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 독해 -경제학 철학 수고(2)

원문1) 우리는 정치경제학자가 설명할 때 으레 그러는 것처럼 가공의 원시상태를 설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원시상태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원시상태는 문제를 회색빛 안개가 낀 곳으로 밀어 넣을 뿐이다. 정치경제학자는 그가 논증해야만 하는 것들, 즉 두 가지 것들의 사이, 예컨대 분업과 교환사이의 필연적인 관계를 사실과 사건이라는 형식으로 가정한다. 신학도 그와 같이 타락을 통해 악의 기원을 설명하는데, 다시 말해서 그가 설명 해야만 하는 것을 하나의 사실로, 역사라는 형식으로 가정한다.
우리는 정치경제학적인, 현재 존재하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읽기1) 이제 마르크스는 경제학의 제 개념과 법칙들을 주어진 것, 전제의 자리에서 몰아내고, 그것들의 정당성을 따지는 고찰을 시작한다. 그러나 이런 고찰에서 계몽사상가들이 흔히했던 가공의 원시상태를 상정하지는 않는다. 경제학자들은 역사적으로 고찰하는듯 하면서도, 그래서 원시상태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면서도 도리어 자신들의 기본개념들이 원시상태에서부터 존재했다는 그 이야기를 반복한다. 예컨대, 아득한 옛날, 국가도 사회도 없던 시절, 인간들은 각자 자기의 작은 소유물들을 이용해서 살고 있었다고 말하는 존 로크처럼 말이다. 그래서 그 소유물을 지키기 위해 각자의 자유를 조금씩 갹출하기로 사회계약을 맺었다는 그런 이야기들...그리고 각자의 소유물을 교환하고, 그래서 돈이 생기고 어쩌구.... 이는 이미 루소가 논박했듯이 "소유"라는 "계약"이라는 그리고 그 계약을 가능하게 하는 "언어"라는 사회적인 산물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의 원시상태는 어떤 형태로든 소유, 분업이 존재하는 원시상태이며, 사실상 원시상태가 아니며, 실제로 존재한 적 없는 가공이다. 이는 마치 기독교에서 모든 악을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타락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 "선/악"의 구분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며,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신의 명령은 적으도 인간과 신 사이의 모종의 사회적 관계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원죄"는 과일을 따먹은 행위 자체가 아니라 인간과 신 사이의 사회적 관계(아마도 주종관계)를 위반한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경제학의 여러 기본 개념들을 그저 주어진 것으로 보는 경제학의 오류를 극복하기 위해 먼 옛날 원시시대를 가정하지 않는다. 그것을 그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회적으로 형성된 것으로 고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가정이 아니라 확인할수 있는 실제 사회적 사실들이다. 이리하여 마르크스는 경제학의 개념들, 법칙들과 그 개념, 법칙이 작용하는 실제 경제활동의 현장, 즉 경제활동을 하는 사람들의 삶을 비교해보자고 요청한다. 실제 사람들은 경제법칙, 그 현란한 그래프가 움직이는 그 모습처럼 살고 있는가? 그 현란한 법칙과 그래프들이 숨겨놓은 실제 삶의 모습은 어떠한 것인가? 만 약 양자간에 현격한 차이가, 그것도 정 반대의 차이가 있다면, 이는 단지 오류에 불과한 것일까? 마르크스는 미리 답을 준비하고 있다. 그건 오류가 아니다. 신학의 세계가 실제 중세 유럽 농노들의 삶과 전혀 무관했던 것이 신학적 오류가 아니었던것 처럼. 그것은 이데올로기다. 신학이 중세의 쇠사슬을 감춘 꽃다발이라면, 경제학은 근대의 쇠사슬을 감춘 보호색이다.


