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 교육운동

전교조의 교원평가 협의체 참가와 관련하여 위원장에게

별안간 불거진 전교조의 교원평가 협의체 참가.

 

사실 저는 오래 전 부터 전교조가 교원평가에 대해 전향적인 접근을 할 필요하다는 입장을 피력한 적 있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양성관 교수 등이 수행한 교원평가 대안모델 개발 수탁연구의 전교조측 담당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협의체 참가에 대해서는 매우 강한 불쾌감과 우려를 감출 수 없습니다.

 그 동안. 본부는 또 참실련은 계속 원칙적 반대라는 말을 반복했습니다. 저희 연구진이 개발한 대안모델도 다만 연구진의 의견일 뿐 전교조의 입장인 것처럼 호도하지 말라며 논평을 내기도 했습니다. 그 어느 구석에서도 본부가 교평에 전향적으로 접근할 것이라는 언질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중앙일보 기사보고 소식을 듣습니다. 교평협의체 참가라고? 이거 참 아햏햏한 상황입니다. 중앙일보에 교평협의체 참가하겠다고 하면 칭찬 듣습니다. 조합원들에게 원칙적 반대라고 하면 칭찬듣습니다. 혹시 뭐 이런 것 아닙니까?

 만약 전향적으로 접근하기로 마음먹었으면 그 소식을 먼저 들어야 할 사람들은 기자가 아니라 조합원입니다. 중요한 결정을 조합원들이 신문보고 알아야 하는 상황이 반복된다면, 본부는 어떤 협의체에 나가서도 정치력을 발휘하기 어렵습니다.

 협의체 참가 자체는 입장에 따라 찬성할수도 반대할수도 있는 정책적인 결정입니다. 거기에 따라 강경파 온건파 나눠지는거고, 그건 세계 어느나라 노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조합의 위원장을 선출할때 경선이 이루어지는 것이겠죠. 문제는 어떤 자격, 어떤 힘을 가지고 협의체에 참가하느냐입니다.

 스웨덴, 독일, 네덜란드 등의 노사정협의체가 제대로 굴러가는 이유는 정부의 태도 때문만은 아닙니다. 정부가 진지한 태도로 나오게끔 하는 노조의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힘은 단결투쟁, 강력투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노조의 지도부가 조합원들을 설득할 수 있는 정치력에 있는 것입니다. 물론 조합원들의 이익을 양보하라는 설득까지 할 수 있으려면 그 노조는 평소에 의사소통이 막힘없이 잘 흘러다니고 있는, 즉 퍼트냄 용어를 빌리면 "사회적 자본"이 틈실한 그런 조직이라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이번 본부의 결정은 애초에 가서 힘을 발휘하기 어려운 결정입니다. 자기 조합원들을 설득할 자신이 없고, 심지어 기회주의자로 몰릴까봐 전전긍긍하는 노조 대표는 절대 협의체에서 대접받지 못합니다. 만약 굳이 협의체에 들어가시겠다면 대대로 끝낼 것이 아니라 조합원 총투표를 하던지 하여간 평조합원들을 논의의 장에 끌어들이는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만약 그럴 생각이 없으시다면 협의체에 들어가서 파토가 나게 해야 합니다. 단 절대 전교조가 먼저 박차고 나오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교총이 박차고 나오게 해야 합니다. 즉, 결사적으로 승진제도 개혁과 교평을 연계시키자고 버텨야 합니다. 그래서 판이 깨져도 교총때문에 깨지게 해야 합니다.

 만의 하나 협의체에 들어가서 언론의 뭊매를 피하고, 가서 자기주장만 하다가 박차고 뛰쳐나옴으로써 조합내 강경목소리도 피하는 얕은 수를 생각하고 계시지 않기를 바랍니다. 협의체에 참가한 당사자들은 협의체의 틀을 유지하는데 얼마나 헌신했느냐가 또 하나의 정치적 평가 기준이 됩니다. 언론의 추이를 잘 살펴보시면서 우리가 양보할 수 있는 부분이면서 교총은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을 내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충분히 양보했는데, 교총은 고집을 세우는 그림을 그리십시오.

