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 교육철학

정치경제적 진보, 교육의 진보

이전 포스팅에서 정치적으로 좌우의 스펙트럼과 교육의 진보보수 스펙트럼이 중첩되면서 여러가지 모순된 입장들을 만들게 되고, 그 입장들간의 논쟁이 100년동안 끊임없이 이어져 온 것이 미국 교육의 역사이자 아직 그들이 죽었다고 선언할 수 없는 저력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좌우, 진보보수가 필요 이상의 용어상의 혼란을 가져오는 것 같아서 둘 다 진보보수로 표현하되, 앞에 정치경제, 교육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로 용어를 수정한다.

정치경제상의 진보의 의미는 명확하다. 그것은 경제적인 평등, 그리고 정치적인 자유와 연결된다. 진보주의자들은 소득과 시장기회가 보다 평등하게 분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정부나 제도는 거리의 정치, 즉 민간기구나 비제도권에게 보다 많은 발언권과 통제권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정치경제상의 보수는 소득과 시장기회는 시장 자율에 맡겨야 하며, 정부나 제도는 권위를 가져야 하며, 거리정치는 가능한한 자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또 다시 중첩이 나타난다.

진보주의자는 시장의 영역에서는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정치행정의 영역에서는 자유를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보수주의자는 시장의 영역에서는 자유를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정치행정의 영역에서는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보주의자는 시장에 대해 법치를 외치고, 보수주의자는 거리에 대해 법치를 외친다. 진보주의자는 거리에서 자유를 외치고, 보수주의자는 시장에서 자유를 외친다. 최근에는 생태문제도 여기에 중요한 변수로 집어넣어야 하지만, 이 역시 결국 시장의 규제냐 자유냐, 민간생태운동의 거리의 목소리를 수용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되기 때문에 잘 포개어질수 있는 부분이다.

그런데, 여기에 가치문화의 문제가 개입되자 문제가 복잡해진다. 도덕의 문제, 종교의 문제, 전통과 취향의 문제 등이 그것이다. 공동체의 도덕과 관습, 전통, 그리고 고전예술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 것에 동의하면 그것은 보수가 된다. 반면에 새로운 것, 파격적인 것, 그리고 공동체의 도덕보다는 개인의 결정권을 더 중요시 한다. 예컨대 가족윤리, 생명윤리에 대해 보수는 엄격하고 진보는 분방하다. 보수는 동성애에 부정적이고 진보는 동성애에 개방적이다. 취향에서도 보수는 고전을 선호하고 진보는 대중예술이나 아방가르드를 선호한다. 흔히 이는 아카데미 취향이라 불리는 론 하워드 류의 영화와 팀버튼 류의 영화로 선명하게 비교될수 있다. 대개는 정치경제적 진보와 가치문화적 진보, 정치경제적 보수와 가치문화적 보수는 나란히 간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는 점에서 여러 특이점들이 발생한다.

미국의 신자유주의자들은 바로 이 특이점들을 공략했다. 그들은 정치경제적으로 진보적이거나 중도적인 사람들 중에서도 상당수가 진보주의자들의 도덕적 자유분방함과 가족주의, 기독교 신앙에 대한 상대주의를 우려하고 있음을 적절히 이용했다. 레이건이나 부시가 압도적으로 당선된 것은 바로 이런 가치문화적 호소력을 통해서였다. 그들은 복지제도가 국고를 낭비한다거나 좌파정책이라거나 하지 않고, 그 대신 개인의 책임과 가족과 지역사회의 책임이라는 전통적인 미덕을 손상시킨다고 메시아적인 열광을 담아 연설했다. 그 사이에 잠시 클린턴의 약진이 있었지만, 이 역시 어떤 문화가치적 대안이라기 보다는 걸프전쟁과 경제난의 여파에 편승한 면이 크다. 오바마의 약진은 경제난에 편승한 면이 있기는 하지만 정치경제적 진보가 문화가치적 보수를 아울러내면서 역으로 보수진영의 균열을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중요한 승리다.

교육은 가치문화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이런 흐름에서 자유롭지 않다.

진보적인 교육자들은 당연히 교육의 결과 사회가 개선되기를 즉, 교육이 정치경제적 진보에 기여하기를 희망한다. 반면 보수적인 교육자들은 교육이 그 본연의 가치로서 존중받기를 희망한다. 그런데 그 결과물은 개인적이다. 진보적인 교육자들은 오래된 전승, 전통, 학문에 기반한 엄격한 교육이 아니라 학생들의 필요와 흥미에 기반한 자유로운 교육을 꿈꾼다. 반면 보수적인 교육자들은 전승, 전통, 학문을 엄격한 위계와 예절 아래에서 학생들이 전수받기를 희망한다. 그런데, 진보적인 교육자들은 학생들의 필요와 흥미를 강조하는 대가로 학교, 공동체, 그리고 교사의 권위를 부정한다. 학생들의 필요와 흥미는 전문가가 개발한 척도에 의해 조사되어야 하며, 개별 교사는 그것에 복종해야 한다. 또 교육의 최종 목적이 정치경제적인 진보이기 때문에 교사는 자신이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진보를 위해 요구되는 그런 교육을 해야 한다. 따라서 진보적인 교육은 개별 교사들에게는 억압적인 교육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진보주의 교육학이 전성기를 이루었던 1930년대 미국에서는 실제 그런 일이 일어났다. 오늘날 계량화, 수치화에 기반한 교육은 마치 우파적인 것으로 간주되지만, 그러한 교육통계학의 태두라 할수 있는 터만, 쏘스틴 등은 정치적으로 좌파였다. 여기에 긴 시간 고민하며 풀어야 할 난맥상이 있다.

반면 보수적인 교육자들은 오래된 전승, 전통, 학문을 중요시 하기 때문에 개별 교사들의 숙련과 경험을 매우 중요시 한다. 이런 고결한 가치들은 매뉴얼을 본다고 해서 뚝딱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오랜 수련과 연마의 결과이며, 그런 결과를 담고 있는 교사들은 고결한 모범이다. 따라서 학생들은 교사를 존경하고 무조건 따라야 하며, 교사들의 자율권은 존중되어야 한다. 그리고 교육의 결과는 사회의 진보가 아니라 개인의 성취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지역사회 수준을 넘어선 제도나 정부의 간섭은 최소화되어야 한다. 따라서 개별 교사들에게는 보수주의 교육이 훨씬 더 친화력이 있고 유리하게 느껴진다. 이들은 얼마든지 정치경제적으로 진보적이 될수 있다. 이들은 전통, 전승, 학문적 교과내용들을 학생들이 획득해야 할 일종의 자원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이 자원을 평등하게 분배하는 것, 즉 가난한 학생들에게도 인문교육의 기회를 확대하는 것은 정치적으로는 진보적인 것이다. 이들은 가난한 학생들을 엄히 훈육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이들의 계급 상승을 돕는 행위라고 충분히 해석할수 있다.

