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 사회주의

마르크스 강독 - 포이어바하에 대한 테제 3번

원문)
3

인간이 환경과 교육의 산물이며 따라서 인간의 변화는 환경과 교육의 변화라는 유물론의 학설은 인간이 환경을 변화시키며 교육자 자신이 교육받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따라서 이 학설은 사회를 두 부문―그 중 한부분은 다른 한 부분보다 더 우월하게 된다 ―으로 나눌 수밖에 없다. 환경의 변혁과 인간 활동 혹은 자기변혁의 일치는 오직 '혁명적 실천'으로서만 파악되고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The materialist doctrine that men are products of circumstances and upbringing, and that, therefore, changed men are products of changed circumstances and changed upbringing, forgets that it is men who change circumstances and that the educator must himself be educated. Hence this doctrine is bound to divide society into two parts, one of which is superior to society. The coincidence of the changing of circumstances and of human activity or self-change [Selbstveränderung] can be conceived and rationally understood only as revolutionary practice.

읽기) 여기서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하를 위시한 그 때 까지의 유물론의 공통된 결함을 다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개요는 테제2번과 동일하게 인간을 활동의 주체로 파악하지 못하고 다만 객체로, 수동적인 수용자로 파악했다는 점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이전까지의 유물론은 인간은 자신이 살고 있는 환경과 받아 온 교육(양육이라고 직역해야 하지만 양육, 훈육, 학습을 포괄하는 의미에서 교육으로 옮겼습니다)의 결과물로 보았습니다. 이건 사실 오늘날에도 많은 좌파들이 자주 빠지는 함정이며, 스탈린 시대 교과서의 '반영론(의식은 물질의 반영이다)'에서 극적으로 표현되기도 했습니다.

사실 여기서 마르크스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인간은 환경의 영향을 받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환경에 영향을 주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인간이 환경을 좌지우지 하는 것은 아니며, 다만 환경과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상호 변화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이 어떤 교육을 받았느냐에 따라 크게 영향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교육을 담당하는 교육자 또한 사람이며 그 과정에서 영향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망각하면 인간은 환경에 수동적으로 영향받고, 인간은 교육받은 대로 만들어진다는 그릇된 생각이 발생됩니다. 그렇다면 환경을 더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또 교육을 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지도한다는 전제적인 발상으로는 한 걸음 남은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과거 소비에트에서 마르크스의 사상을 마치 유물론인 것처럼 몰아 붙인 까닭이며, 변증법을 사유의 방법이 아니라 마치 자연의 존재법칙인 것처럼 호도한 까닭입니다. 이렇게 유물론적 측면이 기계적으로 강조될때 "법칙을 먼저 알고 있는" 지도자 동지의 자리가 마련되는 것입니다.

 마르크스의 인식론은 유물론이라기 보다는 유물론과 관념론의 지양이며, 그것은 바로 이미 정해진 외적 지식의 단순한 습득(유물론적 관점)과 자유 의지를 가지고 실제로 행하는 실천(관념론적 관점)의 결합입니다. 즉 테제1번에서 말했듯 인식론의 변혁적이고 능동적인 측면은 도리어 관념론에서 발전해왔기에 마르크스는 그것을 관념론의 것이라 하여 폐기하는 대신 보존하고, 다시 유물론의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측면과 결합하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리의 객관성은 인식 대상 그 자체, 혹은 인식 과정 혹은 방법론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론과 실천의 결합을 통해 현실 속에서 스스로 입증되어 나가는 데 있는 것입니다. 이는 공교롭게도 수십년 뒤 마르크스의 이 노트를 읽어 봤을 리 없는 미국의 철학자 존 듀이의 인식론과 일맥상통합니다. 듀이 역시 '철학의 재구성'과 '자연과 경험'에서 관념론적 입장과 유물론적 입장을 모두 비판하면서 사고와 실천의 결합으로서 '경험'을 진리의 기준으로 제시한 바 있습니다.

이글루스 가든 - 맑스공부하기

by 부정변증법 | 2009/12/02 09:38 | 마르크스 읽기 | 트랙백 | 덧글(3)

땡큐 북한 커밍아웃.