원문2) 노동자는 부를 많이 생산하면 할수록, 그의 생산의 힘과 범위가 증대될수록, 더욱더 가난해진다. 노동자가 상품을 더 많이 창조할수록 그는 더 값싼 상품이 된다. 사물세계의 가치증대에 정비례해서 인간세계의 가치절하가 일어난다. 노동은 상품을 생산하는 것만이 아니다. 노동은 그 자신과 노동자를 일반적으로 상품을 생산하는 정도만큼 상품으로서 생산한다.


읽기2) 그 렇다면 경제학의 보호색을 뚫고 실제로 들여다 본 경제활동의 사실은? 이상하게도 경제학은 노동이후부터 출발한다. 상품은 이미 나와 있다. 그리고 그것은 수요자와 시장에서 만난다. 그런데, 그 상품이 시장에 나오기까지 거쳐야 하는 과정은 어디로 갔는가? 즉, 노동의 과정은 어디로 갔는가? 마르크스가 경제학에게 추궁하는 것이 바로 이거다. 시장의 법칙? 그거 좋다 이거야.(사실 마르크스는 수요-공급의 법칙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그 상품을 어떻게 만들었냐, 그리고 그것을 만드는 사람들은 어디서 왔느냔 말이다. 그리하여 마르크스는 시장, 교환 이전의 단계, 즉 생산의 단계로 되짚어 가게 되며, 바로 여기에서 "노동"이 그리고 그것을 담당하는 노동자가 등장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이 노동이 참 수상하다고 문제제기한다. 주의할 것은 마르크스가 노동자의 빈곤에 대해 문제제기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노동자가 가난해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의 능력이, 즉 그의 노동력이 증대될수록 가난해진다는 것이 문제다. 즉, 게을러서 가난한게 아니라 열심히 일하면 일할수록 가난해지는게 문제라는 것이다(게을러서 가난해진 사람에 대한 마르크스의 태도는 청교도보다 더 독했으면 독했지, 결코 너그럽지 않다. 룸펜에 대한 그의 태도를 보라! 마르크스주의를 자꾸 부자와 가난한자의 대립으로 보는 것은 상당히 황당한 관점이다) 더 나아가 그럴수록 스스로가 상품이 된다는 것, 그리하여 인간들이 상품들이 된다는 것이다. 이때 상품이 된 인간들이 바로 노동자다. 그런데 노동자는 열심히 일하면 일할수록 자신을 더욱 더 상품화한다. 노동자의 가난, 노동자의 인간적 가치절하의 가장 큰 문제는, 이 모든것이 노동자 자신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노동을 더 열심히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자신을 비참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노동은 상품과 더불어 자신의 비참(소외)를 생산한다는 것, 이것이 이후 마르크스의 모든 이론의 고갱이가 된다.

훗날 "정치경제학 비판 개요 서설"에서 자신과 다른 여타 반자본주의적 사상가들의 결정적 차이를 "분배"가 아니라 "생산"을 자본주의적 비참함의 근원으로 보았다는데서 찾아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 노동은 상품을 생산하는 것만이 아니다. 노동은 그 자신과 노동자를 일반적으로 상품을 생산하는 정도만큼 상품으로서 생산한다." 이 말은 수 없이 음미해야 하는 말이며, 마르크스의 모든 비판적 사상의 압축이다. 자본주의의 문제점은 "노동을 하는 사람"이 "자기 몫"을 받지 못하는 것에 있지 않다. 자본주의의 문제점은 "노동 그 자체"에 있다. 즉, 진정한 해방은 노동과정은 그대로 두고 단지 분배만 개선해서는 되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 자신을 상품으로 만드는 노동을 폐지하는데 있다. 분배는 그 다음의 일이거나, 심지어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이다. 이 한 줄의 문장을 읽지 못했거나, 읽어도 무시한 옛 동구권, 그리고 우리나라의 노동운동가들은 끈덕지게, 현재 벌어지고 있는 노동 그 자체를 긍정하고, 자랑스러운 노동자, 위대한 노동따위의 헛소리를 지껄여왔다. 그리하여, "사회주의는 강철 그리고 전기"라는 터무니없는 생산력 주의까지 만연했던 것이다. 그러나 노동과정 자체가 바뀌지 않는한, 노동의 성격이 바뀌지 않는 한 해방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기존의 좌파, 사회주의자는 자본주의적 문제의 온상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면서 도리어 이를 해방이라는 말로 윤색한다는 점에서 경제학자들보다 더 유해하다.


