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0월 05일
생각을 요구하는 몇 가지 자살...
요즘 자살이 다시 국민들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올해 들어 몇몇 고등학생들이 꽃다운 목숨을 스스로 끊었을 때는 별무반응이었다가 몇몇 유명 연예인이 자살하자 갑자기 호들갑을 떨고 있다. 죽은 자에 대한 예의와는 별도로 이 호들갑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더군다나 이런 호들갑이 항상 가해자를 찾는 마녀사냥으로 돌아가는 것이 더욱 그렇다. 아마도 사람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가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질 것이고, 그래서 사실상의 타살로 몰고가고 싶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자신의 손을 빌리는 타살로서의 자살은 흔한 현상이 아니다. 대개의 경우 자살은 자살인 것이다.
자살의 형식을 취한 타살의 예로 독일의 문예이론가 발터 벤야민을 들 수 있다. 유태인, 지식인, 그리고 좌파를 증오한 히틀러 치하 독일에서 이 세가지를 모두 겸비한 벤야민이 살아갈 방법은 없었다. 그는 기적적으로 먼저 탈출한 동료들인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등과 연락하면서 나치 치하가 아닌 곳으로 탈출을 감행한다. 그러나 결국 피레네 산중에서 발각나서 독일군에게 포위되며, 이때 그가 선택한 것은 자살이다. 그러나 이것을 자살로 볼수는 없다. 어차피 독일군에게 끌려가면 잔인하게 타살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국시대 일본 무장들의 할복 같은 것도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다. 그들에게 할복의 기회를 준 적장은 스스로 죽을 기회를 주는 것을 자비를 베푼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짜 자살은 어떤 경우일까? 어차피 죽을 운명이 아닌데도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경우다. 그런데 대개의 자살은 바로 여기 해당된다. 따라서 여기서 가해자를 찾을수는 없다. 유일한 가해자는 자기 자신이다. 다만 자신을 가해자가 되는 것에 영향을 준 여러 사회적인 변인들은 있을 수 있다.
사회학자 뒤르껭은 자살을 이기적, 이타적, 아노미적 자살로 분류하였다.
이기적 자살은 개인적인 자살이다. 그 동기는 고통의 회피다. 현재 고통이 너무 심하기 때문에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 목적이 순전 자기 자신의 고통회피이기 때문에 이기적이라고 분류한다. 그런데 죽을만큼 심한 고통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근대 이전에 자살을 대죄로 여겨 그 시신까지 조리를 돌렸던 것은 그만큼 자살이 아주 희귀한 현상이었다는 반증이다.
이타적 자살은 어떤 공동체의 가치때문에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다. 공동체의 밀도가 너무 높아서 개인의 가치나 여지가 거의 없는 사회, 문화에서 이런 자살이 나타난다. 민영환 열사의 자결, 베트남 승려들의 소신공양, 혹은 범주상의 문제는 있지만 알카에다 특공대의 자폭 등이 여기 해당된다. 혹은 조직의 비밀을 엄수하기 위해 가차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본 정치인이나 기업인들의 자살도 여기 해당된다. 이런 종류의 자살 역시 매우 특별한 경우다. 근대 이전 사회의 자살에 대한 이런 저런 미화와 찬미 역시 이 행위가 대단히 드물었음을 증명한다.
아노미적 자살은 이타적 자살과 달리 사회의 응집력이 지나치게 약화되어 개인들이 자신들을 정박해둘 의미있는 가치관을 갖지 못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는 현대사회들어 부쩍 증가된 우울증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근대의 합리화 과정은 문제 상황에서 최후의 판단기준으로 수천년간 작동했던 종교, 전통이라는 배경을 해체해버렸다. 자신이 일개 개인이 아니라 보다 큰 의미가 있는 넓은 공동체의 가치있는 구성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쉽게 절망하지 않으며, 다양한 방식의 위로를 받을수 있다. 이 정도 실수야, 저 의미있는 공동체의 가치있는 구성원이라는 나의 정체성과 자부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모든 문제상황에 홀로 된 개인으로 직면해야 한다. 그러나 개인은 나약하다. 이때 어떤 절망을 경험한다면, 그는 헤어날 길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종류의 자살은 앞서 두 경우에 비해 훨씬 빈번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절망을 경험할 가능성은 매우 높다. 그리고 그 절망마다 개인들은 아무런 위로, 완충장치 없이 그 충격을 고스란히 받아야 한다.