북한에서 헌법을 개정했다고 한다. 그 세세한 내용이야 알 것 없지만, 눈을 번쩍 뜨이게 하면서 나를 기쁘게 만든 소식이 있었다. 그것은 '공산주의'라는 말을 모두 삭제했다는 것이다. 즉, 이제부터 북한은 공식적으로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국가가 아닌 것이다.(공산국가라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공산주의에서는 국가가 존재할 수 없으니). 이 말은 다시 바꾸면 북한은 국가가 소멸되는 인류공동체(코뮨)를 향해 가는 것을 부정한다는 뜻이며, 앞으로도 영구히 "국가"로서 존재하겠다는 말이다. 물론 그 국가의 지도자는 국방위원장이다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고 한다. 역사상 군사지도자가 국가원수로 규정된 헌법이 몇개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나치, 파쇼, 혹은 팔랑헤 정권 외에는 없지 않았을까 싶다.

이건 경사가 난 것이다. 북한이 그 허울좋은 공산주의를 버리고 "그래. 난 파쇼다. 어쩔래?"하고 커밍아웃 한거니까. 그 동안 수많은 진보좌파들이 북한이 공산주의라는 말을 쓰고 있는 덕분에 얼마나 벙어리 냉가슴을 앓았던가? 1972년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삭제하고 주체사상을 쳐넣었을때는 민족주의가 웬 공산주의 탈을 쓰고 있나 이런 의구심이라도 남았는데, 이제는 아예 선군사상을 지도 이념으로 명기했단다. 아예 나라를 군대식으로 다스리겠다고 헌법 서문에 쳐넣은 나라가 제대로 꼴 박힌 나라 중에 몇이나 있을까? 그래도 차마 거짓말을 할 수는 없는지 공산주의는 삭제했다. 공산주의의 해방이여 만세!

저 북쪽의 정권은 그 동안 이 공산주의라는 말을 쓰고 싶어도 감히 쓰지 못하고 꼬뮤니즘 따위로 에둘러 말하게 만들었던 원인이었다. 국보법에 잡혀갈까봐 겁도 나고 또 저 형편없는 사회를 이상으로 삼고 있느냐는 비웃음도 두려웠고. . "공산당 선언"이 청소년 권장 고전으로 소개되고 있는 마당에 이 얼마나  웃기는 일이었던가? 그런데 이 고민을 해결해 준 조선노동당에게 태어나서 처음으로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이 참에 공안기관에서도 이제 북한은 공산주의국가가 아니니, 앞으로 민족주의나 군사주의 따위를 이적사상으로 검열하던가 말던가 해야 할 것이다. 참, 지도자를 높이 숭상하는 사고방식이야 말로 가장 친북적인 사고방식이니 종만 치면 엠비어천가를 불러대는 작자들을 모조리 잡아 족쳐야 할 것이다.

자, 그렇다면 저 북쪽의 독재자들이 오용하고 있었던 공산주의의 참 뜻은 무엇인가? 그것은 노동과 분배의 상관관계를 제거한 세상을 의미한다. 지금까지의 노동은 필요에 의해 강요되었지만(목구멍이 포도청), 공산주의의 노동은 능력에 의해 동기화된다(이떄 능력은 잘났다 못났다가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의미). 지금까지의 분배는 얼마나 일했느냐에 의해 이루어졌지만(노동을 시간화한 임금), 공산주의의 분배는 필요에 의해 이루어진다. 좀 개판 세상으로 보이지 않는가? 당연히 공산주의는 무정부적인 요소를 가득 담고 있는 사상이다. 도대체 어떤 지도당이 있어서 공산주의로 영도해 줄테니 닥치고 따라와 하고 말하는 것 자체가 너무도 반공산주의적 발상이었던 것이다. 그러고보면 소련, 북한, 모두 철저한, 아니 가장 철저한 반공국가였던 것이다. 그리고 가장 지독한 반공국가였던 북한, 공산주의와 가장 먼 길을 가면서도 공산주의를 주장하면서 아주 고도의 안티술을 구사했던 북한이 공산주의를 포기했다. 아니 애초에 시도한 적도 없는 공산주의를 지우고 사실은 자신들이 반공국가였음을 고백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이글루스 가든 - 시사진보가든...시사비평을 통해 ...

by 부정변증법 | 2009/10/02 17:11 | 사회에 대해 생각하기 | 트랙백(1) | 덧글(22)

마르크스 고전 읽기 -경제학 철학 노트(7)

원문) 우리는 하나의 정치경제학적 사실, 노동자의 그의 생산의 소외에서 출발하였다. 우리는 이 사실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소외된, 외화된 노동. 우리는 이 개념을 분석하였고, 그에 따라 단순히 하나의 정치경제학적 사실을 분석하였다.
이제 더 나아가 소외된, 외화된 노동이라는 개념이 현실 속에서 어떻게 표현되고 서술되어야만 하는지 살펴보자.