원문3) 이 사실이 표현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일 뿐이다: 노동이 생산하는 대상, 노동 생산물은 노동에게 하나의 낯선 존재로서, 생산자에게서 독립된 힘으로서 노동과 대립한다. 노동 생산물은 하나의 대상에 고정된 사물화한 노동이며, 자신을 사물로, 즉 노동의 대상화로 만든다. 노동의 실현은 곧 그것의 대상화다. 노동의 이러한 실현이 정치경제학적 상태에서는 노동자의 현실성 박탈로 나타나고, 대상화는 대상의 상실과 대상에 대한 예속으로, 전유는 소외로 외화로 나타난다.


읽기3) 그렇다면 대체 자본주의의 노동과정이 어땠단 말인가? 여기서 실제 노동과정에 대한 사회과학적 분석을 기대한 독자들은 실망한다. 갑자기 철학적 해석으로 얼버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용서하자. 이건 그의 20대때 초고다. 경제학과 철학을 융합하려는 그의 시도는 아직 영글지 않았다. 아직 사회학적 개념틀을 개발해내지 못한 마르크스는 도리없이 포이어바흐의 개념들을 도구로 자본주의의 노동을 분석하였고, 그 결과 이런 신비로운 표현들이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진술들이 드러내고자 하는 바는 명확하다. 한 마디로 노동자는 자신이 생산하는 대상, 그 소재, 그리고 그 도구, 방법에 대해 일체 통제권을 갖지 못한다. 그는 주어진 소재, 주어진 도구, 주어진 방법에 따라 주어진 대상을 생산해야 한다. 따라서 그는 노동하지만, 그 노동은 그의 것이 아니다. 노동은 이미 외적 사물로서 그 앞에 고정되어 있고, 그가 하는 일이란 이미 고정된 그 외적 사물에 최대한 빨리, 많이 도달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물화된 노동이며, 이런 노동을 하는 사람은 사람으로서 노동하는 것이 아니라, 이 생산 과정의 한 마디로서, 즉 일종의 살아있는 기계로서 일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노동을 열심히 해서 실현하면 할수록, 노동자는 점점 자신의 노동과 멀어지고, 결국 거기 예속되어서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할수 없이 일하는 처지가 되는 것이다.


원문4) 노동의 실현은 아주 심하게 현실성을 박탈하는 것으로 나타나 노동자가 굶어죽을 정도로 현실성을 박탈한다. 대상화는 아주 심하게 대상의 상실로 나타나 노동자는 필요한 생활 대상들뿐만 아니라 노동의 대상까지도 빼앗기고 만다. 물론 노동 자체는 노동자가 최대한의 긴장과 불규칙한 휴식을 통해서만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는 대상이 된다. 대상의 전유는 아주 심하게 소외로 나타나 노동자가 대상을 많이 생산할수록 점유할 수 있는 것이 적게 되며, 그만큼 더 그의 생산물, 즉 자본의 지배 아래 있게 된다.


읽기4) 이 역시 앞의 부분과 같은 내용을 수사법으로 풀어놓은 것이다. 포이어바흐의 저작을 읽은 사람이라면 이런 식의 아이러니 댓구가 포이어바흐의 종교비판에서 아주 흔하게 사용된 표현임을 알것이다. 거기에 신 대신 노동을 집어넣으면 이 문장들이 된다.


