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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05 마르크스 고전 읽기 -경제학 철학 노트(7)
2008/10/31 마르크스 독해- 경제학 철학 노트 (6)
2008/10/30 마르크스 원전 읽기 -경제학 철학 노트 (5)
원문) 우리는 지금까지 관계를 노동자의 측면에서만 고찰해 왔는데 이후에는 비노동자의 측면에서 고찰하기로 하자.
노동자는 소외되고 외화된 노동을 통해 노동에게 낯설고 노동 바깥에 성립하는 인간의 이 노동에 대한 관계를 산출한다. 노동에 대한 노동자의 관계는 자본가 -또는 그 밖의 다른 이름으로 노동의 주인을 불러도 좋다면-의 노동에 대한 관계를 산출한다. 그러므로 사적소유는 외화된 노동, 자연과 자기 자신에 대한 노동자의 외적 관계의 산물이요, 성과이며, 필연적 귀결이다.그러므로 사적소유는 외화된 노동, 다시 말해서 외화된 인간, 소외된 노동, 소외된 생활, 소외된 인간이라는 것이 개념의 분석에 의해 분명해진다.
읽기) 이제 마르크스는 시야를 노동자의 반대편에서 바라본다. 사실 이 작업이 그의 노작 '자본론'이다. 똑같은 과정이 노동자의 반대편에서는 '자본'으로 보이는 것이다. 즉 소유로 보이는 것이다. 노동자에게 소외된 활동이 자본가에게는 사적 소유, 재산이다. 노동자와 노동의 관계는 소외의 관계지만, 자본가와 노동의 관계는 소유의 관계다. 따라서 사적소유와 외화된 노동, 즉 소외된 노동, 인간 소외 등등은 동일한 본질의 다양한 현상들로 근본적으로 같은 현상인 것이다. 여기에서도 그의 전형적인 변증법적 사유가 드러나고 있다. 변증법의 대가들은 항상 모순되고 대립되는 것을, 오히려 그런 것일수록 그것들이 어떤 하나의 실체의 상반된 현상들이 아닐지 사유한다. 형식논리학적 사유에서는 이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변증법적으로 사유하는 마르크스에게는 소외된 노동과, 노동의 소유는 같은 것이다. 아니, 같은 것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같은 것이 되기 위해 서로를 지양하여 새로운 관계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부정변증법'으로 사유하는 필자는 마르크스와 길을 갈라서게 되지만, 그것은 나중에 논의하기로 하자.
원문) 물론 우리는 외화된 노동(외화된 생활)의 개념을 사적소유의 운동결과로서 정치경제학에서 획득하였다. 그러나 이 개념의 분석에서 신들이 인간지성의 잘못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인 것과 마찬가지로, 비록 사적소유가 외화된 노동의 근거와 원인으로 나타나지만, 그것은 오히려 외화된 노동의 귀결이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나중에 이러한 관계는 상호작용으로 변한다.
사적소유의 전개의 최후 정점에서야 사적소유의 이러한 비밀, 다시 말해 한편으로 사적소유는 외화된 노동의 산물이라는 것, 그리고 사적소유는 노동이 외화되는 수단이며 이러한 외화의 실현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읽기) 정치경제학에서는 노동의 소외가 사적소유의 운동 결과, 즉 자본의 운동결과로 나타난다. 당연히 자본이 투자하고 고용하고 월급을 주고 일을 시키는 것이니. 그러나 기본적으로 자본 그 자체가 소외된 노동의 결과물이다. 즉 애초에 자본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타인 노동의 착취를 통해 축적된 것이다. 그리고 이 관계는 나중에 닭과 달걀의 관계가 된다. 노동이 소외되면서 자본이라는 사적소유를 만들고, 다시 이 사적소유가 노동자를 고용함으로써 소외된 노동을 만들고....이 관계는 사적소유가 모든 신비적 후광을 벗어던지고 철저하게 경제적 관계로 현상하는 단계, 인간에 의한 인간노동의 착취가 그 적나라한 모습을 보이는 단계, 즉 자본주의 경제에서야 분명히 드러난다. 자본은 원래 소외된 노동의 결과 축적된 것이지만, 이제 노동을 지배하고 소외시키는 강력한 힘으로 작용한다.
원문) 이러한 전개는 지금까지 풀리지 않던 모순들에 빛을 던져준다.
1. 정치경제학은 생산의 참된 영혼으로서 노동에서 출발함에도 불구하고, 노동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고 사적소유에게는 모든 것을 주어버린다. 프루동은 이러한 모순에서 노동을 옹호하고 사적소유를 반대하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우리는 외견상의 이러한 모순이 소외된 노동의 자기모순이라는 것과 정치경제학은 소외된 노동의 법칙들을 밝혔을 뿐임을 알고 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또한 임금과 사적소유는 동일한 것임을 알고 있다. 그 이유는 임금은 노동의 생산물, 노동의 대상이 노동 자체에 대해 급료를 지불한 것으로서, 노동 소외의 필연적 결과이기 때문이며, 또한 임금 체계에서 노동은 자기 목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임금의 하인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나중에 상세히 거론할 것이고 지금은 몇 가지 결과만을 이끌어 낼 것이다.