읽기) 지금까지 마르크스는 순전 경제학 범주 내에서 생산과정, 즉 노동을 분석했다. 그리고 그것을 소외된, 외화된 노동으로 정식화하였다. 그렇다면 이제 이것을 경제학이 아니라 현실의 언어로, 일상적인 현상으로 어떻게 서술해야 할까?

원문) 노동의 생산물이 나에게 낯선 것이고 나에게 낯선 힘으로 대립한다면 그것은 누구에게 속하는 것일까?
나 자신의 활동이 나에게 속하지 않으며, 낯선 활동, 강요된 활동이라면 그것은 누구에게 속하는 것인가? 나 이외의 다른 존재에게. 이 존재는 누구일까?
신들일까? 물론 고대에는, 예를 들면 이집트, 인도, 멕시코의 신전건축과 같이 주요 생산이 신에 대한 봉사로 나타날 뿐만 아니라 그 생산물은 신들에게 귀속되었다. 그러나 신들만 노동의 주인이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마찬가지로 자연도 결코 아니었다. 그리고 인간이 자신의 노동을 통해 자연에 숙달되면 숙달될수록 신들의 기적이 산업의 기적에 의해 불필요한 것이 될수록, 인간이 이러한 힘들의 보존을 위해 생산의 기쁨과 생산물의 향유를 포기해야 하다니 이 무슨 모순이란 말인가?

읽기) 이제부터 아주 단순하고 쉬워진다. 노동의 생산물이 나에게 낯선것이 된다면, 내가 만든 생산물이 나에게 대립한다면, 생산물이 스스로 생물이 되어 활동하지 않는 다음에야, 다른 누군가의 것, 다른 누군가에게 속하는 것이 될 것이다. 내가 하고 있는 활동, 노동이 내가 하는 일 같지 않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분명 다른 누군가에게 속하는 것, 즉 내가 다른 누군가를 위해 하는 일일 것이다. 이건 당연하다. 그렇다면 아주 간단한 문제, 내 생산물은 누구에게 속하며, 나의 노동은 누구를 위한 노동인가?
고대에는 신을 위해 그런 일들을 했다. 이것이 포이어바흐의 이론이다. 인간은 자신의 유적인 힘을 신으로 만들었고, 급기야 사진의 긍정적인 힘과 노동을 신에게 돌렸다. 앙코르왓 같은 거대한 건축물을 보면 존재하지 않는 신이 얼마나 많은 인간의 노동력을 가져갔는지, 마야, 아즈텍 같은 경우에는 심지어 살아있는 인간을 제물로 챙겨갔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다. 산업의 기적, 즉 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라 인간은 신에게 자신을 바치지 않는다. 신으로부터 해방! 종교개혁, 칼뱅주의는 바로 신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일하라는 선언이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분명 오늘날 일부 광신도를 제외하면 신을 위해 일하지 않고, 신에게 자신과 그 생산물을 바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한결 여유롭고, 더 풍성해야 하는데, 이게 웬일인가? 자본주의, 후기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떤 면에서는 중세인들보다도 여유가 없다. 그리고 생산, 노동은 점점 고역이 되고있다. 이게 무슨 역설인가?

원문) 노동과 노동의 생산물이 귀속되는, 노동이 그것에게 봉사하며, 노동의 생산물을 향유하는 낯선 존재는 오로지 인간 자신일수밖에 없다. 노동의 생산물이 노동자에게 속하지 않고 낯선 힘으로 그에게 대립한다면, 이는 그 생산물이 노동자 이외의 다른 인간에게 속함으로써만 가능하다.
그의 활동이 그에게 고통이라면, 다른 사람에게는 향유이고, 생활의 기쁨일수밖에 없다. 신들도 자연도 아닌 오직 인간 자신만이 인간을 지배하는 이런 낯선 힘일 수 있다.

