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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강독 - 포이어바하에 대한 테제 3번

원문)
3

인간이 환경과 교육의 산물이며 따라서 인간의 변화는 환경과 교육의 변화라는 유물론의 학설은 인간이 환경을 변화시키며 교육자 자신이 교육받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따라서 이 학설은 사회를 두 부문―그 중 한부분은 다른 한 부분보다 더 우월하게 된다 ―으로 나눌 수밖에 없다. 환경의 변혁과 인간 활동 혹은 자기변혁의 일치는 오직 '혁명적 실천'으로서만 파악되고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The materialist doctrine that men are products of circumstances and upbringing, and that, therefore, changed men are products of changed circumstances and changed upbringing, forgets that it is men who change circumstances and that the educator must himself be educated. Hence this doctrine is bound to divide society into two parts, one of which is superior to society. The coincidence of the changing of circumstances and of human activity or self-change [Selbstveränderung] can be conceived and rationally understood only as revolutionary practice.

읽기) 여기서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하를 위시한 그 때 까지의 유물론의 공통된 결함을 다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개요는 테제2번과 동일하게 인간을 활동의 주체로 파악하지 못하고 다만 객체로, 수동적인 수용자로 파악했다는 점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이전까지의 유물론은 인간은 자신이 살고 있는 환경과 받아 온 교육(양육이라고 직역해야 하지만 양육, 훈육, 학습을 포괄하는 의미에서 교육으로 옮겼습니다)의 결과물로 보았습니다. 이건 사실 오늘날에도 많은 좌파들이 자주 빠지는 함정이며, 스탈린 시대 교과서의 '반영론(의식은 물질의 반영이다)'에서 극적으로 표현되기도 했습니다.

사실 여기서 마르크스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인간은 환경의 영향을 받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환경에 영향을 주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인간이 환경을 좌지우지 하는 것은 아니며, 다만 환경과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상호 변화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이 어떤 교육을 받았느냐에 따라 크게 영향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교육을 담당하는 교육자 또한 사람이며 그 과정에서 영향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망각하면 인간은 환경에 수동적으로 영향받고, 인간은 교육받은 대로 만들어진다는 그릇된 생각이 발생됩니다. 그렇다면 환경을 더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또 교육을 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지도한다는 전제적인 발상으로는 한 걸음 남은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과거 소비에트에서 마르크스의 사상을 마치 유물론인 것처럼 몰아 붙인 까닭이며, 변증법을 사유의 방법이 아니라 마치 자연의 존재법칙인 것처럼 호도한 까닭입니다. 이렇게 유물론적 측면이 기계적으로 강조될때 "법칙을 먼저 알고 있는" 지도자 동지의 자리가 마련되는 것입니다.

 마르크스의 인식론은 유물론이라기 보다는 유물론과 관념론의 지양이며, 그것은 바로 이미 정해진 외적 지식의 단순한 습득(유물론적 관점)과 자유 의지를 가지고 실제로 행하는 실천(관념론적 관점)의 결합입니다. 즉 테제1번에서 말했듯 인식론의 변혁적이고 능동적인 측면은 도리어 관념론에서 발전해왔기에 마르크스는 그것을 관념론의 것이라 하여 폐기하는 대신 보존하고, 다시 유물론의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측면과 결합하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리의 객관성은 인식 대상 그 자체, 혹은 인식 과정 혹은 방법론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론과 실천의 결합을 통해 현실 속에서 스스로 입증되어 나가는 데 있는 것입니다. 이는 공교롭게도 수십년 뒤 마르크스의 이 노트를 읽어 봤을 리 없는 미국의 철학자 존 듀이의 인식론과 일맥상통합니다. 듀이 역시 '철학의 재구성'과 '자연과 경험'에서 관념론적 입장과 유물론적 입장을 모두 비판하면서 사고와 실천의 결합으로서 '경험'을 진리의 기준으로 제시한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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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정변증법 | 2009/12/02 09:38 | 마르크스 읽기 | 트랙백 | 덧글(3)

마르크스 강독 - 포이어바하에 관한 테제 2번

정말 오랜만에 마르크스 강독을 올립니다. 요즘 너무 할 일과 읽을 거리가 많은 탓인지 마르크스 다시 읽기가 자꾸 뒤로 밀립니다. 어쩌면 이게 고전의 운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고전은 마치 언제 찾아도 그 자리에 있을 것 같은 오랜 친구처럼 느껴져서 그리 시급하게 느껴지지 않거든요. 하지만 때가 되면 반드시 다시 읽게되는 책, 그게 고전이겠죠. 이제 포이어바하에 관한 테제 2번을 읽어 보겠습니다.


