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8월 15일
영화 패스트푸드 네이션 감상문
영화 패스트푸드 네이션, 그리고 참교육
영화 “패스트푸드 네이션” 포스터는 성조기가 꽃혀있는 거대한 햄버거 사진이다. 마치 햄버거 속에 담겨있는 미국의 정치경제학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미국의 육식문화, 패스트푸드 문화에 대한 비판은 이 영화 말고도 많이 있다. 이 영화의 미덕은 고발이 아니라 차분한 목소리로 보여주는 희망과 행동에의 요구에 있다.
이 영화는 이야기가 세 갈래다. 첫 번째 갈래는 햄버거 회사 중역인 돈이 자사 히트 상품인 빅원에서 쇠똥이 검출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패티를 공급하는 정육 공장에 현지 조사를 떠나면서 시작된다. 두 번째 갈래는 일자리를 찾아 미국으로 불법이민을 가는 멕시코인들의 이야기다.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당연히 더럽고 힘들고 미국인들이 기피하는 일자리인데, 바로 정육공장이다. 세 번째 갈래는 그 도시에서 빅원을 파는 햄버거집 점원으로 있는 앰버다. 돈이 텍사스 현지에 도착해서 바로 앰버가 일하는 가게에서 멕시코 이민자들이 생산한 패티로 만든 빅원을 사먹는 순간 세 갈래 이야기가 하나가 된다.
돈은 자사 햄버거에 “똥”이 들어간 이유를 철저히 조사한다. 물론 정육공장은 겉으로는 깨끗하고 안전한 모습으로 위장하고 있다. 하지만 꼼꼼한 돈은 점점 깊고 세밀하게 조사를 하며, 조사하면 조사할수록 그가 만나게 되는 것이 단지 쇠고기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의 거대한 모순임을 알게 된다. 정육공장은 소들을 도축, 해체, 가공하는 힘든 작업에 바로 멕시코 불법이주 노동자들을 투입한다. 영어도 서툴고, 불법체류자라 달리 갈 곳도 없는 이들은 저임금과 무자비한 노동으로 혹사당한다. 대량생산 체제를 갖춘 공장에서 기계는 쉬지 않고 똑같은 속도로 고기를 자르고, 갈아댄다. 노동자들은 도축된 고기에서 살코기를 잘라내어 기계 속도에 맞춰 집어넣는다.
가혹한 노동에 지칠 대로 지친 노동자들이 기계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사고가 속출한다. 기계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면 고기가 아니라 팔다리가 갈리기 일쑤다. 사람 팔다리가 갈리는 판인데, 미처 분리되지 않은 쇠고기의 각종 부산물들(심지어 똥도 포함하여!)이 같이 갈리는 정도는 사고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안전하고 위생적인 작업이 가능한 속도는 공장의 이윤 감소를 뜻하니 자본주의의 논리상 용납되지 않는다. 어차피 갈아 만든 고깃덩이인데, 거기 뭐가 들어갔는지 누가 따지겠는가? 햄버거에 쇠똥이 같이 들어간다 한들 하등 이상할 것 없다. 갈린 직원의 팔다리도 들어있는 판이 아닌가? 미국인들은 햄버거를 먹을 때 멕시코 노동자의 팔다리도 먹는 셈이니, 그까짓 똥 정도야!
진상을 알게 된 돈은 이를 본사에 알리고자 한다. 하지만 정육회사는 노회한 쇠고기 딜러 해리를 통해 그를 회유한다. 해리의 말은 미국 보수층의 입장을 대변한다. "원래 고기는 똥과 함께 먹는 거다! 해마다 20만 명이 교통사고로 죽는다. 그러면 자동차를 만들지 말아야 하는가?" 이 대사, 광우병 논란과 관련하여 광우병 확률이 낮다고 따라서 문제 삼을 것 없다고 우겨대던 정부측 관계자의 논리가 아닌가? 돈은 "말도 안 되는 궤변"이라면서 반발하지만, 끝내 양심에 따라 행동하지 못한다. 그는 이미 기성세대다. 그는 먹여 살려야 할 가족이 있고 해고되면 안 되는 직장이 있다. 그는 끝내 정육공장에 얽힌 온갖 비위생적이고 위험한 상황을 묻어두고, 본사로 돌아와 태연한 얼굴로 햄버거 신제품 마케팅에 몰두한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과연 편할까? 억대의 연봉이 그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까?