읽기) 자, 이제 신은 빼자. 신이 빠졌는데도 불구하고 생산물, 노동이 노동하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다른 사람의 것일수 밖에 없다. 음, 여기에 대해서는 마르크스가 뒤르켐이 제시한 "출현적 현상"으로서 사회, 그리고 하나의 사물로서 "사회적 사실"이라는 개념, 즉 구조주의적 개념을 개발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보니, 내가 빼앗긴다면 누군가가 빼앗는 것이라는 단순한 논리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하여 나의 고통은 너의 기쁨의 관계로 제시하고 있다. 어쨌든 여기서 마르크스는 소외론에서 착취론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보면 된다.

원문) 자기 자신에 대한 인간의 관계는 다른 인간에 대한 그의 관계를 통해서 비로소 그에게 대상적이고 현실적이라는, 앞서 제시한 명제를 좀 더 살펴보자. 따라서 인간이 낯설고 적대적이며, 강력한, 그에게 독립적인 대상으로서 그의 노동의 생산물, 그의 대상화된 노동에 관계할 때, 이 관계는 다른 사람이 낯설고 적대적이며, 강력한, 그에게 독립적인 대상의 주인임을 암시한다. 만약 그가 부자유스러운 것으로서 자신의 고유한 활동에 관계하고 있다면, 이는 그가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는 지배, 강제, 질곡 아래에서의 활동과 관계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 그리고 자연으로부터의 모든 인간의 자기 소외는 인간이 자신과 자연을 자신과 구별되는 다른 사람에게 위치시키는 관계 속에서 나타난다. 그런 까닭에 종교적인 자기 소외는 필연적으로 사제에 대한 평신도의 관계 속에서, 또는 여기서는 영적인 세계가 문제이므로 중보자 등에 대한 평신도의 관계 속에서 나타난다. 실천적이고 현실적인 세계에서 자기 소외는 다른 사람에 대한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관계를 통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 소외가 생겨나는 매개는 그 자체로 실제적이다. 그러므로 소외된 노동을 통해서 인간은 그 자신과 낯설고 적대적인 힘인 생산 대상의 관계를 만들어 놓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 자신의 생산과 자신의 생산물에 대해 맺고 있는 관계, 그리고 그가 이러한 다른 사람과 맺고 있는 관계도 만들어 놓는다. 그가 자기 자신의 생산을 그의 현실성 박탈로, 그의 형벌로, 그가 자기 자신의 생산물을 상실로, 그에게 속하지 않는 생산물로 만들어 놓는 만큼, 그는 생산과 생산물에 대한 생산하지 않는 사람의 지배를 만들어 놓는다. 그가 자기 자신의 활동을 자신에게서 소외시키듯이, 그는 낯선 사람이 그 자신의 것이 아닌 활동을 획득하게 한다.

