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 비판교육학

사회과 교육과정에 대한 간단한 비판(정치 영역)

그 동안 제가 너무 많은 일을 하느라 거의 포스팅을 하지 못했습니다. 거의 일주일째 새 포스팅이 없는데도 늘 100회 이상의 히트수가 나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오늘은 그 동안 했던 일들의 작은 결실중 하나를 공개합니다. 사실 저는 요즘 기존의 제도권 교과서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은 버렸습니다. 그건 그저 저의 물질적 기반을 위해 해 둘 뿐입니다(돈벌이의 어려운 표현^^) 저의 실제 꿈은 제도권 교과서를 대체하는 새로운 교과서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제도권 교육과정에 대한 문제제기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전교조가 이런 일을 할 수 있기를 늘 기다려 왔지만, 전교조 기다리다 내가 늙어 죽겠습니다. 그래서 전교조는 저 뒤에 남아 있으라 하고 뜻 맡는 몇몇 분들과 먼저 튀어 나갑니다.

1. 정 치

 

1.1. 제도권 교육과정 분석과 문제제기

 

개정 7차 교육과정에서는 ‘정치’ 과목을 1) 정치 현상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지식을 습득하고, 2) 이를 바탕으로 공동체 생활의 원리를 파악하며, 3) 정치 생활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민주 시민의 자질을 함양하기 위해 개설된 과목이라고 명기하고 있다.

결국 “정치현상에 대한 학문적 지식과 정치현상에 대한 고찰(탐구)→ 정보 획득, 탐구 능력 및 의사결정 능력 함양→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민주 시민의 태도.” 로 요약되며, 능동적 참여의 태도는 명백히 종속변인이며 정치에 대한 학문적 지식과 인지영역이 독립변인이 된다.

그렇다면 어떤 지식? 다음의 표를 보면 정치학의 개론서적 지식과 정치현상에 대한 정보습득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 구성표를 보면 마치 이러한 내용들이 투입되면 민주시민으로서 능동적 참여의 태도가 산출될 것 같이 느껴진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여기에서 우리의 두 가지 문제의식이 출발한다.

영 역

내용 요소

민주 정치의 발전

정치의 의미와 기능/ 정치적 권위와 정통성/ 민주 정치의 발전 과정 민주주의의 이념과 유형/ 정치 문화와 정치 사회화/우리나라 민주 정치의 특성과 과제

국민의 권리와 의무

헌법의 정치적 의의/ 국민 주권과 입헌주의의 원리/ 우리나라 헌법의 기본 원리/ 국민의 정치적 권리의 내용과 한계/우리나라 국민의 정치적 의무/국민 주권 실현의 과제

국가의 조직과 통치

국가와 정부/우리나라의 정부 형태/국회와 입법부/대통령과 행정부/법원과 사법부/민주주의와 지방 자치의 발전 과제

정치 과정과 참여

정치 과정/정치 참여의 의의와 유형/이익 집단과 시민 단체의 정치 참여/정당과 정당 정치/선거와 투표/여론/우리나라 정치 참여의 현실과 과제

국제 사회와 정치

국제 사회의 특성과 변화/국제 사회의 행위 주체/국제 사회의 협력과 갈등 /국제 사회의 여러 문제/우리나라의 외교 정책과 과제/민족 통일의 과제

 

Q1 여기에 투입되는 지식과 정보는 과연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민주시민의 태도를 길러낼 수 있는 원재료로서 정당한 것들인가?

 

어떤 지식과 정보도 일의적인 상태로 투입될 경우에는 능동적 참여가 아니라 순응적 태도만을 만들 뿐이다. 특히 정치학에서 사용된 개념들은 일의적인 경우가 거의 없다. 그런데 교과서에서는 이것들을 철저히 일의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를테면 국민주권 같은 매우 다의적이고 역동적인 개념은 교묘하게 선거절차 속으로 축소되고 고정되고 있다. 이것은 교묘한 이데올로기 장치로 보아야 한다. 이런 교육을 받으면 학생들은 정치를 일의적 개념들로 구성된 객관물로 바라보게 된다. 법칙에 의해 움직이는 객관물에 대해 시민이 할 수 있는 일은 그것에 거스르지 않는 것 뿐이다.

