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 교육학

젊은 교사에게 드리는 편지: 머리말 (1)

젊은 교사에게 드리는 편지

머리말

그다지 품위 있는 말은 아니지만 대중적으로 흔히 사용되는 표현을 사용하려고 할 때 “시쳇말 한다.”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저의 16년 교사 경험에 대해 말해달라고 하면 저는 시쳇말로 “맨 땅에 헤딩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맨땅에 헤딩한다는 말이 무엇인지는 아마 다들 아실 겁니다. 이 말은 아무런 준비 없이, 그리고 어떤 충고나 지침, 그리고 도움 없이무작정 어떤 과업이나 책무를 감당해야 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건 제가 아무런 도움과 준비 없이 발령과 동시에 무작정교실에 투입되었고, 어떤 사전 지식도 기술의 전수도 없이 그냥 무작정 학생과 부대끼면서 닥치는 대로 교육이라 불리는 행위를해왔다는 뜻입니다.

생각해 보면 교육을 했다기 보다는 16년 동안 교실에서 그냥 허우적거렸던 것 같습니다. 그 과정에서 과연 가르치기나 하긴 했는지 의심스럽고, 또 부끄럽고 그렇습니다. 저를 잘 아는 동료교사들이나 제자들에게 이런 말은 필경 환상을 깨뜨리는 그런 말이 될 겁니다. 민망한 이야기지만 저는 나름 꽤능력있는 교사로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내가 허우적거리면서 맨땅에 헤딩했다니! 혹은 이 말은 저를 잘 모르는일반인들에게는 소름이 끼치는 이야기가 될런지도 모르겠습니다. 명색이 한 해에 수백 명의 청소년들에게 어쩌면 치명적일 수도 있는영향을 끼치는 교사가 아무런 준비도, 지침도, 조언도 없이 무작정 닥치는 대로 교실에서 허우적거리며 다녔다니 말입니다. 이게 얼마나 소름끼치는 말인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면 이걸 의사에게 적용시켜보면 됩니다. 만약 처음 병원에 부임하는 의사가 아무런 지침도 없이, 선배들의 조언이나 도움도 없이, 바로 단독으로 환자와 대면해서 각종 치료나 심지어는 수술까지 감당해야 한다면 사람들이 이런 상황을 방치했을까요? 아마 당장 난리가 났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어떤 의사가 16년 동안 그렇게 의사생활을 해 왔다고 고백한다면? 아마 병원장부터 의대학장, 보건장관까지 이어지는 큰 파문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일이없다는 것을 알기에, 의사들은 의대 6년으로도 모자라서 다시 5년의 고된 수련의 과정을 거친 뒤에야 비로소 단독으로 환자를상대한다는 것을 알기에 우리는 의사들에게 몸을 맡기는 것입니다.

