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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독해-경제학 철학 노트(8)

원문) 우리는 지금까지 관계를 노동자의 측면에서만 고찰해 왔는데 이후에는 비노동자의 측면에서 고찰하기로 하자.

노동자는 소외되고 외화된 노동을 통해 노동에게 낯설고 노동 바깥에 성립하는 인간의 이 노동에 대한 관계를 산출한다. 노동에 대한 노동자의 관계는 자본가 -또는 그 밖의 다른 이름으로 노동의 주인을 불러도 좋다면-의 노동에 대한 관계를 산출한다. 그러므로 사적소유는 외화된 노동, 자연과 자기 자신에 대한 노동자의 외적 관계의 산물이요, 성과이며, 필연적 귀결이다.그러므로 사적소유는 외화된 노동, 다시 말해서 외화된 인간, 소외된 노동, 소외된 생활, 소외된 인간이라는 것이 개념의 분석에 의해 분명해진다.


읽기) 이제 마르크스는 시야를 노동자의 반대편에서 바라본다. 사실 이 작업이 그의 노작 '자본론'이다. 똑같은 과정이 노동자의 반대편에서는 '자본'으로 보이는 것이다. 즉 소유로 보이는 것이다. 노동자에게 소외된 활동이 자본가에게는 사적 소유, 재산이다. 노동자와 노동의 관계는 소외의 관계지만, 자본가와 노동의 관계는 소유의 관계다. 따라서 사적소유와 외화된 노동, 즉 소외된 노동, 인간 소외 등등은 동일한 본질의 다양한 현상들로 근본적으로 같은 현상인 것이다. 여기에서도 그의 전형적인 변증법적 사유가 드러나고 있다. 변증법의 대가들은 항상 모순되고 대립되는 것을, 오히려 그런 것일수록 그것들이 어떤 하나의 실체의 상반된 현상들이 아닐지 사유한다. 형식논리학적 사유에서는 이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변증법적으로 사유하는 마르크스에게는 소외된 노동과, 노동의 소유는 같은 것이다. 아니, 같은 것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같은 것이 되기 위해 서로를 지양하여 새로운 관계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부정변증법'으로 사유하는 필자는 마르크스와 길을 갈라서게 되지만, 그것은 나중에 논의하기로 하자.


원문) 물론 우리는 외화된 노동(외화된 생활)의 개념을 사적소유의 운동결과로서 정치경제학에서 획득하였다. 그러나 이 개념의 분석에서 신들이 인간지성의 잘못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인 것과 마찬가지로, 비록 사적소유가 외화된 노동의 근거와 원인으로 나타나지만, 그것은 오히려 외화된 노동의 귀결이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나중에 이러한 관계는 상호작용으로 변한다.

사적소유의 전개의 최후 정점에서야 사적소유의 이러한 비밀, 다시 말해 한편으로 사적소유는 외화된 노동의 산물이라는 것, 그리고 사적소유는 노동이 외화되는 수단이며 이러한 외화의 실현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읽기) 정치경제학에서는 노동의 소외가 사적소유의 운동 결과, 즉 자본의 운동결과로 나타난다. 당연히 자본이 투자하고 고용하고 월급을 주고 일을 시키는 것이니. 그러나 기본적으로 자본 그 자체가 소외된 노동의 결과물이다. 즉 애초에 자본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타인 노동의 착취를 통해 축적된 것이다. 그리고 이 관계는 나중에 닭과 달걀의 관계가 된다. 노동이 소외되면서 자본이라는 사적소유를 만들고, 다시 이 사적소유가 노동자를 고용함으로써 소외된 노동을 만들고....이 관계는 사적소유가 모든 신비적 후광을 벗어던지고 철저하게 경제적 관계로 현상하는 단계, 인간에 의한 인간노동의 착취가 그 적나라한 모습을 보이는 단계, 즉 자본주의 경제에서야 분명히 드러난다. 자본은 원래 소외된 노동의 결과 축적된 것이지만, 이제 노동을 지배하고 소외시키는 강력한 힘으로 작용한다.


원문) 이러한 전개는 지금까지 풀리지 않던 모순들에 빛을 던져준다.

