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가 속에서 평가 개혁하기

교원평가 때문에 전교조와 조야가 시끄럽다. 어떻게 교사를 수치화하여 평가하느냐는 분노의 목소리도 들린다. 하지만 그 배경에 학생을 수치화하여 평가하는 자신의 노동을 부끄러이 여기는 목소리는 별로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설득력이 없다. 혹자는 볼멘소리로 "근본적인 개혁"없이 나 혼자서 무엇을 할수 있냐고 한다. 차라리 난 하기 싫다고 하는 쪽이 더 솔직하고 착하다. 세상에서 가장 나쁜 사람은 핑계를 대는 사람이다.

어쨌든 최근 몇년, 특히 푸코를 공부하면서 그동안 나도 모르게 자행해 왔던 학생을 구획하고 수치화하여 평가하는 일들, 그것도 심혈을 기울여서 그런 일을 해 왔다는 것에 큰 문제의식을 느꼈다. 그렇다고 이 시스템이 다 고쳐지기를 기다릴수도 없고, 아주 외곬으로 나갈수도 없다. 그런데 알고보면 참 비비고 들어갈 틈이 많다. 특히 유인종 교육감이 도입한 수행평가와 공정택이가 도입한 논술형 고사가 너무 큰 도움이 된다.

나는 1년 내내 객관식 문항을 단 하나도 내지 않는다. 물론 수백명 채점하려면 죽어나가지만, 어쨌든 어쩔수없이 무조건 수치화될수밖에 없고, 닫히고 고정된 "정답"을 가진 객관식 문항은 앞으로 내 교사 경력에서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물론 주관식에서도 닫힌 정답이 있는 단답형 문항은 영영 사라질 것이다. 오로지 논술만 출제할 것이다. 하지만 이 논술도 단어를 외우는 대신 문장을 외우는 수준이라면 하나 마나다. 논술시험은 철저히 사고하는 능력, 표현하는 능력에 대한 시험이라야지 암기력을 통한 정답 늘어놓기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래서 나는 두 가지 방법을 쓴다.

1) 문제에 이미 외워야 할 내용을 다 제시하는 방법.
 
이 방법은 객관식 문항에도 적용 가능하다. 문제에 이미 많은 정보를 제공하여 암기식 학습의 필요성을 제거하는 것이다. 다만 제시된 정보들을 나름대로 활용하는 것만을 보겠다는 문제다. 따라서 모범정답은 없으며, 설득력 있게 정보들을 조합할 수 있었음을 보여주면 득점하게 된다. 다라서 평정척도 "어떤 어떤 단어가 포함되면 몇점"이런 식이 아니라 "모든 개념을 활용하여 논리적이고 흥미있게 자기 주장을 펼쳤다. 만점" "논리적이긴 하나 진부하여 흥미가 적다. 감점" 이런 식의 평정척을 사용한다.

물론 학교에서는 모범답안과 예상가능한 유사답안을 써내라고 한다. 까짓거 써서 내자. 약간 불편을 감수하면 되는 거다. 아이들을 위해 제대로 된 평가를 해보겠다는데, 그 정도 부도수표 얼마든지 써줄수 있다. 단 채점은 저렇게 주관적 평정척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유사답안이 나오면 웬만하면 학생에게 유리하게 해석한다. 자기 생각을 나름 애써서 쓰려고 한 것, 그 자체가 득점의 대상인 것이다. 정답은 열려있으니....



2) 수업시간에 자신이 했던 활동 내용을 쓰도록 하는 방법

나는 수업시간에 다양한 활동을 한다. 연극, 만화그리기, UCC만들기 등등. 이때 문제를 이렇게 내는 것이다. "당신이 제작한 UCC의 주제에 대해 논하시오." 이렇게 되면 모든 학생에게 공통된 정답은 없다. 다만 각자의 정답이 있을 뿐. 수업시간에 활동을 열심히 한 사람은 그 내용을 답안지에 작성하면 된다. 결국 형식은 시험이지만 사실은 교사가 아니라 자기가 자기를 평가하는 셈이다. 자기가 했던 활동을 얼마나 충실히 반성해 내느냐가 채점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툭히 이런 식의 평가는 학생들의 자기 평가도 될뿐 아니라 교사가 자기 수업의 효과를 확인하는 그야말로 참평가가 가능한 평가다.