따라서 교사는 정치경제적으로는 진보적이면서 교실에서는 보수적인 교사가 될수 있으며, 정치경제적으로 보수적이면서 교실에서는 진보적인 교사가 될수 있다. 이것은 전혀 모순이 아니다. 이런 다양한 중첩된 교육철학들이 엉켜 있는 곳이 교육운동단체이며, 여기에서 백가쟁명이 일어나서 교육의 발전이 있는 것이다. 전교조에게 부족했던 것은 바로 이것이며, "진보적 교육"의 개념을 "정치경제적 진보"와 기계적으로 결합하려는 동일성의 압력에 굴복했다는 것이다.

이글루스 가든 - 자유로운 아이들, 아름다운 교육을...

by 부정변증법 | 2008/12/20 12:03 | 교육에 대해 생각하기 | 트랙백 | 덧글(4)

교육철학의 여러 관점들과 교과서

교육철학의 여러 관점과 교과서

 

 

1. 교육 철학과 교과서

 

알프레드 노쓰 화이트가 말했듯이 일반적인 관념(IDEA)는 그 모습을 전체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특수한 표현, 특수한 상황과 결합하여 나타난다. 그 특수한 표현과 상황 뒤에는 그 배후로서의 관념이 도도히 흐르고 있지만, 그것은 무의식적이고, 그것을 밝혀내거나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철학이란 바로 이 모든 특수성의 배후에 있는 일반적인 관념을 밝히고자 하는 사색의 과정이며, 철학자란 바로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철학자들은 때로 그 시대, 그 사회의 구체적인 상황과 매우 동떨어진 활동과 사유를 하는 경우가 많다. 종교가 어떤 형태든 간에 이상을 말하지 않을 수 없듯이 철학은 어떤 종류가 되었든 구체성보다는 추상성에 관여하는 것이다.

 

교육철학은 바로 이 배후의 관념을 직관적으로 통찰하는 것이다. 이는 지금까지의 교육의 배후를 지배해온 근본적인 관념들을 조망해주며, 아울러서 앞으로 우리가 배후로 삼아야 할 관념들의 목록을 제공할 수 있다. 그 중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는가는 철학이 아니라 실천적인 문제가 될 것이다.

 

교과서 역시 철학의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선 교과서는 어떤 특정한 교육과정의 한 부분이며, 그 교육과정은 당연히 그 배후에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던 어떤 관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교육과정은 교육목표와 내용에는 관여하지 않으며 오직 주어진 교육목표를 효율적으로 달성하는 것만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소위 중립적 교육관조차 그 배후에 객관주의, 과학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깔고 있는 것이다. 의식의 배후에서 습관과 관례처럼 깔려있는 전제, 관념이 무엇인가에 따라 교육과정의 성격, 그리고 그것에 따른 교과서의 성격은 전혀 달라질 것이다.

 

2. 기존 교육 철학의 주요 흐름과 교과서

 

2.1. 기능주의(객관주의)와 교과서

 

객관주의는 교육할 내용이 피교육자 외부에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전제한다. 이들의 지식관은 진리절대주의다. 지식은 객관적인 것으로 인식주체 외부에 있으며, 그것을 획득하는 방법론만 올바르다면 누구나 동일한 지식을 획득할 수 있다.

이러한 지식관에 서게 되면 교육이란 이 객관적인 내용을 어떻게 피교육자에게 효과적으로 전수하는가 하는 문제가 된다. 또한 학습에 대한 객관적인 보편법칙도 전제되기 때문에 가장 효과적인 전수 방법이란 개념도 성립된다. 그렇게 되면 교육학자가 할 일은 바로 이 방법을 과학적 방법론을 통해 찾아내는 것이다. 일단 이 방법론이 개발되면 이를 바탕으로 표준적인 교수 방법의 패키지가 제공되며, 동시에 전국의 수많은 학생들이 똑 같은 수준의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객관적 교육내용가 교수방법의 패키지에서 교과서는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교과서는 이 세상의 여러 객관적 사실들 중 가장 대표적인 것들을 합리적으로 선택한, 즉 세계의 객관적 지식의 일종의 표본이 된다. 교과서는 세계의 축소판이며, 교과서의 내용을 안다는 것은 세계를 전반적으로 아는 것이 된다(Comenius). 따라서 교과서의 내용은 객관적인 진리이며, 문제는 이것을 어떻게 익히느냐 하는 것이지 여기에 대한 비판적 접근은 허용되지 않는다.

교과서는 이런 불변의 진리를 담고 있을 뿐 아니라 보편타당한 방법론을 응축한 것이기도 하다. 이는 이미 교과서의 선구자인 코메니우스가 보여준 바 있다. 교과서는 세계의 축소판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학습할 수 있도록 배열한 것이기도 하다. 프랑스의 라 샬로트는 이를 더욱 발전시켜 “전혀 전문적인 식견이 없지만 통상적인 상식만 가진 일반인들도 적혀있는데로 따라 하기만 하면 능히 전문적인 교사와 같은 교육효과를 볼 수 있는” 매체로서 교과서 편찬을 주도하였다. 따라서 교과서의 객관성은 그 내용뿐 아니라 배열 순서, 읽는 방식, 사용법을 모두 포괄하게 된다. 교사는 교과서의 내용 뿐 아니라 방법까지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이행하는 존재가 된다. 또한 그렇게 이행했는지 여부를 감시하는 장학관제도가 교과서와 함께 도입되었다.

