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0월 01일
교육 공공성 강화, 입시교육 철폐의 역설
이 사진은 헨리 지루의 "교육이론과 저항"의 이미지다. 이미 절판된 책이기 때문에 구입할 수 없는 점은 유감이다. 그러나 도서관 등에는 있으니 일독할만하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 그람시의 문화정치학, 알뛰세르의 구조주의를 망라하여 저항의 교육이론을 세우고자 한, 그리고 실제로 마이클 애플과 함께 미국의 진보적인 교육자들의 실천적 지침을 제공하고 있는 헨리 지루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결국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1) 알뛰세르, 부르디외 등 구조주의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학교가 이데올로기 기구라는 점은 분명하다.
2) 그러나 지배계급이 이데올로기 기구로 만들었다고 해서, 그것이 무조건 그렇게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3) 학교에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의 저항도 함께 작동하는 하나의 문화적 장이다.
4) 따라서 학교, 즉 공교육은 지배/피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가 충돌하는 역동으로 파악해야 하며, 바로 여기에 비판적 지식인으로서 교사의 역할이 있다.
5) 이 이데올로기는 단지 교과 내용에만 구현된 것이 아니라, 교육과정 자체, 교수방법 자체, 각종 잠재적 교육과정에 그야말로 "문화적"으로 스며들어 있으며, 따라서 학교에서 비판이론이 긴요하게 적용된다.
지루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다른 기회로 미루자. 그런데, 여기서 지루가 말하는 이데올로기적 역동의 장으로서 공교육이 정말 공평하게 계급간의 이데올로기가 대결을 벌리는 공정한 경기장이라고 보는 것은 아님을 유의해야 한다. 어디까지나 공교육은 교과내용은 물론 잠재적 교육과정에까지 지배이데올로기가 교묘하게 구조화되어 있는 지배기구다. 다만, 부르디외, 보울스&진티스처럼 어찌할 수 없을 정도의 지배기구인 것은 아니고 그 안에서 저항과 비판의 여지, 심지어는 피지배계급이 자신의 도구로 재전유할 가능성을 열어놓았을 뿐이다.
이 지점에서 최근 한국 진보진영이 자주 외치는 "입시철폐, 사교육철폐, 교육공공성강화"라는 슬로건이 몹시 눈에 걸린다. 특히 '교육공공성 강화'가 그렇다. 이건 좌파 입으로 외치기에는 참으로 민망스러운 구호다. 그동안 알뛰세르에서부터 지루, 애플에 이르기까지 좌파 교육학자들이 이구동성 외친 주장이 바로 "교육 공공성은 허위"였기 때문이다. 학교가 이데올로기 기구로 비판받는 것은 학교가 "공공성"을 가장하여 특수한 계급의 이익을 관철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육의 공공성이란 즉, 교육의 이데올로기 성이다. 이건 계급의 이익을 초월한 공동의 이익을 허위의식이라고 비판하는 좌파에게는 필연적인 결론이다.
좌파=사회주의=계획경제=공공부문강화로 이어지는 가족 유사성의 연쇄 덕분에 마침내 좌파=공공부문강화라는 잘못된 결론을 내린 것이 아닐까 하는 우려가 든다. 탈계급적이고 중립적인 공공성은 환상이다. 혹은 공공성이 강화되면 사회주의, 사사성이 강화되면 자본주의라는 생각은 좌파라기 보다는 전통 보수주의에 가깝다. 좌파는 공동체적 관점을 가진 자가 아니라 해방적 관점을 가진 자를 의미한다. 공공성의 강화가 도리어 생활세계의 식민화를 가져와서 강철새장을 엮어내는 결과를 가져옴을 우리는 너무도 많이 목격하였다. 게다가 그 새장은 중립적이지도 않다. 중립을 가장한 지배계급의 도구일 뿐. 어쩌면 지금 비판적 교육운동가가 해야 할 일은 교육 공공성의 환상을 해체하는 것이다. 공교육은 결코 중립적일수도, 공적일수도 없음을, 따라서 그저 받는 그런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비판하고 자기들의 무기로 재전유해야 하는 것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입시교육은 참으로 교묘한 역할을 했다. 그것은 교육공공성을 훼손했다. 그리하여 공교육의 기능을 왜곡했다. 그건 엄연한 사실이다. 문제는 그 결과가 누구에게 이득이 되었나 하는 것이다. 입시교육은 어떤 교육 내용도 모두 시험 문제풀이를 위한 기능적 수단으로 바꾸어 버린다. 반공교육도 그것이 시험점수의 수단이 될 경우 더 이상 반공교육이 되지 못한다. 학생들은 북한에 대한 문제가 나올때 기계적인 훈련의 결과 좋게 써진 것은 오답으로, 나쁘게 써진 것은 정답으로 간주한다. 그 이상의 진지한 생각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어떤 이데올로기 교육을 하더라도, 학생들은 그것을 단지 기계적 방식으로 정답찾는 소재로만 간주할 뿐, 진지하게 사려하지 않기 때문에, 즉 시험만 끝나면 다 잊어버리기 때문에, 결국 의식화 되지 않는다. 이데올로기는 실패한다. 이것이 객관식 입시교육이 격심해진 시대의 386세대가 그 이전 세대에 비해 자신들이 받은 반공교육(얼마나 집요하게 받았던가?)의 영향을 덜 받은 이유일수도 있다. 입시교육이 일종의 저항교육의 결과를 가져온 셈일까? 적어도 입시교육은 이데올로기 기구로서 공교육에 대한 초절정의 조롱이자 모욕이다. 이건 정말이지 지독한 역설이다.
