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 경제학

책 광고나 하나 해야겠다.

일전에 "굿바이 맨큐, 대안은 어디에?"라는 포스팅을 한 적이 있다. 적어도 좌파를 자처한다면 경제, 즉 토대상의 변화를 통해 사회 전반의 변화를 읽어내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런데 토대상의 변화를 읽어내려면 경제학은 필수 교양이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경제학은 부르주아의 이데올로기적 무기이다. 18세기 계몽사상이 종교비판에 일도매진하였다면, 20세기 이후에는 바로 경제학비판에 매도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경제학을 공부할 마땅한 교과서가 없다는 것이었다. 가장 널리 알려진 맨큐의 경제학은 너무도 자본주의적 관점을 담고 있다. 스티글리츠의 경제학은 훌륭한 책이지만 완역본이 없다. 크루그먼의 경제학은 주류경제학과 선명한 차이가 보이지 않는다.
자본주의 이해하기 - 경쟁, 명령..

그런데 그 고민을 해결해 주는 책이 나왔다. 바로 "새무얼 보울즈 et al.'자본주의 이해하기: 경쟁, 명령, 변화의 3차원 경제학'. 후마니타스." 다.

이 첵의 저자 보울즈는 그 유명한 재생산 이론의 제창자인 바로 그 보울즈다. 그가 허버트 진티스와 함께 쓴 "자본주의 미국의 학교교육"은 이후 미국에서는 헨리 지루, 마이클 애플에게 유럽에서는 부르디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고, 진보적인 교육자라면 적어도 한번은 읽어보았을 중요한 저작이다. 그런 보울즈가 쓴 경제학 교과서라니 당연히 입맛이 당길수 밖에 없다.

이 책은 그 동안 경제교육에 대한 나의 고민을 쓸어내어 줄 장점들을 두루 가지고 있었다. 우선 모든 경제 교과서의 제일 처음에 나오기 마련인 '호모 이코노미쿠스'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이를 통해 기존 경제학의 인간관과 세계관을 논박하면서 경제가 사회현상의 하나이며 그 외부에 있지 않음을 설득하는 논리를 제공한다. 사실 이런 주장이야 기존의 마르크스 경제학 관련 교과서에도 충분히 나오지만 문제는 마르크스 주의자들끼리만 이해할 수 있는 사투리로 점철되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보울즈의 책은 기존 주류 경제학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를 다시 비판적으로 극복하고 있다.

보울즈는 기존의 주류 경제학이 수평적 차원(경쟁)만 다룬 1차원 경제학이라고 비판하면서 여기에 수직적 차원(권력)과 시간적차원(변화)를 추가한 3차원 경제학을 펼쳐야 한다고 역설한다. 즉, 1차원 경제학은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3차원 중 하나로, 또다른 두 차원과 상호작용하는 한 요소로 포함되는 것이다.  이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의 방법론을 그대로 따라간 것이다. 마르크스는 애덤 스미스, 리카도의 정치경제학의 부정, 즉 사회주의로 정치경제학을 대체한 것이 아니라 정치경제학과 사회주의를  모두 한 계기로 포괄하는 정치경제학비판을 수립하려 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보울즈는 마르크스가 애덤 스미스, 리카르도, 밀의 경제학에 대해 했던 일을 이제 신고전파경제학, 케인즈경제학에 대해 하려는 것이다.

그 결과 이 책은 두 마리의 토끼를 잡게 해 준다.
1)기존의 주류 경제학을 충실히 익힐 수 있는 교과서 2)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안목을 갖추게 하는 좌파 경제학 교과서
이 책의 몇몇 챕터만 골라 요약하면 기존의 주류 경제학 교과서로도 손색 없을 정도로 충실히 공부할 수 있다. 그리고 다시 여기에 대한 다차원적 비판을 공부하게 되면 두 마리 토끼를 잡게 되는 것이다. 

책의 이름부터 흥미롭지 않은가? 경제학교과서, 경제학의 이해 따위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이해다. 이는 기존의 경제학 교과서가 자본주의의 경제법칙이 마치 영원한 "경제법칙"인양 서술하는 것을 거부하고 그것은 "자본주의의 법칙"임을 명시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이후의 법칙은? 그것은 알 수 없다. 저자의 말처럼 경제체제의 변화는 경제체제 자체 내의 내재적 동력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니. 다만 현 경제체제의 내재적 현상을 잘 분석하면 그 추세 정도야 알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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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정변증법 | 2009/05/25 13:15 | 철학, 사회학 탐구 | 트랙백(1) | 덧글(3)

굿바이 맨큐의 경제학, 하지만 대안은 어디에?

“굿바이 엉터리들(hacks: 속어인데 뜻이 무척 많다. 돈만 주면 뭐든 하는 사람들이란 뜻에서 전세마차에서부터 삼류소설가를 지나 매춘부까지..). 뭔가 할 줄 아는 사람들이 오는 걸 환영한다” 올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만이 오바마 정부의 출범이 다가오자 던진 한 마디다. 당연히 졸병들은 부시 정부의 경제 정책 담당자들, 즉 통화주의,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이고, 뭔가 할 줄 아는 사람들은 자신을 포함한 통칭 케인지안, 제도학파 경제학자들일 것이다.
그러자, 노발대발한 경제학자가 있었으니, 우리나라에서,  크루그만이 노벨상 받기 전만 해도, 그리고 전세계 금융위기가 대공황으로 번지기 전만 해도, 그래서 미국적 경제가 최상의 경제라고 믿고 있던 시절만 해도, 마치 경제학의 대명사, 거의 유일한 경제학자 처럼 떠받들어졌던 그레고리 맨큐다. 당연히 노발대발할수밖에 없는 것이 맨큐는 
부시 정부 때 백악관 경제자문회의 의장을 지냈으니, 굿바이 소리듣는 엉터리가 누구를 지칭한 것인지 뻔한것 아닌가?
그러자 크루그먼은 부랴부랴 “친애하는 그렉(그레고리의 애칭). 나는 팀 가이트너(오바마의 재무장관 지명자)와 존 스노(부시의 재무장관)를 비교한 것이지 당신을 말한 건 아니었다”라고 둘러대었지만, 그걸 믿을 맨큐도 아니고, 또 믿을거라 기대한 크루그먼도 아니다.