읽기) 이러한 전개란 노동이 소외된 결과가 자본(사적소유)이며, 다시 그 자본이 소외된 노동을 생성하는 전개를 말한다. 이러한 관계를 밝힘으로써 그 동안 모든 경제학이 '노동'을 '소유'의 근본으로, 출발점으로 삼음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물은 모두 노동이 아니라 자본(사적소유)이 가져가는 모순을 만천하에 밝힐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프루동은 "소유한다는 것은 도둑질하는 것이다."라고 선언하고, 사적소유에 반대했던 것이다. 그런데 알고보니 노동(소외된 노동인 한)과 사적소유가 동일한 것이다. 즉 "임금"을 받고 판매되는 노동 그 자체의 모순이 자본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따라서 임금과 사적소유는 동일한 것이다. 임금 노동은 노동이 아니라 임금, 즉 화폐의 노예이며, 자기 자신의 주인이자 목적이 아니다. 따라서 임금을 받고 일한다는 것, 그 자체가 이미 노동을 소외시킨다는 것이며, 따라서 사적소유, 자본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원문) 따라서 임금의 강제적 인상(다른 모든 어려운 점, 그것이 변칙적인 강제력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는 점은 제쳐 두고서라도)은 노예의 보수 개선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며 노동자에게도 노동에도 그것의 인간적 규정과 품위를 얻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상 프루동이 주장하는 임금의 평등조차 현재의 노동자가 노동과 맺고 있는 관계를 모든 인간이 노동과 맺는 관계로 바꾸는 것에 불과하다. 이렇게 되면 사회가 추상적인 자본가로 파악된다.
임금은 소외된 노동의 직접적 결과이며, 소외된 노동은 사적소유의 직접적인 원인이다. 따라서 한 쪽의 소멸은 다른 쪽의 소멸을 수반한다.
읽기) 따라서 부의 분배에서 노동의 몫을 늘리자는 프루동식의 방안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노예에게 밥을 더 주자 수준은 되지 않을 것이며, 노동의 소외된 속성 그 자체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월급이 많다 적다가 아니라 누구를 위해서 일하며, 그 일의 결과가 누구를 이롭게 하느냐 하는 것이다. 노동의 이로움이 단지 "화폐" 즉 임금으로만 나타난다면, 이는 도리없이 소외된 노동이며 따라서 여전히 사적소유, 즉 자본을 이롭게하고 생성하는 노동이다. 프루동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임금 노동자가 되도록 하자고 주장하는데, 이는 결국 사회 전체가 자본가가 되자라는 말과 동의어가 되는 것이다. 임금노동과 자본은 동전의 양면이며,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는 대립물이니 말이다. 따라서 이 관계가 지양되려면 임금노동과 자본은 모두 부정되어야 하며 지양되어야 한다. 실제 이 중 하나의 부정은 결국 다른 쪽의 부정이 될 것이다. 이것이 필자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투쟁에 미온적인 이유다. 비정규직이든 정규직이든 그것이 임금노동인 한 결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임시직 노예인가 아니면 영구직 노예인가의 차이에 불과하다. 비정규직은 임금노동의 굴레에서 오히려 좀 더 자유롭다. 따라서 비정규직이 요구할 것은 굴레에서 자유로워진 조건은 유지하면서 생계의 압박을 제거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유럽의 자율주의자들은 '보장소득제'를 요구한 것이다.
원문) 2. 사적소유, 노예 상태로부터의 사회의 해방이 노동자 해방이라는 정치적 형식으로 표명된다는 것은 소외된 노동과 사적소유의 관계로부터 더 나아간 결과다. 이는 노동자의 해방만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 보편적·인간적 해방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며, 그 이유는 생산에 대한 노동자의 관계 속에 인간의 예속 상태 전체가 포함되어 있고 모든 예속관계는 이러한 관계의 변형이고 귀결일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분석을 통해서 소외되고 외화된 노동에서 사적소유라는 개념을 발견하였고, 이제는 이러한 두 요인의 도움으로 정치경제학의 모든 범주들을 전개시킬 수 있다. 우리는 각각의 범주들, 예를 들어 거래, 경쟁, 자본, 화폐 등을 이 기본적인 두 요소의 특수하고 발전된 표현으로서 재인식할 것이다.
읽기) 서로 대립물인 소외된 노동과 사적소유의 상호지양은 어떤 형태로 나타날 것인가? 마르크스는 그것을 노동자의 해방으로 제시한다. 또한 노동과 자본은 한 본질의 서로 다른 현상들이기 때문에 노동자의 해방, 즉 노동의 지양은 바로 자본, 사적소유의 지양으로 나타날 것이고, 이는 바로 보펴적인 인간해방이 된다. 앞에서 밝힌 바대로 소외된 노동이 바로 자본의 생산자이기 때문에 소외된 노동의 철폐, 즉 노동해방은 자본의 철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 두개념, 소외된 노동과 자본이라는 두 규정을 길어낸 마르크스는 이후 이 두 규정의 상호작용의 전개를 통해 그동안 그저 전제되었던 경제학의 여러 전제들, 특 거래, 경쟁, 자본, 화폐등을 그것의 표현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 과제는 그의 평생에 걸쳐 완수되지 못했다.