 교총 정책팀은 호구가 아닙니다. 분명 그들도 경우의 수를 그려가며 전교조로 인해 파토나게 만들려고 할겁니다. 절대 거기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그러나, 먼저

조합원들에게 이렇게 순서가 잘못된 것에 대해 사과하고 처음부터 다시 설득작업을 하십시오. 그래서 정치력을 모아 가지고 가십시오. 왜 협의체에 참석하려고 하는지, 가서 무엇은 반드시 지키고 무엇은 양보가 불가피하여 양해를 구할 것인지 분명히 조합원들에게 밝히십시오. 미리 정해 놓고, 언론에 먼저 풀어놓고, 그 다음에 대대에서 통과시키는 이런 짓은 좀 그만 두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이번 협의체 참가는 최대의 재난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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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정변증법 | 2009/11/20 08:26 | 교육에 대해 생각하기 | 트랙백 | 덧글(2)

교실에서 노가다

나는 내 전용 교실을 하나 가지고 있는 꽤 복 받은 교사중 하나입니다. 한국 실정에서는 매우 드문 일이죠. 하지만 그 과정은 눈물겨웠습니다.

우리 학교에 비는 교실이 하나 있습니다. 거기가 이름이 인문사회교실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장에게 그 교실에 책장을 사다 놓고 여러 자료를 비치해서 토론수업방으로 쓰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시작해 보니 난관이 하나 둘이 아니었습니다. 토론에 필요한 기본지식이 턱없이 부족한 우리 아이들에게 충분히 읽힐 자료를 일개 교실에 비치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이었고, 도서관에서 수업을 하려고 해도 이미 각종 스케줄이 빡빡해서 안정적인 시간을 확보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해답은 인터넷인데, 아이들이 수업시간에 자유롭게 필요한 자료를 확보하려면 적어도 5~6대의 컴퓨터는 교실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교실이 컴퓨터교실 외에 있을 턱이 없고, 일반 교실에는 검색, 조사용이 아니라 시청각 교육용 컴퓨터가 한대 있을 뿐입니다. 예산을 신청해 봤지만 어렵다고 합니다.

그래서 교무실이나 특별실 등에 컴퓨터가 교체될때마다 버려지는 컴퓨터들을 모았습니다. 버려지는 컴퓨터라 그 상태는 정말 가관이었습니다. CMOS암호가 걸려있는 놈도 있었습니다. 거런 놈은 메인보드 점퍼 초기화 하고, 작동 안되는 컴퓨터는 램만 빼서 재활용하고 하는 등 10여대 컴퓨터의 부품들 중 쓸만한 놈을 재조립해서 여섯대를 만들어 4층에 있는 인문사회교실로 옮겼습니다.

마침내 우리 아이들은 토론 수업중에 언제든지 자료를 찾아보면서 활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또 문제가 발생합니다. 아이들의 컴퓨터 사용방식은 거칠기 한량없습니다. 잠깐만 앉았다가 가면 바탕화면 가득하게 파일이 덮이고, 온갖 액티브 X와 외부 프로그램이 주렁주렁 설치됩니다. 각종 트로잔, 악성코드도 무수히 검색되고, 아주 지저분해 집니다. 그러면 컴퓨터가 점점 느려지고, 그때마다 사방팔방에서 "선생님, 컴퓨터가 안되요!" 소리가 속출합니다. 그럼 그때마다 가서 해결해 주어야 합니다. 때로는 내가 사회선생인지 기술선생인지 헷갈립니다.

그래도, 이렇게 고달파도 아무것도 없는 교실에서 아는 것이 없는 아이들과 함께 멀뚱멀뚱한 수업을 하는 것 보다는 훨씬 좋습니다. 점심시간이나 방과후에는 사회 뿐 아니라 다른 과목 수행과제를 하려는 아이들이 들락날락합니다. 이제 다음 과제는 버려지는 프린터와 스태너를 주어 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내 교실이 정착해 가자 아무것도 보태준 적 없는 교장, 교감, 연구부장이 사진을 찍어갑니다. 교과교실 활용 실적에 들어가겠죠. 학교일이란게 늘 그렇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관심을 끌었으니 내년에는 토의용 책상이라도 구입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나마 없는 선생님들도 얼마나 많습니까?

그냥, 지나간 노가다들이 생각나서 몇줄 끄적여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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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정변증법 | 2009/10/22 10:35 | 교단 일기 | 트랙백 | 덧글(10)

젊은 교사들에게 드리는 편지 (5) '아이들'의 우상

‘아이들’의 우상


내가 여기서 ‘아이들’이라고 특별한 인용 부호를 단 것은 이것을 일반명사로 사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아이들은 “저 공터에서 뛰어 노는 아이들”의 의미가 아니라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우리 아이들을 살립시다.” 등의 용례에서, “아이들의 사랑과 믿음이 나의 교직생활 30년의 후원자였다.”라는 어느 선생님의 퇴임사에서 사용되는 아이들입니다.