 

Q2 보다 근본적으로 능동적 참여 경험(간접적인 경험이라도) 없이 인지적인 조작만으로 민주시민의 태도가 길러질 수 있는가?

  

결국 이런 상태에서 학생들이 습득하게 될 참여 방법은 법에 호소하는 것, 그리고 선거에 참여하거나 합법적인 단체에 가입하고 진정하는 것 외에는 남지 않는다. 정권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 같은 역동적인 참여는 애초에 배제되고 있다.

 

Q3. 정치의 주체는 시민 뿐인가?

 

이건 보다 심각한 물음이다. 지금 이 교육과정은 정치의 주체로서 사회계약의 테두리 내에 있는 사람들만을 상정하고 있다. 이는 명백히 홉스 -로크- 루소의 전통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홉스는 사회계약 외부의 사람들을 ‘다중’이라 부르며 두려워했다. 그러나 그들이 왜 계약에서 배제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이 교과서의 ‘시민’이라는 말 속에는 다분히 질서와 계약에 순응하기로 서약한 사람들의 함의를 담고 있다. 그것을 거부하여 스스로 외부자가 되거나 배제되고 소외된 사람들은 그렇다면 어떤 권리의 주체도 아닌가? 아감벤, 랑시에르 등은 오히려 그들에게서 정치적인 것을 찾고 있지 않은가?

 

Q4. 국가는 갈등 없이 움직이는 시계장치인가?

 

저 교과서에서 상정하고 있는 정치 모델에서 국가기구는 매우 중립적이다. 어떤 것이 투입되느냐에 따라 산출이 결정되며 국가 자체는 순수 객관적 기계장치같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국가가 그렇게 보이는 것 자체가 실상은 갈등속의 역동적 균형이 아닐까? 그리고 이 갈등 속에서 국가 기구는 그야말로 통치기구로 작동하는 것이 아닐까?

 

1.2. 무엇을 할 것인가?

 

기존의 교과서와 동일한 수준의 규모와 내용범위를 담고 있는 형태이면서, 그 구성과 내용을 다음과 같이 대체하는 새로운 교과서를 개발한다. 이 교과서는 내신용으로는 별 도움이 안 될지 몰라도, 정치를 제대로 이해하고 나아가 정치학의 최신동향을 이해하는데는 도움이 될 것이다.

 

①정치적(Political)인 것의 실제를 포착할 수 있도록 한다.

지금의 정치교육과정은 너무도 정적이다. 그러나 정치적인 것은 기본적으로 시끄러운 것이다. 아렌트가 말했듯이 정치는 노동, 작업, 행위 중 행위의 차원이며, 행위는 기본적으로 차이, 다양성의 드러냄에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서로의 차이와 다양성을 분출하는 속에서 공통적인 것을 찾아가는 역동적 과정으로서 정치. 이렇게 바라 볼 때 정치와 행정의 차이가 포착된다.

 

②민주주의를 구성적(Constructive)인 개념으로 포착할 수 있도록 한다.

민주주의는 어떤 제도나 법규로 환원될 수 없다. 현행 교과서는 민주주의를 몇몇 특정한 선거제도나 대의제로 환원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일종의 이념형이다. 민주주의를 어떤 제도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규범적 차원으로 파악함으로써 여러 나라의 정치, 혹은 한 나라의 과거와 현재를 민주화의 관점에서 비교할 수 있게 된다.

 

③독재와 전체주의를 가르치자.

