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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교육도 경쟁력을 말하자

일전에 참된 경쟁은 반드시 승패를 갈라야 하는 살벌한 쟁투가 아니라 같은 목표를 어깨를 나란히 하여 달성함이며 오히려 협동과 배치되지 않는 개념임을 살펴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신자유주의와 함께 강요되고 있는 한 줄 세우기 학력 경쟁은 사실상 경쟁의 본뜻을 벗어나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경쟁의 원래 의미가 무엇인가 따지는 것은 한가로운 지적 유희에 불과하다. 어차피 세계 여러 나라들이 무한경쟁에 들어선 지금 왜곡된 경쟁이라도 그것에 적합한 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주장이 나올 수도 있다. 이명박 정부가 강요하는 교육에서의 경쟁도 이런 식의 논리에 근거하고 있다. 결국 그들은 참되고 바른 경쟁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요악으로서 경쟁을 이야기 하고 있음을 자인하고 있지만, 고통스럽고 힘들더라도 무한 경쟁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며 냉혹하게 말한다. “어릴때 부터 경쟁에 익숙해져야 한다.”라고 말하는 공정택의 저 뻔뻔한 얼굴을 보라.

그러나 이런 주장은 얼핏 들으면 그럴듯하지만 사실은 변화된 세계의 경제 지평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는 낡은 논리로 매우 “경쟁력을 저해하는” 논리다. 즉 “경제 이데올로기”을 주창하는 집단이 정작 경제에 무지한 것이며, 글로벌 경쟁을 말하는 집단이 글로벌 기준을 전혀 따르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21세기의 경쟁력은 창조력과 소통능력이다.

물론 글로벌 경쟁이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토록 살벌한 것이라면 거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세계 경제가 요구하는 경쟁력을 갖춰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경쟁력은 세계 경제가 현재 도달한 수준에서 결정될 것이다. 요컨대 지금이 13세기라면 이 경쟁력은 농업과 관련된 것이며, 19세기라면 산업과 관련된 것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21세기 세계 경제에서는 어떤 능력이 경쟁력이 될까?

우선 논의를 단순하게 하기 위해 이명박 정부가 요구하는 데로 타자보다 더 많은 이윤을 올리기 위한 경쟁이라는 천민자본주의적 개념을 일단 받아들여보자. 아도르노가 말했듯이 가장 예리한 비판은 상대방 논리 외부에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논리 한 가운데서 그들의 논리에 의해 스스로 무너지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경쟁력도 타자보다 더 잘 팔리는 상품을 제공할 수 있는 능력으로 쉽게 정의 될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이윤의 합계 액수지 판매한 상품의 수량이 아니다. 소위 고부가가치 상품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인 것이다. 그런데 어떤 상품이 고부가가치 상품인가는 그 상품이 유통되는 사회적 배경에 따라 결정되며, 따라서 그것을 만들 수 있는 능력, 즉 소위 경쟁력 역시 사회적 맥락에서 결정된다. 예컨대 자동차는 20세기를 대표하는 고부가가치 상품이었지만, 오늘날에는 GM이 미국 10대 기업에도 끼지 못할 정도로 그 위상이 추락했다. 반대로 유능한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조선시대로 간다면 그는 전혀 경쟁력이 없는 인간이 될 것이다.

21세기의 고부가가치 상품은 무엇일까? 좌파와 우파를 대표하는 미래학자인 제러미 리프킨과 앨빈 토플러가 모두 동의하고 있는 것이 바로 앞으로의 사회는 지식·정보산업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네트워크 사회라는 것이다. 지식·정보산업은 20세기까지 주류를 이루었던 물질산업이 아니라 비물질, 관계 산업이며, 그 생산물은 ‘소유’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접속’의 대상이 된다. 애초에 지식이나 관계는 거래 후에도 주인에게 온전하게 남아 있다는 점에서 소유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특정한 지식이나 관계를 누리기 위해서는 그 보유자와 접촉해야 한다. 그래서 판매량은 의미 없는 개념이 된다. 주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판매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이 접속시키느냐 하는 것이다.

경제의 패러다임이 이렇게 바뀌어나가면 당연히 경쟁력의 의미도 바뀐다. 20세기까지의 경쟁력은 매우 단순화 시켜 말하자면 주어진 시간에 남보다 더 많이 생산할 수 있는 노동능력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많은 사람을 접속시키는 능력이 바로 경쟁력이다.