1. 정치경제학은 생산의 참된 영혼으로서 노동에서 출발함에도 불구하고, 노동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고 사적소유에게는 모든 것을 주어버린다. 프루동은 이러한 모순에서 노동을 옹호하고 사적소유를 반대하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우리는 외견상의 이러한 모순이 소외된 노동의 자기모순이라는 것과 정치경제학은 소외된 노동의 법칙들을 밝혔을 뿐임을 알고 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또한 임금과 사적소유는 동일한 것임을 알고 있다. 그 이유는 임금은 노동의 생산물, 노동의 대상이 노동 자체에 대해 급료를 지불한 것으로서, 노동 소외의 필연적 결과이기 때문이며, 또한 임금 체계에서 노동은 자기 목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임금의 하인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나중에 상세히 거론할 것이고 지금은 몇 가지 결과만을 이끌어 낼 것이다.


읽기) 이러한 전개란 노동이 소외된 결과가 자본(사적소유)이며, 다시 그 자본이 소외된 노동을 생성하는 전개를 말한다. 이러한 관계를 밝힘으로써 그 동안 모든 경제학이 '노동'을 '소유'의 근본으로, 출발점으로 삼음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물은 모두 노동이 아니라 자본(사적소유)이 가져가는 모순을 만천하에 밝힐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프루동은 "소유한다는 것은 도둑질하는 것이다."라고 선언하고, 사적소유에 반대했던 것이다. 그런데 알고보니 노동(소외된 노동인 한)과 사적소유가 동일한 것이다. 즉 "임금"을 받고 판매되는 노동 그 자체의 모순이 자본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따라서 임금과 사적소유는 동일한 것이다. 임금 노동은 노동이 아니라 임금, 즉 화폐의 노예이며, 자기 자신의 주인이자 목적이 아니다. 따라서 임금을 받고 일한다는 것, 그 자체가 이미 노동을 소외시킨다는 것이며, 따라서 사적소유, 자본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원문) 따라서 임금의 강제적 인상(다른 모든 어려운 점, 그것이 변칙적인 강제력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는 점은 제쳐 두고서라도)은 노예의 보수 개선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며 노동자에게도 노동에도 그것의 인간적 규정과 품위를 얻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상 프루동이 주장하는 임금의 평등조차 현재의 노동자가 노동과 맺고 있는 관계를 모든 인간이 노동과 맺는 관계로 바꾸는 것에 불과하다. 이렇게 되면 사회가 추상적인 자본가로 파악된다.

임금은 소외된 노동의 직접적 결과이며, 소외된 노동은 사적소유의 직접적인 원인이다. 따라서 한 쪽의 소멸은 다른 쪽의 소멸을 수반한다.


읽기)  따라서 부의 분배에서 노동의 몫을 늘리자는 프루동식의 방안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노예에게 밥을 더 주자 수준은 되지 않을 것이며, 노동의 소외된 속성 그 자체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월급이 많다 적다가 아니라 누구를 위해서 일하며, 그 일의 결과가 누구를 이롭게 하느냐 하는 것이다. 노동의 이로움이 단지 "화폐" 즉 임금으로만 나타난다면, 이는 도리없이 소외된 노동이며 따라서 여전히 사적소유, 즉 자본을 이롭게하고 생성하는 노동이다.  프루동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임금 노동자가 되도록 하자고 주장하는데, 이는 결국 사회 전체가 자본가가 되자라는 말과 동의어가 되는 것이다. 임금노동과 자본은 동전의 양면이며,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는 대립물이니 말이다.  따라서 이 관계가 지양되려면 임금노동과 자본은 모두 부정되어야 하며 지양되어야 한다. 실제 이 중 하나의 부정은 결국 다른 쪽의 부정이 될 것이다. 이것이 필자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투쟁에 미온적인 이유다. 비정규직이든 정규직이든 그것이 임금노동인 한 결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임시직 노예인가 아니면 영구직 노예인가의 차이에 불과하다. 비정규직은 임금노동의 굴레에서 오히려 좀 더 자유롭다. 따라서 비정규직이 요구할 것은 굴레에서 자유로워진 조건은 유지하면서 생계의 압박을 제거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유럽의 자율주의자들은 '보장소득제'를 요구한 것이다.