사람을 다루는 직업이 아니라 사물을 다루는 직업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방금 자격증을 획득한 신출내기 기사가 대뜸 혼자 달려드는 그런 정비소에 자동차를 맡기지 않습니다. 그 어느 직종에서도 소정의 교육을 마쳤고 약간의 실습과 자격고사를 마치기가 무섭게 불쑥 실무를 맡기는 경우는 없습니다. 또한 실무를 맡은 뒤 그 분야 선배들로부터 체계적인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상태에서선배들과 같은 종류의 업무를 대뜸 들이대는 경우도 없습니다. 어느 직종에서나 신참자는 베테랑의 인도를 받아 업무에 친숙해지는 과정을 거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유독 교사는, 그렇게 중요하고 고결한 직업이니 “노동자”를 자처해서도 안 된다는 충고까지 듣는, 사람을 다루는 직업인,소위 백년지 대계를 다룬다는, 그리고 적어도 통계청 직업분류표 상에는 ‘전문직’이라고 명기된 교사는 신규교사가 발령을 받자마자 베테랑 교사와 동등한 책임, 자격, 권한을 가지고 아무런 준비 없이 불쑥 교실에 던져지는 것이 현실입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발령장 들고 학교에 찾아가서 착임계 쓰고, 그날 오후부터 바로 수업에 투입되었습니다. 그 때는 그러려니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병원이나 자동차 정비소에 비유해보니 이건 정말 아찔한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물론 그것이 선생님을 워낙 존중하는 유교적 전통의 흔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선생님을 워낙 존중하다보니 일단 선생님의 자격을 얻은이상 혼자서 충분히 교육적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바로 교실에 베테랑 등과 동등한 자격으로 투입한다고 좋게 볼 수도있겠습니다. 하지만 제 경험으로 볼 때 한국의 교육 정책과 시스템에서 교사에 대한 존중은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곳곳에 교사에 대한 멸시와 모욕의 장치가 도사리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신규교사를 곧장 투입하는 것도 그러한 멸시와 모욕의장치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신규교사를 교실에 곧장 투입한다고 해서 베테랑교사의 혹은 교감, 교장의 조언과 관여가 전혀 없는 것은아니었던 것입니다. 다만 교실 수업에 대해서만 선배, 교감, 교장의 조언과 관여가 없었을 뿐이었습니다. 정작 교실에서는 죽든 살든 알아서 하라고 내던져 두고는 엉뚱하게 각종 공문서를 작성하고, 각종 행정업무를 처리하고, 그 외 교실 청소, 질서지도,학생 복장 지도 따위에 대해서는 거의 잔소리라고 할 만큼 소위 조언과 관여가 빈번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교실에서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 학생들과의 관계는 어찌 풀어가야 하며, 예상되는 곤란은 무엇이며 어떻게 극복해야하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했습니다. 도리어 연구수업, 공개수업, 시범수업 등의 행사라도 있으면 젊은 저에게 미루었습니다. 그들의논리는 “대학 졸업한지 얼마 안 되었으니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것 아니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이 나한테는 매우해괴하게 들렸습니다. 그렇다면 교사는 대학 때 배운 것에서 아무것도 추가하지 않은 채 세월이 갈수록 점점 까먹어가는 존재란말입니까? 그런데 처음 교사가 된 1992년에 제 눈에 비친 선배교사들은 실제로 그런 존재였습니다. 그들은 ‘하찮은 수업따위’는 대충 진도만 맞추고, 그나마도 해가 갈수록 더욱 무성의하게 그리고 형편없이 하고, 그 대신 공문서 처리, 청소 감독,혹은 자습시간에 조용히 시키기, 운동장 행사 때 줄 잘 세우기 따위의 ‘거룩한 일’에 전념해야 교장, 교감에게 높은 평가를받는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교장은 저의 수업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고, 교실 상호작용에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설사 관심이 있었다 해도 저를 지원해줄 지적, 정신적 자원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명색이 한국 최고의 교원양성기관 출신이라는 서울사대 출신 교장인데도그랬습니다. 교장의 관심사는 교육청이 기한을 정한 공문서를 제 때 처리하는지, 혹은 전교조라도 가입하지 않았는지(당시에는 전교조에가입하는 것이 불법이던 시절이었습니다.)따위에나 관심을 가질 뿐이었습니다. 때로 그들이 교실에 관심을 가질 때가 있기도 했는데,유감스럽게도 그들의 교실 수업 판단 기준은 오직 하나 소란/조용 척도 뿐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상황에서 도대체 교사란 무엇인지, 대체 무엇을 하는 사람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 사람인지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없었습니다.