원문5) 이 모든 결과들은 노동자가 자기 노동의 생산물에 대해 낯선 대상처럼 관계한다는 규정 에 뒤따른다. 이러한 전제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것이 자명해진다: 노동자가 힘들여 노동할수록 그가 자신에 대립되도록 창조한, 낯선 대상적 세계는 더욱 강력해지며, 그 자신, 그의 내적 세계는 더욱 가난해지고 그 자신의 것으로 귀속되는 것은 더욱 적어진다. 이는 종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신에 더 많은 것을 귀속시킬수록 그가 자신 안에 지니고 있는 것은 적어진다. 노동자는 자신의 생명을 대상 속으로 집어넣는다. 그러나 이제 그 생명은 그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활동이 커질수록 노동자는 더욱더 대상을 상실하게 된다. 그의 노동이 생산한 것이 그 자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생산물이 커질수록 노동자 자신은 더욱 작아진다. 노동자가 자신의 생산물에서 외화된다는 것은 그의 노동이 하나의 대상으로, 하나의 외적인 현실적 존재로 된다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그의 노동이 그의 외부에, 그에게서 독립되고 낯설게 존재하며, 그에게 대립하는 자립적 힘이 된다는 것, 그가 대상에게 부여했던 생명이 그에게 적대적이고 낯선 것으로 대립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읽기5) 아니나 다를까, 마르크스는 바로 종교비판과 자신의 노동비판을 알레고리 관계로 놓는다. 인간은 자신의 필요로 인해 신을 만들고, 그 신은 강력해야 하기에, 인간은 그 신에게 온갖 막강한 속성을 부여하고, 그런데 그 속성들은 사실 인간의 것이기에 신이 막강한 존재가 될수록 인간은 비천한 존재가 되며, 결국 인간은 자신의 산물인 신의 노예가 된다. 이것이 포이어바흐 사상의 핵심인 '소외'다. 원래 소외는 헤겔의 개념이다. 헤겔은 "절대정신"(혼란스러우면 그냥 신 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은 원래 하나였는데, 그것이 전개되면서 점점 분화되고, 그리하여 절대정신이 원래는 자신에게서 갈라져 나간 온갖 현상들과 낯선 것으로 대립하는 아픈 분열의 과정을 말한다. 헤겔은 신에게서 자연이, 인간이 분화되어 나가서 불쌍한 신이 소외감을 느끼며, 이는 신이 자연이나 인간이 모두 결국 자신임을 알게됨으로써 극복된다고 말한다. 반면 포이어바흐는 인간이 신을 만들어서, 신에 의해 소외되며, 결국 이 소외는 신이 자신의 산물이며, 자신의 유적 능력에 다름아님을 알게됨으로써 극복된다고 말한다. 어느 경우나 소외는 원래 하나였던 것이 분리되고, 분리된 대상에 의해 분리한 주체가 당하는 설움이다.

마르크스는 이것을 노동으로 옮겨온다. 인간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노동을 한다. 그런데 자신의 노동의 결과 만들어진 대상들의 힘이 점점 강해져서, 결국은 노동의 대상들에 의해 지배받는다. 즉, 자신의 노동의 결과물이 자신과 무관한 것이 되어가고, 더 나아가서 자신이 거기 종속된다. 그렇다면, 그 극복은? 앞에서의 논리에 따르게 되면 결국 저 노동 대상들이 사실은 인간 자신의 고안에 불과함을 깨닫는 것이다. 달리 말해, 노동의 결과가 자신과 무관하지 않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에게 분통을 터뜨린다. 하지만, 그건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를 읽을때 보기로 하고, 여기
서 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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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정변증법 | 2008/10/19 22:46 | 마르크스 읽기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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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키시야스 at 2009/05/18 04:23
역시 마르크스는 천재입니다...ㅜㅜ
Commented by 부정변증법 at 2009/05/18 20:58
예. 마르크스는 절대 무덤에 집어넣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바라는 세상은 마르크스가 무덤에 드러눕는 세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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