원문) 2. 사적소유, 노예 상태로부터의 사회의 해방이 노동자 해방이라는 정치적 형식으로 표명된다는 것은 소외된 노동과 사적소유의 관계로부터 더 나아간 결과다. 이는 노동자의 해방만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 보편적·인간적 해방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며, 그 이유는 생산에 대한 노동자의 관계 속에 인간의 예속 상태 전체가 포함되어 있고 모든 예속관계는 이러한 관계의 변형이고 귀결일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분석을 통해서 소외되고 외화된 노동에서 사적소유라는 개념을 발견하였고, 이제는 이러한 두 요인의 도움으로 정치경제학의 모든 범주들을 전개시킬 수 있다. 우리는 각각의 범주들, 예를 들어 거래, 경쟁, 자본, 화폐 등을 이 기본적인 두 요소의 특수하고 발전된 표현으로서 재인식할 것이다.

 

읽기) 서로 대립물인 소외된 노동과 사적소유의 상호지양은 어떤 형태로 나타날 것인가? 마르크스는 그것을 노동자의 해방으로 제시한다. 또한 노동과 자본은 한 본질의 서로 다른 현상들이기 때문에 노동자의 해방, 즉 노동의 지양은 바로 자본, 사적소유의 지양으로 나타날 것이고, 이는 바로 보펴적인 인간해방이 된다. 앞에서 밝힌 바대로 소외된 노동이 바로 자본의 생산자이기 때문에 소외된 노동의 철폐, 즉 노동해방은 자본의 철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 두개념, 소외된 노동과 자본이라는 두 규정을 길어낸 마르크스는 이후 이 두 규정의 상호작용의 전개를 통해 그동안 그저 전제되었던 경제학의 여러 전제들, 특 거래, 경쟁, 자본, 화폐등을 그것의 표현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 과제는 그의 평생에 걸쳐 완수되지 못했다.

원문)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형태를 추적하기에 앞서 두 개의 과제를 해결해야만 한다.

1. 소외된 노동의 결과로서 나타났던 사적소유의 보편적 본질을, 그것의 참으로 인간적이고 사회적인 소유와의 관계 속에서 규정하는 것.

2. 우리는 노동의 소외와 그것의 외화를 하나의 사실로 받아들이고 이 사실을 분석하였다. 이제 우리는 인간이 어떻게 자신의 노동을 외화시키고 소외시키는지를 묻는다. 이러한 소외가 어떻게 인간적 발전 속에 자리 잡았는가?


우리는 이미 사적소유의 기원에 관한 물음을 인류의 발전과 외화된 노동의 관계에 대한 물음으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이 문제의 답을 구할 재료를 많이 획득하였다. 사적소유에 관해 이야기 할 때 우리는 인간 외부에 있는 무엇인가를 다루고 있다고 생각한다. 노동에 관해 이야기할 경우, 비로소 우리는 직접적으로 인간을 다룬다. 이러한 새로운 문제의 공식화는 이미 그 답을 암시하고 있다.

 

읽기) 그런데, 마르크스는 구체적인 경제학 범주들의 분석에 앞서 두개의 선결과제를 제시한다. 이 두개가 먼저 해결되어야 할 개연성은 사실 그다지 분명하지 않다. 어쟀든 마르크스가 새로 던진 질문은 소외된 노동이 아니라 노동자가 자신을 실현하는 그런 노동의 결과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소외된 노동의 결과가 사적소유라면, 소외되지 않은 노동의 결과는 어떤 소유일까? 그것을 마르크스는 사회적 소유라고 말하고 있다. 두번째 물음은 사실 가볍지 않고, 엄청난 부담감을 주는 물음인데, 대체 어쩌다가 노동이 이렇게 소외된 노동이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방대한 역사적 연구를 요구한다.


원문) 1의 경우, 사적소유의 보편적 본질과 그것이 참으로 인간적인 소유와 맺는 관계.