교사에 대한 표면적인 수사와 실상은 너무 달랐습니다. 표면적으로야 백년지 대계를 책임지는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수다스럽게 떠들었지만, 실상은 말단 행정직 노릇과 학생들에 대한 간수 노릇만 잘 하면 되는 그런 자리였던 것입니다. 말로는 입시교육이 아이들을 멍들게 하네 어쩌네 하지만(요즘은 아주 뻔뻔해져서 입시교육을 대 놓고 주장하는 판이니 더 말할 것도없습니다만), 정작 입시교육을 하지 않으면 비난받는 존재가 교사였습니다. 말로는 창의적 지식인, 전문직 어쩌고 했지만 실상은 늘하던 것, 늘 있던 것만 반복 수행해야 인정받는 곳이 학교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나이만 먹고 호방만 올라가면 그게 베테랑교사였고, 행정, 경영 분야의 진짜 전문가가 보면 아마츄어 수준에 불과한 거짓 공문, 거짓 보고서나 잘 작성하면 그게 유능한교사였습니다. 젊은 신임교사가 수업을 더 잘하고 학생들의 호응을 독차지 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기는 커녕 오히려 당연하게 생각하면서“나도 젊을 때는 그랬다. 너도 나이 들어 봐라.”라고 말하던 사람들이 소위 선배교사들이었습니다. 이들 선배교사들은 도대체교사로서 나이 먹어가는 것, 그렇게 교사로서 한 평생을 살아가는 것의 의미도 가치도 보여주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결심했습니다. 나이 들더라도 절대 저런 교사가 되지 않겠다고. 그리고 나중에 후배 교사들에게 베테랑으로서 많은 지원, 격려, 조언을 주고, 절대 맨땅에 헤딩하지 않게 하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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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정변증법 | 2009/08/22 16:28 | 젊은 교사에게 드리는 편지 | 트랙백 | 덧글(4)

사회과 교육과정에 대한 간단한 비판(정치 영역)

그 동안 제가 너무 많은 일을 하느라 거의 포스팅을 하지 못했습니다. 거의 일주일째 새 포스팅이 없는데도 늘 100회 이상의 히트수가 나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오늘은 그 동안 했던 일들의 작은 결실중 하나를 공개합니다. 사실 저는 요즘 기존의 제도권 교과서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은 버렸습니다. 그건 그저 저의 물질적 기반을 위해 해 둘 뿐입니다(돈벌이의 어려운 표현^^) 저의 실제 꿈은 제도권 교과서를 대체하는 새로운 교과서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제도권 교육과정에 대한 문제제기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전교조가 이런 일을 할 수 있기를 늘 기다려 왔지만, 전교조 기다리다 내가 늙어 죽겠습니다. 그래서 전교조는 저 뒤에 남아 있으라 하고 뜻 맡는 몇몇 분들과 먼저 튀어 나갑니다.

1. 정 치

 

1.1. 제도권 교육과정 분석과 문제제기

 

개정 7차 교육과정에서는 ‘정치’ 과목을 1) 정치 현상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지식을 습득하고, 2) 이를 바탕으로 공동체 생활의 원리를 파악하며, 3) 정치 생활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민주 시민의 자질을 함양하기 위해 개설된 과목이라고 명기하고 있다.

결국 “정치현상에 대한 학문적 지식과 정치현상에 대한 고찰(탐구)→ 정보 획득, 탐구 능력 및 의사결정 능력 함양→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민주 시민의 태도.” 로 요약되며, 능동적 참여의 태도는 명백히 종속변인이며 정치에 대한 학문적 지식과 인지영역이 독립변인이 된다.

그렇다면 어떤 지식? 다음의 표를 보면 정치학의 개론서적 지식과 정치현상에 대한 정보습득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 구성표를 보면 마치 이러한 내용들이 투입되면 민주시민으로서 능동적 참여의 태도가 산출될 것 같이 느껴진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여기에서 우리의 두 가지 문제의식이 출발한다.