원문)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형태를 추적하기에 앞서 두 개의 과제를 해결해야만 한다.
1. 소외된 노동의 결과로서 나타났던 사적소유의 보편적 본질을, 그것의 참으로 인간적이고 사회적인 소유와의 관계 속에서 규정하는 것.
2. 우리는 노동의 소외와 그것의 외화를 하나의 사실로 받아들이고 이 사실을 분석하였다. 이제 우리는 인간이 어떻게 자신의 노동을 외화시키고 소외시키는지를 묻는다. 이러한 소외가 어떻게 인간적 발전 속에 자리 잡았는가?
우리는 이미 사적소유의 기원에 관한 물음을 인류의 발전과 외화된 노동의 관계에 대한 물음으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이 문제의 답을 구할 재료를 많이 획득하였다. 사적소유에 관해 이야기 할 때 우리는 인간 외부에 있는 무엇인가를 다루고 있다고 생각한다. 노동에 관해 이야기할 경우, 비로소 우리는 직접적으로 인간을 다룬다. 이러한 새로운 문제의 공식화는 이미 그 답을 암시하고 있다.
읽기) 그런데, 마르크스는 구체적인 경제학 범주들의 분석에 앞서 두개의 선결과제를 제시한다. 이 두개가 먼저 해결되어야 할 개연성은 사실 그다지 분명하지 않다. 어쟀든 마르크스가 새로 던진 질문은 소외된 노동이 아니라 노동자가 자신을 실현하는 그런 노동의 결과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소외된 노동의 결과가 사적소유라면, 소외되지 않은 노동의 결과는 어떤 소유일까? 그것을 마르크스는 사회적 소유라고 말하고 있다. 두번째 물음은 사실 가볍지 않고, 엄청난 부담감을 주는 물음인데, 대체 어쩌다가 노동이 이렇게 소외된 노동이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방대한 역사적 연구를 요구한다.
원문) 1의 경우, 사적소유의 보편적 본질과 그것이 참으로 인간적인 소유와 맺는 관계.
외화된 노동은 상호규정적인 또는 하나이고 동일한 관계의 다른 표현일 뿐인 두 개의 구성부분으로 분해되었다. 전유는 소외로 외화로 나타나고 외화는 전유로, 소외는 진정한 시민권 취득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한 측면, 노동자 자신과 관련된 외화된 노동, 다시 말해 자기 자신에 대한 외화된 노동의 관계를 고찰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의 산물이며 필연적 결과로서 노동자와 노동에 대한 비노동자의 소유관계를 발견하였다.
외화된 노동의 물질적이고 요약된 표현으로서 사적소유는 노동자가 그의 노동, 그의 노동 생산물 및 비노동자와 맺는 관계, 그리고 비노동자가 노동자 및 노동 생산물과 맺는 관계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읽기) 아직까지는 마르크스는 그런 역사적 연구를 통해 질문에 답할만한 역량이 되지는 않는다. 그는 여전히 이것을 오직 변증술로만 풀어나가려 하고 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자꾸 동어반복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어쨌든 다시 그 논리를 따라가 보면 사적소유와 참으로 인간적인 소유와의 관계부터 따져본다(물음 1). 이 문헌 앞에서 분석 대상이 되었던 현상인 소외된 노동은 그 반대쪽 측면인 소유를 대립자로 산출함으로써 소외와 소유로 분해되었다. 그리하여 노동자와는 소외가, 비노동자와는 소유가 나타났다. 따라서 사적 소유는 소외된 노동의 외적 표현이자 결과다. 사적 소유에는 노동자와 소외된 노동의 관계, 비노동자와 노동생산물의 관계가 응축되어 있는 것이다. 이 문장은 거꾸로 해석하면 더 이해가 쉽다. 사적소유에는 두 계기가 포함되어 있다. 노동자가 그 소유의 대상을 생산하는 과정으로서 소외된 노동, 그리고 생산된 결과물에 비노동자가 맺는 관계로서 소유. 그리하여 소외의 최종적인 결과는 사적소유이며, 사적소유자에게만 당시에 주어지던 시민권인 것이다.
원문) 우리는 이미 노동을 통해서 자연을 획득하는 노동자와 관련하여 전유는 소외로, 자기활동은 타인을 위한 활동, 타인의 활동으로, 생명의 약동은 생명의 희생으로, 대상의 생산은 낯선 힘, 대상의 상실, 낯선 사람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보았다. 이제 우리는 노동과 노동자에게 낯선 이 사람이 노동자, 노동, 그리고 노동의 대상과 맺고 있는 관계를 고찰한다.
첫째로 지적할 것은 노동자에게 외화, 소외의 활동으로 나타나는 모든 것이 비노동자에게는 외화, 소외의 상태로 나타난다는 것에 주목하라는 것이다. 둘째, 생산 속에서 그리고 (마음의 상태로서) 생산물에 대한 노동자의 현실적·실천적 행동은 그와 대립하는 비노동자의 경우 이론적 행동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셋째는 비노동자는 노동자가 자신에게 반대해 행하는 모든 것을 노동자에 반대해 행하지만, 노동자에 반대하여 행하는 일체의 것을 자기 자신에게 행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 가지 관계들을 상세히 고찰하기로 하자.