현재 교과서는 독재, 전체주의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민주주의 만큼이나 독재, 전체주의, 파시즘의 이념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현재 우리 사회에 어떤 부분이 민주적이며 어떤 부분이 전체주의적인지 비판적으로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④정치 기구 등에 대한 정보는 직간접적인 경험 속에서 터득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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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정변증법 | 2009/06/18 23:12 | 트랙백 | 덧글(6)

교육 공공성 강화, 입시교육 철폐의 역설

이 사진은 헨리 지루의 "교육이론과 저항"의 이미지다. 이미 절판된 책이기 때문에 구입할 수 없는 점은 유감이다. 그러나 도서관 등에는 있으니 일독할만하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 그람시의 문화정치학, 알뛰세르의 구조주의를 망라하여 저항의 교육이론을 세우고자 한, 그리고 실제로 마이클 애플과 함께 미국의 진보적인 교육자들의 실천적 지침을 제공하고 있는 헨리 지루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결국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1) 알뛰세르, 부르디외 등 구조주의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학교가 이데올로기 기구라는 점은 분명하다.
2) 그러나 지배계급이 이데올로기 기구로 만들었다고 해서, 그것이 무조건 그렇게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3) 학교에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의 저항도 함께 작동하는 하나의 문화적 장이다.
4) 따라서 학교, 즉 공교육은 지배/피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가 충돌하는 역동으로 파악해야 하며, 바로 여기에 비판적 지식인으로서 교사의 역할이 있다.
5) 이 이데올로기는 단지 교과 내용에만 구현된 것이 아니라, 교육과정 자체, 교수방법 자체, 각종 잠재적 교육과정에 그야말로 "문화적"으로 스며들어 있으며, 따라서 학교에서 비판이론이 긴요하게 적용된다.

지루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다른 기회로 미루자. 그런데, 여기서 지루가 말하는 이데올로기적 역동의 장으로서 공교육이 정말 공평하게 계급간의 이데올로기가 대결을 벌리는 공정한 경기장이라고 보는 것은 아님을 유의해야 한다. 어디까지나 공교육은 교과내용은 물론 잠재적 교육과정에까지 지배이데올로기가 교묘하게 구조화되어 있는 지배기구다. 다만, 부르디외, 보울스&진티스처럼 어찌할 수 없을 정도의 지배기구인 것은 아니고 그 안에서 저항과 비판의 여지, 심지어는 피지배계급이 자신의 도구로 재전유할 가능성을 열어놓았을 뿐이다.

이 지점에서 최근 한국 진보진영이 자주 외치는 "입시철폐, 사교육철폐, 교육공공성강화"라는 슬로건이 몹시 눈에 걸린다. 특히 '교육공공성 강화'가 그렇다. 이건 좌파 입으로 외치기에는 참으로 민망스러운 구호다. 그동안 알뛰세르에서부터 지루, 애플에 이르기까지 좌파 교육학자들이 이구동성 외친 주장이 바로 "교육 공공성은 허위"였기 때문이다. 학교가 이데올로기 기구로 비판받는 것은 학교가 "공공성"을 가장하여 특수한 계급의 이익을 관철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육의 공공성이란 즉, 교육의 이데올로기 성이다. 이건 계급의 이익을 초월한 공동의 이익을 허위의식이라고 비판하는 좌파에게는 필연적인 결론이다.