이 말은 얼른 들으면 무척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박봉과 고달픈 업무에도 ‘아이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아이들’의 헤맑은 눈과 웃음만을 유일한 보상으로 삼아 알뜰 살뜰하게 보살피는 선생님의 상이 저절로 그려집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서는 많이 줄어들었지만 10년 전만 해도 이런 이유 때문에 교사가 되고자 했던 젊은이들이 제법 많았습니다. 하지만, 제 아무리 아름다워 보일지라도 불행히도 이것은 우상이며 잘못된 믿음입니다.

파울루 프레이리는 일찌기 이러한 관점을 ‘보육자적 관점’ 혹은 ‘보모적 교사관’이라고 부르면서 경계했습니다. 프레이리 같은 위대한 교육 사상가이자 교육 실천가가 왜 ‘아이들을 사랑으로 돌보자’는 이 아름다운 생각을 오히려 경계했을까요? 혹은 이와 비슷한 사례로 유명한 혁명가 체 게바라가 혁명가가 되려는 청년들에게 제일 먼저 한 말은 “민중을 믿지 마라.”였다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이 역시 “민중에 대한 사랑”, “민중에 대한 믿음과 헌신”을 위해 몸을 던진 청년들을 몹시 아연실색하게 했습니다. 여기서 던져주는 공통의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지식인의 책무, 지식인의 위상과 관련됩니다. 교사는 ‘지식인’입니다. ‘사랑으로’ 아이들을 보살피는 일은 사실 교사가 아니라 ‘착한 어른’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며, 교사가 꼭 더 잘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게다가 이 일은 부모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왜 굳이 부모의 품에서 아이들을 떼어내어 학교라는 공간까지 끌고 와서 교사 앞에 앉혔을까요? 그것은 교사에게서 부모에게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어떤 특수한 책무와 능력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사가 고작 한다는 것이 사랑으로 아이들을 보살피고 예뻐해주는 일이라면 낭비도 이만저만한 낭비가 아닌 것입니다.

체 게바라가 ‘혁명가’들이 이런 편향에 빠지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민중과 사이좋게 지내는 민중의 벗이야 민중들 끼리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민중들이 보지 못하는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어 그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역할, 현실에 안주하는 민중들에게 때로는 불쾌하게 만드는 일을 감수하면서까지 진실을 보여줄 수 있는 역할, 그런 역할을 혁명가에게서 기대했던 것입니다.


교사는 근대 공교육 제도와 함께 형성된 직업적 교육자입니다. 즉 전문 교육자입니다. 이러한 전문 교육자를 양성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은 시대가 갈 수록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또한 교사는 의사와 함께 공식적으로 학력을 제한하고 있는 유일한 직업입니다. 이러한 점들을 감안한다면 교사의 가장 중요한 자질은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아이들을 전문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전문적인 능력’입니다.

이 능력을 갖추기 위해 -비록 본래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대학의 교직과정이 존재하고, 교원 양성기관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격이 훌륭하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분에게도, 또 일반 대학에서 공부를 열심히 하여 학식이 높은 분에게도 문호를 개방하지 않고, 오직 교원양성기관 졸업자에게만, 그것도 치열한 경쟁시험을 거친 사람들에게만 교직의 문호를 개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이들을 전문적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아이들이 원하는 것과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 사이의 균형을 찾을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많은 교사들이 바로 이 지점에서 침몰하고 마는데, 이는 이 중 어느 한 측면만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명심해야 합니다. 아이들은 마냥 자기가 원하는대로 자랄 수 없습니다. 아이들은 장차 ‘삶’이라는 이름으로 분투해야 할 ‘세계’, 즉 사회에서 쓸모있는 인간으로 자라야 합니다. 물론 이 세계니 사회니 하는 것의 범위를 무엇으로 보는가에 따라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는 크게 달라지겠지만, 어쨌든 이 ‘필요한 것’이 ‘원하는 것’과 다르거나 충돌할 가능성이 매우 높으리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교사들은 매우 자주 ‘필요한 것’을 아이들에게 강요합니다. 온갖 지루하고 힘든 일들을 강제로 요구하며 이 모든 것들이 다 ‘너 잘 되라고’ 시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건 그때가 되면 다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아무리 미래의 삶을 이야기 하고 그것을 위해 싫더라도 ‘필요한 것’을 하라고 강요해도 아이들이 그것을 자기 것이라고 느끼지 않는 한, 아이들은 시늉만 할 뿐, 절대 그것을 제대로 하지 않습니다. 설사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필요하다고 느껴서 한 것이 아니라 강압에 굴복해서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교사가 아무리 아이들을 위해서라고 말해봐야 아이들에게는 단지 강압일 뿐이며, 이렇게 되면 교사는 아이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만 압제자에 불과하게 됩니다. 결국 아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필요한 것을 강제한 교사는 아이들과 적대관계가 되며, 이들 사이에서는 갈등이 귾임없이 일어납니다. 이 때 많은 젊은 교사들은 그만 진심을 몰라주는 아이들에게 실망하면서 환멸을 느끼거나 냉담자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아이들에 대한 실망감을 토로하면서 자신을 갉아 먹습니다.