물론 가족이라는 완충장치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기든스가 말했듯이 가족은 완충장치가 되기는 커녕 그 자신을 유지하기도 벅차다. 가족은 당연한 보금자리가 아니라, 구성원들이 상호 협상하여 구성해야 하는 대상이 되었다. 요컨대 가정은 현대인들의 절망들을 넙죽넙죽 받아줄 능력이 없다. 가족이 그런 역할을 하기로 기대할경우, 도리어 가족은 또다른 실망, 그리고 분노와 절망을 불러일으키고 말것이다. 애초에 변덕스럽기 짝이 없는 남녀간의 애정에 의존하는 핵가족에, 과거 전통사회의 공동체와 교회의 역할을 요구한다는 것이 넌센스다. 그래서 가족에 올인하는 한국인들은 절망에 직면해서 위로를 받기는 커녕 가족 전체를 죽이는 참극을 저지르곤 한다.(동반자살이 아니라 가족살해다.)
일본인은 가족보다 훨씬 더 큰 공동체인 회사를 자신의 배경으로 삼았다. 회사는 정체성, 자부심의 바탕으로서의 역할을 가족보다 한결 더 잘 제공했다. 그러나 1990년대 이 회사가 무너지고, 가족같은 직원을 해고하는 상황이 오자, 해고된 직원도 자살하고, 해고한 사장도 자살했다.
그러면 어찌해야 할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신이 생각하고 자신이 그 구성원이라고 여기는 관계망이 넓고 다양할수록 그는 정서적으로 건강하고, 자살할 가능성이 낮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전통적인 공동체, 가족, 교회는 이미 자본주의에 포섭되어있거나 그 배후의 신성한 광휘를 잃어버렸거나, 너무 미약하기 때문에 그런 역할을 하기 어렵다. 가보지 않아서 단정할수는 없지만, 최진실은 교회에서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는 커녕, 교회 비즈니스를 위해 활용할만한 유용한 자원으로 취급당했을 것이다. 심지어는 죽은 다음에도 그러하지 아니한가?
그래서 나는 존재론적인 사회 참여야 말로 이런 절망을 디디고 나아갈 유일한 방편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40년 전에 마르쿠제가 과학적 사회주의자들의 혁명공학을 비판하면서 말했듯이 저항운동은 사회를 바꾸려는 구체적인 청사진, 역사적 필연성을 구현하려는 것이 아니다. 저항운동은 바로 자기 자신의 절망을 극복하려는 실존적인 운동인 것이다. 그 운동 속에서 자신이 인류의 보편적인 정의를 구현하는 정신적 공동체의 일원임을 느끼는 것이다. 이 느낌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다른 여러 절망들에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혹은 아도르노가 제안한 미학적 공동체, 미적 구현으로서의 비판 역시 이런 역할을 할 것이다. 저항이라는 말이 거부감이 느껴지면, 요즘 유행하는 글로벌 차원의 각종 시민운동, 혹은 활발하게 성장하는 제3부문도 있다.
나는 안재환이나 최진실이 교회에 다니는 대신, 사회 의식을 깨우치고, 각종 사회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더라면 하는 생각을 한다. 그리하여 사회의 정의를 일으키고 더 나아가 세계에 기여한다는 보람을 얻어나갔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느낀다. 그러니 그들을 자살로 이끌어간 가해자를 찾는 일은 헛일이다. 굳이 따지면 가해자는 자신들이며, 자신들의 좁은 세계다. 사업과 가족, 그리고 몇몇 친지들을 넘어서지 못한, 보다 보편적이고 넓고 의미있는 가치에 기여할 만큼 성장하지 못한 자신들이며, 그런 성장을 방해한 주변의 각종 착취자들(그들을 통해 돈을 버는)과 시스템이다. 악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어쩌면 우리나라에서 악플을 가장 많이 받고 있는 사람 중 하나인 진중권 같은 이들의 명랑한 모습을 보라. 무엇이 그를 명랑하게 유지시키는가? 돈, 명성, 교회?