결국 객관주의 교육철학의 최종 종점은 내용과 교사용 지도서로 세트를 이루는 교과서다. 내용은 해당 분야의 권위자가 정해주는 것이며, 지도서는 소위 교육전문가가 개발한다. 교사의 전문성은 이 내용과 방법에의 숙달여부로만 판단된다. 따라서 전문직(profession)이라기 보다는 숙련직(craftsman)에 가깝게 된다. 따라서 교육학은 일종의 공학이 된다. 이는 “교육이란 의도된 행동의 변화”라는 Tyler류의 행동주의 교육학에서 극치에 이른다. 타일러는 어떤 행동을 어떤 행동으로 바꾸어야 하는지는 교육학에서 결정할 일이 아니라고 아예 배제해 버린다. 그것은 교육철학의 과제라고 하면서 교육학과 교육철학을 분리한다. 따라서 교사는 철학할 수 없는 위치에 서게 된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가장 냉전이 치열하던 시기에 이런 류의 교육학과 교과서가 판친 것이 우연은 아닐 것이다.

이들의 교과서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일종의 요약집과 드릴북이라고 할 수 있다. 각종 참고서는 사실상 이들의 교과서관을 가장 가감 없이 보여주는 것이다. 실제 자습서와 교과서의 근본적인 차이는 연습문제의 숫자에 불과하지 않은가?

 

2.2. 인문주의(전통주의)와 교과서

 

유교문화권에서는 이미 오랫동안 가장 보편적인 교육철학으로 자리잡았던 것이 바로 이 전통주의다. 이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문장은 學而時習之不亦說乎 다. 여기에는 배움 그 자체의 기쁨 이외의 어떤 외재적 가치가 제시되지 않고 있다.

이 흐름은 텍스트에 유연하게 접근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객관주의와 가깝지만, 교과서의 내용과 방법을 빈틈없이 이행하는 것을 교육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거리가 멀다. 전통주의에서 중요시 하는 것은 교과서를 피교육자의 뇌에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있는 내용을 공부함으로써 얻게 되는 피교육자의 교양과 안목이다. 이 관점은 교육의 목적이 어떤 특정한 기능과 능력을 함양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받은 사람”을 만드는 것이 되며, 이런 점에서 교육 본위론이라 불리기도 한다.

인문주의, 전통주의 혹은 교육본위론을 가장 설득력 있게 정리한 철학자는 피터즈다. 피터즈는 교육을 교도, 교화, 훈련 등과 구별하는 본질적인 기준을 1) 그 내용이 내재적인 가치 있는 것이라야 하고, 2) 그 방법이 도덕적으로 정당화 되어야 하며, 3) 자발성에 기초한 것이라야 한다 고 제시하였다. 그 내용이 내재적 가치를 가져야 한다는 것은 다른 어떤 것의 수단으로서 가치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배우는 것 자체가 가치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따라서 교육내용은 인문적 소양이 중심이 되며, 심지어 기능적인 내용이라 할지라도 궁극적인 목적은 기능 자체가 아니라 소양 함양이 된다. 방법이 도덕적으로 정당화되어야 하기 때문에 행동주의의 각종 보상-강화 연쇄(특히 부정적 보상)는 일종의 기만적인 것으로 거부된다. 또한 자발성의 기준에 의해 각종 강제적 학습은 거부된다.

인문주의 교육철학의 입장에 서면 교과서의 권위는 어떤 면에서는 기능주의보다도 더 높아진다. 그러나 교과서의 권위는 객관적 사실, 세계를 살아가기 위한 필수지식이라서가 아니라 인류의 지혜가 농축된 고전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권위다. 따라서 교과서는 엄선된 고전, 혹은 고전의 발췌나 안내로 이루어지는 것이 가장 타당해진다. 다만 배우고자 하는 바가 고전의 내용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얻게 되는 소양과 지성이기 때문에 반드시 다 배울 필요 없으며, 표준화될 필요도 없다. 당연히 그 방법도 표준화된 효율적 방법을 추구하지 않고 교육 현장에서 학생과 교사의 상호작용 속에 찾아가는 것이 된다. 즉 교과서는 단지 교재(material)이 되는 것이지 포괄적인 지침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 기능주의 입장에서는 전국의 모든 학교가 같은 교과서를 사용해야 하지만 인문주의에서는 그럴 이유가 없으며, 교사가 능력이 된다면 스스로 교과서를 만들어 쓰거나, 교재로 쓸만한 다른 책을 골라서 가르쳐도 문제될 것이 없다. 다만 일단 선택된 교과서의 내용은 전통과 관습의 이름아래 무거운 권위를 가지게 된다.

 

2.3. 구성주의와 교과서

 

구성주의 교육의 목표는 매우 극단적으로 말하면 세상에 대해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식 기관, 인식 도구에 대해서 배우는 것이다. 따라서 구성주의는 기능주의의 바탕이 되는 객관주의적 지식관과 정 반대방향에 서 있다. 객관주의에서 지식은 외부세계의 모사이며 인상이다. 그러나 구성주의의 지식은 외부세계에서 유입된 자극을 인식하는 주체가 고유의 메카니즘에 따라 구성해낸 것이다. 그렇다고 구성주의가 완전한 상대주의나 불가지론의 입장에 서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객관적인 세계의 존재여부에는 관심이 없다. 그것은 인간의 인식 범위를 벗어나는 문제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인식하는 주체와 무관한 객관적인 지식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아래의 표(강인애, 1997)는 구성주의와 객관주의를 비교하는 거의 모든 저서에 빈번히 인용되는 도표다. 객관주의와 구성주의는 지식을 바라보는 관점이 전혀 다르며, 따라서 지식을 얻는 과정 즉 인식과 학습의 과정도 전혀 다름을 확인할 수 있다.

 

 

객관주의

구성주의

지식

고정적이고 확인 할 수 있는 대상

개인의 사회적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개인의 인지적 작용에 의해 지속적으로 구성, 재구성 되어지는 것

지식의 특징

초역사적, 초공간적, 범우주적인 성격

특정 사회, 문화, 역사, 상황적 성격의 반영과 구현

현실

규칙으로 규명가능하며 통제와 예측이 가능

불확실하며, 복잡하고, 독특함을 지니고, 예측이 불가능

최종목표

모든 상황적, 역사적, 문화적인 것을 초원해 적용할 수 있는 절대적 진리와 지식의 추구(Truth)

개인에게 의미있고 타당하고 적합한 것이면 몯 진리이며 지식(Viability)

주요용어

발견(discovery/find)

일치(correspondence)

창조(creation)

구성(construction)

교수-학습 원칙 비교

▶ 추상적인 지식과 상황에 관계없이 적용될 수 있는 지식을 제공.