좌파=사회주의=계획경제=공공부문강화로 이어지는 가족 유사성의 연쇄 덕분에 마침내 좌파=공공부문강화라는 잘못된 결론을 내린 것이 아닐까 하는 우려가 든다. 탈계급적이고 중립적인 공공성은 환상이다. 혹은 공공성이 강화되면 사회주의, 사사성이 강화되면 자본주의라는 생각은 좌파라기 보다는 전통 보수주의에 가깝다. 좌파는 공동체적 관점을 가진 자가 아니라 해방적 관점을 가진 자를 의미한다. 공공성의 강화가 도리어 생활세계의 식민화를 가져와서 강철새장을 엮어내는 결과를 가져옴을 우리는 너무도 많이 목격하였다. 게다가 그 새장은 중립적이지도 않다. 중립을 가장한 지배계급의 도구일 뿐. 어쩌면 지금 비판적 교육운동가가 해야 할 일은 교육 공공성의 환상을 해체하는 것이다. 공교육은 결코 중립적일수도, 공적일수도 없음을, 따라서 그저 받는 그런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비판하고 자기들의 무기로 재전유해야 하는 것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입시교육은 참으로 교묘한 역할을 했다. 그것은 교육공공성을 훼손했다. 그리하여 공교육의 기능을 왜곡했다. 그건 엄연한 사실이다. 문제는 그 결과가 누구에게 이득이 되었나 하는 것이다. 입시교육은 어떤 교육 내용도 모두 시험 문제풀이를 위한 기능적 수단으로 바꾸어 버린다. 반공교육도 그것이 시험점수의 수단이 될 경우 더 이상 반공교육이 되지 못한다. 학생들은 북한에 대한 문제가 나올때 기계적인 훈련의 결과 좋게 써진 것은 오답으로, 나쁘게 써진 것은 정답으로 간주한다. 그 이상의 진지한 생각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어떤 이데올로기 교육을 하더라도, 학생들은 그것을 단지 기계적 방식으로 정답찾는 소재로만 간주할 뿐, 진지하게 사려하지 않기 때문에, 즉 시험만 끝나면 다 잊어버리기 때문에, 결국 의식화 되지 않는다. 이데올로기는 실패한다. 이것이 객관식 입시교육이 격심해진 시대의 386세대가 그 이전 세대에 비해 자신들이 받은 반공교육(얼마나 집요하게 받았던가?)의 영향을 덜 받은 이유일수도 있다. 입시교육이 일종의 저항교육의 결과를 가져온 셈일까? 적어도 입시교육은 이데올로기 기구로서 공교육에 대한 초절정의 조롱이자 모욕이다. 이건 정말이지 지독한 역설이다.

그래서 입시교육을 교육운동이 극복해야 할 궁극적인 절대악으로 간주하는 모습은 때로는 이런 역설의 늪에 빠진다. 입시교육이 무너지고, 공교육이 원래 가지고 있는 기능을 제대로 발휘한다면, 그것은 또 어떤 모습이겠는가? 정상화된 공교육, 공공성이 강화된 공교육이 오히려 민중들의 의식을 제대로 마비시키는 더 무서운 도구가 아니겠는가? 

물론 나는 여기서 입시교육을 옹호하자는 것은 아니다. 입시교육의 반대말로 교육공공성 강화를 말하는 것의 위험성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입시교육의 진정한 폐해는 바로 "모든 것을 기능적 수단으로 바꾸어 버리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비판적, 성찰적 이성은 마비되고 도구적 이성의 전횡으로 모든 인간적인, 문화적인 것을 사물화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기능적, 도구적 사물화라는 측면에서는 "교육 공공성의 강화"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것이 문제다. 입시교육을  철폐한 뒤 우리가 획득할 교육의 상으로서 가치 중립적인 "공공재로서의 교육"을 내세우는 주장은 그래서 두렵다. "강철새장"이 해방의 이름으로 제시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다른 기능적, 도구적 교육에 불과한 것이 해방이라는 이름으로 강요될것이기 때문이다. 가치 중립적인 외양을 하고서.

그래서 나는 보다 가치 함축적인 "복지로서의 교육"이 좌파가 내세울 지향임을 주장한다. "복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말이며, 그 최종 판관은 그것을 수용하는 개별 행위자들이다. 행복은 남이 평가할수 있는것이 아니니. 그래서 이 블로그의 타이틀도 "행복한 교육"이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차차 더 펼쳐 보일 것이다. 

이글루스 가든 - 자유로운 아이들, 아름다운 교육을...

by 부정변증법 | 2008/10/01 10:20 | 교육에 대해 생각하기 | 트랙백(1) | 덧글(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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