생각해 보면 헐리우드 스타들의 활발한 사회활동이 자기 홍보하려고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명성, 성공, 돈이 해결해주지 못하는 자신의 존재감, 정체감을 회복하기 위한, 세계내의 한 점이 되기 위한 실존적 저항인 것이다.
자살의 형식을 취한 타살의 예로 독일의 문예이론가 발터 벤야민을 들 수 있다. 유태인, 지식인, 그리고 좌파를 증오한 히틀러 치하 독일에서 이 세가지를 모두 겸비한 벤야민이 살아갈 방법은 없었다. 그는 기적적으로 먼저 탈출한 동료들인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등과 연락하면서 나치 치하가 아닌 곳으로 탈출을 감행한다. 그러나 결국 피레네 산중에서 발각나서 독일군에게 포위되며, 이때 그가 선택한 것은 자살이다. 그러나 이것을 자살로 볼수는 없다. 어차피 독일군에게 끌려가면 잔인하게 타살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국시대 일본 무장들의 할복 같은 것도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다. 그들에게 할복의 기회를 준 적장은 스스로 죽을 기회를 주는 것을 자비를 베푼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짜 자살은 어떤 경우일까? 어차피 죽을 운명이 아닌데도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경우다. 그런데 대개의 자살은 바로 여기 해당된다. 따라서 여기서 가해자를 찾을수는 없다. 유일한 가해자는 자기 자신이다. 다만 자신을 가해자가 되는 것에 영향을 준 여러 사회적인 변인들은 있을 수 있다.
사회학자 뒤르껭은 자살을 이기적, 이타적, 아노미적 자살로 분류하였다.
이기적 자살은 개인적인 자살이다. 그 동기는 고통의 회피다. 현재 고통이 너무 심하기 때문에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 목적이 순전 자기 자신의 고통회피이기 때문에 이기적이라고 분류한다. 그런데 죽을만큼 심한 고통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근대 이전에 자살을 대죄로 여겨 그 시신까지 조리를 돌렸던 것은 그만큼 자살이 아주 희귀한 현상이었다는 반증이다.
이타적 자살은 어떤 공동체의 가치때문에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다. 공동체의 밀도가 너무 높아서 개인의 가치나 여지가 거의 없는 사회, 문화에서 이런 자살이 나타난다. 민영환 열사의 자결, 베트남 승려들의 소신공양, 혹은 범주상의 문제는 있지만 알카에다 특공대의 자폭 등이 여기 해당된다. 혹은 조직의 비밀을 엄수하기 위해 가차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본 정치인이나 기업인들의 자살도 여기 해당된다. 이런 종류의 자살 역시 매우 특별한 경우다. 근대 이전 사회의 자살에 대한 이런 저런 미화와 찬미 역시 이 행위가 대단히 드물었음을 증명한다.
아노미적 자살은 이타적 자살과 달리 사회의 응집력이 지나치게 약화되어 개인들이 자신들을 정박해둘 의미있는 가치관을 갖지 못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는 현대사회들어 부쩍 증가된 우울증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근대의 합리화 과정은 문제 상황에서 최후의 판단기준으로 수천년간 작동했던 종교, 전통이라는 배경을 해체해버렸다. 자신이 일개 개인이 아니라 보다 큰 의미가 있는 넓은 공동체의 가치있는 구성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쉽게 절망하지 않으며, 다양한 방식의 위로를 받을수 있다. 이 정도 실수야, 저 의미있는 공동체의 가치있는 구성원이라는 나의 정체성과 자부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모든 문제상황에 홀로 된 개인으로 직면해야 한다. 그러나 개인은 나약하다. 이때 어떤 절망을 경험한다면, 그는 헤어날 길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종류의 자살은 앞서 두 경우에 비해 훨씬 빈번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절망을 경험할 가능성은 매우 높다. 그리고 그 절망마다 개인들은 아무런 위로, 완충장치 없이 그 충격을 고스란히 받아야 한다.