이런 식으로 문제를 출제하자, 근처의 학원들이 두손을 들어버렸다. 하긴 그들은 내가 객관식 문제 내던 시절에도 두손 다 들었던 녀석이다. 예측불가능성! 이제는 나의 재치와 학식이 아니라 학생 수백명이 제각각 자신의 정답을 가지게 되는 문제를 내고 있으니, 학원은 영영 따라오기 어려워진 것이다. 이렇게 하나 둘 학원의 쓸모를 줄여나갈때 사교육 문제도 해결될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칼자루를 쥐고 있는 쪽은 교사인것 같다.

이글루스 가든 - 자유로운 아이들, 아름다운 교육을...

by 부정변증법 | 2008/09/08 22:38 | 교단 일기 | 트랙백 | 덧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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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아큐라 at 2008/09/09 16:34
사립학교에 계신가 보네요.

선생님 기준으로 보면 저도 세상에서 가장 나쁜 사람이지만, 기간제 교사로써 나름 평가의 비중을 수행과 주관식에서 많이 확보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놀이로써의 교육에 대해 궁리하면서 수업에 일단 놀이를 많이 도입해보려고 하긴 하는데, 우선 아이들의 영어에 대한 거부감은 다른 교과 선생님들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지요.

혹시 이택광씨 아시나요? 우석훈과 더불어 가장 좋은 글을 쓰는 학자라고 봅니다. http://wallflower.egloos.com/
Commented by 부정변증법 at 2008/09/09 18:10
공립에 있습니다. 아이들이 놀이하며 공부할 교실 확보가 참 어려운데, 전근 갈때마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려니 자극도 되고 짜증도 납니다. 그런데, 사립에 있을거라 생각하신 특별한 이유라도?
Commented by 부정변증법 at 2008/09/10 08:07
이택광씨 블로그도 링크했습니다^^
Commented by 사띠현정 at 2008/09/09 22:34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합니다! 칼자루를 쥐고 있음을 자각하고 또 그것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교사가 미래형 교사입니다. '칼자루'를 쥐고 있음에도 징징대는 교사는 과거형 교사이고, 하던대로 하자는 가장 나쁜 교사!

하지만 선생님의 그 엄청난 노동과 공력! 대학교수들도 그래서 다 조교들 시킨다는 소문입니다. 그래도 선생님처럼 하면 '학급당 인원수' 감축 이유가 충분히 생기고 교원평가 궂이 안해도 되겠다는 사회적 분위기를 일으킬 수 있죠.
Commented by 부정변증법 at 2008/09/10 08:06
더 할 나위는 있습니다. ^^ 저는 조교 동원할수 없는 시간강사도 겸하고 있어서 학기말이 되면 대학생 보고서와 중학생 수행평가들로 책상이 산더미를 이루곤 합니다.ㅠㅠ 솔직히 힘들어 미칠 지경이고, 이렇게 힘들어 미칠지경인데 행정잡무 따위가 발목을 잡을때, 그런 실상이 알려질때 전교조를 비롯한 교사운동진영의 목소리가 제힘을 발휘할거라 생각합니다.
Commented by 아큐라 at 2008/09/10 16:22
아 같은 지역에 계속 계신 것처럼 말씀하셔서요. 공립 고등학교는 같은 지역에 계속 근무하지 않더라구요. 중학교는 같은 지역에서 오래 계시기도 하나 보군요.
Commented by 부정변증법 at 2008/09/10 16:26
강동, 송파지역에 10년째 있습니다. 중학교는 같은 지역에 오래 있을수 있습니다. 하지만 강동, 송파지역은 인기지역이라 15년쯤 지나면 나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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