외화된 노동은 상호규정적인 또는 하나이고 동일한 관계의 다른 표현일 뿐인 두 개의 구성부분으로 분해되었다. 전유는 소외로 외화로 나타나고 외화는 전유로, 소외는 진정한 시민권 취득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한 측면, 노동자 자신과 관련된 외화된 노동, 다시 말해 자기 자신에 대한 외화된 노동의 관계를 고찰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의 산물이며 필연적 결과로서 노동자와 노동에 대한 비노동자의 소유관계를 발견하였다.

외화된 노동의 물질적이고 요약된 표현으로서 사적소유는 노동자가 그의 노동, 그의 노동 생산물 및 비노동자와 맺는 관계, 그리고 비노동자가 노동자 및 노동 생산물과 맺는 관계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읽기) 아직까지는 마르크스는 그런 역사적 연구를 통해 질문에 답할만한 역량이 되지는 않는다. 그는 여전히 이것을 오직 변증술로만 풀어나가려 하고 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자꾸 동어반복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어쨌든 다시 그 논리를 따라가 보면 사적소유와 참으로 인간적인 소유와의 관계부터 따져본다(물음 1). 이 문헌 앞에서 분석 대상이 되었던 현상인 소외된 노동은 그 반대쪽 측면인 소유를 대립자로 산출함으로써 소외와 소유로 분해되었다. 그리하여 노동자와는 소외가, 비노동자와는 소유가 나타났다. 따라서 사적 소유는 소외된 노동의 외적 표현이자 결과다. 사적 소유에는 노동자와 소외된 노동의 관계, 비노동자와 노동생산물의 관계가 응축되어 있는 것이다. 이 문장은 거꾸로 해석하면 더 이해가 쉽다. 사적소유에는 두 계기가 포함되어 있다. 노동자가 그 소유의 대상을 생산하는 과정으로서 소외된 노동, 그리고 생산된 결과물에 비노동자가 맺는 관계로서 소유. 그리하여 소외의 최종적인 결과는 사적소유이며, 사적소유자에게만 당시에 주어지던 시민권인 것이다.


원문) 우리는 이미 노동을 통해서 자연을 획득하는 노동자와 관련하여 전유는 소외로, 자기활동은 타인을 위한 활동, 타인의 활동으로, 생명의 약동은 생명의 희생으로, 대상의 생산은 낯선 힘, 대상의 상실, 낯선 사람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보았다. 이제 우리는 노동과 노동자에게 낯선 이 사람이 노동자, 노동, 그리고 노동의 대상과 맺고 있는 관계를 고찰한다.

첫째로 지적할 것은 노동자에게 외화, 소외의 활동으로 나타나는 모든 것이 비노동자에게는 외화, 소외의 상태로 나타난다는 것에 주목하라는 것이다. 둘째, 생산 속에서 그리고 (마음의 상태로서) 생산물에 대한 노동자의 현실적·실천적 행동은 그와 대립하는 비노동자의 경우 이론적 행동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셋째는 비노동자는 노동자가 자신에게 반대해 행하는 모든 것을 노동자에 반대해 행하지만, 노동자에 반대하여 행하는 일체의 것을 자기 자신에게 행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 가지 관계들을 상세히 고찰하기로 하자.


읽기) 여기서 노트는 끊어진다. 이 세가지 관계는 마르크스 평생에 걸쳐 상세히 고찰되지만, 결국 출판된 것은 두번째 관계를 집중적으로 취급한 자본론이었다.

어쨌든 경제학이 감추고 있는 실제 활동을 노동자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소외된 노동과정, 소외된 활동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동일한 활동을 자본가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소외의 상태로 나타난다. 활동과 상태는 다르다. 상태는 활동과 달리 하나의 사물(thing)로 간주된다. 그리하여 노동자에게는 실제 삶이고 생활인 것이 자본가에게는 추상적인 공식과 이론으로 나타난다. "아, 일하기 싫다."와 "근로의욕 저하", "나 짤렸어!"와 "인력 감축". 같은 현상이 이렇게 다르게 나타난다. 마지막 세번째 관계는 조금 이해하기 까다롭다. 이 말은 결국 노동자는 결과적으로 자해행위를 하는 셈이 되지만 자본가는 그렇지 않다 이런 식의 뜻이 될거다. 즉 자본가는 당연히 노동자에게 해가되고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행위를 한다. 그런데 노동자 역시 도리어 자신에게 해가되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가는 결코 그러지 않는다. 