읽기) 여기서 노트는 끊어진다. 이 세가지 관계는 마르크스 평생에 걸쳐 상세히 고찰되지만, 결국 출판된 것은 두번째 관계를 집중적으로 취급한 자본론이었다.
어쨌든 경제학이 감추고 있는 실제 활동을 노동자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소외된 노동과정, 소외된 활동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동일한 활동을 자본가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소외의 상태로 나타난다. 활동과 상태는 다르다. 상태는 활동과 달리 하나의 사물(thing)로 간주된다. 그리하여 노동자에게는 실제 삶이고 생활인 것이 자본가에게는 추상적인 공식과 이론으로 나타난다. "아, 일하기 싫다."와 "근로의욕 저하", "나 짤렸어!"와 "인력 감축". 같은 현상이 이렇게 다르게 나타난다. 마지막 세번째 관계는 조금 이해하기 까다롭다. 이 말은 결국 노동자는 결과적으로 자해행위를 하는 셈이 되지만 자본가는 그렇지 않다 이런 식의 뜻이 될거다. 즉 자본가는 당연히 노동자에게 해가되고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행위를 한다. 그런데 노동자 역시 도리어 자신에게 해가되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가는 결코 그러지 않는다.
이 대목은 사회학적인 조사가 좀 더 필요한 부분이며, 결국 '계급 구성'이라는 개념을 이끌어내게 되는 대목이다. 계급구성 개념의 의미는 이렇다. 자연적인 상태에서 노동자는 결코 자신을 위해서만 행위하지 않으며, 때로는 도리어 자본가를 위해서 행위한다. 그러나 자본가는 자연적인 상태에서도 결코 노동자를 위해 행위하지 않으며 철저히 자기를 위해 행위한다. 따라서 자본가라는 계급은 기성의 것이지만, 노동자라는 계급은 의식적으로 구성되지 않으면 안된다.
바로 이 대목이 마르크스 사상을 여타의 사회주의 내지 노동계급 사상과 구별하는 부분이다. 마르크스 사상은 결국 "앎", "정체성"에서 출발하게 되는 것이다. 계급투쟁은 먼저 자신의 계급을 앎에서 시작하며, 이 계급은 이미 정해진 사회의 어떤 틀이 아니라 "같은 계급이라고 서로 알게된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는 한, 자연적인 노동자 계급의 의식은 결코 노동자 계급을 위하지 않는다.
# by | 2008/11/17 21:57 | 마르크스 읽기 | 트랙백 | 덧글(4)
# by | 2008/11/05 09:45 | 마르크스 읽기 | 트랙백 | 덧글(0)
원문) 대상적 세계의 실천적 산출, 비유기적 자연의 가공은 인간이 의식적인 유적존재라는 것, 다시 말해 유에 대해서 자신의 본질로서 또는 자신에 대해서 유적 존재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확증한다. 물론 동물도 생산을 한다. 꿀벌, 비버, 개미 등처럼 동물은 둥지, 주거를 짓는다. 그러나 동물은 일면적으로 생산하지만 인간은 보편적으로 생산한다. 동물은 직접적인 육체적 욕구의 지배 하에서만 생산하지만 인간은 육체적 욕구에서 자유롭게 생산하고 그러한 욕구에서 벗어난 자유 속에서만 진정으로 생산한다. 동물은 자기 자신만을 생산하지만 인간은 자연 전체를 재생산한다. 동물의 생산물은 직접적으로 물질적인 신체에 속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생산물에 자유롭게 대항한다. 동물은 자신이 속해있는 종의 규준과 욕구에 따라서만 형태를 만들지만 인간은 모든 종의 규준에 따라 생산할 줄 알고, 어떤 경우에나 대상에 고유한 규준을 도모할 줄 안다. 그런 까닭에 인간은 미의 법칙에 따라 형태를 만든다. 읽기) 따라서 인간은 비유기적 자연에서 그저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의식적으로 가공하여 대상적 세계를 산출한다. 여기서 훗날 비트겐슈타인이 "세계란 경우의 총체다"라는 말의 의미를 알게 될 열쇠를 본다. 인간만 세계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만이 비유기적 자연에 의식적으로 접근하고 그것을 가공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자신에게 의미 있게 된 자아외부의 것들의 총체가 바로 그의 세계다. 이렇게 외적 세계를 창출함으로써 그는 인류의 구성원이 된다. 비버, 꿀벌 들은 정해진 바 대로 생산하지만, 인간은 자연을 보편적으로 파악하고서 생산한다. 동물은 생존본능에 의해 생산하지만, 인간은 생존본능, 육체적 욕구와 무관하게 생산할수 있다. 동물은 생산활동의 결과 자기 종을 계속 재생산하지만, 인간은 새로운 세계를, 자연을 재생산한다. 동물의 생산활동의 결과는 결국 자신의 육체이지만, 인간은 그 결과를 자유롭게 사용할수 있다. 한 마디로 동물은 자연에 의해 정해진 법칙에 의해 생산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의적으로 생산할 수 있다. 