이 것은 참으로 안타깝고 어처구니 없는 결과입니다. 이 과정은 무엇입니까? 일방적으로 사랑하고, 그 사랑의 내용을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사랑의 이름으로 엄격한 강압을 일방적으로 부과하고, 갈등이 일어나자 일방적으로 사랑을 철회한 것입니다. 이것을 만약 남녀관계에 비유해 봅시다. 이것은 사랑이겠습니까 아니면 스토킹이겠습니까?


비유가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요리사의 예를 들어 봅시다. 사실 맛있고 훌륭한 요리의 기준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특급 셰프가 있는 것이겠죠. 하지만 어떤 요리를 제공할 것인가 하는 것은 셰프가 일방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예컨대 크림소스 스파게티는 이탈리아 요리의 수치라고 생각하는 셰프라 할지라도 손님이 그것을 주문했다면 일단 그 범위 안에서 솜씨를 뽐내어야 합니다. 셰프가 손님의 메뉴를 교정해 줄 권리는 없습니다. 심지어 “맛도 모르는 사람에게는 요리해 주지 않겠다”며 봉사를 철회할 권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반대의 편향, 즉 학생의 요구를 절대화 하는 것 역시 위험합니다. 이것은 진보적 성향의 교사들, 혹은 ‘에밀’을 잘못 읽은 교사들이 자주 저지르는 오류입니다. 사실 선량한 교사들이 처음 교실에 들어서면 아이들의 헤맑은 모습에 감동을 받습니다. 실제 아이들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그들은 천사이며 각박한 세상에 피어난 꽃들이며, 아직 소멸되지 않은 꿈들이며, 정말 그 어떤 찬사와 미사여구를 다 사용해도 모자랄 것 같은 그런 존재입니다. 그래서 원래 교직에 뜻이 없고, 다만 사범대학을 다니기 때문에 교생실습을 나왔다가 뜻이 바뀌어 교사가 되기로 마음을 고쳐먹는 경우가 적지 않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절대로 명심해야 하는 것은 아이들은 인간이라는 점입니다. 더군다나 미드의 이론을 빌리면 ‘일반화된 타자’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의 형성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미성숙한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교사의 깊은 뜻과 호의를 분명히 알고 있으며 좋아하고 고맙게 여기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사가 원하는 바를 스스로 알아내어 보답하지는 않습니다. 아이들은 학생들의 요구를 잘 들어주는 교사에게 계속해서 요구할 것입니다. 물론 그에게 고마움과 친근함을 표시하기는 하겠지만, 그게 전부입니다. 아이들은 수업시간을 무질서하게 만들 것이며 공부하지 말고 놀자고 떼를 쓸 겁니다. 마침내 교사가 참다 못해 “난 너희들이 하자는 대로 다 들어주었어. 그런데 왜 너희는 내 마음을 몰라주니?” 하며 화를 버럭 내고 눈물을 흘리는 지경까지 이르기까지 할 것입니다. 이런 경험이 몇 번 반복되면 젊은 교사가 냉담자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또 다시 셰프에 비유하자면 이 경우는 셰프가 ‘고객은 왕이다’라는 말을 너무 신봉한 나머지 메뉴 결정 뿐 아니라 레시피까지 손님에게 일임해 버린, 그리고 테이블 매너까지 손님에게 맡겨버린 경우입니다. 이렇게 되면 레스토랑의 존재가치는 사라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학교의, 교사의 존재가치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자,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은 이렇게 어렵습니다. 사실 여러분이 처음 학교에 가서 만나게 될 선배교사들의 모습은 상당히 냉담해져 있거나 무기력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분들 역시 젊은 시절에는 아이들을 사랑하고자 하는 의욕에 가득차 있었습니다. 심지어 그 분들 중에는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도 커서 아이들을 괴롭히는 학교 현실에 맞서 싸우다가 해직과 복직을 반복하신 분들도 있습니다. 그 사랑, 그 정열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요? 심지어 그런 분들일수록 도리어 배신감, 상처, 환멸만 남아 있는 것 처럼 보이기까지 하니 말입니다. ‘아이들’이 그토록 사악하단 말입니까? 아닙니다. 그 분들의 상처는 ‘아이들’을 ‘아이들로서’ 사랑하는 법을 몰랐기 때문에 입은 것들입니다.