영 역

내용 요소

민주 정치의 발전

정치의 의미와 기능/ 정치적 권위와 정통성/ 민주 정치의 발전 과정 민주주의의 이념과 유형/ 정치 문화와 정치 사회화/우리나라 민주 정치의 특성과 과제

국민의 권리와 의무

헌법의 정치적 의의/ 국민 주권과 입헌주의의 원리/ 우리나라 헌법의 기본 원리/ 국민의 정치적 권리의 내용과 한계/우리나라 국민의 정치적 의무/국민 주권 실현의 과제

국가의 조직과 통치

국가와 정부/우리나라의 정부 형태/국회와 입법부/대통령과 행정부/법원과 사법부/민주주의와 지방 자치의 발전 과제

정치 과정과 참여

정치 과정/정치 참여의 의의와 유형/이익 집단과 시민 단체의 정치 참여/정당과 정당 정치/선거와 투표/여론/우리나라 정치 참여의 현실과 과제

국제 사회와 정치

국제 사회의 특성과 변화/국제 사회의 행위 주체/국제 사회의 협력과 갈등 /국제 사회의 여러 문제/우리나라의 외교 정책과 과제/민족 통일의 과제

 

Q1 여기에 투입되는 지식과 정보는 과연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민주시민의 태도를 길러낼 수 있는 원재료로서 정당한 것들인가?

 

어떤 지식과 정보도 일의적인 상태로 투입될 경우에는 능동적 참여가 아니라 순응적 태도만을 만들 뿐이다. 특히 정치학에서 사용된 개념들은 일의적인 경우가 거의 없다. 그런데 교과서에서는 이것들을 철저히 일의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를테면 국민주권 같은 매우 다의적이고 역동적인 개념은 교묘하게 선거절차 속으로 축소되고 고정되고 있다. 이것은 교묘한 이데올로기 장치로 보아야 한다. 이런 교육을 받으면 학생들은 정치를 일의적 개념들로 구성된 객관물로 바라보게 된다. 법칙에 의해 움직이는 객관물에 대해 시민이 할 수 있는 일은 그것에 거스르지 않는 것 뿐이다.

 

Q2 보다 근본적으로 능동적 참여 경험(간접적인 경험이라도) 없이 인지적인 조작만으로 민주시민의 태도가 길러질 수 있는가?

  

결국 이런 상태에서 학생들이 습득하게 될 참여 방법은 법에 호소하는 것, 그리고 선거에 참여하거나 합법적인 단체에 가입하고 진정하는 것 외에는 남지 않는다. 정권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 같은 역동적인 참여는 애초에 배제되고 있다.

 

Q3. 정치의 주체는 시민 뿐인가?

 

이건 보다 심각한 물음이다. 지금 이 교육과정은 정치의 주체로서 사회계약의 테두리 내에 있는 사람들만을 상정하고 있다. 이는 명백히 홉스 -로크- 루소의 전통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홉스는 사회계약 외부의 사람들을 ‘다중’이라 부르며 두려워했다. 그러나 그들이 왜 계약에서 배제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이 교과서의 ‘시민’이라는 말 속에는 다분히 질서와 계약에 순응하기로 서약한 사람들의 함의를 담고 있다. 그것을 거부하여 스스로 외부자가 되거나 배제되고 소외된 사람들은 그렇다면 어떤 권리의 주체도 아닌가? 아감벤, 랑시에르 등은 오히려 그들에게서 정치적인 것을 찾고 있지 않은가?

 

Q4. 국가는 갈등 없이 움직이는 시계장치인가?

 

저 교과서에서 상정하고 있는 정치 모델에서 국가기구는 매우 중립적이다. 어떤 것이 투입되느냐에 따라 산출이 결정되며 국가 자체는 순수 객관적 기계장치같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국가가 그렇게 보이는 것 자체가 실상은 갈등속의 역동적 균형이 아닐까? 그리고 이 갈등 속에서 국가 기구는 그야말로 통치기구로 작동하는 것이 아닐까?

 

1.2. 무엇을 할 것인가?

 

기존의 교과서와 동일한 수준의 규모와 내용범위를 담고 있는 형태이면서, 그 구성과 내용을 다음과 같이 대체하는 새로운 교과서를 개발한다. 이 교과서는 내신용으로는 별 도움이 안 될지 몰라도, 정치를 제대로 이해하고 나아가 정치학의 최신동향을 이해하는데는 도움이 될 것이다.

 

①정치적(Political)인 것의 실제를 포착할 수 있도록 한다.