읽기) 즉, 소외된 노동은 다른 누군가가 그 노동의 주인임을 보여준다. 그것이 소외된 노동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사실 이 부분은 마르크스의 독창적 아이디어라기 보다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에 나오는 유명한 '주인과 노예의 비유'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주인과 노예의 비유를 포이어바흐의 유물론과 연결지음으로써 독특한 결론을 얻은 것이다.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비유는 존재론적이다. 실제 주인과 노예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이라기 보다는 존재론을 설명하기 위한 비유인 것이다. 그 내용은 자립적 의식인 주인은 스스로를 주체로 확인하는 의식이면서 동시에 노예인 비자립적 의식을 통해서 자신을 의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즉, 주인이 자신의 자유를 의식하기 위해 그 대립물, 자유롭지 못한 사람, 노예에 비추어서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헤겔은 이를 지양되어야 할 분열로 보며, 소외로 본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이를 의식에 대한 비유가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로 돌려 놓았다. 그리고 이를 자립적 의식, 주인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비자립적 의식, 노예의 입장에서 바라본 것이다. 비자립적 존재, 노예, 그리고 노동자는 자신의 비자립성을 앞에서 제시한 소외의 형태로 경험한다. 죽도록 일을 하는데, 그 결과물은 자기에게 속하지 않는다. 일하는 주체는 자신인데, 그 일, 그 활동이 자신을 고통스럽게 한다. 그리고 인류라는 말을 알고 있는데, 자신은 그 구성원이 아닌것 같다. 더욱 기가 막힌것은 열심히 일하면 일할수록 자신을 옥죄는 그런 고통스런 현상은 더 강화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현상에 불과하다. 그 현상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자기 아닌 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노동을, 자신의 노동생산물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소외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향유가, 헤겔식의 말을 빌리면, 자신의 소외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존재의 확인, 자아실현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헤겔의 주인-노예 변증법의 그 다음 이야기를 전개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이 관계가 주인에게도 부정적인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주인의 경우 자신의 존재를 확증하기 위한 거울이 천하디 천한 노예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도리어 주인이 노예에게 의존적인 관계가 된다. 노예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다 해서 주인이 자아실현을 하지는 않는다. 반면 노예는 직접 자연에 자기 힘을 가해 노동을 함으로써 자아실현을 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이 대목을 거부하는 것으로 보인다. 노예는 자연에 자기 힘을 가해 자아실현을 할 수 있을런지 모르지만, 근대 산업 노동자는 그 마저도 불가능하다. 생산수단이 자연이 아니라 이미 다른 누군가의 소유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주인이 자아실현이 불가능하다는 헤겔의 정식도 거부하지는 않는다. 결국 자본주의는 자본가와 노동자 모두가 소외되는 그런 체계로 규정될수밖에 없다.
스탈린주의자들과 결국은 스탈린을 정당화한 알뛰세르는 마르크스의 이 책, 경제학철학 초고를 거부했다. 그리고 소외론은 관념론적 마르크스, 잉여가치론이 진정한 마르크스라고 분리하였다. 그러나 이 대목은 그들의 해석이 잘못되었음을 보여준다. 소외론과 착취론(잉여가치론)은 한 몸인 것이다. 그것은 현상과 본질의 관계에 있다. 착취로 인해 소외가 발생하며, 다시 이 소외가 그 착취관계를 강화하는 것이다.
어쨌든 여기서 마르크스는 자신의 평생을 지배하는 방법론을 획득했다. 그것은 현상을 먼저 관찰하고, 그 현상들의 관계를 기술한 뒤, 그 이면에 숨어있는 본질을 추적하는 것이다. 그것을 그는 나중에 정치경제학비판 서설에서 "추상에서 구체"라는 용어로 정식화 하였다. 그러나 이 문헌에서는 그러한 마르크스의 방법론의 정수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추상적인 수준에서 논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방향은 분명히 보이고 있다.

by 부정변증법 | 2008/11/05 09:45 | 마르크스 읽기 | 트랙백 | 덧글(0)

마르크스 원전 읽기 -경제학 철학 노트 (5)

원문) 인간은 그가 실천적으로도 이론적으로도 유(類)를, 다른 사물의 유와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의 유를 자신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뿐만아니라, 현재의 생동적인 유로서 자기 자신에게 관계한다는 점에서, 보편적인, 따라서 자유로운 존재로서 자기 자신에게 관계한다는점에서 하나의 유적 존재다.


읽기)이제 노동 과정에서 소외의 세번째 특징이 나타난다. 그런데 이 부분은 이 문헌 전체에서 헤겔 철학에 대해 장광설로 비판하고 있는절대지에 대한 부분과 더불어 가장 사변적이고 난해한 부분이다. 우선 유(Gattung. Genus)라는 용어부터 당혹스럽다. 이용어는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에서 기원한 용어다. 유(genus)는 몇몇 개념들을 포괄하는 상위 개념이 되면서도 그 고유한 속성을가지고 있는, 즉 다른 유와 구별될 수 있는 그런 개념이다. 유의 하위개념들이 종(specy)다. 즉 이런 저런 인종들이있으며, 이들을 포괄하는 인류가 있는 것이다. 인류는 한 사람이 다른 자연과 구별되는 가장 보편적인 범주다. 즉 갑돌이,을돌이를 추상하면 한국인, 일본인, 다시 추상하면 황인종, 백인종, 그리고 그것을 더 추상하면 인류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여기서 더 추상하면 그냥 동물이 된다. 따라서 여기서 유라고 함은 한 사람을 동물과 구별하도록 하는 가장 보편적인 특징을 지닌 그런 집합 혹은 그런 속성이 된다.