▶ 모든 지식은 수업 이전에 미리 세밀한 계획에 따라 구조화, 순서화, 체계화,하여 제시.

▶ 교사와 학생의 역할 : 지식의 전달자와 지식의 습득자로서의 관계.

▶ 개별적 학습환경 : 개인과제, 개인활동, 개인의 성취의 중요성 강조.

▶ 지식의 암기와 축척

 

 

▶ 항상 구체적인 상황을 배경으로 한 지식을 제공

▶ 현실의 복잡함을 그대로 제시하여 인지적 도전을 유도

▶ 모든 지식과 과제는 항상 실재적 상황을 전제로 하여 전개되고, 다루는 과제는 실제로 사회에서 대면하게될 특성을 지닌 것으로 제시

▶ 교사와 학생의 역할 : 학새의 학습을 도와주는 조언자, 촉매자로서의 교사와 자율적이고 적극적으로 책임감 있는 학습의 주체로서의 학생의 역할

설계와 분석

▷ 누가

▷ 언제

▷어느만큼

▶ 수업설계자/교사

▶ 수업 전

▶ 세분화, 순서화, 연계화

▶ 학생 개개인 스스로

▶ 수업하는과정중에 지속적으로

▶ 전체적으로 학습목표만 설정

수업 평가

▷ 누가

▷ 언제

▷ 형태

▶ 수업설계자/교사

▶ 학습목표 설정과 동시에 설계한 뒤 맨나중에 실시

▶객관적 평가

▶ 학생 본인, 동료학생, 교사

▶ 수업하는 과정 중에서 계속 수행

▶다양한 형태(객관식, 주관식, 관찰, 포트폴리오, 프로젝트, 저널 등)

 

 

만약 인식하는 주체가 변하면 그 주체가 인식하는 지식도 변한다. 마찬가지로 인식하는 주체가 다르면 그 주체가 인식하는 지식도 다르다. 즉, 지식은 완전히 열려있는 개념이 된다. 하지만 지식이 열려있다는 것의 의미를 상대주의와 혼동하면 안된다. 이 열려있음은 진위가 수시로 뒤바뀐다는 의미가 아니라 끊임없이 지식의 의미와 내용이 인식주체에 의해 구성, 재구성된다는 의미다. 구성주의의 대표자인 마투라나는 우리의 인식과정을 잠수함을 조종하는 항해사가 각종 계기판에 대한 지식을 얻는 것에 비유했다. 따라서 학습자는 교육자에 의해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져야 할 존재가 아니라 모두 나름의 계기판을 가지고 있는 잠수함 항해사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제 문제는 그 계기판이 어디서 왔는가, 그리고 그 계기판은 자생적인가 아니면 의식적으로 구성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여기에 따라 여러 종류의 구성주의가 나타나며, 거기에 따라 다양한 교육과정과 교과서에 대한 관점이 나타난다. 이들 여러 구성주의들 중 특히 교육학에 많은 영향을 준 것은 다음의 세 유파다.

 

 

2.3.1. 급진적 구성주의

 

여기서 급진적이라는 의미는 정치적 의미가 아니라 구성주의의 원래 개념에 가장 충실하다는 의미다. 마투라나, 바렐라, 글라저스펠트가 대표자들이다. 이들의 인식론은 한마디로 “재귀적 과정으로서의 인식”이다. 따라서 이들은 모든 지식은 인식하는 주체가 자신을 인식하는 것으로 본다. 인식은 외부세계를 정신 안에 그대로 그려내는 일이 아니며, 또한 우리의 인식도구에 의해 첨삭된 것을 그려내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인식도구는 훨씬 능동적이다. 우리의 정신은 외부에 자극에 따라 스스로의 삶에 적합한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내놓는 작업’을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세계 속에서 산다. “우리는 모두 나름의 메트릭스”를 만들고 그 속에서 사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세계를 인식한다. 우리는 우리가 만든 세계를 인식한다. 마투라나는 이러한 순환의 과정을 “무릇 함이 곧 앎이며, 앎이 곧 함이다”라고 표현했다.

교과서의 측면에서 바라보면 급진적 구성주의는 매우 난감한 이론이다. 급진적 구성주의에서는 교과서는 물론 교재 자체가 인정되지 않는다. 인식 주체가 10명이면 구성되는 지식도 10개이기 때문에 개별학습을 제외한 어떤 교육방법도 이 이론에서는 정당화되지 않는다. 따라서 교과서의 개념은 아예 수립될 수 없다. 교사는 학생들 각각에게 그들의 인지구조에 따른 적절한 교재를 선정해 주어야 한다.

 

2.3.2. 인지적 구성주의

 

급진적 구성주의는 구성주의 아이디어에는 가장 충실하지만 교육학이라기 보다는 어떤 면에서는 반교육학에 가깝다. 급진적 구성주의에 입각하면 제도로서의 교육은 그 자리에서 해체되고 만다. 따라서 급진적 구성주의는 교육학이 아니라 생물학과 인공지능 분야에 널리 보급되었으며 교육학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은 피아제의 인지적 구성주의다.

피아제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문헌에서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기 때문에 긴 설명이 필요 없다. 피아제는 인간의 인식이 고정된 활동의 반복이나 습득 정보의 양적 증가가 아니라 지속적인 인지 발달과정으로 보았다. 그런데 이 발달과정은 임의적인 것과 조건지워진 것 사이에 위치한다. 우선 인지 발달과정은 생물학적으로 결정지어지는 발달 과정의 틀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틀 안에서는 인간의 인지가 외부 자극에 의한 평형 상실을 극복하기 위해 동화(assimilation)와 조절(accomodation)의 과정을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발달해 간다고 보았다.

동화란 새로운 정보 혹은 새로운 경험을 접할 때, 그러한 정보와 경험을 이미 자신에게 구성되어 있는 도식(schema)에 적용시키려는 경향성을 뜻한다. 도식은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고, 반응하고 기능하기 위해 사용하는 지식이나 저차, 관계, 마투라나의 비유를 빌리면 계기판이다. 조절이란 새로운 정보 혹은 새로운 경험을 인식하기 위해 기존의 도식을 수정하는 것이다. 인지 발달이란 모순없는 새로운 지식은 동화시키고, 기존의 도식에 적절하지 않은 지식은 도식을 변경하면서 이를 확장시키는 과정이 된다.