원문)
2

인간의 사유에 객관적인 진리가 부여될 수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는 이론적인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인 문제이다. 인간은 자기 사유의 참됨을, 즉 현실성과 힘, 그의 사유의 차안성을 실천속에서 증명해야 한다. 실천에서 분리된 사유를 놓고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 하는 논쟁은 순전히 스콜라적인 문제이다.

The question whether objective truth can be attributed to human thinking is not a question of theory but is a practical question. Man must prove the truth — i.e. the reality and power, the this-sideness of his thinking in practice. The dispute over the reality or non-reality of thinking that is isolated from practice is a purely scholastic question.

읽기)
이 부분은 훗날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매우 선호했던 부분입니다. 그때 그들은 이 글을 "실천"이라는 부분에 강한 방점을 두어 읽었습니다. 이를 통해 지식인들을 비판하고 현실적인 투쟁을 외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실천을 지나치게 협소하게 파악하여 계급투쟁과 관련한 경제투쟁이나 정치투쟁을 강조한 오류를 범했습니다. 이 글이 '인식론'임을 유념해야 합니다. 그리고 제일 마지막 문장에서 '스콜라'를 대비시킴을 유념해야 합니다.

스콜라 철학은 100% 연역으로 구성된 철학입니다. 실체에 대한 정의로부터 출발하여 인간 만사 모든 것을 세밀하게 논리적으로 연역하는 체계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경향은 이후 독일 관념론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칸트의, 그리고 헤겔의 거대한 철학체계는 순전히 "곰곰히 따져도 말이됨", 즉 논리적인 정합성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이를 비판합니다. 그 거대한 체계가 아무리 꼼꼼하게 짜여 있어도 결국은 인간의 머리속에서 일어난 "사유"에 불과한 것이며, 그 사유가 참인지 거짓인지는 실제로 해 보아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마르크스가 덮어놓고 "실천"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유"는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사유는 "실제로 해 봄" 즉 실천을 염두에 두고 이루어져야 하며, 실천을 통해 검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마르크스의 인식론은 사실상 '이론수립-가설설정-경험적 증거로 검증'이라는 과학적 방법론을 채택하겠다는 선언입니다. 사회과학이 보편화된 오늘날에야 이게 너무 당연한 것이지만, 자연과학이 아니면 모두 철학적 사변에 의존했던 19세기에는 자연계를 대상이 아니라 인간계를 대사으로 과학적 방법으로 탐구한다는 것은 매우 생소한 아이디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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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정변증법 | 2009/11/30 10:47 | 마르크스 읽기 | 트랙백 | 덧글(0)

마르크스 원전 읽기 -경제학 철학 노트 (5)

원문) 인간은 그가 실천적으로도 이론적으로도 유(類)를, 다른 사물의 유와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의 유를 자신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뿐만아니라, 현재의 생동적인 유로서 자기 자신에게 관계한다는 점에서, 보편적인, 따라서 자유로운 존재로서 자기 자신에게 관계한다는점에서 하나의 유적 존재다.


읽기)이제 노동 과정에서 소외의 세번째 특징이 나타난다. 그런데 이 부분은 이 문헌 전체에서 헤겔 철학에 대해 장광설로 비판하고 있는절대지에 대한 부분과 더불어 가장 사변적이고 난해한 부분이다. 우선 유(Gattung. Genus)라는 용어부터 당혹스럽다. 이용어는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에서 기원한 용어다. 유(genus)는 몇몇 개념들을 포괄하는 상위 개념이 되면서도 그 고유한 속성을가지고 있는, 즉 다른 유와 구별될 수 있는 그런 개념이다. 유의 하위개념들이 종(specy)다. 즉 이런 저런 인종들이있으며, 이들을 포괄하는 인류가 있는 것이다. 인류는 한 사람이 다른 자연과 구별되는 가장 보편적인 범주다. 즉 갑돌이,을돌이를 추상하면 한국인, 일본인, 다시 추상하면 황인종, 백인종, 그리고 그것을 더 추상하면 인류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여기서 더 추상하면 그냥 동물이 된다. 따라서 여기서 유라고 함은 한 사람을 동물과 구별하도록 하는 가장 보편적인 특징을 지닌 그런 집합 혹은 그런 속성이 된다.


