는 것이었고, 특히 L전자에서 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경제가 어렵다면서 L전자는 신입사원을 네 명만 뽑겠다고 합니다. 반면 여기서 일하기를 원하는 대학 졸업 예정자는 수백명에 이릅니다. L전자는 명문대 졸업만으로는 안 되고 폭넓은 경험, 다양한 외국어 구사능력, 그리고 외국 어학연수 경력 등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학비를 벌어가며 힘겹게 대학을 다닌 길동이가 외국으로 어학연수를 다녀오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계속 이런 식이면 길동이는 실업자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이런 길동이를 보고 어른들은 “L전자나 그 동급 회사만 고집하고 눈높이를 낮추라”고 합니다. 하지만 외국 어학연수 등을 요구하지 않는 일자리들은 고등학교 졸업만 해도 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것들입니다.
길동이는 어른들에게 “그런 일자리에 들어갈 것 같았으면 내가 왜 평균 95점 밑으로 한번도 안 떨어질 만큼 열심히 공부했겠느냐?”라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 by | 2009/10/18 22:26 | 교단 일기 | 트랙백 | 덧글(17)
1. 정 치
1.1. 제도권 교육과정 분석과 문제제기
개정 7차 교육과정에서는 ‘정치’ 과목을 1) 정치 현상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지식을 습득하고, 2) 이를 바탕으로 공동체 생활의 원리를 파악하며, 3) 정치 생활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민주 시민의 자질을 함양하기 위해 개설된 과목이라고 명기하고 있다.
결국 “정치현상에 대한 학문적 지식과 정치현상에 대한 고찰(탐구)→ 정보 획득, 탐구 능력 및 의사결정 능력 함양→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민주 시민의 태도.” 로 요약되며, 능동적 참여의 태도는 명백히 종속변인이며 정치에 대한 학문적 지식과 인지영역이 독립변인이 된다.
그렇다면 어떤 지식? 다음의 표를 보면 정치학의 개론서적 지식과 정치현상에 대한 정보습득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 구성표를 보면 마치 이러한 내용들이 투입되면 민주시민으로서 능동적 참여의 태도가 산출될 것 같이 느껴진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여기에서 우리의 두 가지 문제의식이 출발한다.
영 역 | 내용 요소 |
민주 정치의 발전 | 정치의 의미와 기능/ 정치적 권위와 정통성/ 민주 정치의 발전 과정 민주주의의 이념과 유형/ 정치 문화와 정치 사회화/우리나라 민주 정치의 특성과 과제 |
국민의 권리와 의무 | 헌법의 정치적 의의/ 국민 주권과 입헌주의의 원리/ 우리나라 헌법의 기본 원리/ 국민의 정치적 권리의 내용과 한계/우리나라 국민의 정치적 의무/국민 주권 실현의 과제 |
국가의 조직과 통치 | 국가와 정부/우리나라의 정부 형태/국회와 입법부/대통령과 행정부/법원과 사법부/민주주의와 지방 자치의 발전 과제 |
정치 과정과 참여 | 정치 과정/정치 참여의 의의와 유형/이익 집단과 시민 단체의 정치 참여/정당과 정당 정치/선거와 투표/여론/우리나라 정치 참여의 현실과 과제 |
국제 사회와 정치 | 국제 사회의 특성과 변화/국제 사회의 행위 주체/국제 사회의 협력과 갈등 /국제 사회의 여러 문제/우리나라의 외교 정책과 과제/민족 통일의 과제 |
Q1 여기에 투입되는 지식과 정보는 과연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민주시민의 태도를 길러낼 수 있는 원재료로서 정당한 것들인가?
어떤 지식과 정보도 일의적인 상태로 투입될 경우에는 능동적 참여가 아니라 순응적 태도만을 만들 뿐이다. 특히 정치학에서 사용된 개념들은 일의적인 경우가 거의 없다. 그런데 교과서에서는 이것들을 철저히 일의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를테면 국민주권 같은 매우 다의적이고 역동적인 개념은 교묘하게 선거절차 속으로 축소되고 고정되고 있다. 이것은 교묘한 이데올로기 장치로 보아야 한다. 이런 교육을 받으면 학생들은 정치를 일의적 개념들로 구성된 객관물로 바라보게 된다. 법칙에 의해 움직이는 객관물에 대해 시민이 할 수 있는 일은 그것에 거스르지 않는 것 뿐이다.
Q2 보다 근본적으로 능동적 참여 경험(간접적인 경험이라도) 없이 인지적인 조작만으로 민주시민의 태도가 길러질 수 있는가?
결국 이런 상태에서 학생들이 습득하게 될 참여 방법은 법에 호소하는 것, 그리고 선거에 참여하거나 합법적인 단체에 가입하고 진정하는 것 외에는 남지 않는다. 정권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 같은 역동적인 참여는 애초에 배제되고 있다.
Q3. 정치의 주체는 시민 뿐인가?