이 대목은 사회학적인 조사가 좀 더 필요한 부분이며, 결국 '계급 구성'이라는 개념을 이끌어내게 되는 대목이다. 계급구성 개념의 의미는 이렇다. 자연적인 상태에서 노동자는 결코 자신을 위해서만 행위하지 않으며, 때로는 도리어 자본가를 위해서 행위한다. 그러나 자본가는 자연적인 상태에서도 결코 노동자를 위해 행위하지 않으며 철저히 자기를 위해 행위한다. 따라서 자본가라는 계급은 기성의 것이지만, 노동자라는 계급은 의식적으로 구성되지 않으면 안된다.

바로 이 대목이 마르크스 사상을 여타의 사회주의 내지 노동계급 사상과 구별하는 부분이다. 마르크스 사상은 결국 "앎", "정체성"에서 출발하게 되는 것이다. 계급투쟁은 먼저 자신의 계급을 앎에서 시작하며, 이 계급은 이미 정해진 사회의 어떤 틀이 아니라 "같은 계급이라고 서로 알게된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는 한, 자연적인 노동자 계급의 의식은 결코 노동자 계급을 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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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정변증법 | 2008/11/17 21:57 | 마르크스 읽기 | 트랙백 | 덧글(4)

마르크스 고전 읽기 -경제학 철학 노트(7)

원문) 우리는 하나의 정치경제학적 사실, 노동자의 그의 생산의 소외에서 출발하였다. 우리는 이 사실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소외된, 외화된 노동. 우리는 이 개념을 분석하였고, 그에 따라 단순히 하나의 정치경제학적 사실을 분석하였다.
이제 더 나아가 소외된, 외화된 노동이라는 개념이 현실 속에서 어떻게 표현되고 서술되어야만 하는지 살펴보자.

읽기) 지금까지 마르크스는 순전 경제학 범주 내에서 생산과정, 즉 노동을 분석했다. 그리고 그것을 소외된, 외화된 노동으로 정식화하였다. 그렇다면 이제 이것을 경제학이 아니라 현실의 언어로, 일상적인 현상으로 어떻게 서술해야 할까?

원문) 노동의 생산물이 나에게 낯선 것이고 나에게 낯선 힘으로 대립한다면 그것은 누구에게 속하는 것일까?
나 자신의 활동이 나에게 속하지 않으며, 낯선 활동, 강요된 활동이라면 그것은 누구에게 속하는 것인가? 나 이외의 다른 존재에게. 이 존재는 누구일까?
신들일까? 물론 고대에는, 예를 들면 이집트, 인도, 멕시코의 신전건축과 같이 주요 생산이 신에 대한 봉사로 나타날 뿐만 아니라 그 생산물은 신들에게 귀속되었다. 그러나 신들만 노동의 주인이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마찬가지로 자연도 결코 아니었다. 그리고 인간이 자신의 노동을 통해 자연에 숙달되면 숙달될수록 신들의 기적이 산업의 기적에 의해 불필요한 것이 될수록, 인간이 이러한 힘들의 보존을 위해 생산의 기쁨과 생산물의 향유를 포기해야 하다니 이 무슨 모순이란 말인가?

읽기) 이제부터 아주 단순하고 쉬워진다. 노동의 생산물이 나에게 낯선것이 된다면, 내가 만든 생산물이 나에게 대립한다면, 생산물이 스스로 생물이 되어 활동하지 않는 다음에야, 다른 누군가의 것, 다른 누군가에게 속하는 것이 될 것이다. 내가 하고 있는 활동, 노동이 내가 하는 일 같지 않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분명 다른 누군가에게 속하는 것, 즉 내가 다른 누군가를 위해 하는 일일 것이다. 이건 당연하다. 그렇다면 아주 간단한 문제, 내 생산물은 누구에게 속하며, 나의 노동은 누구를 위한 노동인가?
고대에는 신을 위해 그런 일들을 했다. 이것이 포이어바흐의 이론이다. 인간은 자신의 유적인 힘을 신으로 만들었고, 급기야 사진의 긍정적인 힘과 노동을 신에게 돌렸다. 앙코르왓 같은 거대한 건축물을 보면 존재하지 않는 신이 얼마나 많은 인간의 노동력을 가져갔는지, 마야, 아즈텍 같은 경우에는 심지어 살아있는 인간을 제물로 챙겨갔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다. 산업의 기적, 즉 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라 인간은 신에게 자신을 바치지 않는다. 신으로부터 해방! 종교개혁, 칼뱅주의는 바로 신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일하라는 선언이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분명 오늘날 일부 광신도를 제외하면 신을 위해 일하지 않고, 신에게 자신과 그 생산물을 바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한결 여유롭고, 더 풍성해야 하는데, 이게 웬일인가? 자본주의, 후기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떤 면에서는 중세인들보다도 여유가 없다. 그리고 생산, 노동은 점점 고역이 되고있다. 이게 무슨 역설인가?