유적 존재라 함은 자신이 바로 그런 분류에 포함되고 있음을 의식하는 존재를 말한다. 포이어바흐는 오직 인간만이 자신이 인류임을 의식한다고 보았다. 즉, 인간만이 인간성 자체를 의식할수 있고, 이런저런 속성을 가졌기에 자신이 동물과 구별된다고 의식한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유적존재다. 사실 이 유적존재라는 용어는 이후형이상학적 개념으로 마르크스 자신에게 배격되며, 다시 사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으로는(다른 논문에서 밝히겠지만) 이유적존재로서 인간 개념을 포기한 것은 마르크스 이론의 큰 헛점을 남기게 된다.


원문)유적생활은 동물에게뿐 아니라 인간에게도 물질적으로 우선 인간이 비유기적 자연에 의해 생활한다는 것에서 성립하지만, 인간은동물보다 보편적이며, 그가 그것에 의해 생활하는 비유기적 자연의 범위도 더 보편적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식물, 동물, 암석,공기, 빛 등은 한편으로는 과학의 대상이며, 한편으로는 예술의 대상이다: 이들은 인간이 향유하고 소화하기 위해 제일 먼저 마련해두어야 하는 인간 정신의 비유기적 자연, 정신적인 생활수단이다. 이론적 관점에서 보면 이들은 인간의식의 일부분을 형성하며,실천적 관점에서 보면 이들은 인간의 생활과 활동의 일부분을 형성한다. 이러한 자연생산물이 식품, 연료, 의복, 주거 등의 어떤형식으로 나타나든 간에 인간은 물질적으로 이러한 자연생산물에 의해 생활한다. 인간의 보편성은 실천적으로 자연이 (ⅰ) 직접적인 생활수단인 한에서,(ⅱ) 인간의 생명활동의 소재와 대상과 도구인 한에서 자연 전체를 그의 비유기적 육체로 만드는 바로 그 보편성 속에서 나타난다.자연은 그 자체가 인간의 육체가 아닌 한 인간의 비유기적 신체다. 인간이 자연적 수단에 의해 살아간다는 것은 인간이 죽지 않기위해 끝없이 자연과의 상호작용 속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육체적·정신적 생활이 자연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인간 역시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에, 자연은 스스로에 의존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읽기) 이건 변증법적인 사유가 들어가 있어서 단답식 교육을 받은 우리가 이해하기 무척 어려운 문장이다. 먼저 비유기적 자연이라는 말은 그냥 물질이라고 옮겨도무방하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 살펴보자.선 유적 생활을 하기 위해서 존재는 자신을 보편적인 '유'로서 인식해야 함은 앞에서보았다. 그런데 이 인식은 자신의 '유'의 반대편, 즉 그 반정립을 통해서만 정립될 수 있다. 개별 존재 역시 즉자적 존재에서대자적 존재, 즉 "그저 있음"이 아니라 "무엇에 대하여 있음"이 될때 인식이 가능하듯이 보편적 존재, 즉 유적 존재 역시"무엇에 대하여 있음"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 "무엇" 역시 보편적이라야 함은 물론이다. 즉 나는 연필 한자루, 책상하나를 쥐고 있다. 나는 교감 아무개와 싸운다. 그런데 나는 내가 보다 보편적인 존재임을 안다. 나는 학자로서 문방구를사용하며, 교사로서 관리자와 싸운다. 더 보편적이 되면 나는 한국인으로서 한반도에 살며, 노동자로서 국가에 고용되어 있다.보다시피 주체의 보편성이 상승되면, 거기에 대상이 되는 것(혹은 그 부정)의 보편성도 상승된다. 여기까지는 아직 '종'의수준이다. 이제 '유'의 수준까지 가면  "나는 인류로서 자연에 살고 있다"수준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을 "인류"로 볼수 있는 것은 그가 접하는 각종 사물들을 총체적인 "자연"으로 보편화시킬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연을 두 가지 방식으로 상대한다. 하나는 자신의 직접적인 생존 수단으로, 즉 구체적인 식량, 도구 등등으로, 다른 하나는 보편적인 자연으로.