이 치열하면서 잔혹하기까지 한 비방전(?)은 오늘날 보수/진보의 이데올로기 대결이 바로 경제학을 두고 벌어지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일찍이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이야 말로 중세의 기독교를 대신하는 세속의 종교임을 간파했다. 그가 온갖 잡다한 철학적 논설에서 대담하게 경제학으로 전환해간 이유도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기독교적 중세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철학이 가장 강력한 무기였지만, 이제 이데올로기 대결은 그 곳이 아니라 경제학에서 펼쳐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진보진영은 일부 무지함으로 인해, 일부 무능함으로 인해 우파적 경제학의 독주를 너무 오랫동안 방치해 두었다. 바로 "맨큐의 경제학"이 "맨큐"의 경제학이 아니라 "경제학" 행세를 하도록 방치해 두었던 것이다. 그건 그 동안 한국의 진보진영(혹은 자칭 진보진영)의 다수를 점한 엔엘 계열의 민족주의적 성향과 반지성주의적 성향(품성론의 영향을 받은)에서 비롯되었으리라. 그래서 조금만 머리를 쓰게되고 머리 복잡해지기 시작하면 "이론이 무슨 소용이냐! 중요한건 실천이다, 투쟁!"을 외쳐대었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 맨큐
의 경제학은 배웠다 하는 사람들에게는 경제를 익히는 유일한 관문으로 자리잡았고, 이 관문을 통과한 사람들은 도대체 특정 진영의 경제관 외의 것은 이해할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사실 맨큐조차 넓게는 케인지안으로 분류되긴 하지만, 맨큐의 경제학 책에서는, 특히 간추린 맨큐의 경제학 책에서는 그 흔적을 찾을수 없다).

심지어 어는 자
립형사립고등학교에서는 교과서 대신 맨큐의 경제학을 이용해서 수업을 한다고 자랑하고 있었다. 그 무지한 교장의 발언의 배후는 "우리는 신통화주의 경제학을 가르친다"가 아니라 "우리는 저명한 경제학자의 책을 가르친다."였다.

이건 진보진영이 신경썼으면 충분히 막을수 있는 상황이었다. 왜냐하면 그 반대편에 선 경제학자들 역시 훌륭한 교과서들을 많이 썼기 때문이다. 경제위기가 닥치고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자 비로소 새로이 서점에 마구 공급되기 시작하는 폴 크루그만의 경제학
입문만 해도 그렇다. 앞의 자사고 교장에게는 어쩌면 이게 더 매력적일수도 있겠다. "우리는 노벨상 받은 사람의 책을 교재로 쓴다." 얼마나 그럴듯한가?
사실, 이 책이 이미 2판이 넘어간 1997년에 나온 책임에도 불구하고, 이제야 유행에 따라 슬그머니 나온것이 불만이다. 10년전부터 크루그먼이 맨큐의 대항마로 경제학 교육에 널리 보급되었더라면 훨씬 더 많은 미네르바가 탄생할수도 있었으니.
하지만 진보진영은 크루그먼을 외면했다. 이유는 여러가지겠지만, 엔엘 쪽에서는 그래봐야 미국놈이라는 논리였을 것이고, 피디쪽에서는 그래봐야 자본주의 범위 안에 있는 주류경제학이라는 논리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나라 진보진영이 마르크스라도 꼼꼼히 독해 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니 기가막힐 노릇이다.

그런데, 지금 벌어지는 각종 논쟁의 핵심은 경제 아니면 생태, 혹은 경제와 생태다. 경제에는 경제학이, 생태에는 자연과학이 필수적이 교양이 되고 있다. 이 두 학문에 대한 기초 소양이 없으면 아예 논쟁이 먹히질 않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정책을 펴는 당국자에게 마르크스를 들먹이며 논박해봐야 먹히지를 않는다. 심지어는 케인즈까지도 먹히지 않는다. 그러나 크루그먼은 먹힌다. 이건 아주 중요한 차이다. 게다가 맨큐의 경제학조차도 잘 분석해보면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에 대한 비판점을 많이 찾아낼수 있다. 이건 더더욱 중요한 차이다.

때 늦었지만 이제라도 크루그먼의 경제학이 번역되어 출판된 것을 축하해야 하나? 그런데 문제는 그나마 이게 날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격한 단정적 표현을 서슴치 않는 젊은이들에게 쓰레기라는 말로 불리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애초에 노벨상 효과에 편승한 반짝 마케팅 이상을 생각하지 않은듯한 느낌, 맨큐의 경제학 독점이라는 이상한 한국적 상황을 극복할 경제학의 균형회복이라는 긴 안목을 갖고 만든 책이 아니라는 느낌, 그래서 35000원이라는 무시무시한 값으로 반짝 이윤만 먹고 떨어지려는듯한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번역자 프로필을 보면 기가 막힌다.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독일 막스 플랑크 과학사연구소의 연구원을 거쳐 현재서울대 기초교육원에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뉴턴과 아인슈타인>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에너지, 힘,물질> <대폭발> <180억 광년의 여행> <물리상수란 무엇인가> <양자역학으로 본우주> <물리학 강의> <우주가 지금과 다르게 생성될 수 있었을까?> 등이 있다....