따라서 효과적인 교육은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인지적 발달 단계에 적합한 자극을 주어야 하지만, 그 자극이 지식이 되는 과정은 각 학습자의 스키마에의 적응과 스키마의 조절을 통한 능동적인 지식 구성적 과정이 된다. 생물학적 발달 단계에 따라 수용가능 혹은 불가능한 교육적 자극은 구별할 수 있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그 이후는 학생이 스스로 능동적으로 정보를 내면화 시키면서 자신의 인지도식을 확장시키게 된다. 이것이 피아제의 교육이다.

피아제의 이론을 따라가면 교과서가 극단적으로 거부되거나 혹은 극단적으로 절대화된다. 각 인식주체의 동화 조절 과정을 강조할 경우 교과서는 극단적으로 개별화된다. 모든 교재는 개별 아동들의 기존 스키마에 따라 가장 적절한 자극을 줄 수 있도록 개발되어야 한다. 그러나 피아제는 여기에 발달심리학적 배경을 집어 넣어 극단적 개별화의 위험을 피해간다. 따라서 최종적으로 피아제의 교과서는 개별화 교재이면서 연령대별로 어느정도 일반화된 모습을 갖게 된다.

 

2.3.3. 사회적 구성주의

사회적 구성주의는 비고스키(Vygotsky)의 발달 심리이론에 기초를 두고, 학습에 영향을 미친 사회적인 요소에 관심을 갖는다. 시회적 구성주의에서는 인간의 인지적 발달과 기능은 사회적 상호작용이 내면화되어 이루어지는 것이다. 비고츠키과 피아제의 교육은 그 실천의 측면에서는 결국 서로 비슷한 실천을 하게 되지만, 그 이론적 전제는 매우 날카롭게 대립된다. 특히 도식(스키마)은 이들의 오랜 이론적 전쟁터가 되었다.

피아제의 스키마는 아동의 내면에서 먼저 발생한다. 비고츠키의 스키마는 아동 외부의 영향이 보다 결정적이다. 피아제의 스키마는 아동과 외부자극간의 개별적인 작용에 의해 구조화된다. 그러나 비고츠키의 스키마는 개인의 신체적인 성장뿐 아니라 사회적인 상호작용의 결과가 결정적으로 확장한다. 인간의 정신은 독립적 활동이 아니라 사회 학습의 결과이며, 일상에서의 과제 해결은 성인이나 혹은 뛰어난 동료와의 대화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이처럼 사회의 보다 성숙한 구성원들과 상호작용하는 동안 자신의 문화에 적합한 인지 과정이 아동에게 전이된다.

비고츠키는 아동의 개별적인 스키마와 사회적 상호작용의 접점으로 '근접 발달 영역(zond of proximal development)'라는 개념을 개발했다. 이는 아동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지만 성인이나 뛰어난 동료와 함께 학습하면 성공할 수 있는 영역을 의미한다(Woolfolk, 1993). 이 영역에서는 어른 혹은 유능한 동료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아동의 인지구조가 확장되어가는 영역이다. 여기에서는 스키마를 형성할 수 있는 단서가 제공되고 각종 협력과 격려가 제공된다. 학습이 평생에 걸쳐 일어나는 과정이라고 할 때, 비고츠키는 그 중 근접발달영역을 교육이 일어나는 영역이 된다. 즉 교육은 궁극적으로 아동이 자신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할 때까지 제공되는 도움이나 보조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교사나 성인의 적극적인 역할의 이론적 정당성이 마련된다.

사회적 구성주의는 지식은 전적인 개인의 경험에 의존하며, 모든 사람은 똑같은 이해에 도달할 수 없다는 급진적 구성주의의 한계점을 사회,문화적 상호작용으로 보완하고 학교 교육의 정당성의 근거를 제공했다는 의미가 있다. 결국 사회적 구성주의의 관점에 따르면, 지식의 구성은 개인 내면의 인지적 작용과 함께 사회, 문화적인 상호작용이 통합적으로 이루어지는 역동적인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사회적 구성주의를 따르게 되면 교과서의 위상도 어느정도 정당화된다. 교육은 스스로 사회, 문화적인 상호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수준에 이르도록 하는 조력활동이다. 따라서 학생이 살고 있는 시대와 지역, 그리고 사회적 상황이 요구하는 상호작용과 지식이 교과서의 내용이 된다. 그러나 이는 단지 재료로서 주어질 뿐, 교육의 결과는 성인이나 유능한 동료와의 근접발달영역에서의 상호작용을 통해 학생들의 정신 속에서 구성되어간다.

 

2.4. 실용주의와 교과서

 

이명박에 의해 남용되어 전혀 엉뚱한 뜻으로 쓰이고 있지만, 실용주의는 그런 천박한 의미가 아니다. 실용주의는 불변의 고정된 진리관을 거부하고 모든 진리는 구체적인 삶의 맥락, 즉 실천과 경험 속에서 결정된다고 보았다. 더 나아가 실천과 경험의 맥락에서 벗어나서는 어떤 진리도 제대로 인식할 수 없다고 보면서 일체의 형이상학을 거부하였다. 그런데 이 실천과 경험은 인간이 인식 대상에 단지 적응하는 과정일 뿐 아니라 인식 대상을 자신의 목적에 맡게 변형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교육이야말로 인식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활동인 만큼 실용주의 철학자들은 교육에 가장 큰 관심을 가졌다. 실용주의를 대표하는 존 듀이는 교육을 “경험의 능동적 재구성 과정”이라고 보았다. 즉 인식의 과정이 곧 실천과 경험의 과정이라면 배움의 과정 역시 당연히 실천과 경험의 과정일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국 듀이에게는 인간적인 삶과 배움, 그리고 교육은 서로 구별되는 개념이 아니다. 산다는 것이 곧 교육하는 것이다. 다만 듀이는 좁은 의미의 교육(학교 교육)의 필요성은 인정하고 이를 별도로 구별하고 있다. 학교교육, 혹은 제도교육은 이런 경험의 재구성 과정을 위해 적절하게 조성된 환경이 제공된다는 점에서 여타의 경험과 구별되는 특수한 상황이다.