지금의 정치교육과정은 너무도 정적이다. 그러나 정치적인 것은 기본적으로 시끄러운 것이다. 아렌트가 말했듯이 정치는 노동, 작업, 행위 중 행위의 차원이며, 행위는 기본적으로 차이, 다양성의 드러냄에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서로의 차이와 다양성을 분출하는 속에서 공통적인 것을 찾아가는 역동적 과정으로서 정치. 이렇게 바라 볼 때 정치와 행정의 차이가 포착된다.

 

②민주주의를 구성적(Constructive)인 개념으로 포착할 수 있도록 한다.

민주주의는 어떤 제도나 법규로 환원될 수 없다. 현행 교과서는 민주주의를 몇몇 특정한 선거제도나 대의제로 환원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일종의 이념형이다. 민주주의를 어떤 제도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규범적 차원으로 파악함으로써 여러 나라의 정치, 혹은 한 나라의 과거와 현재를 민주화의 관점에서 비교할 수 있게 된다.

 

③독재와 전체주의를 가르치자.

현재 교과서는 독재, 전체주의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민주주의 만큼이나 독재, 전체주의, 파시즘의 이념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현재 우리 사회에 어떤 부분이 민주적이며 어떤 부분이 전체주의적인지 비판적으로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④정치 기구 등에 대한 정보는 직간접적인 경험 속에서 터득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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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정변증법 | 2009/06/18 23:12 | 트랙백 | 덧글(6)

진보진영은 '사교육 탓'을 넘어야 한다

 

 

지난 포스팅에서 저 빈칸의 ?들 속에 학업성취의 가장 중요한 변인들이 숨어 있을 것이며, 그것을 찾는 것이 교육학자, 사회학자의 과제일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교육학자, 사회학자들이 게으름뱅이가 아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는 많은 이론들이 나와 있다. 그 중 가장 흔하게 거론되는 것이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와 학업성취도의 관계에 대한 연구들이다.

그러나 사회경제적 지위와 학업성취도가 상당한 상관관계를 보여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메카니즘을 밝히지 않는 한 분석적 가치도 적을 뿐 아니라,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도 않는다. 사회경제적 지위가 비슷한 정도의 상류층 학생들 간에도 상당한 수준의 학업성취도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이에 삽입되는 매개변인이 사교육이다. 다음의 보도 내용이 그 가장 전형적인 주장이다.


....권영길
민주노동당 의원은 24일 서울 11개 지역교육청의 과목별 기초학력 미달 비율과 무료급식 지원자 비율의 상관관계를 분석해 보니 상관계수가 평균 0.75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특히 사교육 의존도가 높은 영어와 수학의 경우, 학년이 올라갈수록 상관계수가 커지는 것으로 분석됐다. 권영길 의원은 “이번 조사 결과는 학년이 올라갈수록 소득에 따른 교육격차가 공고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며 “저소득층에 대한 집중 지원이 교육격차 해소의 첫 걸음이라는 것이 다시 한 번 확인된 셈”이라고 말했다.....(한겨레, 2월 24일)


이 주장을 따라가게 되면 다음과 같은 모형을 얻게 된다.

 

 

 

이게 진보진영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모형이다. 한마디로 부잣집이 자녀 교육에 더 많은 투자를 하며, 특히 많은 사교육을 하기 때문에 학업성취도가 높다는 것이다. 이번 민주노동당의 발표도, 진보신당의 논평도 다 이런 취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물론 학업성취도 격차를 교사들의 노력부족으로 몰아가면서 교원평가를 강행하려는 안병만 장관의 단순무식한 논리에 대해 학업성취도는 SES에서 결정난다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주장이 도리어 신자유주의를 도와준다는 것이다. 즉, 안병만은 병맛을 만들수 있어도, 이주호에게는 얼씨구나 하며 어시스트를 해준 격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형적인 우파들은 학업성취도를 순전히 개인의 노력탓으로 보는 자유주의를 견지하겠지만, 신자유주의는 빈부차가 학력차로 나타난다는 좌파들의 견해를 거부하지 않고 공유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가 괜히 '신'이 아니다. 이주호는 2004년부터 시종일관 "빈부교육격차 해소, 교육평등을 위해 평준화를 해체해야 한다."는 역설을 주장하고 다닌 인물이다. 아마, 그들은 이 모형을 거부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거침없이 명제를 펼쳐나갈 것이다.