유적 존재라 함은 자신이 바로 그런 분류에 포함되고 있음을 의식하는 존재를 말한다. 포이어바흐는 오직 인간만이 자신이 인류임을 의식한다고 보았다. 즉, 인간만이 인간성 자체를 의식할수 있고, 이런저런 속성을 가졌기에 자신이 동물과 구별된다고 의식한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유적존재다. 사실 이 유적존재라는 용어는 이후형이상학적 개념으로 마르크스 자신에게 배격되며, 다시 사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으로는(다른 논문에서 밝히겠지만) 이유적존재로서 인간 개념을 포기한 것은 마르크스 이론의 큰 헛점을 남기게 된다.


원문)유적생활은 동물에게뿐 아니라 인간에게도 물질적으로 우선 인간이 비유기적 자연에 의해 생활한다는 것에서 성립하지만, 인간은동물보다 보편적이며, 그가 그것에 의해 생활하는 비유기적 자연의 범위도 더 보편적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식물, 동물, 암석,공기, 빛 등은 한편으로는 과학의 대상이며, 한편으로는 예술의 대상이다: 이들은 인간이 향유하고 소화하기 위해 제일 먼저 마련해두어야 하는 인간 정신의 비유기적 자연, 정신적인 생활수단이다. 이론적 관점에서 보면 이들은 인간의식의 일부분을 형성하며,실천적 관점에서 보면 이들은 인간의 생활과 활동의 일부분을 형성한다. 이러한 자연생산물이 식품, 연료, 의복, 주거 등의 어떤형식으로 나타나든 간에 인간은 물질적으로 이러한 자연생산물에 의해 생활한다. 인간의 보편성은 실천적으로 자연이 (ⅰ) 직접적인 생활수단인 한에서,(ⅱ) 인간의 생명활동의 소재와 대상과 도구인 한에서 자연 전체를 그의 비유기적 육체로 만드는 바로 그 보편성 속에서 나타난다.자연은 그 자체가 인간의 육체가 아닌 한 인간의 비유기적 신체다. 인간이 자연적 수단에 의해 살아간다는 것은 인간이 죽지 않기위해 끝없이 자연과의 상호작용 속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육체적·정신적 생활이 자연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인간 역시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에, 자연은 스스로에 의존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읽기) 이건 변증법적인 사유가 들어가 있어서 단답식 교육을 받은 우리가 이해하기 무척 어려운 문장이다. 먼저 비유기적 자연이라는 말은 그냥 물질이라고 옮겨도무방하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 살펴보자.선 유적 생활을 하기 위해서 존재는 자신을 보편적인 '유'로서 인식해야 함은 앞에서보았다. 그런데 이 인식은 자신의 '유'의 반대편, 즉 그 반정립을 통해서만 정립될 수 있다. 개별 존재 역시 즉자적 존재에서대자적 존재, 즉 "그저 있음"이 아니라 "무엇에 대하여 있음"이 될때 인식이 가능하듯이 보편적 존재, 즉 유적 존재 역시"무엇에 대하여 있음"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 "무엇" 역시 보편적이라야 함은 물론이다. 즉 나는 연필 한자루, 책상하나를 쥐고 있다. 나는 교감 아무개와 싸운다. 그런데 나는 내가 보다 보편적인 존재임을 안다. 나는 학자로서 문방구를사용하며, 교사로서 관리자와 싸운다. 더 보편적이 되면 나는 한국인으로서 한반도에 살며, 노동자로서 국가에 고용되어 있다.보다시피 주체의 보편성이 상승되면, 거기에 대상이 되는 것(혹은 그 부정)의 보편성도 상승된다. 여기까지는 아직 '종'의수준이다. 이제 '유'의 수준까지 가면  "나는 인류로서 자연에 살고 있다"수준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을 "인류"로 볼수 있는 것은 그가 접하는 각종 사물들을 총체적인 "자연"으로 보편화시킬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연을 두 가지 방식으로 상대한다. 하나는 자신의 직접적인 생존 수단으로, 즉 구체적인 식량, 도구 등등으로, 다른 하나는 보편적인 자연으로.


이보편적인 자연은 인간 "주체"와 관계를 맺는 전체적이고 보편적인 자연이다. 각종 물질은 이런저런 과정을 통해 주체 내부로들어오면 육체가 되며, 밖으로 나가면 자연이 된다. 이렇게 인간은 자신과 자연이 대립되었으면서도 동시에 통일되어 있음을 알며,궁극적으로 모두 자연임을 안다.