즉 인간은 "미적으로 생산"할수 있다. 여기서 이 "미적 생산"은 칸트적 의미다. 칸트는 미의 핵심을 "무관심적 관심"이라고 하였다. 즉, 관심을 가지고 있으나, 그것이 가져다 주는 실질적인 효과, 효용에는 관심이 없는 상태가 바로 미적 관조의 상태다. 그러니 인간은 "당장 생활을 위한 쓸모"가 아니라 "보기에 좋기 위해서도"생산하는 존재며, 바로 이것이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다. 인간의 노동이 꿀벌의 노동과 구별되는 것은 바로 이 "미적인 관조"에 있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보시니 좋더라!" 신이 세계를 창조한 목적도 이와 같았던 것이다. 그런데 포이어바흐는 뭐라 했나? 신은 개별인간이 아닌 인간의 유적 존재, 유가 실체화 된 것이다. 따라서 신이 "보시니 좋더라"한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 "보시니 좋더라"한다는 것이다. 원문) 그러므로 인간은 대상적 세계의 가공에서 비로소 자신을 현실적인 하나의 유적 존재로서 확인한다. 이 생산은 인간의 제작 활동적 유적 생활이다. 이 생산을 통해 자연은 인간의 작품으로서 그리고 인간의 현실성으로서 나타난다. 그런 까닭에 노동의 대상은 인간의 유적생활의 대상화다: 이는 인간이 의식에서처럼 지적으로뿐만 아니라 제작 활동적, 현실적으로도 자신을 이중화하고, 그런 까닭에 자신에 의해 창조된 세계 속에서 자기 자신을 직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외된 노동은 인간에게서 그의 생산의 대상을 박탈함으로써, 인간에게서 그의 유적생활, 그의 현실적인 유적 대상성을 박탈하고 동물에 대한 인간의 장점을 단점으로 변화시켜 그의 비유기적 신체, 자연을 떨어져 나가게 한다. 마찬가지로 소외된 노동은 자기활동, 자유로운 활동을 수단으로 전락시킴으로써 인간의 유적활동을 그의 육체적 생존의 수단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신의 유에 대해 가진 의식은, 소외로 인해, 유적생활이 인간에게 수단이 되는 것으로 변하고 만다. 읽 기) 이제 앞에서 한참 논의했으니 이 대목은 읽어내기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자신과 마주선 대상적 세계를 가공하면서 그 속에서 자신의 상을 보게 된다. 따라서 인간의 생산활동은 단지 생존수단을 얻는 과정이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는 자신을 표현하는 작업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노동과 작업, 노동하는 동물과 제작하는 인간을 구별한 아렌트의 치밀한 논의가 보충되어야 한다. 그 런데 소외된 노동은 이 소중한 인간의 제작활동을 박탈한다. 왜냐하면 소외된 노동에서 인간은 생산의 대상을 타인의 소유로 내어주고 있기 때문이며, 타인의 목적에 따라 생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노동자는 자신의 의식, 자신의 표현으로서 창조적인 생산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주어진 규준에 따라 반복되는 생산, 즉 동물이나 다름없는 그런 생산을 하게 된다. 노동자는 꿀벌이나 비버다. 그런데 정해진 규준을 정확히 지키는 점에서는 의식있는 존재인 인간은 무의식적 존재인 꿀벌보다 한결 뒤떨어진다. 그런데 이 대목이 논리적으로는 조금 문제가 된다. 인간이 소외된 노동에서 유적 생활, 자유로운 활동을 육체적 생존의 수단으로 만든다기 보다는 아예 박탈당한다고 보는 것이 더 논리적으로 잘 이어지기 때문이다. 즉, 소외된 노동에서 인간은 마치 동물처럼 주어진 동작을 정해진 순서대로 해야 한다. 자기 의식, 자기 표현욕 등은 억제되어야 한다. 이 억제는 육체적 생존을 위해서다. 원문) 따라서 소외된 노동은: (3) 인간의 유적 존재, 자연뿐만 아니라 인간의 정신적인 유적 능력을 그에게 낯선 본질, 그의 개인적 생존의 수단으로 만든다. 소외된 노동은 인간에게서 인간 고유의 신체, 마찬가지로 그의 바깥의 자연, 마찬가지로 그의 정신적, 인간적 본질을 소외시킨다. (4) 인간이 자신의 노동의 생산물, 자신의 생명활동, 자신의 유적 존재에서 소외되어 있다는 것에서 생겨나는 직접적인 결과의 하나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소외다. 인간이 자기 자신과 대립하는 경우에는 다른 인간이 그에게 대립하는 것이다. 자신의 노동, 자신의 노동의 생산물,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에서 타당한 것은, 다른 인간, 다른 인간의 노동, 그리고 노동의 대상에 대한 관계에서도 타당하다. 일반적으로 인간이 자신의 유적 존재에서 소외되어 있다는 명제는 어떤 인간이 그들 각자가 인간적 본질에서 소외되어 있는 것처럼 다른 인간으로부터 소외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그리고 일반적으로 인간이 자신과 맺는 일체의 관계에서의 소외는 우선 그가 다른 인간과 맺고 있는 관계 속에서 드러난다. 