 이런 의미에서 듀이는 교육과 훈련을 날카롭게 구별한다. 훈련은 지식이나 기능을 획득하는 과정과 실제 그것을 사용하는 과정이 구별되어 있다. 반면 교육은 이 둘이 구별되지 않는다. 훈련은 과정이야 어떻든 최종적인 결과인 지식과 기능을 습득하면 되는 것이지만 교육은 학습자가 그것을 획득하는 과정 속에서 자신이 획득하게 될 지식과 기능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실용주의에서는 학습자가 자신을 스스로 가르치는 것이지 정해진 교육자가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학습자가 자신을 스스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면 그것은 교육이 아니라 훈련에 불과하게 된다.

따라서 교사의 위상은 구성주의보다 더욱 학생과 같은 방향에 서게 된다. 구성주의의 교사가 안내자라면 실용주의의 교사는 동반자가 된다. 듀이는 학생과 교사가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교육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것은 교사와 학생이 공유하고 있는 사회의 개선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듀이는 자신의 대표작에 정치적 내용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와 교육』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이다. 교육은 교사와 학생이 함께 자신들의 삶을 개선하는 구체적인 실천과 경험을 통해 자신과 자신의 세상을 개선해나가는 일련의 과정이다. 따라서 교사는 학생들과 공유된 문제의식 속에서 함께 경험을 재구성해야 한다. 그것은 결국 이들이 함께 몸담고 있는 사회의 민주주의를 더욱 공고화 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민주주의는 교육의 목적이자 동시에 교육의 결과다.

그런데 실용주의에서 교사가 학생들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 교사의 위상 약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교사는 학생들과 같은 방향을 보는 만큼 교과서의 압박에서는 자유로워진다. 실용주의에서 교사는 학생들과 함께 문제해결을 위한 공동체를 구성하게 되며, 그 속에서 경험 많은 지도적인 구성원이지만 그렇다고 이들을 가르치는 입장에 서지는 않는다. 따라서 실용주의 교육관에서 문제해결을 위해 필요한 여러 지식과 정보의 리소스는 있을 수 있을지언정 어느정도 확정된 진리를 담고 있는 교과서의 자리는 전혀 없다. 지식과 정보의 리소스는 아직 지식이 아니다. 그것은 학생들의 삶과 앎의 공동체가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활용할 때 비로소 지식이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실용주의는 객관주의(행동주의)가 아니라 인문주의와 강력하게 충돌을 일으킨다. 실용주의 관점에서는 전통과 고전 역시 특별한 자격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전을 중심으로 편성된 인문주의의 교과서, 교재는 그것이 학생들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필요한 정보나 통찰을 이끌어내는데 사용되지 않으면 다만 종이 조각에 불과한 것이 된다. 극 결과 실용주의의 교육관과 교과서관은 가장 급진적인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실제 실용주의의 영향을 받았는지 여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듀이와 대단히 근접한 사상적 유사성을 보여주는 파울루 프레이리(1991)의 대화식 교육 역시 이런 관점에 서 있다. 프레이리는 미리 정해진 내용을 일방적으로 답으로서 가르치는 교육을 은행저금식 교육이라 부르면서 비판하고, 또한 학생들이 모두 같은 방향, 즉 교사를 향해 앉아있는 모습을 고속철도 교실이라고 비판한다. 프레이리 역시 교사는 정해진 교재나 교과서가 아니라 학생들의 삶의 경험 속에서 교재와 교과서를 끌어와야 하며, 이를 위해 교사로서가 아니라 공동의 행위자로서 학생들의 삶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3. 결론 혹은 질문

 

지금까지 교육철학의 몇몇 관점들, 그리고 그 관점에서 비롯되는 교육과정과 교과서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사실 교육철학은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인간 행위의 배후에 깔린 관념을 추적하는 것이다. 화이트헤드가 말했듯이 어떤 관점을 취하게 되면 탐조등처럼 그 부위는 밝게 보이지만 나머지 부분은 전혀 볼 수 없게 된다. 철학은 바로 현재 우리가 어떤 탐조등을 사용하고 있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그것을 알게 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인식의 지평의 한계를 미리 알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부분이 어느정도인지도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부분, 우리가 기존에 가지고 있는 관점, 관념의 한계에 갇혀있어 보지 못한 부분을 보기 위해 정교한 계획은 불가능하다. 유일하게 가능한 것은 기존의 틀을 벗어나보는 모험이다.

따라서 교육철학은 모험을 하기 위한 사전 답사와 같은 것이다. 교육에 대해 또 교과서에 대해 철학한다는 것은 교과서에 숨어있는 관념, 탐조등을 찾아보는 것이며, 자신이 교과서에 대해 은연중에 전제하는 관념을 비추어 보는 것이면서 동시에 교과서로부터 벗어나 모험을 시도하고자 하는 것이다. 모험은 보수, 진보 모두에게 필요하다. 자신의 탐조등에 갇힌 편협한 시야는 설득이 아니라 힘의 논리에 의존하게 되며, 그 비극적인 말로를 집권 반년만에 정치적으로 파산한 대통령에게서 보고있지 않은가?

 

참고문헌 혹은 더 읽을 책

 

Boyd, W.(1964). The History of Western Education. London: Penguin Books.

Dewey, J.(1916). Democracy and education: An introduction to the philosophy of education. New York : Macmillan. 이홍우 역(1992).『민주주의와 교육』.서울:교육과학사

Freire, P.(1991). Pedagogy for Oppressed People.

Mollenhauer, K.(1983). Vergessene Zusammenhaenge. Muenchen: Juventa Verlag. 정창호 옮김(2005). 『가르치기 힘든 시대의 교육』. 서울: 삼우반.

Niebuhr, R.(1960). Moral Man and Immoral Society. London: John Knox Press.

Peters. R.S.(1966). Ethics and Education. London: George Allen & Uniwin.

Peters. R.S.(1981). Essays on Educators. London: George Allen & Uniwin.

Schultz, T., W.(1981). Investing in People: The Economics of Population Quality.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Vally, S. & Spreen, C.(2006). The Globalization of Education Policy and Practice in South Africa. Martell, G. ed(2006). Education's Iron Cage and It's Dismantling in The New Global Order. Ottawa: The Canadian Centre for Policy Alternatives, pp.57-74.

Vygotsky, L.S.(1986). Mind in Society. Cambridge, M.A.: MIT Press.

Vygotsky, L.S.(1986). Thought and Language. Cambridge, M.A.: MIT Press.

William Boyd(1964). The History of Western Education. London: Adam & Charles Black. 이홍우 역(1996). 서양교육사. 서울: 교육과학사.