이거, 풀이 하는 게 아니라 더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 같은데, 이걸 변증법 abc로 다시 풀어보자.


1)A라는 존재가 있다. 그런데 이 존재는 그저 있는 것만으로는 존재가 아니다. 2)그리하여 이 존재는 자신의 대립물인 B를정립한다. 즉 부정이 일어난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서 A는 자신이 존재하기 위해 B라는 타자, 부정에 의존해야 하는 사항에처한다. 즉 소외가 일어났다. 3) 그러나 이 소외는 A가 자신과 B모두 그들을 모두 그 내부의 계기들로 포괄할수 있는 '알파벳'이라는 더 보편적인 존재의 부분임을 깨달으면서 해소된다. 이게 지양이다.물론 여기서 끝나는게 아니다. '알파벳'은 '한글'과 대립한다. 그리고 같은 과정을 통해 이 대립은 '문자'에 포함됨으로써해소된다... 등등.


이제 이걸 인간과 자연으로 가져가 보자.1) 나는 인류다. 인류는 혼자 뻘쭘히 인류가 아니라 다른 비유기적자연과 구별되는 한 인류다. 2) 그런데 나는 인류로 존재하기위해 저 비유기적자연에 의존해야 한다. 이로써 비유기적 자연은 나에게 대립물로, 낯선 것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비유기적 자연은나에게 흡수되면 육체가 되고, 내 육체는 밖으로 나가면 비유기적 자연이 된다. 그러니 나와 비유기적 자연은 모두 대자연의 순환의 한 고리씩인 것이다. 3)이리하여 인간은인류 역시 자연의 한 부분이며 외적 자연이라고 생각했던 비유기적 자연과 더불어 하나인 것이다. 이렇게 해서 소외가 해소된다.


아직도 이해가 안된다면 이렇게 생각해 보자. 한 인간은 자신의 대립물, 자신의 대상, 그가 상대하는 세계의 보편성의 수준만큼 보편적 인간이 된다. 그가 상대하는 의식하는 세계가, 이 사람, 저 사람, 이 물건, 저 물건인 사람과, 그가 상대하고 의식하는 세계가 자연계, 인류, 우주인 사람의수준은 다른 것이다. 더 나아가 자신이 바로 이 인류, 자연계의 불가분의 한 고리임을 인식하고 의식하는 인간은 어떨겠는가?인간은 유일하게 한 개체이자 동시에 이런 보편적 존재를 의식할 수 있는 동물이다.


원문)소외된 노동은 인간에게서 (1)자연을 소외시키고, (2)자기 자신, 인간 고유의 활동적 기능, 인간의 생명활동을 소외시킴으로써,인간에게서 유를 소외시킨다. 소외된 노동은 인간에게 유적 생활을 개인 생활의 수단으로 만든다. 첫째로 소외된 노동은 유적생활과개인생활을 소외시키고, 둘째로 추상 속에 있는 후자를 마찬가지로 추상화되고 소외된 형식 속에 있는 전자의 목적으로 삼는다. 그까닭은 첫째, 인간에게 노동, 생명활동, 생산적 생활 자체가 욕구, 육체적 생존을 유지하려는 욕구를 충족시키는 수단으로서만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생산적 생활은 유적 생활이다. 그것은 생활을 생성하는 생활이다. 생명활동의 방식 속에는 어떤 종의성격 전체, 그의 유적 성격이 놓여 있으며, 자유로운 의식적 활동은 인간의 유적 성격이다. 생활 자체는 생활의 수단으로서만나타난다.