그러므로 소외된 노동의 관계 속에서 각각의 인간들은 자기 자신을 노동자로서 존재하도록 하는 관계를 기준으로 삼아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가늠한다. 읽 기) 이리하여 소외의 세번째 규정과 네번째 규정이 나왔다. 소외된 노동은 인간을 인류(인간의 본성)로부터 소외시킨다. 그 결과 인간은 자신을 인류로서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인간들 역시 외적 대상, 즉 생존의 수단으로만 보게 된다. 인간이 인류로서 자신과 대립하고 있으니, 타인과 대립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마르크스는 개별 인간들과 구별되는 추상적인 "인류"라는 실체가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그 인류는 신이 되기 때문이다. 인류란 인간과 인간의 관계들이 맺어질때 나타나는 하나의 현상이다. 훗날 뒤르켐은 이를 "출현적 현상으로서 사회"라고 멋들어지게 정의했다. 인간이 인류로부터 소외되고 있다는 것은 결국 인류라는 사람이 아니라 구체적인 다른 사람으로부터 소외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으로부터 소외되고 있다는 것은 그가 다른 인간과 맺고 있는 관계에서 소외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현대사회학의 핵심 쟁점인 상호주관성, 서로주체성 등의 논의를 펼친다면 지나치게 복잡해 질것이니 생략하자. 어쨌든 이렇게 소외된 노동자들은 자신을 주체적으로 바라볼 수 없고, 자신의 조건, 즉 노동하는 동물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자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 관계 속에서만 인식할 수 있다. 즉, 그는 자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모두 판매하기 위해 내어 놓은 노동력으로 보며, 단지 생존수단을 얻기 위해 자기본질을 수단으로 삼는 존재로 보며, 따라서 서로를 자기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 본다. 이것이 바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인 것이다. |
# by | 2008/10/31 13:02 | 마르크스 읽기 | 트랙백 | 덧글(0)
원문) 인간은 그가 실천적으로도 이론적으로도 유(類)를, 다른 사물의 유와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의 유를 자신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뿐만아니라, 현재의 생동적인 유로서 자기 자신에게 관계한다는 점에서, 보편적인, 따라서 자유로운 존재로서 자기 자신에게 관계한다는점에서 하나의 유적 존재다.
읽기)이제 노동 과정에서 소외의 세번째 특징이 나타난다. 그런데 이 부분은 이 문헌 전체에서 헤겔 철학에 대해 장광설로 비판하고 있는절대지에 대한 부분과 더불어 가장 사변적이고 난해한 부분이다. 우선 유(Gattung. Genus)라는 용어부터 당혹스럽다. 이용어는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에서 기원한 용어다. 유(genus)는 몇몇 개념들을 포괄하는 상위 개념이 되면서도 그 고유한 속성을가지고 있는, 즉 다른 유와 구별될 수 있는 그런 개념이다. 유의 하위개념들이 종(specy)다. 즉 이런 저런 인종들이있으며, 이들을 포괄하는 인류가 있는 것이다. 인류는 한 사람이 다른 자연과 구별되는 가장 보편적인 범주다. 즉 갑돌이,을돌이를 추상하면 한국인, 일본인, 다시 추상하면 황인종, 백인종, 그리고 그것을 더 추상하면 인류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여기서 더 추상하면 그냥 동물이 된다. 따라서 여기서 유라고 함은 한 사람을 동물과 구별하도록 하는 가장 보편적인 특징을 지닌 그런 집합 혹은 그런 속성이 된다.
유적 존재라 함은 자신이 바로 그런 분류에 포함되고 있음을 의식하는 존재를 말한다. 포이어바흐는 오직 인간만이 자신이 인류임을 의식한다고 보았다. 즉, 인간만이 인간성 자체를 의식할수 있고, 이런저런 속성을 가졌기에 자신이 동물과 구별된다고 의식한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유적존재다. 사실 이 유적존재라는 용어는 이후형이상학적 개념으로 마르크스 자신에게 배격되며, 다시 사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으로는(다른 논문에서 밝히겠지만) 이유적존재로서 인간 개념을 포기한 것은 마르크스 이론의 큰 헛점을 남기게 된다.