이건 보다 심각한 물음이다. 지금 이 교육과정은 정치의 주체로서 사회계약의 테두리 내에 있는 사람들만을 상정하고 있다. 이는 명백히 홉스 -로크- 루소의 전통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홉스는 사회계약 외부의 사람들을 ‘다중’이라 부르며 두려워했다. 그러나 그들이 왜 계약에서 배제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이 교과서의 ‘시민’이라는 말 속에는 다분히 질서와 계약에 순응하기로 서약한 사람들의 함의를 담고 있다. 그것을 거부하여 스스로 외부자가 되거나 배제되고 소외된 사람들은 그렇다면 어떤 권리의 주체도 아닌가? 아감벤, 랑시에르 등은 오히려 그들에게서 정치적인 것을 찾고 있지 않은가?
Q4. 국가는 갈등 없이 움직이는 시계장치인가?
저 교과서에서 상정하고 있는 정치 모델에서 국가기구는 매우 중립적이다. 어떤 것이 투입되느냐에 따라 산출이 결정되며 국가 자체는 순수 객관적 기계장치같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국가가 그렇게 보이는 것 자체가 실상은 갈등속의 역동적 균형이 아닐까? 그리고 이 갈등 속에서 국가 기구는 그야말로 통치기구로 작동하는 것이 아닐까?
1.2. 무엇을 할 것인가?
기존의 교과서와 동일한 수준의 규모와 내용범위를 담고 있는 형태이면서, 그 구성과 내용을 다음과 같이 대체하는 새로운 교과서를 개발한다. 이 교과서는 내신용으로는 별 도움이 안 될지 몰라도, 정치를 제대로 이해하고 나아가 정치학의 최신동향을 이해하는데는 도움이 될 것이다.
①정치적(Political)인 것의 실제를 포착할 수 있도록 한다.
지금의 정치교육과정은 너무도 정적이다. 그러나 정치적인 것은 기본적으로 시끄러운 것이다. 아렌트가 말했듯이 정치는 노동, 작업, 행위 중 행위의 차원이며, 행위는 기본적으로 차이, 다양성의 드러냄에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서로의 차이와 다양성을 분출하는 속에서 공통적인 것을 찾아가는 역동적 과정으로서 정치. 이렇게 바라 볼 때 정치와 행정의 차이가 포착된다.
②민주주의를 구성적(Constructive)인 개념으로 포착할 수 있도록 한다.
민주주의는 어떤 제도나 법규로 환원될 수 없다. 현행 교과서는 민주주의를 몇몇 특정한 선거제도나 대의제로 환원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일종의 이념형이다. 민주주의를 어떤 제도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규범적 차원으로 파악함으로써 여러 나라의 정치, 혹은 한 나라의 과거와 현재를 민주화의 관점에서 비교할 수 있게 된다.
③독재와 전체주의를 가르치자.
현재 교과서는 독재, 전체주의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민주주의 만큼이나 독재, 전체주의, 파시즘의 이념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현재 우리 사회에 어떤 부분이 민주적이며 어떤 부분이 전체주의적인지 비판적으로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④정치 기구 등에 대한 정보는 직간접적인 경험 속에서 터득하도록 한다.
# by | 2009/06/18 23:12 | 트랙백 | 덧글(6)
신보수처럼 사회학자들을 골치아프게 만드는 집단도 없을 것이다. 사실 이들은 68혁명을 꽃피운 신좌파의 반대편이다. 신좌파의 특징은 계급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노동자도 있었고, 지식인도 있었고, 실업자도 있었고, 별별 사람이 다 있었다. 여성은 경우에 따라 중산층 이상의 계급에 속해있을수 있지만, 남성에 대해서는 피지배계급이었고, 청년들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생태,민권운동 같은 지배, 피지배로도 환원되지 않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운동세력들이 어떤 공통점도 없어 보임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운동을 일으켰다. 그것이 유럽과 미국을 아로새겼던 60년대의 물결이었다.
이 60년대의 물결은 여전히 매카시즘의 시대를 좋은 시절로 기억하는 수구보수들에게는 잊지 못할 악몽의 시간이었다. 무엇보다도 뉴레프트들이 "소련"이나 "중국"도 맹렬히 비판함으로써 기존의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공세가 먹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좌와 우를 넘어 일체의 억압에 저항했다. 그들은 보수당과 사회당 노동당을 싸잡아서 구세력으로 몰아붙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20년간 수구보수들은 권력을 내어주어야만 했다. 수구들은 존슨 대통령의 복지정책이 자신들의 부를 빼앗아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을 보고 있어야 했고, 낙태니, 동성애니 하는 그들 기준에서 파렴치한 반인륜적 행위들이 햇빛을 보는 것을 견뎌야 했고, 빨갱이 지식인들이 글과 예술작품으로 기업과 권력자를 조롱하는 것도 허용되는 꼴을 보아야 했다.