 

1. 부유층은 사교육비를 투자하기 때문에 자녀가 성적이 높다.

2. 빈곤층은 사교육비를 투자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녀 성적이 낮다.

3. 따라서 평등의 관점에서 빈곤층도 부유층 만큼 사교육비를 투자할 수 있게 해야한다.

4. 그 방법은 교사들의 노동을 강화하여 빈곤층이 학교에서 학원 다니는 효과를 얻게 하는 것이다.

5. 교사들의 노동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학교간, 그리고 학교와 학원 사이의 경쟁을 조장해야 한다.

 

이 명제들 중 1,2 번은 전통적인 좌파의 주장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자연스럽게 4,5번을 도출해 내는 것이다. 이게 신자유주의의 무서움이다. 이걸 반박하다 보면 좌파는 자가당착에 빠지게 된다. 부유층이 사교육 등 더 많은 교육투자를 하기 때문에 빈곤층이 뒤처지지 않게 정책적 뒷받침을 하라는 요구를 줄기차게 하면서도 이른바 공교육 강화방안을 통해 학교를 학교+학원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정책은 반대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좌파는 1,2번의 전제를 고집해서는 안된다.


사실 SES, 사교육 가설은 경험적으로 타당하지 않은 가설임이 여러차례 증명되었다. 고집불통 한국 학부모들은 잘 믿지 않지만, 한국교육개발원에서 김양분 이라는 연구원이 조사한 결과들만 훑어봐도 사교육이 성적을 올린다는 것은 그리 신뢰할만하지 못한 속설에 불과하다. 특히 사교육 효과는 상위권 학생들의 경우 더욱 의미 없어진다.


아래의 그림을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이 그림은 말도 많고 탈도 많던 김광억 외(2004)의 ‘누가 서울대에 들어오는가?’에 나오는 강남지역 학생들의 서울평균 대비 서울대 입학 비율이다.

85년부터 강남지역 학생들은 서울지역 평균보다 1.5배~2배 서울대학에 더 많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비중은 85년과 87년에 절정을 이루었다가, 93년을 계기로 조금씩 내려앉고 있다. 그러나 어느 정도 범위 내에서 항상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87년은 사교육이 절대적으로 금지되었던 시절이다. 그 시절에는 사교육을 받으면 퇴학을 당하고, 학원이라고는 사대문 안에 가야 재수생 학원이 있었다. 93년은 사교육의 고삐가 풀리기 시작한 해다. 그때부터 속셈학원이란 이름을 빙자한 보습학원들이 퍼지기 시작했다. 따라서 만약 사교육원인이라면 강남지역의 서울대 입학 비율은 93년을 계기로 비약적으로 증가했어야 했다. 그러나 학원이야 있건 없건 그 비율은 큰 차이가 없고, 도리어 학원이 없던 시절에 더 높기까지 하다. (물론 80년대에도 대학생 몰래 과외가 성행하지 않았느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지만, 과외받는 학생들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고, 그것도 서울대를 노리는 학생들 보다는 좀 처지는 학생들 쪽이 많았다.)

 

 

사실 SES가 높은 집단이 서울대에 입학하는 비율이 점점 높아지는 것은 사실이다. 아래 그림을 보면 고소득직군 아버지를 둔 학생이 서울대에 입학하는 비율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앞의 강남의 사례를 보았듯이 그게 꼭 사교육 때문만은 아니다. 그렇다고 사교육이 전혀 효과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아무래도 학교공부에 조금이라도 +@를 하는 것이니 성적을 깎아먹기야 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 기울기가 완만할 것이란 의미다.