(이 부분은 제가 잘못알았네요. 사실은 알라딘에 출판사가 제공한 번역자 정보가 엉터리가 간 것이었겟죠. 번역자 분은 물리학과 졸업한 것은 맞지만, 석사부터는 경제학을 하셨네요. 도대체 출판사가 인터넷에 이런 잘못된 번역자 정보를 올려놓고 1년이 다가도록 교정하지 않았다는게 이해가 안되네요.)

이게 무슨 소설책 번역하는 것도 아니고... 출판사가 뚝딱 심보였거나, 아니면 내노라 하는 경제학자들이 이 책의 번역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거나 둘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그러니 미국발 경제위기, 노벨상 수상, 그리고 오바마 정부의 출범이라는 호재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기대만큼 판매되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

맨큐의 경제학이 한국을 이렇게 휩쓴것이 꼼꼼하고 세련된 편집작업, 그리고 교보문고의 공들인 마케팅 때문임을 생각하면, 경제학자 중에서도 특히 수려한 문장가로 때로는 독설가로 손꼽히는 크루그먼이 정작 한국에는 뒤늦게 소개되면서, 이런 취급이나 받는다는 것이, 그리고 소위 진보적인 경제학자라는 분들이 이런 절호의 기회도 활용하지 못한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

돈 벌 생각이 아니라, 정말 공공의 이익과 지성을 위해 그야말로 진보적인 시각을 가지고 책을 만들었으면 한다. 그러면 번역부터 시작해서 마케팅에 이르기까지 모두 차별화될수 있었을 것이다. 미국에서는 이 책의 하드커버본이 150달러다. 그런데 왜 한국에서는 무려 35000원이나 하는가? 오히려 한국에서는 가난한 사람들도 경제를 알아야 하기에 등등의 멋진 수사법을 동원하면서 20000원 이내에 페이퍼북을 낼수도 있지 않았는가?

그런 점에서 또 하나 안타까운 사례가 스티클리츠의 경제학이다. 사실 스티글리츠는 이미 2001년에 노벨상을 수상했고,
또 경제 사상이라는 면에서는 크루그먼 보다 더 독창적이라고도 할수 있는 학자다.
게다가 그는 애초에 기념비적인 교과서를 목표로 이 책을 저술했다. 1900년의 알프레드 마셜, 1960년에 사무엘슨이라면 2000년에는 스티글리츠라는 대단한 자신감과 야심을 가지고 매우 공들여 만든 경제학 교과서다. 게다가 번역도 잘했다. 진보적인 혹은 중도적인 경제학 전문가들이 꼼꼼하게 번역한 흔적이 엿보인다. 맨큐의 경제학보다 더 나았으면 나았지 결코 떨어지지 않는 책이다. 그러나, 문제는 더 나중에 소개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맨큐의 경제학 대신 스티글리츠의 경제학을 보아야 할 이유"를 설득력있게 보여 주었어야 했다. 그러나 이런 노력이 부족했다. 게다가 완역을 하지도 않았다. 총 40개 장중 26개 장을 임의로 골라서 번역해 내고, 완역본은 나중에 미시경제학, 거시경제학이라는 책으로 내겠다고 머리말에 써놓았다. 그러니 망할수밖에 없다. 겨우 절반만 번역된 책은 설사 다 읽을 의도가 없더라도 구매의사를 떨어뜨린다. 그리고 나중에 나올 미시경제학, 거시경제학은 겨우 14개 장 더 추가된 것 때문에 두배의 돈을 내야 한다. 결국 이것도 저것도 안팔리고 끝난 것이다. 오호통재! 스티글리츠가 맨큐한테 밀릴 정도의 경제학자가 아니지 않았는가? 반면 교보문고측은 어땠는가? 무리해서라도 엄청 두꺼운 맨큐의 경제학을 먼저 내었다. 그리고 나서 평판을 얻고 나서 간추린 맨큐의 경제학을 나중에 내었다. 거꾸로가 아닌가? 먼저 뭔가 있어보이지만 너무 버거운 책을 내서 잔뜩 동기유발한 다음에 축약판을 내는게 맞다. 축약판을 내서 먼저 김빼놓고 나서 나중에 완판을 낸다는건 너무 맥빠지는 마케팅이다. 게다가 축약판의 축약 원칙조차 스티글리츠의 권장사항과 다르게 되어있다. 결국 번역자들이 자기 입맛에 맞는 챕터만 골라서 번역했다는 의혹을 사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양식있는 교수, 교사들은 이 책을 선뜻 권하기가 어렵게 된다. 나중에 완역본이 두권으로 나왔지만, 이미 시장에 자리잡기에 실패한 다음 나온 완역본은 번역자의 학문적 실적으로나 의미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스티클리츠의 경제학이 맨큐의 대항마로 적절하다고 본다. 원전은 어쩐지 몰라도 번역의 질이, 또 터무니없는 가격이 압박을 주는 크루그먼 경제학과 비교할 경우 더욱 그렇다. 하지만 진짜 진보적인 경제학자들이라면 이런 훌륭한 경제학 교과서의 페이퍼백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누군가가 그런 일을 했으면 한다. 그리고 마르크스 경제학에만 너무 시야를 제한시켜서 나머지를 모조리 결국은 시장주의자로 몰아서 평가절하하는 무지한 짓도 그만했으면 한다. 마르크스가 꿈꾸는 세상도 시장없는 세상은 아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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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정변증법 | 2009/01/01 15:39 | 사회에 대해 생각하기 | 트랙백 | 덧글(51)

마르크스 원전 읽기 -경제학 철학 노트 (5)

원문) 인간은 그가 실천적으로도 이론적으로도 유(類)를, 다른 사물의 유와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의 유를 자신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뿐만아니라, 현재의 생동적인 유로서 자기 자신에게 관계한다는 점에서, 보편적인, 따라서 자유로운 존재로서 자기 자신에게 관계한다는점에서 하나의 유적 존재다.