원문) 노동과 노동의 생산물이 귀속되는, 노동이 그것에게 봉사하며, 노동의 생산물을 향유하는 낯선 존재는 오로지 인간 자신일수밖에 없다. 노동의 생산물이 노동자에게 속하지 않고 낯선 힘으로 그에게 대립한다면, 이는 그 생산물이 노동자 이외의 다른 인간에게 속함으로써만 가능하다.
그의 활동이 그에게 고통이라면, 다른 사람에게는 향유이고, 생활의 기쁨일수밖에 없다. 신들도 자연도 아닌 오직 인간 자신만이 인간을 지배하는 이런 낯선 힘일 수 있다.

읽기) 자, 이제 신은 빼자. 신이 빠졌는데도 불구하고 생산물, 노동이 노동하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다른 사람의 것일수 밖에 없다. 음, 여기에 대해서는 마르크스가 뒤르켐이 제시한 "출현적 현상"으로서 사회, 그리고 하나의 사물로서 "사회적 사실"이라는 개념, 즉 구조주의적 개념을 개발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보니, 내가 빼앗긴다면 누군가가 빼앗는 것이라는 단순한 논리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하여 나의 고통은 너의 기쁨의 관계로 제시하고 있다. 어쨌든 여기서 마르크스는 소외론에서 착취론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보면 된다.

원문) 자기 자신에 대한 인간의 관계는 다른 인간에 대한 그의 관계를 통해서 비로소 그에게 대상적이고 현실적이라는, 앞서 제시한 명제를 좀 더 살펴보자. 따라서 인간이 낯설고 적대적이며, 강력한, 그에게 독립적인 대상으로서 그의 노동의 생산물, 그의 대상화된 노동에 관계할 때, 이 관계는 다른 사람이 낯설고 적대적이며, 강력한, 그에게 독립적인 대상의 주인임을 암시한다. 만약 그가 부자유스러운 것으로서 자신의 고유한 활동에 관계하고 있다면, 이는 그가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는 지배, 강제, 질곡 아래에서의 활동과 관계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 그리고 자연으로부터의 모든 인간의 자기 소외는 인간이 자신과 자연을 자신과 구별되는 다른 사람에게 위치시키는 관계 속에서 나타난다. 그런 까닭에 종교적인 자기 소외는 필연적으로 사제에 대한 평신도의 관계 속에서, 또는 여기서는 영적인 세계가 문제이므로 중보자 등에 대한 평신도의 관계 속에서 나타난다. 실천적이고 현실적인 세계에서 자기 소외는 다른 사람에 대한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관계를 통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 소외가 생겨나는 매개는 그 자체로 실제적이다. 그러므로 소외된 노동을 통해서 인간은 그 자신과 낯설고 적대적인 힘인 생산 대상의 관계를 만들어 놓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 자신의 생산과 자신의 생산물에 대해 맺고 있는 관계, 그리고 그가 이러한 다른 사람과 맺고 있는 관계도 만들어 놓는다. 그가 자기 자신의 생산을 그의 현실성 박탈로, 그의 형벌로, 그가 자기 자신의 생산물을 상실로, 그에게 속하지 않는 생산물로 만들어 놓는 만큼, 그는 생산과 생산물에 대한 생산하지 않는 사람의 지배를 만들어 놓는다. 그가 자기 자신의 활동을 자신에게서 소외시키듯이, 그는 낯선 사람이 그 자신의 것이 아닌 활동을 획득하게 한다.