원문)유적생활은 동물에게뿐 아니라 인간에게도 물질적으로 우선 인간이 비유기적 자연에 의해 생활한다는 것에서 성립하지만, 인간은동물보다 보편적이며, 그가 그것에 의해 생활하는 비유기적 자연의 범위도 더 보편적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식물, 동물, 암석,공기, 빛 등은 한편으로는 과학의 대상이며, 한편으로는 예술의 대상이다: 이들은 인간이 향유하고 소화하기 위해 제일 먼저 마련해두어야 하는 인간 정신의 비유기적 자연, 정신적인 생활수단이다. 이론적 관점에서 보면 이들은 인간의식의 일부분을 형성하며,실천적 관점에서 보면 이들은 인간의 생활과 활동의 일부분을 형성한다. 이러한 자연생산물이 식품, 연료, 의복, 주거 등의 어떤형식으로 나타나든 간에 인간은 물질적으로 이러한 자연생산물에 의해 생활한다. 인간의 보편성은 실천적으로 자연이 (ⅰ) 직접적인 생활수단인 한에서,(ⅱ) 인간의 생명활동의 소재와 대상과 도구인 한에서 자연 전체를 그의 비유기적 육체로 만드는 바로 그 보편성 속에서 나타난다.자연은 그 자체가 인간의 육체가 아닌 한 인간의 비유기적 신체다. 인간이 자연적 수단에 의해 살아간다는 것은 인간이 죽지 않기위해 끝없이 자연과의 상호작용 속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육체적·정신적 생활이 자연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인간 역시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에, 자연은 스스로에 의존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읽기) 이건 변증법적인 사유가 들어가 있어서 단답식 교육을 받은 우리가 이해하기 무척 어려운 문장이다. 먼저 비유기적 자연이라는 말은 그냥 물질이라고 옮겨도무방하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 살펴보자.선 유적 생활을 하기 위해서 존재는 자신을 보편적인 '유'로서 인식해야 함은 앞에서보았다. 그런데 이 인식은 자신의 '유'의 반대편, 즉 그 반정립을 통해서만 정립될 수 있다. 개별 존재 역시 즉자적 존재에서대자적 존재, 즉 "그저 있음"이 아니라 "무엇에 대하여 있음"이 될때 인식이 가능하듯이 보편적 존재, 즉 유적 존재 역시"무엇에 대하여 있음"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 "무엇" 역시 보편적이라야 함은 물론이다. 즉 나는 연필 한자루, 책상하나를 쥐고 있다. 나는 교감 아무개와 싸운다. 그런데 나는 내가 보다 보편적인 존재임을 안다. 나는 학자로서 문방구를사용하며, 교사로서 관리자와 싸운다. 더 보편적이 되면 나는 한국인으로서 한반도에 살며, 노동자로서 국가에 고용되어 있다.보다시피 주체의 보편성이 상승되면, 거기에 대상이 되는 것(혹은 그 부정)의 보편성도 상승된다. 여기까지는 아직 '종'의수준이다. 이제 '유'의 수준까지 가면 "나는 인류로서 자연에 살고 있다"수준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을 "인류"로 볼수 있는 것은 그가 접하는 각종 사물들을 총체적인 "자연"으로 보편화시킬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연을 두 가지 방식으로 상대한다. 하나는 자신의 직접적인 생존 수단으로, 즉 구체적인 식량, 도구 등등으로, 다른 하나는 보편적인 자연으로.
이보편적인 자연은 인간 "주체"와 관계를 맺는 전체적이고 보편적인 자연이다. 각종 물질은 이런저런 과정을 통해 주체 내부로들어오면 육체가 되며, 밖으로 나가면 자연이 된다. 이렇게 인간은 자신과 자연이 대립되었으면서도 동시에 통일되어 있음을 알며,궁극적으로 모두 자연임을 안다.
이거, 풀이 하는 게 아니라 더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 같은데, 이걸 변증법 abc로 다시 풀어보자.
1)A라는 존재가 있다. 그런데 이 존재는 그저 있는 것만으로는 존재가 아니다. 2)그리하여 이 존재는 자신의 대립물인 B를정립한다. 즉 부정이 일어난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서 A는 자신이 존재하기 위해 B라는 타자, 부정에 의존해야 하는 사항에처한다. 즉 소외가 일어났다. 3) 그러나 이 소외는 A가 자신과 B모두 그들을 모두 그 내부의 계기들로 포괄할수 있는 '알파벳'이라는 더 보편적인 존재의 부분임을 깨달으면서 해소된다. 이게 지양이다.물론 여기서 끝나는게 아니다. '알파벳'은 '한글'과 대립한다. 그리고 같은 과정을 통해 이 대립은 '문자'에 포함됨으로써해소된다... 등등.
이제 이걸 인간과 자연으로 가져가 보자.1) 나는 인류다. 인류는 혼자 뻘쭘히 인류가 아니라 다른 비유기적자연과 구별되는 한 인류다. 2) 그런데 나는 인류로 존재하기위해 저 비유기적자연에 의존해야 한다. 이로써 비유기적 자연은 나에게 대립물로, 낯선 것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비유기적 자연은나에게 흡수되면 육체가 되고, 내 육체는 밖으로 나가면 비유기적 자연이 된다. 그러니 나와 비유기적 자연은 모두 대자연의 순환의 한 고리씩인 것이다. 3)이리하여 인간은인류 역시 자연의 한 부분이며 외적 자연이라고 생각했던 비유기적 자연과 더불어 하나인 것이다. 이렇게 해서 소외가 해소된다.
아직도 이해가 안된다면 이렇게 생각해 보자. 한 인간은 자신의 대립물, 자신의 대상, 그가 상대하는 세계의 보편성의 수준만큼 보편적 인간이 된다. 그가 상대하는 의식하는 세계가, 이 사람, 저 사람, 이 물건, 저 물건인 사람과, 그가 상대하고 의식하는 세계가 자연계, 인류, 우주인 사람의수준은 다른 것이다. 더 나아가 자신이 바로 이 인류, 자연계의 불가분의 한 고리임을 인식하고 의식하는 인간은 어떨겠는가?인간은 유일하게 한 개체이자 동시에 이런 보편적 존재를 의식할 수 있는 동물이다.