그래서 입시교육을 교육운동이 극복해야 할 궁극적인 절대악으로 간주하는 모습은 때로는 이런 역설의 늪에 빠진다. 입시교육이 무너지고, 공교육이 원래 가지고 있는 기능을 제대로 발휘한다면, 그것은 또 어떤 모습이겠는가? 정상화된 공교육, 공공성이 강화된 공교육이 오히려 민중들의 의식을 제대로 마비시키는 더 무서운 도구가 아니겠는가?
물론 나는 여기서 입시교육을 옹호하자는 것은 아니다. 입시교육의 반대말로 교육공공성 강화를 말하는 것의 위험성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입시교육의 진정한 폐해는 바로 "모든 것을 기능적 수단으로 바꾸어 버리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비판적, 성찰적 이성은 마비되고 도구적 이성의 전횡으로 모든 인간적인, 문화적인 것을 사물화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기능적, 도구적 사물화라는 측면에서는 "교육 공공성의 강화"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것이 문제다. 입시교육을 철폐한 뒤 우리가 획득할 교육의 상으로서 가치 중립적인 "공공재로서의 교육"을 내세우는 주장은 그래서 두렵다. "강철새장"이 해방의 이름으로 제시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다른 기능적, 도구적 교육에 불과한 것이 해방이라는 이름으로 강요될것이기 때문이다. 가치 중립적인 외양을 하고서.
그래서 나는 보다 가치 함축적인 "복지로서의 교육"이 좌파가 내세울 지향임을 주장한다. "복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말이며, 그 최종 판관은 그것을 수용하는 개별 행위자들이다. 행복은 남이 평가할수 있는것이 아니니. 그래서 이 블로그의 타이틀도 "행복한 교육"이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차차 더 펼쳐 보일 것이다.
이글루스 가든 - 자유로운 아이들, 아름다운 교육을...
# by | 2008/10/01 10:20 | 교육에 대해 생각하기 | 트랙백(1) | 덧글(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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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가구당 전기세가 386만원?
여러분은 일년에 전기세를 얼마나 내시나요? 어제 모처럼 신문을 꼼꼼히 읽다보니 깜짝 놀랄 기사를 하나 봤습니다. 제가 어제 서울신문을 찬찬히 읽다보니 이런 기사가 있더군요. 라는 기사였는데 최근 에너지관리공단이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타워펠리스가 가구당 연 전기료 납부 300만원을 넘어서고 있으며, 상위 30위 아파트 중 19곳이 서울 강남이라는 기사였습니다. 물론 단위 사업장 단위로 치면 인천 국제공항이 부동의 1위라고.....more
그러고 보면 교육의 공공성이란 공공의 교육이 아니라 그저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만큼의 교육받을 기회와 여건이 주어지는 것'으로 봐야하겠군요.
ps. 포스팅 초반부분에서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의 저항도 함께 작동하는..]의 내용 맥락이 지배구조의 서사 내에서 양가적 분열(맞나?)을 일으켜 저항한다고 보는 서발턴 연구자들의 저항맥락과 꽤 유사하네요. 둘 다 그람시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건가요?(그람시의 이름만 들어본 초짜 1인)
그것이 안된다면 신자유주의에 끌려갈 수 밖에 없다고 봅니다. 레벨이 틀리니까요.