많은 사람을 접속시키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그들이 보유하고 있는 지식과 정보가 매우 독창적이고 유용해서 여기에 접속하지 않으면 손해라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많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그 관계를 양적으로 확장하고 질적으로 심화하는 것이다. 흔히 “상품이 아니라 감동을 판다.”에 해당되는 능력인데, 이게 단지 가식적인 웃음과 친절만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이 두 방법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전자는 창조성, 후자는 소통성이라고 할 수 있다. 즉, 21세기의 경쟁력은 창조력과 소통능력이다. 이미 지구적 분업이 활발한 상태에서 기존의 생산라인이 제3세계로 넘어간 마당에 창조력과 소통능력이 아니라 엉뚱하게 “소유”와 “재화생산”에 기반한 경쟁력을 외치는 것은 어리석다.

창조력과 소통능력은 기계로 대체할 수 없는 인간의 고유한 능력이다. 20세기까지는 자동화된 공장과 번쩍이는 기계들이 생산력과 번영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런 것들은 이제 한 수 아래의 산업이 되었고, 부가가치도 매우 낮다. 미국이나 유럽의 글로벌 기업 본사에는 공장이 없다. 그곳에서는 오직 연구와 관계망 관리만 한다. 그들은 특정한 상품을 생산하지 않고, 어떤 삶의 방식, 삶 그 자체를 생산한다. 삶의 방식을 창출한다는 것은 고도로 예술적이고 문화적인 작업이다. 필립스의 카피 문구인 “명품을 만드는 작은 차이”는 기술이 아니라 바로 이 점을 지적한 것이다.

 

21세기의 인재 양성: 창조와 소통에 기반한 교육이 필요하다

이런 작업을 위해서는 삶에 대한 성찰과 여러 예술적인 능력들이 필요하다. 한 마디로 21세기 고부가가치 산업의 기반은 인문적 교양이다. 그리고 이것은 오직 사람만이 가진 자질이다. 물론 공상과학 영화에서는 교양을 가진 로봇이 등장하지만, 아직 현실에서는 삶 자체를 창출할 수 있는 능력은 오직 인간의 것이다. 따라서 21세기 경제의 가장 강력한 생산수단은 바로 사람이다. 21세기에는 얼마나 많은 자본, 혹은 물질을 가지고 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인재를 보유하고 있는가에 의해 경제력이 좌우되는 것이다.

물론 이 인재는 20세기의 인재와 전혀 의무가 다르다. 얼마나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가, 혹은 주어진 규율을 잘 준수하는가, 혹은 주어진 시간에 얼마나 많은 작업을 할 수 있는가 등은 인재의 기준으로 그리 중요하지 않다. 반복되는 규율적인 작업은 기계가 할 일이며, 지식 그 자체는 인터넷에 공유되어 있다. 세계적인 초국적 기업일수록 도리어 노무관리가 느슨하고, 일터와 쉼터의 구분이 모호해짐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인재는 새로운 것을 생각해 낼 수 있는 사람이며, 그것도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창조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한다. 또한 이렇게 창출된 삶을 혼자 누리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과 공유(접속)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한다.

사실 필자는 그리 동의하지 않지만, 어쨌든 학교 교육이 경쟁력 있는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면, 그 인재는 변화된 시대에 걸맞는 창조력과 소통능력을 갖춘 인재라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창조력과 소통능력을 기르는 교육 방법은 오직 하나 밖에 없다. 그것은 창조의 경험과 소통의 경험을 많이 하는 것이다. 즉 학교가 창조와 소통의 장이 되어야 한다. 창조력과 소통능력은 매우 민감하고 예민한 능력이라 조금이라도 억압이나 제한이 느껴지면 순식간에 사그라든다. 1년간 매우 활발했던 학급이라도 교사가 1주일만 억압하면 화석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경쟁교육은 경쟁력을 잠식한다.

21세기의 새로운 경쟁력 측면에서 볼때, 현재 한국의 공교육은 매우 심각하다. 게다가 이 심각한 상황을 도리어 강화하자는 주장이 경쟁력의 이름을 걸고 태연히 나오기까지 하고 있다.