그러나 70년대동안 미국의 수구보수들이 침묵만 지키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절치부심 재기를 준비했고, 그 방법은 신좌파와 똑 같이 탈계급적이고 다원적인 세력들을 하나로 연결하는 것이었다. 가장 기본적으로 기독교근본주의자와 시장자유주의자와 반공주의자, 그리고 보수주의자가 뭉쳤다. 사실 이들은 어제까지만 해도 상극이었다. 시장자유주의자는 당연히 고도의 실용주의자이기 때문에 어떤 종류의 근본주의자와도 잘 어울리지 못한다. 돈만 준다면(어려운 말로 유인만 있다면) 신앙 따위야 헌신짝이 될수 있는게 진정 시장적 인간이다. 게다가 반공주의자는 또 어떤가? 또 보수주의자는? 미국의 건국 아버지들인 제퍼슨, 프랭클린 등이 모두 계몽주의자들이었고, 이신론자(사실상 무신론자, 유물론자)였다는 점에서, 그리고 미국이 기독교 국가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헌법에 정교분리를 명시할 것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보수주의와 기독교근본주의는 어울리지 않는다. 또 미국의 건국정신이 정치적 자유주의라는 점에서 반공주의는 역시 어긋난다. 이렇게 보수주의, 기독교근본주의, 반공주의, 시장주의는 서로서로 어긋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하나로 뭉쳐서 거대한 운동을 이루었다. 그게 바로 신보수, 즉 뉴라이트 운동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이질적인 집단들의 느슨한 연대였기 때문에 계급이라는 도구를 이용해서는 절대 분석되지 않는다. 즉 뉴레프트의 정확히 오른쪽 대칭인 것이다. 뉴레프트가 어떤 공식적 조직도 만들지 않으면서, 단지 삶의 양식과 생각, 즉 주체성만을 퍼뜨렸듯이, 뉴라이트도 특별히 어떤 조직을 만드는게 아니라 사고방식, 삶의 양식을 퍼뜨렸다. 그것은 바로 질서였다. 뉴라이트는 계급으로 포착되지 않는 뉴레프트를 하나의 단어로 포괄하는데 성공했다. 그것은 "불평분자"였다. 그들은 모든 종류의 뉴레프트 운동을 싸잡아서 불평과 혼란으로 비난하면서 질서와 경건이라는 자신들의 삶을 제시했다. 그리고 그것은 특히 백인 하층계급에게 크게 어필했다.
이렇게 탈계급적인 뉴라이트의 공세 앞에서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진지를 구축했던 좌파들은 연전연패할수밖에 없었다. 노동자들이 뉴라이트에 포섭된 것이다. 특히 좌파들이 흑인이나 소수민족을 배려한 덕분에 일자리를 잃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분노한 백인 하층민들의 이탈, 그리고 자유의 물결이 교회나 가정이라는 공동체를 파괴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하는 주부들을 중심으로 많은 하층민들이 뉴라이트에게 표를 던졌다. 노동조합에 의존하던 구좌파 정당인 영국 노동당은 대처에게 대패해야 했으며, 일본 사회당은 괴멸했다. 세계에서 가장 긴 역사를 가진 좌파정당인 독일 사민당조차 8-90년대를 야당으로 보내야 했다.
이러한 뉴라이트 현상은 계급을 기반으로 하지 않고, 단지 어떤 이념이나 생각을 기반으로 하고도 강고한 정치세력화가 가능함을 보여주었다. 레이건이나 대처의 당선은 단지 선거 결과가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운동의 흐름이었던 것이다. 반면 중간 중간에 있었던 좌파의 집권, 즉 클린턴, 블레어, 쉬뢰더 등의 승리는 단지 선거 결과였을 뿐 어떤 운동의 흐름은 보여주지 않았다. 버락 오바마의 승리가 중요한 것은 단지 좌파가 승리해서가 아니라 그 선거 과정이 뉴라이트 운동에 반대편에 선 새로운 운동의 흐름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 승리의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역시 계급의 벽을 횡단하면서 어떤 생각을 중심으로 연대했기 때문이다. 오바마 진영은 뉴라이트가 뉴레프트를 통칭한 "무질서, 혼란"이라는 말을 그대로 "변화"라는 말로 바꾸었다. 그렇게 되면 뉴라이트가 자랑하던 "질서"는 "완고함"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뉴라이트의 정책을 "무자비함, 냉정함"으로 묘사함으로써 뉴레프트를 "배려있음"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어쨌든 80년대를 풍미한 미국과 유럽의 뉴라이트 운동은, 계급이 아닌 어떤 견해, 관점, 생각이 계급의 벽을 가로지르며 거대한 사회적 정치적 힘을 만들어낼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사실 그 원조는 뉴레프트였음을 보여주었다. 실상 미국, 유럽에서도 뉴라이트의 지도부들은 전향한 과거 좌파들이었다. 다니엘 벨, 알빈 토플러, 피터 드러커, 그리고 이들의 선배격인 하이에크 등이 그렇다.
# by | 2009/01/06 23:01 | 철학, 사회학 탐구 | 트랙백(1) | 덧글(15)
# by | 2008/05/03 19:28 | 사회에 대해 생각하기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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