하지만 이 영화는 희망의 싹도 보여준다. 바로 햄버거 가게 점원인 여고생 앰버에게 삼촌이 찾아오면서 희망이 시작된다. 삼촌은 남아프리카의 인종 차별에 항의하면서 총장실 점거농성을 하다 대학에서 퇴학당한 운동권 출신이다. 공교롭게 삼촌이 퇴학당한 다음해에 남아프리카 흑인들이 자유를 찾았다. "그게 네 덕분이라고 생각해?"라는 질문에 그는 과감하게 "그렇다"고 대답한다. 직접 관계는 없어도 이런저런 작은 행동들이 바로 혁명의 동력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살아온 사람은 세상의 기준으로는 실패한 인생으로 보일지라도 본인의 마음에는 성취와 행복으로 넘친다고 말한다. 아울러 “혁명은 젊을 때 해야 한다.”라고 결정적인 한마디를 덧붙이며.
마침 그 무렵 앰버는 우연히 알게 된 대학생들을 통해 쇠고기가 얼마나 잔혹하게 생산되고 있는지, 햄버거 패티 공장이 얼마나 비위생적이고 비인간적인지 듣고 있던 참이었다. 삼촌을 통해 양심을 각성한 앰버는 자신이 햄버거를 팔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졌고, 마침내 힘겹게 얻었음에 틀림없는 그 일자리를 미련없이 내던짐으로써 객관적으로는 작지만, 실존적으로는 거대한 실천의 첫발을 디딘다.
여기서 더 나아가 앰버는 대학생들과 함께 비인간적이고 비위생적인 정육공장을 응징하기 위해 목장의 울타리를 부숴서 소들을 모두 자유롭게 풀어주는 대담한 행동까지 감행한다. 그러나 울타리를 열어도 소들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도망쳐! 자유를 찾아! 여기 계속 있으면 도살당해!" 하고 외치는 대학생들을 비웃으며 GMO 사료 맛에 길들여진 소들은 자유로운 바깥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를 향해 마냥 뒷걸음질 친다. 결국 학생들은 단 한 마리의 소들도 풀어주지 못하고 기숙사로 돌아온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좌절감 대신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웃으며 말한다. "실패했어! 하지만 우리는 처음으로 행동했어."
이게 영화가 참으로 하고자 하는 말이다. 사회를 바꾸는 것은 얼른 보면 실패했고, 유치하기까지 한 작은 실천이다. 선각자들의 울부짖음과 선도적인 활동으로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자유롭게 풀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뒷걸음질 치던 소들을 보라. 자유는 선택하고 책임질 것을 요구한다. 즉 자유는 그 무게를 걸머질 “용기”를 요구한다. 앰버는 울타리를 열기 전에 소들에게 그들이 곧 도살될 것이라는 인식, 밖으로 나서고자 하는 “용기”를 심어주어야 했다. 인식과 용기 없이 울타리만 열어주는 것은 해방이 아니다.
교육의 문제도 이와 같다.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입시교육을 힘겨워하는 만큼 입시 없는 교육을 두려워한다. 막상 시험이 없어지고, 학원이 없어진다고 생각해 보라. 갑자기 늘어난 그 시간은 고스란히 자기 책임이다. 학원에 맡겼던 엄청난 시간과 자원이 고스란히 학생과 학부모의 책임으로 돌아온다. 관리된 시간과 표준화된 행동에 익숙해진 사람에게 이러한 상황은 혼란이다.
교사도 그렇다. 입시교육은 성공하든 실패하든 단일한 척도에 자신을 내맡길 수 있기에, 아무것도 선택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입시교육을 거부하는 순간, 교육의 모든 것을 자신이 스스로 선택해야 하고 책임도 져야 한다. 그래서 교사들은 입시교육을 비판하면서도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한다. 따라서 입시교육의 문제는 울타리, 즉 제도가 바뀐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이는 교육주체들이 입시교육의 철폐를 희망하고, 그 댓가로 선택과 책임의 무게를 기꺼이 걸머질 용기를 가질 때 비로소 가능하다. 그렇다면 입시교육철폐는 참교육의 전제조건이 아니라 오히려 참교육의 최종 결과물이 아닐까? 참교육은 큰 그림이 아니라 앰버와 동료들이 감행했던 것 같은 유치한 시행착오들을 계속 누적해나가는 것이 아닐까?
이글루스 가든 - 자유로운 아이들, 아름다운 교육을...
# by | 2008/08/15 14:46 | 예술의 향기 | 트랙백 | 덧글(1)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