읽기)이제 노동 과정에서 소외의 세번째 특징이 나타난다. 그런데 이 부분은 이 문헌 전체에서 헤겔 철학에 대해 장광설로 비판하고 있는절대지에 대한 부분과 더불어 가장 사변적이고 난해한 부분이다. 우선 유(Gattung. Genus)라는 용어부터 당혹스럽다. 이용어는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에서 기원한 용어다. 유(genus)는 몇몇 개념들을 포괄하는 상위 개념이 되면서도 그 고유한 속성을가지고 있는, 즉 다른 유와 구별될 수 있는 그런 개념이다. 유의 하위개념들이 종(specy)다. 즉 이런 저런 인종들이있으며, 이들을 포괄하는 인류가 있는 것이다. 인류는 한 사람이 다른 자연과 구별되는 가장 보편적인 범주다. 즉 갑돌이,을돌이를 추상하면 한국인, 일본인, 다시 추상하면 황인종, 백인종, 그리고 그것을 더 추상하면 인류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여기서 더 추상하면 그냥 동물이 된다. 따라서 여기서 유라고 함은 한 사람을 동물과 구별하도록 하는 가장 보편적인 특징을 지닌 그런 집합 혹은 그런 속성이 된다.


유적 존재라 함은 자신이 바로 그런 분류에 포함되고 있음을 의식하는 존재를 말한다. 포이어바흐는 오직 인간만이 자신이 인류임을 의식한다고 보았다. 즉, 인간만이 인간성 자체를 의식할수 있고, 이런저런 속성을 가졌기에 자신이 동물과 구별된다고 의식한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유적존재다. 사실 이 유적존재라는 용어는 이후형이상학적 개념으로 마르크스 자신에게 배격되며, 다시 사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으로는(다른 논문에서 밝히겠지만) 이유적존재로서 인간 개념을 포기한 것은 마르크스 이론의 큰 헛점을 남기게 된다.


원문)유적생활은 동물에게뿐 아니라 인간에게도 물질적으로 우선 인간이 비유기적 자연에 의해 생활한다는 것에서 성립하지만, 인간은동물보다 보편적이며, 그가 그것에 의해 생활하는 비유기적 자연의 범위도 더 보편적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식물, 동물, 암석,공기, 빛 등은 한편으로는 과학의 대상이며, 한편으로는 예술의 대상이다: 이들은 인간이 향유하고 소화하기 위해 제일 먼저 마련해두어야 하는 인간 정신의 비유기적 자연, 정신적인 생활수단이다. 이론적 관점에서 보면 이들은 인간의식의 일부분을 형성하며,실천적 관점에서 보면 이들은 인간의 생활과 활동의 일부분을 형성한다. 이러한 자연생산물이 식품, 연료, 의복, 주거 등의 어떤형식으로 나타나든 간에 인간은 물질적으로 이러한 자연생산물에 의해 생활한다. 인간의 보편성은 실천적으로 자연이 (ⅰ) 직접적인 생활수단인 한에서,(ⅱ) 인간의 생명활동의 소재와 대상과 도구인 한에서 자연 전체를 그의 비유기적 육체로 만드는 바로 그 보편성 속에서 나타난다.자연은 그 자체가 인간의 육체가 아닌 한 인간의 비유기적 신체다. 인간이 자연적 수단에 의해 살아간다는 것은 인간이 죽지 않기위해 끝없이 자연과의 상호작용 속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육체적·정신적 생활이 자연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인간 역시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에, 자연은 스스로에 의존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읽기) 이건 변증법적인 사유가 들어가 있어서 단답식 교육을 받은 우리가 이해하기 무척 어려운 문장이다. 먼저 비유기적 자연이라는 말은 그냥 물질이라고 옮겨도무방하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 살펴보자.선 유적 생활을 하기 위해서 존재는 자신을 보편적인 '유'로서 인식해야 함은 앞에서보았다. 그런데 이 인식은 자신의 '유'의 반대편, 즉 그 반정립을 통해서만 정립될 수 있다. 개별 존재 역시 즉자적 존재에서대자적 존재, 즉 "그저 있음"이 아니라 "무엇에 대하여 있음"이 될때 인식이 가능하듯이 보편적 존재, 즉 유적 존재 역시"무엇에 대하여 있음"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 "무엇" 역시 보편적이라야 함은 물론이다. 즉 나는 연필 한자루, 책상하나를 쥐고 있다. 나는 교감 아무개와 싸운다. 그런데 나는 내가 보다 보편적인 존재임을 안다. 나는 학자로서 문방구를사용하며, 교사로서 관리자와 싸운다. 더 보편적이 되면 나는 한국인으로서 한반도에 살며, 노동자로서 국가에 고용되어 있다.보다시피 주체의 보편성이 상승되면, 거기에 대상이 되는 것(혹은 그 부정)의 보편성도 상승된다. 여기까지는 아직 '종'의수준이다. 이제 '유'의 수준까지 가면  "나는 인류로서 자연에 살고 있다"수준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을 "인류"로 볼수 있는 것은 그가 접하는 각종 사물들을 총체적인 "자연"으로 보편화시킬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연을 두 가지 방식으로 상대한다. 하나는 자신의 직접적인 생존 수단으로, 즉 구체적인 식량, 도구 등등으로, 다른 하나는 보편적인 자연으로.