1. 행복이 어떤 제도(?)이념(?)의 목적이 된다는 점, 전혀 납득이 안 갑니다. http://blog.naver.com/tentandavia/20050821142 은 홍기빈 박사의 글인데요. 행복이라는 나이브한 말이 복지든 이념이든 집단의 목적이든 경성의 무엇과 연관되는 것이 사실 이해가 잘 안됩니다.
2. 군국주의와 공공성의 관계 역시 그렇게 단선적으로 설정되기에는 무리라고 봅니다.
그리고 군국주의의 비유는 공적인 것: 사적인 것 을 자꾸 선:악으로 비유하는 구좌파의 허점을 드러내기 위해 수사법으로 비판한 것이지, 정말 그렇게 연결하자는 것은 아니고요. 제가 생각하는 공공성 담론의 위험은 사실 군국주의 등이 아니라 탈계급성의 망상입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라는 것이 사실 자본주의와 그 '정점'으로서 금융화된 국가독점자본주의가 세계적으로 '자기전개'하는 가운데 국민국가는 물론 그 자신의 성립터전이었던 '제국'의 기본 틀거리조차 무너뜨리는 방향으로 '운동'하는 현실에 비추어, '공공성' 담론 자체는 한국에서 일종의 반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역할을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다른 말로 바꾸면 한국의 좌파가 언제나 '표적'에서 벗어난 곳에서 엉뚱한 일을 벌리고 있었다는 결론인데, 최근 장하준이 점점 뜨는 이유와 박근혜가 40% 이상 고정지지율을 확보한 이유를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해방'을 말하기에 먹고사니즘에 노출된 민중들의 '직감'은 국가의 귀환을 요구합니다. 다른 측면에서 막상 뽑아 놓았더니 현 정부가 '귀환한 국가' 구실이 아닌 '마지막 국가 해체자'처럼 굴더라는 것인데. 이 현실은 사뭇 비장하기만 합니다.
1. 일단 행복이란 표현 자체는 이명박이든 히틀러든 아리스토텔레스든 누구나 쓸 수 있습니다. 수사적으로는 만인이 다 쓸 수 있는 표현인 행복을 복지의 목적이라고 하시면 논리가 똑바로 서있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게 될 것 같습니다.
2. 그래도 복지라는 건 결국 공공성에 다 포괄되는 걸로 밖에는 이해가 안 되네요. -_-;; 제일 처음에 드렸던 질문이 바로 그겁니다. 복지라는게 결국 공공성 외부로 나올 여지가 있는 개념인가요?
아, 그리고 행복은 아무나 써서는 안되는 개념입니다. 행복을 제대로 알고, 제대로 쓰도록 해야죠. "나는 행복해"라는 자기기만을 무너뜨리고 현실을 직시하면서, 행복이라는 것이 윤리의 목적임을 자각하게 만드는건 철학의 일입니다. 고대 그리스 같으면야, 폴리스에 기여하고, 폴리스의 분업체계에 적응하는 것이 결국 행복이라고 말함으로써 사실상 공공성과 통일되겠지만, 근대 이후의 세계는 그리 녹록치 않죠. 특히 공공성의 폭주가 전체주의를 가져옴도 입증되었고. 행복은 개인과 사회의 교섭과정속에서 구성해나가야겠죠.
참 위의 덧글은 못 보시고 넘어가신 건가요?
행복은 공과 사가 상호작용을 제대로 이룰때 도달하게 되겠죠? 사사화와 마찬가지로 공공화도 인간에게 불행임을 지난 20세기 자본주의와 현실사회주의가 모두 인간을 불행하게 만듦으로써 증명했다고 봅니다. 음. 사실 20세기의 케인즈주의 자본주의와 스탈린주의 사회주의는 이름만 다르지 같은 체제였던 것으로 보이지만....
소유의 종말에서 리프킨이 말하듯 1부문이 정부-공공성, 2부문이 사기업-영리집단, 3부문이 민간조직, 4부문이 흑시장.. 이렇게 분류하면 공공성과 복지가 결국 같은 주체의 문제가 되는 것 같아서요.
다음에는 제가 좀 준비된 주제로 시간이 날때 논쟁을 걸어보겠습니다. 이만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