아 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은 부모와 교사의 공통분모라 할 수 있지만, 교사의 사랑은 지식에 기반한 사랑이라는 점에서 부모와 구별되는 것입니다. 교사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라 지식과 규범에 근거한 것입니다. 이 지식에는 크게 세 가지가 포함됩니다. 1) 아이들에 대한 지식 2) 아이들의 필요에 대한 지식 3) 아이들을 필요한 것으로 이끄는 방법에 대한 지식.

이 중 첫 번째 지식을 통해 우리는 아이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주는 것을 아이들은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는지 알 수 있게 됩니다. 두 번째 지식은 발달심리학과 사회학, 그리고 윤리학을 통해 아이들이 지금 단계에서 배워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 줍니다. 이렇게 아이들이 원하는 것과 필요한 것을 명확히 알게 되면, 둘 사이의 현실적인 차이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알게 되며, 따라서 이 차이를 좁히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 즉 세번째 지식이 그 쓰임새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 런데 많은 교원양성기관이나 연수기관에서는 첫번째와 두번째 지식은 도외시한채 세번째 종류의 지식만 강조하는 경향이 있고, 또 교사들 역시 당장 써먹을 수 있는 것을 찾으려는 조급함 때문에 첫번째, 두번째 지식에 대한 끈질긴 탐구를 생략한 채 각종 방법론만 터득하려는 경향을 보이곤 합니다. 이는 마치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떤 길을 달려야 할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자동차 운전 기술만 부지런히 익히는 것과 같습니다. 부지런한 교사들일수록, 아이들을 사랑하는 교사들일수록 더욱 맹렬히 방법을 익히기 마련이니 그럴수록 상처가 더 커지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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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정변증법 | 2009/09/22 08:20 | 젊은 교사에게 드리는 편지 | 트랙백(3) | 덧글(9)

전교조 집행부는 사퇴하라

이런 글을 쓴 동기는 이렇습니다.

저와 친하게 지내는 이웃 학교(음 이웃 지구?) 분회장이 고민을 털어 놓았습니다. 그 학교가 교원평가 시범학교 신청을 했다는것입니다. 그런데 먼저 신청을 해 놓고 나중에 요식적으로 설문조사를 하더라는 겁니다. 찬성칸에는 그냥 동그라미만 치고, 반대칸에는 사유까지 적으라는 아주 노골적인 설문지를 말입니다. 그래서 교무부장한테 따지고 교무기획한테 따지고 했지만 아무도편들어주지 않고 그래서 그냥 주저 앉았다고 합니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범학교 신청을 하는데 물어보지도않는다? 이건 전교조가 아예 존재감이 없다는 뜻입니다. 1000명이 모여도 존재감을 만들 수 있고 10만명이 모여도 존재감이사라질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정치력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현 집행부는 전교조의 존재감을 완전히 소멸시키고있습니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요? 도대체 속을 내어 놓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원평가부터 그렇습니다. 대중이 원영만,장혜옥으로 이어지던  교찾사 집행부를 버리고 참실련 집행부를 선택한 것은  전화질 등등을 차치하고, 교원평가와 관련하여 얽힌, 그리고 이런 저런 반대투쟁의 연속에 얽힌  그 착잡함 때문이었습니다. 저런 식의 교원평가는 싫지만, 그래도 무능하고 부도덕한 교사들(사실 대개 교총 교사들 아니었습니까?)을 몰아내고 아이들을 해방시킬수 있다면 그런 제도는 전교조가 먼저 치고 나갔으면 좋겠다. 반대를 위한 반대 집단으로 몰리는 건 싫다. 등등... 그래서 영리하게도 당시 참실련 선본은 "국민에게박수 받는 전교조"라는 슬로건을 내걸었습니다.