이보편적인 자연은 인간 "주체"와 관계를 맺는 전체적이고 보편적인 자연이다. 각종 물질은 이런저런 과정을 통해 주체 내부로들어오면 육체가 되며, 밖으로 나가면 자연이 된다. 이렇게 인간은 자신과 자연이 대립되었으면서도 동시에 통일되어 있음을 알며,궁극적으로 모두 자연임을 안다.


이거, 풀이 하는 게 아니라 더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 같은데, 이걸 변증법 abc로 다시 풀어보자.


1)A라는 존재가 있다. 그런데 이 존재는 그저 있는 것만으로는 존재가 아니다. 2)그리하여 이 존재는 자신의 대립물인 B를정립한다. 즉 부정이 일어난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서 A는 자신이 존재하기 위해 B라는 타자, 부정에 의존해야 하는 사항에처한다. 즉 소외가 일어났다. 3) 그러나 이 소외는 A가 자신과 B모두 그들을 모두 그 내부의 계기들로 포괄할수 있는 '알파벳'이라는 더 보편적인 존재의 부분임을 깨달으면서 해소된다. 이게 지양이다.물론 여기서 끝나는게 아니다. '알파벳'은 '한글'과 대립한다. 그리고 같은 과정을 통해 이 대립은 '문자'에 포함됨으로써해소된다... 등등.


이제 이걸 인간과 자연으로 가져가 보자.1) 나는 인류다. 인류는 혼자 뻘쭘히 인류가 아니라 다른 비유기적자연과 구별되는 한 인류다. 2) 그런데 나는 인류로 존재하기위해 저 비유기적자연에 의존해야 한다. 이로써 비유기적 자연은 나에게 대립물로, 낯선 것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비유기적 자연은나에게 흡수되면 육체가 되고, 내 육체는 밖으로 나가면 비유기적 자연이 된다. 그러니 나와 비유기적 자연은 모두 대자연의 순환의 한 고리씩인 것이다. 3)이리하여 인간은인류 역시 자연의 한 부분이며 외적 자연이라고 생각했던 비유기적 자연과 더불어 하나인 것이다. 이렇게 해서 소외가 해소된다.


아직도 이해가 안된다면 이렇게 생각해 보자. 한 인간은 자신의 대립물, 자신의 대상, 그가 상대하는 세계의 보편성의 수준만큼 보편적 인간이 된다. 그가 상대하는 의식하는 세계가, 이 사람, 저 사람, 이 물건, 저 물건인 사람과, 그가 상대하고 의식하는 세계가 자연계, 인류, 우주인 사람의수준은 다른 것이다. 더 나아가 자신이 바로 이 인류, 자연계의 불가분의 한 고리임을 인식하고 의식하는 인간은 어떨겠는가?인간은 유일하게 한 개체이자 동시에 이런 보편적 존재를 의식할 수 있는 동물이다.


원문)소외된 노동은 인간에게서 (1)자연을 소외시키고, (2)자기 자신, 인간 고유의 활동적 기능, 인간의 생명활동을 소외시킴으로써,인간에게서 유를 소외시킨다. 소외된 노동은 인간에게 유적 생활을 개인 생활의 수단으로 만든다. 첫째로 소외된 노동은 유적생활과개인생활을 소외시키고, 둘째로 추상 속에 있는 후자를 마찬가지로 추상화되고 소외된 형식 속에 있는 전자의 목적으로 삼는다. 그까닭은 첫째, 인간에게 노동, 생명활동, 생산적 생활 자체가 욕구, 육체적 생존을 유지하려는 욕구를 충족시키는 수단으로서만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생산적 생활은 유적 생활이다. 그것은 생활을 생성하는 생활이다. 생명활동의 방식 속에는 어떤 종의성격 전체, 그의 유적 성격이 놓여 있으며, 자유로운 의식적 활동은 인간의 유적 성격이다. 생활 자체는 생활의 수단으로서만나타난다.


읽기)그렇다면 소외된 노동이 어찌하여 인간을 유로부터 소외시킨다는 것일까? 우선 인간에게서 인류로서의 활동을 소외시킴으로써다. 이문단은 매우 복잡하게 기술되었지만 실은 아주 단순한 내용이다. 요약하면 이렇다. 인간은 활동한다. 인간의 활동에는 두 종류가있다. 하나는 개별 존재로서의 활동이며 다른 하나는 인류로서의 활동이다. 즉 개인적인 욕구와 충동을 충족시키는 활동, 그리고인류로서 자신의 유적 존재를 의식하며 하는 활동이다. 이 중 전자는 단지 생존하고 순간적인 욕구를 충족하는 활동이다. 따라서그때 그때의 활동이며 파편적인 활동이다.  후자는 인류의 생활방식 자체를 만들어가는 활동이다. 이 활동은 여러 파편적 활동을보편화하여 바라보는 활동이다. 노동은 단지 생존수단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방식도 생산하는 활동이다. 즉, 단지 먹이 획득이아니라 먹이 획득 방법을 만들어내고 적용하는 과정이 노동인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생존, 즉 생명유지를 위한 활동 속에서 이미노동이라는 자신의 유적 성격이 드러나는 존재다. 그러나 소외된 노동은 이런 활동을 단지 육체적 생존 유지의 수단으로 만들어버린다. 즉 이 속에서 인간은 자연, 외적 세계를 그때 그때의 생존 수단으로서만 접하게 된다. 이로써 인간은 노동을 하면서 점점자신을 "인류", "유적 존재"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이는 인간을 동물로 만든다는 것이다. 동물이 어쨌길래?