원문)소외된 노동은 인간에게서 (1)자연을 소외시키고, (2)자기 자신, 인간 고유의 활동적 기능, 인간의 생명활동을 소외시킴으로써,인간에게서 유를 소외시킨다. 소외된 노동은 인간에게 유적 생활을 개인 생활의 수단으로 만든다. 첫째로 소외된 노동은 유적생활과개인생활을 소외시키고, 둘째로 추상 속에 있는 후자를 마찬가지로 추상화되고 소외된 형식 속에 있는 전자의 목적으로 삼는다. 그까닭은 첫째, 인간에게 노동, 생명활동, 생산적 생활 자체가 욕구, 육체적 생존을 유지하려는 욕구를 충족시키는 수단으로서만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생산적 생활은 유적 생활이다. 그것은 생활을 생성하는 생활이다. 생명활동의 방식 속에는 어떤 종의성격 전체, 그의 유적 성격이 놓여 있으며, 자유로운 의식적 활동은 인간의 유적 성격이다. 생활 자체는 생활의 수단으로서만나타난다.
읽기)그렇다면 소외된 노동이 어찌하여 인간을 유로부터 소외시킨다는 것일까? 우선 인간에게서 인류로서의 활동을 소외시킴으로써다. 이문단은 매우 복잡하게 기술되었지만 실은 아주 단순한 내용이다. 요약하면 이렇다. 인간은 활동한다. 인간의 활동에는 두 종류가있다. 하나는 개별 존재로서의 활동이며 다른 하나는 인류로서의 활동이다. 즉 개인적인 욕구와 충동을 충족시키는 활동, 그리고인류로서 자신의 유적 존재를 의식하며 하는 활동이다. 이 중 전자는 단지 생존하고 순간적인 욕구를 충족하는 활동이다. 따라서그때 그때의 활동이며 파편적인 활동이다. 후자는 인류의 생활방식 자체를 만들어가는 활동이다. 이 활동은 여러 파편적 활동을보편화하여 바라보는 활동이다. 노동은 단지 생존수단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방식도 생산하는 활동이다. 즉, 단지 먹이 획득이아니라 먹이 획득 방법을 만들어내고 적용하는 과정이 노동인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생존, 즉 생명유지를 위한 활동 속에서 이미노동이라는 자신의 유적 성격이 드러나는 존재다. 그러나 소외된 노동은 이런 활동을 단지 육체적 생존 유지의 수단으로 만들어버린다. 즉 이 속에서 인간은 자연, 외적 세계를 그때 그때의 생존 수단으로서만 접하게 된다. 이로써 인간은 노동을 하면서 점점자신을 "인류", "유적 존재"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이는 인간을 동물로 만든다는 것이다. 동물이 어쨌길래?
원문)동물은 자신의 생명활동과 직접적으로 하나다. 동물은 자신의 생명활동과 구별되지 않는다. 동물은 생명활동이다. 인간은 자신의생명활동 자체를 자신의 의욕과 의식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는 의식된 생명활동을 가진다. 인간이 직접적으로 그것에 융합되는 규정은없다. 의식된 생명활동은 인간을 동물적인 생명활동과 직접적으로 구별한다. 바로 이 때문에 인간은 하나의 유적 존재이다. 또는인간이 하나의 유적 존재이기 때문에 그는 의식적 존재일 뿐이며, 다시 말해 그의 고유한 생활은 그에게 대상이다. 바로 이 때문에그의 활동은 자유로운 활동이다. 소외된 노동은 이 관계를 전도시키고, 바로 인간은 의식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의 생명활동,자신의 존재의 본질을 단지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 만든다.
읽기) 마르크스는 동물과 인간의 결정적인 차이를 자기내 존재와 대자적 존재로 본다. 이는 나중에 하이데거와 사르트르에게 그대로 계승된다.하이데거는 오직 인간만(존재한다면 천사나 신도) 자연계의 대자적 존재라고 본다. 이 의미는 자신의 활동을 의식하는 존재, 자기자신을 의식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존재, 즉 자기 바깥으로 나가서 자기를 인식할수 있는 존재다. 동물은 본능적으로 생멸활동을하지만, 자신이 생명활동을 하고 있음을 알지 못한다. 즉 동물은 자신의 생명활동 그 자체다. (물론 이런 인간 규정은 최근,일부 영장류와 돌고래가 자아의식을 가지고 있음이 확인됨으로써 지지받기 어려워졌다. 하지만 이는 영장류와 돌고래를 사람 대접을하면 될 일이다). 이는 훗날 허버트 미드가 "I"와 "me"분립 이론을 수립하는 초석이 된다. 이제 "유적존재"라는 모호한 용어가 "생명활동을 의식하는 존재"로 "활동하는 자신을 의식하는 존재"로 보다 분명해진다. 이로써인간은 그의 활동, 그의 생활을 자신의 대상으로 삼을수 있는 존재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그의 활동, 그의 생활을 통제할수 있는 존재이며, 따라서 "자유로운 존재"다. 이런 의미를 알아야 엄격한 생활을 하던 고대 스파르타인이 자신들을"자유로운"존재라고 자부한 이유를 납득할수 있게 된다. 확실히 스파르타인은 충동과 욕망에 휘둘리는 그리고 그 충동과 욕망을의식하지 못하는 현대인들보다 자유로웠다.
# by | 2008/10/30 12:23 | 마르크스 읽기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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