물론 가족이라는 완충장치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기든스가 말했듯이 가족은 완충장치가 되기는 커녕 그 자신을 유지하기도 벅차다. 가족은 당연한 보금자리가 아니라, 구성원들이 상호 협상하여 구성해야 하는 대상이 되었다. 요컨대 가정은 현대인들의 절망들을 넙죽넙죽 받아줄 능력이 없다. 가족이 그런 역할을 하기로 기대할경우, 도리어 가족은 또다른 실망, 그리고 분노와 절망을 불러일으키고 말것이다. 애초에 변덕스럽기 짝이 없는 남녀간의 애정에 의존하는 핵가족에, 과거 전통사회의 공동체와 교회의 역할을 요구한다는 것이 넌센스다. 그래서 가족에 올인하는 한국인들은 절망에 직면해서 위로를 받기는 커녕 가족 전체를 죽이는 참극을 저지르곤 한다.(동반자살이 아니라 가족살해다.)
일본인은 가족보다 훨씬 더 큰 공동체인 회사를 자신의 배경으로 삼았다. 회사는 정체성, 자부심의 바탕으로서의 역할을 가족보다 한결 더 잘 제공했다. 그러나 1990년대 이 회사가 무너지고, 가족같은 직원을 해고하는 상황이 오자, 해고된 직원도 자살하고, 해고한 사장도 자살했다.
그러면 어찌해야 할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신이 생각하고 자신이 그 구성원이라고 여기는 관계망이 넓고 다양할수록 그는 정서적으로 건강하고, 자살할 가능성이 낮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전통적인 공동체, 가족, 교회는 이미 자본주의에 포섭되어있거나 그 배후의 신성한 광휘를 잃어버렸거나, 너무 미약하기 때문에 그런 역할을 하기 어렵다. 가보지 않아서 단정할수는 없지만, 최진실은 교회에서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는 커녕, 교회 비즈니스를 위해 활용할만한 유용한 자원으로 취급당했을 것이다. 심지어는 죽은 다음에도 그러하지 아니한가?
그래서 나는 존재론적인 사회 참여야 말로 이런 절망을 디디고 나아갈 유일한 방편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40년 전에 마르쿠제가 과학적 사회주의자들의 혁명공학을 비판하면서 말했듯이 저항운동은 사회를 바꾸려는 구체적인 청사진, 역사적 필연성을 구현하려는 것이 아니다. 저항운동은 바로 자기 자신의 절망을 극복하려는 실존적인 운동인 것이다. 그 운동 속에서 자신이 인류의 보편적인 정의를 구현하는 정신적 공동체의 일원임을 느끼는 것이다. 이 느낌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다른 여러 절망들에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혹은 아도르노가 제안한 미학적 공동체, 미적 구현으로서의 비판 역시 이런 역할을 할 것이다. 저항이라는 말이 거부감이 느껴지면, 요즘 유행하는 글로벌 차원의 각종 시민운동, 혹은 활발하게 성장하는 제3부문도 있다.
나는 안재환이나 최진실이 교회에 다니는 대신, 사회 의식을 깨우치고, 각종 사회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더라면 하는 생각을 한다. 그리하여 사회의 정의를 일으키고 더 나아가 세계에 기여한다는 보람을 얻어나갔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느낀다. 그러니 그들을 자살로 이끌어간 가해자를 찾는 일은 헛일이다. 굳이 따지면 가해자는 자신들이며, 자신들의 좁은 세계다. 사업과 가족, 그리고 몇몇 친지들을 넘어서지 못한, 보다 보편적이고 넓고 의미있는 가치에 기여할 만큼 성장하지 못한 자신들이며, 그런 성장을 방해한 주변의 각종 착취자들(그들을 통해 돈을 버는)과 시스템이다. 악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어쩌면 우리나라에서 악플을 가장 많이 받고 있는 사람 중 하나인 진중권 같은 이들의 명랑한 모습을 보라. 무엇이 그를 명랑하게 유지시키는가? 돈, 명성, 교회?