원문)동물은 자신의 생명활동과 직접적으로 하나다. 동물은 자신의 생명활동과 구별되지 않는다. 동물은 생명활동이다. 인간은 자신의생명활동 자체를 자신의 의욕과 의식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는 의식된 생명활동을 가진다. 인간이 직접적으로 그것에 융합되는 규정은없다. 의식된 생명활동은 인간을 동물적인 생명활동과 직접적으로 구별한다. 바로 이 때문에 인간은 하나의 유적 존재이다. 또는인간이 하나의 유적 존재이기 때문에 그는 의식적 존재일 뿐이며, 다시 말해 그의 고유한 생활은 그에게 대상이다. 바로 이 때문에그의 활동은 자유로운 활동이다. 소외된 노동은 이 관계를 전도시키고, 바로 인간은 의식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의 생명활동,자신의 존재의 본질을 단지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 만든다.


읽기) 마르크스는 동물과 인간의 결정적인 차이를 자기내 존재와 대자적 존재로 본다. 이는 나중에 하이데거와 사르트르에게 그대로 계승된다.하이데거는 오직 인간만(존재한다면 천사나 신도) 자연계의 대자적 존재라고 본다. 이 의미는 자신의 활동을 의식하는 존재, 자기자신을 의식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존재, 즉 자기 바깥으로 나가서 자기를 인식할수 있는 존재다. 동물은 본능적으로 생멸활동을하지만, 자신이 생명활동을 하고 있음을 알지 못한다. 즉 동물은 자신의 생명활동 그 자체다. (물론 이런 인간 규정은 최근,일부 영장류와 돌고래가 자아의식을 가지고 있음이 확인됨으로써 지지받기 어려워졌다. 하지만 이는 영장류와 돌고래를 사람 대접을하면 될 일이다). 이는 훗날 허버트 미드가 "I"와 "me"분립 이론을 수립하는 초석이 된다.  이제 "유적존재"라는 모호한 용어가 "생명활동을 의식하는 존재"로 "활동하는 자신을 의식하는 존재"로 보다 분명해진다. 이로써인간은 그의 활동, 그의 생활을 자신의 대상으로 삼을수 있는 존재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그의 활동, 그의 생활을 통제할수 있는 존재이며, 따라서 "자유로운 존재"다. 이런 의미를 알아야 엄격한 생활을 하던 고대 스파르타인이 자신들을"자유로운"존재라고 자부한 이유를 납득할수 있게 된다. 확실히 스파르타인은 충동과 욕망에 휘둘리는 그리고 그 충동과 욕망을의식하지 못하는 현대인들보다 자유로웠다.

그런데, 소외된 노동은 인간이 하루의 대부분을 원하지 않는 일을 할수밖에 없게 만들며, 그 이유가 겨우 "생존수단을 얻기위함"이다. 이로써 인간은 "생명활동"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끌려가게 된다. 그런데 인간은 의식적인 존재이기 때문에자신이 생존 수단을 얻기 위해 자신의 생명활동을 그 도구로 사용함을 안다. "목구멍이 포동청이다"라는 말을 하면서. 이건동물보다 곱절로 비참한 것이 아닐까? 일벌들이 자신의 "일함"을 의식한다면 어떻게 될까?

by 부정변증법 | 2008/10/30 12:23 | 마르크스 읽기 | 트랙백 | 덧글(0)

마르크스고전읽기 -경제학 철학 수고(4)

원문) 그러면 노동의 외화는 어디에서 성립하는가?

읽기) 우선 이 문헌헌에 무차별적으로 사용되는 외화, 소외 두 용어를 좀 정리해야겠다. 이 둘은 각기 alienation 과 estrangement 의 번역이다. 이 중 하나는 헤겔의 용어고 다른 하나는 포이어바흐의 용어다. 헤겔의 용어는 이렇다. 원래 정신이 있다. 그런데 이 정신은 스스로를 인식하지 못한다. 이 상태는 그저 있는 상태이며 자신이 있음도 알지 못하는 상태다. 자신이 있음을 인식하려면 자신을 비출 대상이 있어야 한다. 즉, "무언가에 대하여, 무엇"이 되어야 자신의 있음을 알게된다. 이리하여 유명한 대자적 존재라는 말이 나온다. 이로써 정신은 자신의 대상인 외부세계를 만들어낸다. 여기에서 최초의 외화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정신과 그 외부세계는 한몸에서 난 두 현상이지만, 이를 모르는 정신은 그 외부세계에 비추어 본 자신이 실제 자신과 "동일한지"에 대해 확신하지 못한다. 이로써 정신은 "정신"과 "외부세계, 대상"으로 분열되고, 이를 다시 하나로 만들기 위한 기나긴 여정이 시작된다. 이로써 원래 하나라야 마땅한 존재가 자신을 분열된 것으로 파악하는 현상, 자신에게 속한 것을 타자로써 파악하는 현상이 계속된다. 이것이 alienation이다.