그 다음은? 국민에게 박수를 받으려면 계급성과 당파성에 투철한 분들에게 욕을 들어먹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계급성과 당파성에 투철하려면 국민에게 박수받는 것은 포기해야 합니다. 그런데 참실련 집행부는 선거때는 국민을 내세우고 집권하자 당파성을 내세웠습니다. 선거때는 교원평가 모델을 먼저 내어 놓아 대안세력으로 나설 것 같은 뉘앙스(그런다고 말은 안하고 정말 뉘앙스만)만 내세우더니 막상 집권하자마자 교원평가는 원칙적으로 반대한다고합니다. 

위원장 선거에 표를 던지는 대중조합원과 이제 위원장이 된 다음 상대해야 하는 대의원들의 정서가 다르다는 것을 의식한 교묘한 정치술인가요? 대중을 향해서는 개량과 온건의 얼굴을, 그리고 대의원을 향해서는 "투쟁"을 외치는.

원칙적으로 반대라...이게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원칙적으로 교원평가에 찬성하지만 정부안과 같은 방식은 반대한다.", 이게 대중에게 참실련이 던진 메시지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정부안과 같은 쿵큼한 속이 없는, 정말 거지같은 선생들 정신좀 차리게 할 그런 제대로 된 평가제도 만들어서 이 참에 근평도갈아버리고 승진제도 개선까지 밀고 나가자, 이런 메시지 던지지 않았습니까?

원칙적으로 반대라는 말은 사실상 아무것도 안하겠다는 말입니다. 반대면 반대입니다. 찬성은 찬성입니다. 일단 반대 하면 감내하던가 투쟁하던가 밖에 없습니다. 일단 찬성하면 받아들이던가 대안을 제시하던가 밖에 없습니다. 반대 하면서 감내하는 것이나 찬성 하면서 받아들이는 것이나 뭐가 다릅니까? 교원평가 수용론과 교원평가 감내론은 뭐가 다릅니까?

차라리 개량주의라는 욕을 먹으십시오. 대안투쟁 하겠다고 하셨으면 정말 대안을 내어 놓고, 이런 식의 평가라면 수용하겠다고 하면서 딜을 하십시오. 노동조합 지도부에 개량/강경 양 날개가 있는 것은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인 것입니다. 노동운동사 어디를 보아도 강/온 집행부가 번갈아가면서 발전시켜왔지 강경몰이만 가지고 여기까지 온 사례가 없습니다. 그럼 차라리 그 중 개량, 온건이라는 역할을 당당하게 받아들이십시오.

만약 받아들이지 못하겠으면, 이렇게 이도 저도 아닌 상태에서 존재감만 날리지 말고, 차라리 강경파에게 그냥 권력을 이양 하시던가, 개량, 협상 파에게(있다면) 권력을 이양하십시오. 제발 이렇게 퍼져 있지 마십시오.

그럼 분명 본부에서 얼마나 열심히 투쟁하고 있는데 무슨 소리냐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현장에는 그 작은 숨결조차 느껴지지 않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랍니까? 투쟁 했는데도 임팩트가 없다면 무능한 것입니다. 아니면 투쟁하는 시늉만 했다는 뜻이니 이는 부도덕한 것입니다. 투쟁하고 싶지 않은데 마지못해 투쟁했다면 이는 진정성이 없다는 뜻입니다.

참실련 집행부 여러분...
간곡히 부탁드리건데, 진심을 떳떳하게 밝혀 주십시오. 이렇게 납작하게 엎드려 있지 말고, 여러분이 생각하고 있는 현 시점의 전술이 정면 돌파인지, 아니면 대안투쟁인지, 아니면 소나기는 피해가자인지....지난 2년에도 모자라서 이 2년 또 이렇게 수용도 아닌것이 반대도 아닌것이 이러면서 소일하지 마십시오. 부탁드립니다.


경고: 만약 이 글을 인용해서 "전교조 전직 간부, 집행부 총 사퇴하고 교원평가 수용을 촉구" 이 따위로 기사 올리는 언론 매체가 발견되거나 각종 홈페이지 등이 발견될 경우에는 명예훼손과 저작권 침해를 엄중하게 물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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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정변증법 | 2009/09/16 09:03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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