 

 

사실 사회현상이란 무 자르듯이 어떤 변인 한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경제학, 경영학자들은 그런 만행을 잘 저지른다. 노동운동가나 좌파정치인들도 이런 오류를 자주 범한다. 하지만, 사회학자, 인류학자는 훨씬 더 신중하다. 위의 그래프를 설명할 수 있는 가설도 여러 개를 세울 수 있다. 그리고 이 결과는 이 가설들의 상호작용으로 일어난 것으로 볼 것이다. 그러면서 이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또 다른 가설들을 탐색할 것이다. 요컨대 사회학에서는 새 이론이 나오면 옛 이론을 논박하지 않는다. 다만 그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측면으로 첨가된다(바로 이게 얼른 봐서는 잘 구별되지 않는, 사회학이론과 사회철학의 차이다. 사회학자는 논박에 관심이 없다.)
 

1. 과외금지 해제로 고소득직군에서 자녀에게 사교육을 시켰다.

2. 문민정부의 등장으로 고소득직군이 자녀의 학력과 출세의 상관관계가 더 높아질 것으로 기대했다.

3. 민주화, 개방화, 그리고 지식정보화로 인해 전문직의 수 자체가 증가하였고, 교육받은 엘리트들이 고소득직군으로 대거 진입하였다.

 

그렇다면 사교육 말고도 SES가 높은 가정의 어떤 특성들이 학생들의 학업 성취도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에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진보진영은 사교육이 아니라 이런 특성들의 혜택을 빈곤층 자녀도 누릴수 있도록 정책을 펴야 한다. 특히 대지주, 부동산 부자, 기업 소유자로 대표되던 부유층에는 없고, 93년부터 그 비중이 늘어난 지식노동자, 전문직종사자에게는 있는 그 무엇을 찾아야 한다. 

 

바로 여기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변인이 동기(motivation)다. 동기는 행동을 촉발하며, 행동을 지속시키며, 행동의 강렬함을 결정하는 심리적 기제다. 동기는 인간을 의지를 가진 존재, 의욕하는 존재로 본다면 반드시 전제해야 하는 전제다. 이는 기계론적 인간관을 거부한다는 윤리적 의미에서 뿐 아니라, 실제 심리학과 생리학의 과학적 발견결과와도 일치하는 이론이다. 반면 경쟁을 붙이면 공부 잘 한다는 논리는 인간을 단순한 자극-반응의 기계로 보는 매우 위험한 인간관에 기초해 있다. 인간은 객관적 상황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상황이 어떻든 간에 스스로 하고자 할때 한다. 그리고 스스로 하고자 해서 할 때 그 결과가 가장 훌륭함은 당연한 것이다. 따라서 학업성취도에 대한 모형은 ‘동기(학습동기)’를 중심으로 재편되어야 한다.

(이후부터는 연구 시간이 필요합니다.^^ 오래 기다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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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정변증법 | 2009/02/25 19:59 | 교육에 대해 생각하기 | 트랙백 | 덧글(28)

미국 교육개혁 논쟁사를 읽으며

다이안 래비치의 '미국개혁논쟁사'를 읽고 있다. 이 제목은 내가 멋대로 의역한 것이고, 원래 제목은 Left Back: battles over school reform인가 그렇다.
 
영어로 된 400쪽이 넘는, 그것도 글자도 깨알같은 책을 읽자니 좀체 진도가 나가지 않지만 뭔가 가닥이 잡혀가는 느낌은 든다. 미국이 100년 남짓한 공교육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치열한 논쟁을 지금까지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인상적이었다.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교육의 의미, 나아갈 바에 대해 이렇게 치열하고 근본적인 논쟁이 없었다. 심지어 전교조 조차 교육의 의미, 상, 지향점 등을 놓고 논쟁하지 않았다. 아직 다 읽지는 않았지만 몇가지 유용한 정보를 얻었다.