소외는 포이어바흐의 용어다. 포이어바흐는 인간이 신을 만들고, 그 신에게 자신의 모든 힘과 좋은 점을 부여한다고 본다. 그리하여 마침내 신은 인간 자신의 산물이 아니라 인간에게 아주 낯선 대상이 되어 인간 앞에 군림한다. 이로써 인간은 자신의 산물인 신의 지배를 받으며, 신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주변화된다. 이것이 인간의 estrangemnet다. 보다시피 결국 이 두 용어를 구별할 이유가 없어보인다. 이 문헌을 처음 번역한 강유원 선생이 이 두용어를 외화, 소외로 번역한 관례를 따랐지만, 그냥 다 '소외'로 읽어도 무방할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마르크스는 노동 과정속에서 일어나는 소외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원문) 첫째, 노동이 노동자에게 외적이라는 것, 즉 노동이 노동자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 그런 까닭에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 속에서 스스로를 긍정하지 않고 부정하며, 행복을 느끼지 않고 불행을 느끼며, 자유롭고 육체적이며 정신적인 에너지를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육체를 소모시키고 그의 정신을 황폐화시킨다. 그런 까닭에 노동자는 노동의 외부에서야 비로소 자기 곁에 있다고 느끼고, 노동 안에서는 이방인이라고 느낀다. 노동하지 않을 때는 집에 있는 것처럼 편안하고, 노동할 때에는 편안하지 않다. 그런 까닭에 그의 노동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강요된, 강제노동이다. 그런 까닭에 노동은 욕구의 충족이 아니라 노동 바깥에 있는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 노동의 낯설음은 어떠한 물질적인 혹은 그 밖의 강제도 존재하지 않게 되자마자, 노동이 마치 역병처럼 기피된다는 것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읽기) 가장 먼저,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이 자신의 적성, 소질, 희망과 무관한 일이라는 현실에 직면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억지로 일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더 기가 막힌 것은 그 일의 결과 자신의 어떤 바람직한 능력이나 특성의 향상이 없다는 것이다. 억지로 죽도록 일했지만, 일하기 전이나 뒤나 자신의 진보와 향상이 없다면 한 마디로 시간낭비 아닌가? 이는 특히 육체노동이 사라진 오늘날 더욱 심각하다. 차라리 중세식 농업노동은 근육과 체력이라도 길렀지만, 오늘날의 노동은 고도의 분업화로 인해 아무리 많이 하더라도 아주 세분화된 단순한 작업에만 숙달될 뿐, 어떤 가치 있는 능력이 향상되지 않는다. 그러니 편협한 마음, 균형잡히지 않은 육체, 국소부위의 신체 손상 등이 노동의 결과다. 그러니 항상 휴식은 달콤하고 일요일은 행복하고 월요일은 마음이 무겁다. 인간은 항상 노동하지 않기를 꿈꾸며, 심지어 노동하는 순간에도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하는 이유는 "먹고살기 위해서", 즉 생존수단을 얻기 위해서다. 이로써 노동은 수단이 된다. 노동의 목적은 노동을 통해 충족하게 될 욕구가 아니라, 노동의 결과 받게 될 임금을 통해 충족하게 될 욕구다. 즉 노동을 하는 목적과 실제 노동과는 무관하다. 그러니 자발적으로 열심히 일할 노동자는 없다. 그래서 강제가 사라지면 노동도 사라진다. 계약한 노동시간을 떼우고 월급만 받을수 있으면 그만이지, 그 노동의 결과야 어찌되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런 의미에서 자신의 노동 결과물에 고도의 관심을 기울였던 기술자, 장인과 근대의 노동자는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쉬는 것보다 일하는 것이 더 편하다"라고 말했던 모차르트의 말은 오늘날 점점 먼 이상이 되어가고 있다. 도리어 "월급이 나오고 보는 사람이 없다면 되도록 놀고싶다"는 것이 오늘날의 노동자다. 당연하지 않은가? 내가 원한 일도, 내가 발전하고 계발되는 일도 아닌데다, 하면할수록 나의 심신을 망치는 일인데, 왜 자발적으로 하겠는가?

원문) 외적인 노동, 인간이 스스로를 외화하는 노동은 자기희생이며, 고행이다. 마지막으로 노동자에 대한 노동의 외재성은 노동이 노동자 자신의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것이라는 것, 노동이 그에게 속하지 않는다는 것, 그가 노동에서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속한다는 것에서 나타난다. 종교에서 인간적인 상상력, 인간적인 두뇌, 인간적인 심정의 자기 활동이 개인에게 독립되어, 즉 낯선 신적인 또는 악마적인 활동으로서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듯이 노동자의 활동 역시 자기 활동이 아니다. 노동자의 활동은 다른 사람에게 속하며 노동자 자신의 상실이다.

읽기) 사정이 이러하니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노동을 강제받아야 하며, 온갖 감시장치를 통해 땡땡이를 치지 못하도록 통제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노동의 결과, 그 생산물을 통해 이득을 보는 존재가 노동자 자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을 판매했고, 그 댓가로 임금을 받았다. 그러니 그 노동은 근무시간 동안은 노동자의 것이 아니라 그것을 구입한 사람, 즉 자본가의 것이다. 돈을 받았기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자기 몸이 남의 마음에 따라 남의 목적을 위해 그리고 남이 정해준 시간과 리듬에 따라 일해야 한다는 것은 대단한 고역일수밖에 없다. 차라리 노예는 애초에 자기가 남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노예에게는 어떤 분열도 소외도 있을수 없다. 그러나 노동자, 소위 자유 노동자는 자유 시민이지만, 일하는 시간 동안에는 다른 사람의 소유물처럼 된다. 생각은 자유민인데 몸은 노예다. "나"는 여전이 내것이로되 "나의 활동"은 내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그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는 마치 종교에서 사람들이 자신들의 좋은 활동은 신 덕분, 나뿐 활동은 악마 때문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활동은 대체 어디 있으며, 활동이 모두 남의 것인 자신은 대체 무엇인가? 결국 이는 자신의 상실이다. 노동자는 노동하는 순간부터 자신을 상실하며, 근무시간이 끝나면 그 때 자신으로 돌아온다.