지식을 화석처럼 암기하는 수업, 기계적으로 반응하는 시험, 그리고 그 시험 점수를 더 받기 위해 벌이는 치열한 경쟁은 한 눈에 봐도 21세기가 요구하는 인재 양성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실은 단지 도움이 안 되는 정도가 아니라 크게 해악을 끼친다.

우선 암기식의 수업은 교과서에 주어진 지식을 절대화 한다. 또한 이러한 지식을 습득하는 방법은 매우 단순하고 기계적인 두뇌작용이다. 따라서 주어진 한계 너머를 사유하고 상상할 수 있는 활발하고 유연한 두뇌를 필수조건으로 하는 창조적인 능력을 크게 훼손한다. 또 암기식 수업은 학습을 개인적인 경험으로 만든다. 수업은 교사의 독백으로 진행되고, 학생들 역시 개별적으로 교사의 말을 습득한다. 학습과정에서 협동이나 소통의 경험은 거의 기대하기 어렵다. 따라서 이는 창조적인 능력 뿐 아니라 소통능력도 훼손한다.

더욱 심각한 악영향을 주는 것은 시험이다. 시험은 교육의 결과를 수치화하여 측정하는 절차다. 그런데 창조력은 기존의 것을 넘어섬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측정 가능해진 순간 이미 그것은 더 이상 창조적이지 않게 된다. 학생이 창조적이 될수록 시험은 망칠 가능성이 커진다. 동시에 시험 점수가 높아질수록 그 학생은 자신의 창조성을 상실할 것이다. 또한 시험은 소통을 차단한다. 시험에서 소통행위는 곧 ‘부정행위’로 간주된다. 시험은 모든 소통을 단절한 완전한 침묵과 고립 속에서 치뤄진다. 따라서 소통능력이 우수한 학생일수록 시험을 견디기 어려워하거나 부정행위를 할 것이다. 반대로 시험을 잘 치는 학생일수록 매사를 혼자 처리하려 할 것이며, 소통능력에 심각한 결함을 보일 것이다.

최악의 상황은 이 시험 점수를 근거로 등수를 매겨 경쟁시키는 것이다. 이 경우 학생들은 교과서적인 지식과 시험의 틀을 넘기는커녕, 그런 생각조차 포기하게 될 것이다. 또한 등수를 다투어야 하기 때문에 “만인에 대한 만인의 질투”가 교실을 지배하게 되며, 결국 소통의 경험은 시험 뿐 아니라 모든 학습과정에서 단절되고 말 것이다. 누가 잠재적인 경쟁자와 유의미한 정보를 소통하겠는가? 또한 경쟁은 창조적 사고를 위해 필수적인 모험심을 거세한다. 사소한 실수도 바로 석차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에서 누가 기존의 틀을 벗어난 모험을 감행하겠는가? 결국 시험 점수를 근거로 서로 경쟁하는 교육은, “가만있으면 중간이나 가는”인성을 대량으로 생산하며, 주어진 틀에서 누가 덜 벗어나는가를 겨루는 퇴행적인 경쟁을 조장한다. 즉 누가 더 경쟁력을 죽이는가를 놓고 경쟁하는 것이다. 아니면 누가 20세기 식의 경쟁력을 더 많이 갖추고 있나 경쟁하는 것이다.

 

참교육이야 말로 경쟁력 있는 교육

지금까지 21세기의 경쟁력은 결코 고립된 학습경쟁을 통한 시험 점수 올리기로 얻을 수 없는 창조력과 소통능력임을 확인하였다. 이러한 능력은 주어진 틀을 벗어나는 다양한 경험과 고차적인 문제들을 동료들과의 협동을 통해 해결하는 그런 학습과정을 통해 달성할 수 있다. 공교롭게도 경쟁보다 협동을, 획일화보다 다양화를 추구하는 교육은 전교조가 창립이래 계속 요구해왔던 그런 교육이다. 우리는 그런 교육을 참교육이라 불렀다. 물론 우리가 아직 참교육의 구체적인 상과 다양한 모델들을 개발해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협동과 소통에 기반한 비경쟁적 교육이라는 기본 정신은 항상 유지해 왔다. 그러니 우리는 교육경쟁력에 반대한 것이 아니라 진정한 미래형 교육경쟁력을 주장해왔던 것이다. 우리가 표준화된 학업성취도 평가를 반대하고, 입시교육을 강화할 소지가 있는 일체의 교육정책에 반대하는 것은 글로벌 경쟁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세계와의 경쟁을 회피하는 쪽은 이명박, 공정택의 교육정책이다. 학업성취도 점수를 높이기 위해,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무한 경쟁을 펼치며 밤잠을 설치는 학생들의 모습은 매우 치열하고 대견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경쟁력을 갉아먹고, 세계와의 경쟁 대신 옆자리 친구, 옆의 학교와의 경쟁을 선택한 옹졸한 모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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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정변증법 | 2008/08/20 14:41 | 교육에 대해 생각하기 | 트랙백 | 덧글(0)