생각해 보면 헐리우드 스타들의 활발한 사회활동이 자기 홍보하려고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명성, 성공, 돈이 해결해주지 못하는 자신의 존재감, 정체감을 회복하기 위한, 세계내의 한 점이 되기 위한 실존적 저항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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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 2008/10/05 17:26 | 사회에 대해 생각하기 | 트랙백 | 덧글(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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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개인이 자살하는 이유를 저 정도로 상세이 분류하고 설명할 수 는 없지만 간단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죽는 놈이 나쁜놈.(이건 좀 많은 의미에서 하는 말입니다. 죽은 사람 매도하잔 것보단 산사람을 더 죽지 않게 하잔의미가 큽니다.)
죽는 사람은 절대다수가 공통점을 갖더군요.(자살한 사람들의 이야깁니다.)
고독 해서 죽는다는 겁니다.
고독의 이유는 정말 다양한데, 주변에 사람이 없어서도 아니고, 돈이 없다 만도 아니고, 사랑해주는 사람이 없다도 아닙니다.
교류가 유대가 끊어져서 죽는다는게 제 관점입니다.
자살자 = 교류가 끊어져버린자.
교류가 끊어지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저는 이 한가지만 충분하다면 교류는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교류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입니다.
그런데 자살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교류하고자 포기한 이들이더군요.
뭐 어디어디 동화에서나(애니나 영화에서도 자주 나옵니다만은.)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낫다 라는 헛소릴 하자는건 아니지만.(어떤 분은 그러더군요. 내일은 오늘 보다 낫지 않아. 나는 어제를 원해~!!! 절규의 원인을 보니 입영통지서더군요 . 쿨럭;;;)
요는 다른 이유보다 스스로 교류하고자 한다면 죽을 수가 없단겁니다.(적어도 자살이란 수단으로는.)
솔찍히 운빨이라고 보기도 하는데...
죽을래도 못죽는 사람 많지않나요?
이유는 다양하지만 못 죽는 사람도 죽는 사람만큼 많습니다.
그들이 못 죽는 이유는 다양해도 하나의 틀로 묶자면 교류를 끈지 못해서라고 봅니다(주관적인 생각입니다.)
결론!!
자신이 교류하고자 하는 마음이 존재하는한 자살하지는 않는다.
대부분 보면 글쓴분의 말에서 나온 여러가지에서 절망하고 교류하기를 포기해서 죽는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저도 비슷한 생각을 했지만 말 주변이 없어서 이를 어떻게 표현하나 했는데
조목조목 짚으신 것을 보고 크게 고개 끄덕였습니다.
자살에도 여러 종류가 있지만 최진실씨 같은 경우에는 정말..충분히 자기 스스로가
자신을 구원할 수 있지 않았나 싶어요.
"가해자는 자신들이며, 자신들의 좁은 세계다. 사업과 가족, 그리고 몇몇 친지들을 넘어서지 못한, 보다 보편적이고 넓고 의미있는 가치에 기여할 만큼 성장하지 못한 자신들이며, 그런 성장을 방해한 주변의 각종 착취자들(그들을 통해 돈을 버는)과 시스템이다." 이 문구가 참 공감되네요.
고통을 딛고 일어나 승화시켜 앞으로 나아갈 것을 선택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삶과 죽음의 기로가 갈리는 것이겠지요.
안타까운 마음뿐입니다.
사이버모욕죄를 신설을 두둔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사이버모욕죄’자체만으로 네티즌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킵니다. 현행 형법상의 명예훼손죄가 명백히 시행됨에도 불구하고 그 법률을 의식하는 네티즌이 몇 이나 되겠습니까? 오히려 네티즌에게 명예훼손죄를 적용시키는 것이 매우 예외적인 경우로 여겨집니다. ‘사이버모욕죄’는 인터넷 상의 언어폭력이 실질적 ‘폭력’임을 인식시킬 수 있는 기회라고 봅니다. 이 법률을 정치적으로 남용하게 내버려두어서는 안되겠죠. 정치적 악용에 대한 감시는 시민들의 몫으로 남겨두고 싶습니다.
완충장치로서의 조직에 관한 내용과 사회참여가 실존적인 행동이라는 내용을 뜻깊게 읽고 갑니다.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