원문) 그런 까닭에 인간(노동자)은 그의 동물적인 기능들, 먹고, 마시고, 생식하는 것에서만, 기껏해야 그의 거주와 의복 등에서만 자발적으로 활동한다고 느끼고, 그의 인간적인 기능들에서는 자신을 동물로 느낀다는 결과가 나온다. 동물적인 것이 인간적인 것으로, 그리고 인간적인 것이 동물적인 것으로 된다.
먹는 것, 마시는 것, 생식하는 것 등은 물론 참으로 인간적인 기능들이다. 그러나 그러한 일들을 인간적인 활동의 다른 영역에서 분리하고 최후의, 유일한 궁극목적으로 만드는 추상에서는 그러한 일들이 동물적이다.

읽기) 여기서 마르크스의 유명한 문장이 등장한다. 하루 중에서 근무하는 시간을 제외한 시간동안 노동자는 무엇을 하는가? 당신들은 무엇을 하는가? 당시 10시간 노동법도 간신히 통과될까 말까한 시절임을 명심하자. 그러면 9시 출근에 8시 퇴근이란 뜻이다. 그럼 남은 시간, 즉 자유 의지로 살수 있는 시간 동안 무엇을 하겠는가? 먹고, 자고, 싸고, 생식한다.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작업장에서 자신이 아니라 남의 것, 즉 가축이나 노예였던 노동자는 간신히 되돌아온 자유시간에는 결국 동물적인 일을 할 시간만 남아있는 것이다. 노동을 한다는 것은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는 매우 중요한 징표다. 그런데 인간은 그 노동 시간동안 가축이다. 먹고, 자고, 싸고, 생식하는 것은 인간의 동물적 속성이다. 그런데 그 시간동안 인간은 자신을 살아있다고 느낀다. 여러분도 생각해 보라. 9시부터 6시까지 사이에 자신이 살아있음을, 가장 활력있는 순간이 언제인지, 학생들이 1교시부터 6교시 까지 사이에 가장 생생하게 살아있는 시간이 언제인지? 그것은 점심시간다. 즉, 먹는 시간이다.
물론 마르크스는 먹고, 마시고, 생식하는 것을 끊고 고차적인 정신세계를 찾아가자는 종교를 설파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나름 가치있는 활동이다. 그러나 그 활동들이 삶의, 그리고 그 많은 시간을 소모하는 노동과 고역의 최종 목적이라면, 그렇다면 그것은 동물적인 활동이다. "목구멍 포도청"때문에 일하는 인간은 동물이다. 그리고 "목구멍을 포도청으로 임명하는"왕국은 동물의 왕국이다.


원문) 우리는 두 가지 측면에서 실천적인 인간 활동의 소외의 행위, 노동을 고찰하였다. (1) 노동자에게 낯선 대상으로서 그리고 노동자를 지배하는 대상으로서 노동의 생산물에 대한 노동자의 관계. 이러한 관계는 동시에 낯설고 그에게 적대적으로 대립하는 세계로서 감성적 외적 자연적 대상에 대한 관계다. (2) 노동의 내부에 있는 생산행위에 대한 노동의 관계. 이러한 관계는 낯설고 노동자에게 속하지 않는 활동, 고통으로서 활동, 무력으로서 힘, 거세로서 생식에 대한 노동자 자신의 관계이며, 이 활동은 노동자 자신과 대립하며, 그에게서 독립적이고 그에게 속하지 않는 활동으로서 노동자 자신의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에너지와 그의 인격적 생명 (도대체 활동 이외의 생명이란 무엇인가?)이다. 앞에서 서술했던 것이 대상의 소외였다면, 이것은 자기 소외다.
우리는 이제 두 개의 규정에서 소외된 노동의 세 번째 규정을 이끌어내야만 한다.

읽기) 이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에서 인간 소외를 두가지 끌어내었다. 하나는 저번에 살펴본 바와 같은 자신의 생산물이 낯선 것이 되고, 도리어 자신을 지배하는 현상이다. 다음은 그 생산을 하는 과정 속에서 노동자가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지 못하는 상황이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 아닌가?"라고 반문할지 모른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다시 되묻는다. "활동을 제외한 생명이란 무엇인가?" 즉 "일을 제외한 삶, 결국 먹는 일만 남은 삶은 무엇인가?" 앞의 것, 즉 노동 생산물이 낯선 것이 되어 도리어 노동자를 지배하는 상황은 대상의 소외, 노동 대상이 남의 것이었기에 비롯된 것이지만, 두번째 소외는 이제, 노동 과정, 노동 시간 동안 노동자 자신이 자신의 것이 아니게 된 상황, 하루 중 가장 인간적이고 활동적인 시간과 능력을 순전 타인에게 내어주고 기껏 먹고, 자고, 생식하는 활동만 자신에게 남겨둔 분열적 상황이다. 이는 노동자와 노동대상의 분열이 아니라 노동자 자신의 분열이다. 이를 마르크스는 자기소외라고 부른다.

이 두 가지 규정에서 마르크스는 다시 세번째 소외를 제시하고자 한다.(다음 시간에)

by 부정변증법 | 2008/10/27 09:44 | 마르크스 읽기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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