이보편적인 자연은 인간 "주체"와 관계를 맺는 전체적이고 보편적인 자연이다. 각종 물질은 이런저런 과정을 통해 주체 내부로들어오면 육체가 되며, 밖으로 나가면 자연이 된다. 이렇게 인간은 자신과 자연이 대립되었으면서도 동시에 통일되어 있음을 알며,궁극적으로 모두 자연임을 안다.


이거, 풀이 하는 게 아니라 더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 같은데, 이걸 변증법 abc로 다시 풀어보자.


1)A라는 존재가 있다. 그런데 이 존재는 그저 있는 것만으로는 존재가 아니다. 2)그리하여 이 존재는 자신의 대립물인 B를정립한다. 즉 부정이 일어난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서 A는 자신이 존재하기 위해 B라는 타자, 부정에 의존해야 하는 사항에처한다. 즉 소외가 일어났다. 3) 그러나 이 소외는 A가 자신과 B모두 그들을 모두 그 내부의 계기들로 포괄할수 있는 '알파벳'이라는 더 보편적인 존재의 부분임을 깨달으면서 해소된다. 이게 지양이다.물론 여기서 끝나는게 아니다. '알파벳'은 '한글'과 대립한다. 그리고 같은 과정을 통해 이 대립은 '문자'에 포함됨으로써해소된다... 등등.


이제 이걸 인간과 자연으로 가져가 보자.1) 나는 인류다. 인류는 혼자 뻘쭘히 인류가 아니라 다른 비유기적자연과 구별되는 한 인류다. 2) 그런데 나는 인류로 존재하기위해 저 비유기적자연에 의존해야 한다. 이로써 비유기적 자연은 나에게 대립물로, 낯선 것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비유기적 자연은나에게 흡수되면 육체가 되고, 내 육체는 밖으로 나가면 비유기적 자연이 된다. 그러니 나와 비유기적 자연은 모두 대자연의 순환의 한 고리씩인 것이다. 3)이리하여 인간은인류 역시 자연의 한 부분이며 외적 자연이라고 생각했던 비유기적 자연과 더불어 하나인 것이다. 이렇게 해서 소외가 해소된다.


아직도 이해가 안된다면 이렇게 생각해 보자. 한 인간은 자신의 대립물, 자신의 대상, 그가 상대하는 세계의 보편성의 수준만큼 보편적 인간이 된다. 그가 상대하는 의식하는 세계가, 이 사람, 저 사람, 이 물건, 저 물건인 사람과, 그가 상대하고 의식하는 세계가 자연계, 인류, 우주인 사람의수준은 다른 것이다. 더 나아가 자신이 바로 이 인류, 자연계의 불가분의 한 고리임을 인식하고 의식하는 인간은 어떨겠는가?인간은 유일하게 한 개체이자 동시에 이런 보편적 존재를 의식할 수 있는 동물이다.


원문)소외된 노동은 인간에게서 (1)자연을 소외시키고, (2)자기 자신, 인간 고유의 활동적 기능, 인간의 생명활동을 소외시킴으로써,인간에게서 유를 소외시킨다. 소외된 노동은 인간에게 유적 생활을 개인 생활의 수단으로 만든다. 첫째로 소외된 노동은 유적생활과개인생활을 소외시키고, 둘째로 추상 속에 있는 후자를 마찬가지로 추상화되고 소외된 형식 속에 있는 전자의 목적으로 삼는다. 그까닭은 첫째, 인간에게 노동, 생명활동, 생산적 생활 자체가 욕구, 육체적 생존을 유지하려는 욕구를 충족시키는 수단으로서만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생산적 생활은 유적 생활이다. 그것은 생활을 생성하는 생활이다. 생명활동의 방식 속에는 어떤 종의성격 전체, 그의 유적 성격이 놓여 있으며, 자유로운 의식적 활동은 인간의 유적 성격이다. 생활 자체는 생활의 수단으로서만나타난다.