경쟁에 대해 말한다(1)

이제는 경쟁력을 말하자(1) -잘못 사용되고 있는 말 “경쟁”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이 모락모락 아지랑이를 피우고 있다. 그 아지랑이만으로 공교육은 위태롭게 흔들린다. 사교육이 들썩이고 교사들은 각종 괴담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은 “그렇다면 경쟁력 없는 교육을 하자는 말인가?”라고 하면서 앞으로도 계속 우겨붙일 기세다. 여기에 대해 전교조나 교육시민운동단체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경쟁이 아니라 협동”이라고 맞불을 놓고 있다. 하지만 그 맞불은 그다지 성공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안타깝지만 경쟁이 아니라 협동이라는 프레임은 마치 경쟁력 없는 교사들, 무사안일을 희망하는 교사들이 협동이라는 두루뭉술한 단어를 통해 서로서로 감싸고 넘어가려는 핑계로 받아들여지기가 쉽게 때문이다. 온통 경쟁력이라는 말로 도배가 된 세상에서 경쟁력을 도외시하고 있다는 딱지를 붙이고서는 어떤 교육 프레임 전쟁에서도 우위를 차지하기 어렵다.

해답은 신자유주의 세력이 교육에 침투한 방법 속에 있다. 그들은 교육목표, 학력, 평가 등 교육의 용어를 멋대로 자기들 식으로 재규정한 뒤 그 프레임 속에 교육자들을 끌어들였다. 그들의 프레임 속에서 맴도는 한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을 만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가 되돌려주어야 한다. 그들의 절대화두인 “경쟁력”을 우리식으로 재규정해야 한다. 즉 “경쟁보다는 협동의 교육을!” “경쟁보다 인성을”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경쟁보다 협동이 더 높은 경쟁력을 보장한다.”, “인성이 경쟁력이다.”, “너희들이 말하는 경쟁은 경쟁이 아니라 갈등이다.” 이렇게 말해야 하는 것이다.

 

어원으로 살펴본 경쟁

경쟁력을 우리식으로 재규정하기 위해서는 현재 경쟁력이라는 말의 의미, 사용되고 있는 맥락을 분석하고, 다시 그 단어의 역사를 고찰해 보아야 한다. ‘경쟁’은 사전적으로는 그저 “같은 목적에 대하여 이기거나 앞서려고 서로 겨룸”이라는 소극적인 의미만 가지고 있다. 여기에는 겨룸의 결과 다음은 나와있지 않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자들이 사용하는 ‘경쟁’은 그런 정도의 의미로만 사용되지 않는다. 여기에는 승자와 패자의 잔혹하게 갈라지는 운명의 암시가 포함되어있다. 그들의 용법으로 경쟁을 사용하게 되면 승자와 패자가 갈라지며 승자에게는 보상이 패자에게는 파멸이 기다리는 그런 상황이 연상된다. 이런 의미로 경쟁이 사용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경쟁” “경쟁력”이란 말 앞에서는 저절로 오그라들고 위축된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경쟁력”을 “생존의 문제”로 삼아버리는 것이다. 이는 “생존경쟁”, “무한경쟁”따위의 말과 더불어 더욱 강화되어 사람들의 무의식에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 경쟁이라는 단어의 어원을 살펴보면 원래부터 그런 삭막한 의미를 가진 단어가 아니며, 이 단어가 수용되던 당시의 제국주의적 용법이 적용된 것 뿐임을 알 수 있다. 사실 경쟁이라는 단어는 원래 우리말에 없던 말이다. 우리 말에서 원래 경(競)과 쟁(爭)은 서로 다른 단어였다. 이 말들은 각기 달리 사용되었으며 두 말이 결합된 용법은 거의 찾기 어렵다. 경은 제한된 자원(특히 어떤 지위나 관직) 놓고 서로 이를 차지하고자 하는 상황에 사용되었고, 쟁은 서로 시기하여 다투는 상황에 주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19세기 이후 영어의 compete를 번역할 때 ‘경쟁’이라는 용어를 조합함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용법이 정착되었다.