읽기) 즉, 소외된 노동은 다른 누군가가 그 노동의 주인임을 보여준다. 그것이 소외된 노동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사실 이 부분은 마르크스의 독창적 아이디어라기 보다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에 나오는 유명한 '주인과 노예의 비유'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주인과 노예의 비유를 포이어바흐의 유물론과 연결지음으로써 독특한 결론을 얻은 것이다.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비유는 존재론적이다. 실제 주인과 노예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이라기 보다는 존재론을 설명하기 위한 비유인 것이다. 그 내용은 자립적 의식인 주인은 스스로를 주체로 확인하는 의식이면서 동시에 노예인 비자립적 의식을 통해서 자신을 의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즉, 주인이 자신의 자유를 의식하기 위해 그 대립물, 자유롭지 못한 사람, 노예에 비추어서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헤겔은 이를 지양되어야 할 분열로 보며, 소외로 본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이를 의식에 대한 비유가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로 돌려 놓았다. 그리고 이를 자립적 의식, 주인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비자립적 의식, 노예의 입장에서 바라본 것이다. 비자립적 존재, 노예, 그리고 노동자는 자신의 비자립성을 앞에서 제시한 소외의 형태로 경험한다. 죽도록 일을 하는데, 그 결과물은 자기에게 속하지 않는다. 일하는 주체는 자신인데, 그 일, 그 활동이 자신을 고통스럽게 한다. 그리고 인류라는 말을 알고 있는데, 자신은 그 구성원이 아닌것 같다. 더욱 기가 막힌것은 열심히 일하면 일할수록 자신을 옥죄는 그런 고통스런 현상은 더 강화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현상에 불과하다. 그 현상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자기 아닌 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노동을, 자신의 노동생산물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소외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향유가, 헤겔식의 말을 빌리면, 자신의 소외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존재의 확인, 자아실현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헤겔의 주인-노예 변증법의 그 다음 이야기를 전개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이 관계가 주인에게도 부정적인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주인의 경우 자신의 존재를 확증하기 위한 거울이 천하디 천한 노예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도리어 주인이 노예에게 의존적인 관계가 된다. 노예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다 해서 주인이 자아실현을 하지는 않는다. 반면 노예는 직접 자연에 자기 힘을 가해 노동을 함으로써 자아실현을 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이 대목을 거부하는 것으로 보인다. 노예는 자연에 자기 힘을 가해 자아실현을 할 수 있을런지 모르지만, 근대 산업 노동자는 그 마저도 불가능하다. 생산수단이 자연이 아니라 이미 다른 누군가의 소유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주인이 자아실현이 불가능하다는 헤겔의 정식도 거부하지는 않는다. 결국 자본주의는 자본가와 노동자 모두가 소외되는 그런 체계로 규정될수밖에 없다.
스탈린주의자들과 결국은 스탈린을 정당화한 알뛰세르는 마르크스의 이 책, 경제학철학 초고를 거부했다. 그리고 소외론은 관념론적 마르크스, 잉여가치론이 진정한 마르크스라고 분리하였다. 그러나 이 대목은 그들의 해석이 잘못되었음을 보여준다. 소외론과 착취론(잉여가치론)은 한 몸인 것이다. 그것은 현상과 본질의 관계에 있다. 착취로 인해 소외가 발생하며, 다시 이 소외가 그 착취관계를 강화하는 것이다.
어쨌든 여기서 마르크스는 자신의 평생을 지배하는 방법론을 획득했다. 그것은 현상을 먼저 관찰하고, 그 현상들의 관계를 기술한 뒤, 그 이면에 숨어있는 본질을 추적하는 것이다. 그것을 그는 나중에 정치경제학비판 서설에서 "추상에서 구체"라는 용어로 정식화 하였다. 그러나 이 문헌에서는 그러한 마르크스의 방법론의 정수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추상적인 수준에서 논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방향은 분명히 보이고 있다.

by 부정변증법 | 2008/11/05 09:45 | 마르크스 읽기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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