읽기)그렇다면 소외된 노동이 어찌하여 인간을 유로부터 소외시킨다는 것일까? 우선 인간에게서 인류로서의 활동을 소외시킴으로써다. 이문단은 매우 복잡하게 기술되었지만 실은 아주 단순한 내용이다. 요약하면 이렇다. 인간은 활동한다. 인간의 활동에는 두 종류가있다. 하나는 개별 존재로서의 활동이며 다른 하나는 인류로서의 활동이다. 즉 개인적인 욕구와 충동을 충족시키는 활동, 그리고인류로서 자신의 유적 존재를 의식하며 하는 활동이다. 이 중 전자는 단지 생존하고 순간적인 욕구를 충족하는 활동이다. 따라서그때 그때의 활동이며 파편적인 활동이다.  후자는 인류의 생활방식 자체를 만들어가는 활동이다. 이 활동은 여러 파편적 활동을보편화하여 바라보는 활동이다. 노동은 단지 생존수단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방식도 생산하는 활동이다. 즉, 단지 먹이 획득이아니라 먹이 획득 방법을 만들어내고 적용하는 과정이 노동인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생존, 즉 생명유지를 위한 활동 속에서 이미노동이라는 자신의 유적 성격이 드러나는 존재다. 그러나 소외된 노동은 이런 활동을 단지 육체적 생존 유지의 수단으로 만들어버린다. 즉 이 속에서 인간은 자연, 외적 세계를 그때 그때의 생존 수단으로서만 접하게 된다. 이로써 인간은 노동을 하면서 점점자신을 "인류", "유적 존재"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이는 인간을 동물로 만든다는 것이다. 동물이 어쨌길래?


원문)동물은 자신의 생명활동과 직접적으로 하나다. 동물은 자신의 생명활동과 구별되지 않는다. 동물은 생명활동이다. 인간은 자신의생명활동 자체를 자신의 의욕과 의식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는 의식된 생명활동을 가진다. 인간이 직접적으로 그것에 융합되는 규정은없다. 의식된 생명활동은 인간을 동물적인 생명활동과 직접적으로 구별한다. 바로 이 때문에 인간은 하나의 유적 존재이다. 또는인간이 하나의 유적 존재이기 때문에 그는 의식적 존재일 뿐이며, 다시 말해 그의 고유한 생활은 그에게 대상이다. 바로 이 때문에그의 활동은 자유로운 활동이다. 소외된 노동은 이 관계를 전도시키고, 바로 인간은 의식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의 생명활동,자신의 존재의 본질을 단지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 만든다.


읽기) 마르크스는 동물과 인간의 결정적인 차이를 자기내 존재와 대자적 존재로 본다. 이는 나중에 하이데거와 사르트르에게 그대로 계승된다.하이데거는 오직 인간만(존재한다면 천사나 신도) 자연계의 대자적 존재라고 본다. 이 의미는 자신의 활동을 의식하는 존재, 자기자신을 의식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존재, 즉 자기 바깥으로 나가서 자기를 인식할수 있는 존재다. 동물은 본능적으로 생멸활동을하지만, 자신이 생명활동을 하고 있음을 알지 못한다. 즉 동물은 자신의 생명활동 그 자체다. (물론 이런 인간 규정은 최근,일부 영장류와 돌고래가 자아의식을 가지고 있음이 확인됨으로써 지지받기 어려워졌다. 하지만 이는 영장류와 돌고래를 사람 대접을하면 될 일이다). 이는 훗날 허버트 미드가 "I"와 "me"분립 이론을 수립하는 초석이 된다.  이제 "유적존재"라는 모호한 용어가 "생명활동을 의식하는 존재"로 "활동하는 자신을 의식하는 존재"로 보다 분명해진다. 이로써인간은 그의 활동, 그의 생활을 자신의 대상으로 삼을수 있는 존재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그의 활동, 그의 생활을 통제할수 있는 존재이며, 따라서 "자유로운 존재"다. 이런 의미를 알아야 엄격한 생활을 하던 고대 스파르타인이 자신들을"자유로운"존재라고 자부한 이유를 납득할수 있게 된다. 확실히 스파르타인은 충동과 욕망에 휘둘리는 그리고 그 충동과 욕망을의식하지 못하는 현대인들보다 자유로웠다.

그런데, 소외된 노동은 인간이 하루의 대부분을 원하지 않는 일을 할수밖에 없게 만들며, 그 이유가 겨우 "생존수단을 얻기위함"이다. 이로써 인간은 "생명활동"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끌려가게 된다. 그런데 인간은 의식적인 존재이기 때문에자신이 생존 수단을 얻기 위해 자신의 생명활동을 그 도구로 사용함을 안다. "목구멍이 포동청이다"라는 말을 하면서. 이건동물보다 곱절로 비참한 것이 아닐까? 일벌들이 자신의 "일함"을 의식한다면 어떻게 될까?

by 부정변증법 | 2008/10/30 12:23 | 마르크스 읽기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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