그런데 영어의 compete 역시 오늘날 사용하는 것 같은 승자와 패자를 가리는 의미를 가진 단어가 아니다. 이 단어는 라틴어의 con(함께)과 petere(가다)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그대로 번역하면 “함께 가다”라는 의미가 된다. 즉 서로 다른 주체가 같은 방향을 향해 함께 간다는 것이다. 이때 서로의 속도를 견주는 경우는 있으나 상대방을 탈락시킴으로써 자신만 목적지에 도달한다는 의미는 전혀 들어있지 않다. 오히려 서로의 속도를 견주어 봄으로써 궁극적으로 쌍방 모두가 더 빨리 도착하게 되는 그런 상황을 의미한다. 즉 경쟁은 자신의 경쟁자와 목표·성공을 공유하는 것이지 독점하는 것이다. 이는 흔히 경쟁자로 번역되는 rival의 어원을 살펴봐도 명백하다. 이 단어는 river(강)에서 파생된 단어다. 즉 강을 사이에 두고 있다는 의미로서 평소에는 우기에는 강물을 서로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나, 갈수기 때는 강물의 합리적 활용을 위해 서로 협력하는 그런 관계를 의미한다.

 

경쟁의 진정한 의미

어원을 살펴보면 경쟁과 협동을 대비시켜 말하는 것이 오류임이 명백해진다. 경쟁과 협동은 서로 대립되는 대신 인간의 공동 행위를 구성하는 요소들로서 상보적인 관계다. 인간은 공통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한편으로는 협동하고 한편으로는 경쟁한다. 협동의 반대편에 있는 관계는 경쟁이 아니라 갈등이다. 갈등은 경쟁이 왜곡되면 쉽사리 발생하며, 타락한 경쟁이라 할만하다.

예를 들면 로마의 정치가들은 로마의 번영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놓고 서로 경쟁했다. 그런데 이것이 상대방을 거꾸러뜨리거나 파멸시킴으로써 성공의 독점을 향한 투쟁이 될 경우 compete가 아니라 conflict, 즉 갈등이 된다. 로마의 예를 들면 마리우스와 술라, 혹은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는 갈등했지 경쟁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예를 들면 이황과 기대승은 경쟁했지만 노론과 소론은 경쟁이 아니라 갈등을 했다.

결국 동·서양 모두를 따져 보아도 경쟁이라는 말에는 단지 서로 견주어 본다는 정도의 의미가 들어있지 상대방을 물리친다는 의미는 들어있지 않다. 홀로 달리는 것보다 함께 달리는 것이 기록 향상에 도움이 되는 것처럼, 경쟁은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는데 활력이 되는 것이다. 만화영화 “내일의 조(허리케인 조)”에서는 경쟁이 갈등이 되는 상황이 아니라 갈등이 경쟁이 되는 상황이 잘 묘사되고 있다. 처음에는 단지 싸워 이겨야 하는 싸움 상대가 그 싸움을 복싱이라고 하는 스포츠의 틀에서 룰을 지키며 행하게 되자 서로의 기량을 향상시키는 우정의 대상으로 바뀌게 된다. 이 경쟁자들은 경기에서는 최선을 다해 상대를 공격하지만 경기장 밖에서는 서로의 경기력 향상을 위해 조언을 하고 함께 궁리도 한다. 이게 참된 경쟁이고 경쟁자다.