Young, R.E.(1990). A Critical Theory of Education: Habermas and Our Children's Future. London: Pearson Education. 이정화, 이지헌 옮김(2003). 『하버마스, 비판이론, 교육』. 서울: 교육과학사.

 

강인애(1997). 『왜 구성주의인가?』. 서울: 문음사.

이유선(2006). 『듀이와 로티』. 서울: 김영사.

이홍우(1996). 『교육과정 탐구』. 서울: 교육과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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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정변증법 | 2008/08/18 23:11 | 교육에 대해 생각하기 | 트랙백 | 덧글(0)

교사의 철학함의 의미

교사가 철학함의 의미


문제는 철학함이 과연 어떤 행위인가 하는 것이다. 칸트는 제자들에게 철학을 배우지 말고 철학함을 배우라고 했지만, 정작 그철학함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저작과 활동을 통해 미루어 배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어쩌면 그렇게미루어 배우기 위해 그의 저작과 활동을 이리저리 따져보는 것, 그게 바로 철학함이겠다.

즉, 철학함이란 따져보고, 나누어보고, 다시 합쳐도 보고 하면서 그 의미를 밝혀내는 과정이 된다. 흄의 비유대로 돌부리에 발이걸려 넘어진 뒤 돌부리에게 저주를 퍼붓는 것은 반응하는 것이지만, 그 돌부리의 어떤 작용이 자신을 넘어지게 했는가, 그리고 그돌부리가 거기에 있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 따지는 것은 학문이지만, 그 돌부리가 거기 있음, 그리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짐이 세계와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를 따져보고 사색하는 것은 철학함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교육으로 옮겨 보면, 그저 주저진 것을 가르치는 것은 단지 반응하는 것이며, 어떻게 잘 가르칠 것인가를 숙고하는 것은교육학을 하는 것이며, 가르친다는 것이 교사와 학생과 세상에 어떤 의미를 주는가 따져보는 것은 교육철학을 하는 것이다. 즉반응은 지도안에 나와있는 행위 이상 수준을 생각하지 않으며, 교육학은 교육 이전 수준에서 생각하지 않지만, 교육철학은 교육 이전수준에서 생각하여 교육의 정당성과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다.

철학은 추상의 학문이다. 이 추상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최고로 상승되어있음의 의미다. 개개의 사물을 그 공통점만을추출하여 이들을 포괄할 수 있는 개념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을 추상이라고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는 이 추상이 최고에 도달할때 우리가얻는 관념, 개념은 가장 단순한 것이라는 것이다. 공통점만을 계속 추출했기 때문에, 그 구체적인 내용들이 모두 제거된, 가장작은 알맹이만 남아있는 것이다.

그런데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추상은 철학의 과정이 아니다. 최고도의 추상은 철학의 종점이 아니라 출발점이다. 추상은 오히려 일상속에서 일어난다. 인간의 지성은 원래 추상하는 기계다. 오랜 역사동안 인간은 자신의 행위들을 일상속에서 추상해왔으며, 이런추상들이 모여서 상식의 체계를 이루고 있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사용하는 개념, 일상 속에서 적용하는 수 많은 관습, 관례들은의심받지 않는 우리의 "공통의 장소" "공통의 것"의 원천을 이루는 추상들의 저장고다. "인생". "선과 악", "탄생과죽음", "고통", "기쁨", "행복" 같은 개념들이 구체가 아니라 추상임은 당연하다. 그리고 이런 추상들은 철학함의 결과가아니라 인류 역사의 결과인 것이다.

철학자는 바로 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개념들의 의미를 캐어 묻는다. 그리하여 이 추상들이 기실 아무 알맹이 없음을 깨닫고,그것을 삶과 세계속에 투입하여 의미를 채워나간다. 만약 그 추상이 의미를 담을 수 없는 용기이면 그것은 폐기될 것이다. 이와같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관념과 개념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것의 의미를 캐어물어 그 용기를 채워나가는 과정이 바로 철학함이다.즉, 철학함의 시작은 바로 "의심"에 있는 것이다.

일찍이 소크라테스는 지식을 더 많이 얻었음을 자랑하던 시대에 맞서 "안다는 것"자체를 캐어 물었다. 그리하여 "앎"을 자처하던자들의 무지를 폭로하면서 "앎"과 "지혜"가 무엇인지 고뇌하게 만들었다. 공자는 "마땅히 지켜야 하는 대상" 혹은 "시대에뒤떨어진 폐기대상"이라고 간주되던 "예"의 의미를 캐어물어, 그 의미를 인간의 선한 마음으로 정당화시키는 인학을 펼쳤다. 흄은통용되던 거의 모든 상식 "지식", "과학", 심지어는 "자아"까지 모조리 의심의 대상으로 삼았다. 마르크스는 너무 당연히통용되어 더 이상 따져볼 여지가 없을 것 같았던 단순한 개념들인 노동, 화폐, 자본을 추궁하여 방대한 이론을 뽑아내어 현존하는사회가 당연한 것이 아님을 드러내었다. 하이데거는 더 나아가 최후의 추상인 "존재"까지 추궁하였다.

그렇다면 교육철학이란, 교사의 철학함이란, 교육이라 불리는 행위의 체계에서 더 이상 의문의 여지가 되지 않는 것, 너무 당연한것, 그리하여 의미의 최소단위로 여겨지는 것들을 추궁하여 거기에서 새로운 의미와 내용을 끌어내고 풍성하게 만드는 것이 된다.교육의 최소단위라면 가르침, 교사, 학생, 교재, 학습 등이 있겠다. 평소에 가르침은 무엇인가, 교사는 무엇인가 등을 추궁해 본교사가 사실은 의외로 적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교사가 자신의 삶을 활기있고 생기있게 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이러한 추궁을 생활화한 교사는 매순간의 교육활동이 자신의 의미 체계 속에서 유의미하게 되도록 선택할 것이며, 그렇지 않는 교사는주어진 것을 그저 따라할 것이다. 그저 따라하는 교사는 사르트르의 용어로 "자기기만, 불성실"을 하고 있는 것이며 "죽은자의일"을 하는 것이다. 누구든 자기가 지금 현재 하는 일을 자신의 존재와 비추어 정당화할 수 없다면, 그는 삶을 사는 것이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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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정변증법 | 2008/08/09 20:18 | 교육에 대해 생각하기 | 트랙백 | 덧글(0)

교육에 대해 철학함(1)


서설 -교사는 왜 철학해야 하는가?

