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현상학 지지(GG) 치다

정신현상학 1
게오르크 W.F. 헤겔 지음, 임석진 옮김 / 한길사
나의 점수 :



우습겠지만 내가 이 책에 도전한 이유는 시름을 잊기 위해서였다. 요즘 세상, 이미 정열은 다하고 왕년에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나름 할 바를 다했다고 자부하는 80년대 학번에게 흘러간 청춘과 뒤바꾼 소중한 성과들이 도로 원점으로 돌아가는 꼴은 차마 눈뜨고 못볼 일인 것이다. 처음에는 촛불도 들고, 가두도 뛰었다. 하지만 이제는... 뉴스도 보기 싫고, 신문도 보기 싫고... 마치 정치적으로 좌절한 스피노자가 한평반의 골방에서 문자와 추상적 사유에 펼쳐진 드넓은 낙원을 노닐듯이, 정말 세상을 잊고 저 드넓은 추상의 세계에서 위로를 얻기 위해서였다.

먼저 워밍업도 했다. "정신현상학입문"이라는 유명한 책도 읽었고, 더군다나 세계 최고의 헤겔 연구자인 찰스 테일러의 "현대사회의 위기와 헤겔철학"도 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가지 이유때문에 결국 정신현상학을 더 이상 읽을수 없게 되었다.

1. 서설 부분은 너무 전복적이었다. 따로 단행본으로까지 출간되는 서설은 뭐라고 딱 정리할 수는 없지만 읽는 내내 나의 사유, 나의 사상이 끊임없이 역동하고 뒤집히고 다시 뒤집히는 느낌을 받아야 했다. 이건 휴식과 위로와는 거리가 멀었다. 뭔가 뒤집히는데 구체적이지 않고, 그것이 구체적이려면 결국 실천해야 한다는 울림이 있었다. 헤겔이 끊임없이 강조하는 진리와 진리의 주체는 구별되지 않는다. 주관과 객관, 주체와 대상은 분열이며 소외다라는 말....

2. 본문 부분은 너무 도깨비 같은 장광설이었다. 처음 감각적 확신 부분은 그럭저럭 알수 있었는데, 지각 부분에서부터 꼬이기 시작해서 갈수록 태산이었다. 결국 1권에서는 유명한 노예와 주인의 비유 외에는 아무것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뭔가 대단한것 같다는 느낌만 있을 뿐. 하긴 테일러도 헤겔철학은 계몽주의와 낭만주의가 모두 나타나고 있기에, 분석과 표현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고 했으니.... 아, 명색이 필명에 변증법을 쓰면서도 아직까지 충분히 변증법적이지 못한지 자꾸 개념을 구획지어 이해하려 드는 버릇 때문에 도저히 끊임없이 변전하는 헤겔의 사유를 따라잡지를 못하겠다. 여기에 대면 "천의고원"은 지루한 동어반복의 연속에 불과하다.

그래서 "여기까지" 하고 덮었다. 그리고 "칸트의 교육학 강의"로 책을 바꾸었다. 저거 읽다 이거 읽으니 이건 완전 초등학교 교과서다. 하루만에 다 읽었다. 이제 좀 쉬었다가 2권의 "인륜"부분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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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정변증법 | 2008/09/11 18:51 | 철학, 사회학 탐구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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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사띠현정 at 2008/09/12 07:57
님의 왕성한 탐구력에 경탄합니다. 내 관심사 엮어 말한다면, 임종 직전의 성 아우구수티누스 - 뭘 보았는지 "저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내 신학대전 같은 책 안 썼을 것을!" 이랬답니다.

입을 열어 말을 꺼내는 순간 '틀린다'는 말은 '개구즉착'이라고 중국과 한국의 선사들이 즐겨 쓰는 말입니다.

'말'의 더미에서 벗어나고 아니면 더 깊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말'이 없는 쪽으로 이행할 필요도 있죠. 서양에 '참선' 즉 수행불교가 자꾸 확산되는 이유가 이때문입니다.

'정신현상학'을 읽는 것 하고 자신의 '정신'현상을 탐구하는 것 하고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수행이란 정신현상을 탐구하는 것인데, 님처럼 왕성한 탐구정신을 가진 분이 '책'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 또는 정신 자체에 집중하게 될때, 엄청난 '폭발'이 있을 것입니다.

내 얘기가 맘에 안든다면 그냥 버려도 좋습니다. 닿는 것이 있다면 "벽암록" 같은 책을 읽어 보시죠.
Commented by 부정변증법 at 2008/09/12 08:15
불교의 선이 요가의 선처럼 마음을 비우는게 아니라 끊임없이 내면에서 질문하고 답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헤겔과 선사상이 매우 유사하다고 느껴집니다. "벽암록"도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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