읽기)그렇다면 소외된 노동이 어찌하여 인간을 유로부터 소외시킨다는 것일까? 우선 인간에게서 인류로서의 활동을 소외시킴으로써다. 이문단은 매우 복잡하게 기술되었지만 실은 아주 단순한 내용이다. 요약하면 이렇다. 인간은 활동한다. 인간의 활동에는 두 종류가있다. 하나는 개별 존재로서의 활동이며 다른 하나는 인류로서의 활동이다. 즉 개인적인 욕구와 충동을 충족시키는 활동, 그리고인류로서 자신의 유적 존재를 의식하며 하는 활동이다. 이 중 전자는 단지 생존하고 순간적인 욕구를 충족하는 활동이다. 따라서그때 그때의 활동이며 파편적인 활동이다.  후자는 인류의 생활방식 자체를 만들어가는 활동이다. 이 활동은 여러 파편적 활동을보편화하여 바라보는 활동이다. 노동은 단지 생존수단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방식도 생산하는 활동이다. 즉, 단지 먹이 획득이아니라 먹이 획득 방법을 만들어내고 적용하는 과정이 노동인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생존, 즉 생명유지를 위한 활동 속에서 이미노동이라는 자신의 유적 성격이 드러나는 존재다. 그러나 소외된 노동은 이런 활동을 단지 육체적 생존 유지의 수단으로 만들어버린다. 즉 이 속에서 인간은 자연, 외적 세계를 그때 그때의 생존 수단으로서만 접하게 된다. 이로써 인간은 노동을 하면서 점점자신을 "인류", "유적 존재"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이는 인간을 동물로 만든다는 것이다. 동물이 어쨌길래?


원문)동물은 자신의 생명활동과 직접적으로 하나다. 동물은 자신의 생명활동과 구별되지 않는다. 동물은 생명활동이다. 인간은 자신의생명활동 자체를 자신의 의욕과 의식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는 의식된 생명활동을 가진다. 인간이 직접적으로 그것에 융합되는 규정은없다. 의식된 생명활동은 인간을 동물적인 생명활동과 직접적으로 구별한다. 바로 이 때문에 인간은 하나의 유적 존재이다. 또는인간이 하나의 유적 존재이기 때문에 그는 의식적 존재일 뿐이며, 다시 말해 그의 고유한 생활은 그에게 대상이다. 바로 이 때문에그의 활동은 자유로운 활동이다. 소외된 노동은 이 관계를 전도시키고, 바로 인간은 의식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의 생명활동,자신의 존재의 본질을 단지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 만든다.


읽기) 마르크스는 동물과 인간의 결정적인 차이를 자기내 존재와 대자적 존재로 본다. 이는 나중에 하이데거와 사르트르에게 그대로 계승된다.하이데거는 오직 인간만(존재한다면 천사나 신도) 자연계의 대자적 존재라고 본다. 이 의미는 자신의 활동을 의식하는 존재, 자기자신을 의식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존재, 즉 자기 바깥으로 나가서 자기를 인식할수 있는 존재다. 동물은 본능적으로 생멸활동을하지만, 자신이 생명활동을 하고 있음을 알지 못한다. 즉 동물은 자신의 생명활동 그 자체다. (물론 이런 인간 규정은 최근,일부 영장류와 돌고래가 자아의식을 가지고 있음이 확인됨으로써 지지받기 어려워졌다. 하지만 이는 영장류와 돌고래를 사람 대접을하면 될 일이다). 이는 훗날 허버트 미드가 "I"와 "me"분립 이론을 수립하는 초석이 된다.  이제 "유적존재"라는 모호한 용어가 "생명활동을 의식하는 존재"로 "활동하는 자신을 의식하는 존재"로 보다 분명해진다. 이로써인간은 그의 활동, 그의 생활을 자신의 대상으로 삼을수 있는 존재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그의 활동, 그의 생활을 통제할수 있는 존재이며, 따라서 "자유로운 존재"다. 이런 의미를 알아야 엄격한 생활을 하던 고대 스파르타인이 자신들을"자유로운"존재라고 자부한 이유를 납득할수 있게 된다. 확실히 스파르타인은 충동과 욕망에 휘둘리는 그리고 그 충동과 욕망을의식하지 못하는 현대인들보다 자유로웠다.

그런데, 소외된 노동은 인간이 하루의 대부분을 원하지 않는 일을 할수밖에 없게 만들며, 그 이유가 겨우 "생존수단을 얻기위함"이다. 이로써 인간은 "생명활동"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끌려가게 된다. 그런데 인간은 의식적인 존재이기 때문에자신이 생존 수단을 얻기 위해 자신의 생명활동을 그 도구로 사용함을 안다. "목구멍이 포동청이다"라는 말을 하면서. 이건동물보다 곱절로 비참한 것이 아닐까? 일벌들이 자신의 "일함"을 의식한다면 어떻게 될까?

by 부정변증법 | 2008/10/30 12:23 | 마르크스 읽기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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