우리는 흔히 우왕좌왕하는 정책을 비판할때 "철학이 없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국정철학"을 제시하라고 요구한다. 그런데 비판을 하고, 그런 요구를 하는 사람들은 과연 "철학"을 어떤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것일지 의문이 생긴다. 그냥 사용하는 것일까, 아니면 명석판명한 의미를 가지고 사용하는 것일까? 아니면 철학이라는 말의 의미를 설사 모를지라도 그 배후에 어떤 무의식적인 전제를 두고 사용하는 것일까?

특히 교육감 선거가 한창인 요즘, 교육에 대한 철학을 요구하는 질문이 잦아지고 있다. 교육전문가는 물론 정치인, 학부모들까지 "당신의 교육철학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기 일쑤다. 그런데 문제는 이 질문의 뜻이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단지 "교육에 대한 당신의 견해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좀 현학적이고 폼나게 바꾼 것일까? 아니면 다른 어떤 의미가 은연중에 사용되고 있는것일까?

그러나 여기서 너무 현학적이 되지 말자. 철학이라는 말, 혹은 철학함이라는 말의 의미는 매우 단순하다. 그것은 음미하고 반성하는 것을 말한다. 즉, 그냥 지나쳐가고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을 자신의 삶, 행위, 세계와의 관련속에서 되새겨보는 것이다. 

데이비드 흄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아이"의 비유로 철학함을 잘 설명했다. 보통 아이들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 돌부리를 원망한다. 그러나 철학하는 아이는 그 돌부리가 왜 하필 그곳에 있었으며, 자신은 왜 하필 그곳으로 갔으며, 왜 그 돌부리를 보지 못해 넘어졌는지 따지게 된다. 그 돌부리가 우연히 있었을수도 있고, 행인들의 출입을 통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배치되었을수도 있으며, 이 두 경우에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현상의 의미는 전혀 달라진다. 전자의 경우는 재수 없는 경우며, 앞으로 좀더 주의해서 다녀야겠다는 결심으로 마무리 되며, 후자의 경우는 왜 이 땅의 출입이 통제되었는지, 그것의 정당성의 근거는 무엇인지 따져보는 추론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철학함이며 철학적 반성이다.물론 흄은 일반인들이 이런 철학적 반성을 일상적으로 할 것이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어쨌던 바로 철학이란 습관들, 상식들의 의미를 음미하고 반성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교육철학이란 교육과 관련한 각종 관생, 관습, 행위, 개념들의 의미를 음미하고 반성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 속에서 교육이란 무엇이며, 어떤 것이라야 하며, 교육의 잘잘못을 가려내는 일반적 기준은 가능한지 어떻게 정당화되는지가 따져지게 될 것이다. 요컨대 교육철학은 교육에 대한 일반론이며, 교육을 상식과 습관이 아니라 분명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의도적 행위로 수립할 기본 토대가 된다. 즉 교육철학이 없는 교육은 단지 직관에 의존한 독단론이나 습관에 의존한 무의미한 관행에 불과하게 되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특히 후자의 경우를 "생기없는 교육" "죽은 지식"이라 부르며 일종의 퇴행적 현상으로 맹렬하게 비판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것은 교직과목에 엄연히 교육철학이라는 과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이 말이 널리 쓰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상 "교육에 대한 철학함"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육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교육문제가 중산층 가정을 파탄낼정도의 처지가 되었음에도 "교육"의 근원에 대한 물음이 널리 회자되지 않고 입시제도니, 학력신장이니 하는 지엽말단적이고 기능적인 논쟁만 오가고 있는것이다. 도대체 교육이란 무엇이고, 좋은 교육의 기준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정당화되는가에 대한 논의가 없이, 교육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그 방법만 논구하는 것은 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어딘지도 모르면서 가장 좋은 코스를 찾고있는 어리석은 운전자와 같다.

그러나 이것은 비단 교육철학의 위기만은 아니다. 철학 전반의 위기이며 세계의 위기인 것이다. 즉 세계가 부조리하고 갈수록 살기 어려워 짐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와 근원을 캐어묻는 행위 자체가 거의 소멸되어버린 세계의 위기인 것이다. 살기 어렵다고 하는 말을 입에달고 살면서도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은 하지 않는것이다. 이렇게 "좋은 삶"이 무엇인지 캐어묻지 않으면서도 "잘 살게 해달라"는 욕망만이 넘치는 것이 현대병의 근원이 아닐까? 그래서 이 넘치는 욕망이 "나쁜삶"의 원인임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이 원인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며 악순환에 빠지는 것이 바로 현대병이 아닐까? 그리고 철학이야 말로 이 현대병에 가장 적절한 처방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흄은 일반인들이 철학적 반성을 할 기대도 필요도 인정하지 않았지만, 삶의 매 순간순간이 정당성의 문제에 빠져드는 피곤한 현대에는 일반인들이야 말로 철학함이 일상화되어야 할것이다. 철학함이란 치료약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 자체가 치유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교육이 교육병에 걸려있다면, 우리는 교육에 대해 철학함으로써 그것을 치유해 나가야 하지 않을까? 더군다나 일반인이 아닌, 교육전문가인 교사라면 더더욱 그래야 하지 않을까? 매순간 자신의 교육적 선택을 음미하고 그 근거를 캐어물어야 하지 않을까? 매 순간 자신의 교육적 행위가 초래한 결과를 반성하고 그 의미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 의미들을 다른 교사들과 주고받고, 비판하고, 공유하고, 확장시키는 과정 속에서 교육을 더욱 풍성한 의미를 가진 인간 행위의 집합으로 만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행복을 위한 교육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과정이 인간에게는 더 없는 행복이 아닐까?

이런 의미에서 교사의 철학함은 비단 학생뿐 아니라 교육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뿐 아니라 교사 자신을 위해서도 필수적인 것이다. 무릇 자신이 행하는 일의 목적과 의미를 여러 다양한 행위들과의 관련 속에서 설명하고 그 정당성의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다면, 그가 하는 일은 단순노동에 불과할 것이며, 소나 말이 하는 일과 다를바 없을 것이다. 적어도 그것이 인간적 행위라면, 그는 자신의 행위를 설명하고  정당화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즉, 인간은 철학을 하기 때문에 소나 말과 구별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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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정변증법 | 2008/07/29 12:27 | 교육에 대해 생각하기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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