1) 미국은 공교육이 도입되는 순간부터 이미 논쟁에 휘말렸으며, 이 논쟁은 100년 내내 이어져서 전투라 불릴 정도로 치열했다는 것이다.

2최초의 쟁점은 교육권이 부모와 지역사회에게 있느냐, 아니면 사회, 즉 국가(주)에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처럼 어느날 갑자기 일부 집단이 "교육수요자"라는 말을 쓴다고 해서 그게 무비판적으로 사용되는 그런 풍토가 아니었다. 만약 미국이었다면 단번에 학부모는 공교육의 수요자가 아니며, 공교육은 학부모가 아니라 사회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반론이 튀어나오고, 다시 일대 논란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래서 비록 부시 8년 이래 미국의 공교육이 세계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지만, 언제든지 다시 재건할수 있는 여력이 있는 것이다.

2) 두번째 쟁점은 교육이 개인의 발달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사회의 개선을 위한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보수와 진보주의 교육학이 갈렸다. 진보주의 교육학은 교육은 단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개선을 위한 참여라는 점을 명백히 했다. 여기에는 존 듀이의 강력한 논변이 그 이론적 기반이 되었다.

3) 그런데 이 진보주의 교육학이 도리어 각종 계량적 교육평가, 심리검사 등의 원천이 되었다. 교육이 사회의 개선에 기여하려면 그 효과가 측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보수주의에서 교육은 일종의 신비의 아우라를 가지고 있는 활동이었기에 "어디 감히 교육을 측정해?"하는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고전의 가치를 어떻게 수치화 하겠는가? 이런 식의 논변이 보수적인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진보주의자들은 고전이나 전통이 특별한 자격을 가지지 않으며, 모든 것은 사회에 얼마나 기여하는가를 놓고 가치를 평가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지점이 현재 신자유주의 교육개혁과 맡물려서 아주 묘한 상황을 만들고 있다. 결국 문제는 사회의 개선을 "부의 증대"로 볼것이냐, "자유의 증대"로 볼것이냐에 따라 갈라지게 된다. 교육이 사회의 부의 증대에 기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진보적이면서 우파가 되는 것이고, 교육이 사회의 자유의 증대에 기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진보적이면서 좌파가 되는 것이다. 좌우 스펙트럼과 진보보수 스펙트럼은 이렇게 다른 차원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교과를 통해 사회의 부를 증대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보수우파가 되고, 전통적인 교과를 통해 사회의 자유를 증대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면 보수좌파가 되는 것이다. 이 스펙트럼들에 대해서는 추후 다시 논의하겠다. 

4) 그런데 교수방법에 가서는 엉뚱하게 양 진영이 갈렸다. 사회에 교육이 기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진보주의자들은 도리어 교수학습 방법에서는 학생 개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학생중심 교육을 주장한다. 반면에 교육은 개인의 성공을 위한 것이라 주장하는 보수주의자들은 도리어 교수학습 방법에서는 집단적이고 획일적인 교사중심 교육을 주장한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혼돈이 일어난다. 학생중심 교육을 주장하는 진보주의교육학은 따라서 교사들의 고유한 권위를 부정하고, 교육과정과 내용을 교사의 자의에 맡겨서는 안되며, 사회적으로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개별 학교, 개별 교사에 대해 억압적인 모습을 보인다. 반면 보수주의교육학은 고전의 가치는 엄한 스승 아래서 배울수 있는 것이라 보기 때문에 교사의 권위를 높이고, 개별 학교의 선택을 존중한다. 이 복잡한 그물망에 대해서도 추후 다시 논의하겠다.

어쨌든 이 스펙트럼의 교차 속에서 오늘날 한국 교육의 문제에 대해 논의할수 있는 기본적인 재료는 충분히 얻을수 있었다. 이 재료들을 통해 이제 이념형을 구상하고 분석하는 과제가 남았다.

이글루스 가든 - 자유로운 아이들, 아름다운 교육을...

by 부정변증법 | 2008/12/17 13:55 | 교육에 대해 생각하기 | 트랙백 | 덧글(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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