지금까지 경쟁이 상대에게 승리하기 위해 다투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견주어 봄으로써 공동의 목적을 더 잘 달성하는 과정임을 살펴보았다. 경쟁의 의미를 이런 식으로 받아들이면 경쟁력의 의미도 서로 싸워 이길 수 있는 승부개념이 아니라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는데 자극이 될 정도의 능력이라는 의미로 바꿔 말해야 한다. 즉 상대와 견주었을 때 동기부여가 될 수 있는 정도의 능력이 경쟁력이다. 이는 상대를 물리쳐서 이길 수 있는 힘을 뜻하지 않는다. 따라서 요즘 유행하는 국제경쟁력이라는 말도 달리 해석해야 한다. 이는 다른 나라와 실력을 견주어볼만한 수준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지 다른 나라들을 모두 물리치고 1등 아니면 까무라치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즉, 흔히 말하는 선의의 경쟁인데, 사실상 선의의 경쟁이라는 말은 동어반복이다. 경쟁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 선의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앞에 선의라는 말을 덧붙이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오히려 정상적인 경쟁과 대비되는 “악의적 경쟁”이라는 말을 따로 만들어 쓰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그리고 요즘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에 경도된 교육당국에서 입만 열면 떠들어내든 경쟁이 바로 이 악의적 경쟁임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경쟁의 왜곡

이렇게 건전한 의미를 가지고 있던 경쟁이라는 단어가 살벌한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자본주의가 그 팽창의 극치를 달리던 제국주의 시절이다. 그 바탕에는 칼뱅의 개신교 사상과 오독된 다윈주의가 깔려 있다. 칼뱅의 구원 예정설은 구원 티켓이 한정적임을 강조했고, 그의 세속주의는 종교적 의례의 효험을 부정함으로써 세속에서 더 많은 재산을 획득하는 것이 구원 티켓을 얻었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지게 만들었다. 이로써 재산의 획득은 한정된 구원 티켓을 얻기 위한 치열한 경쟁대상이 되었다. 구원이 아니면 지옥이기에 이 경쟁은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겨루어 봄” 수준의 목가적인 경쟁이 될 수 없었다. 물론 칼뱅은 누군가가 구원을 받았다는 확실한 증거나 증표 따위는 없다고 했지만, 사람들은 증표를 갈구하며 이는 끝없는 불안증을 불러 일으켜 재산 경쟁을 가열시켰다. 어차피 구원받을 수가 한정되었다면 구원에 이르는 지름길은 내가 잘되는 것이 아니라 남을 탈락시키는 것이다. 이로써 “만인의 만인에 대한 질투” 상태가 도래했다.

제국주의자들은 다양성과 역사의 무작위성, 우연성을 강조했던 다윈의 학설을 오독하여 인류의 역사가 “생존경쟁”, “약육강식”의 지독한 싸움터라는 이른바 사회진화론을 통해 강대국의 약소국 침략을 합리화했다. 이 시기에 서양의 언어가 우리나라에 전해졌음을 염두에 둔다면, 특히 우리나라가 당시 약소국으로서 생존에 위협을 느끼던 상태였음을 감안한다면 compete를 번역할 때 왜 이 단어를 치열하고 살벌한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하필이면 수 천년 역사 중 경쟁이라는 말이 가장 잘못된 방식으로 사용되던 그 무렵에 이 단어가 우리말에 흘러들어왔던 것이다.

 

참된 경쟁을 위하여

이제 경쟁의 참뜻과 왜곡의 원인을 알았으니, 이 지독한 오용을 중단하고 그것이 가지고 있는 건전한 의미를 살려야 한다. 경쟁을 회피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때로 경쟁하고 때로 협동하면서 공통의 목표를 보다 효과적으로 달성하기를 희망하며, 실제 그렇게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상대를 밟고 서며, 상대를 누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잘못된 경쟁은 거부해야 한다. 우리는 경쟁을 회피하기 위해 신자유주의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경쟁을 막고, 경쟁을 19세기적 의미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신자유주의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런데, 혹자는 이렇게 물어 올 수 있다. “경제를 생각하라. 경쟁의 의미가 아무리 왜곡되었다 할지라도, 현재 정글 같은 세계경제질서에서 한국이 살아남으려면 그런 왜곡되고 잔혹한 경쟁에 뛰어들어야 하고 그럴 능력을 갖춰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러자면 먼저 교육경쟁력부터 높여야 하지 않겠는가?” 여기에 대한 대답은 “경제논리로 교육을 말하지 말라.” 보다는 “그런 논리는 최근의 경제적 변화를 반영하지 못한 낡은 경제논리다. 당신들이 말하는 그런 경쟁력은 21세기 신경제 질서에서 오히려 경쟁력을 갉아먹는 장벽이다.”가 더 효과적일 것이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서 계속 논의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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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정변증법 | 2008/06/19 11:13 | 교육에 대해 생각하기 | 트랙백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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