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6월 19일
경쟁에 대해 말한다(1)
이제는 경쟁력을 말하자(1) -잘못 사용되고 있는 말 “경쟁”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이 모락모락 아지랑이를 피우고 있다. 그 아지랑이만으로 공교육은 위태롭게 흔들린다. 사교육이 들썩이고 교사들은 각종 괴담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은 “그렇다면 경쟁력 없는 교육을 하자는 말인가?”라고 하면서 앞으로도 계속 우겨붙일 기세다. 여기에 대해 전교조나 교육시민운동단체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경쟁이 아니라 협동”이라고 맞불을 놓고 있다. 하지만 그 맞불은 그다지 성공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안타깝지만 경쟁이 아니라 협동이라는 프레임은 마치 경쟁력 없는 교사들, 무사안일을 희망하는 교사들이 협동이라는 두루뭉술한 단어를 통해 서로서로 감싸고 넘어가려는 핑계로 받아들여지기가 쉽게 때문이다. 온통 경쟁력이라는 말로 도배가 된 세상에서 경쟁력을 도외시하고 있다는 딱지를 붙이고서는 어떤 교육 프레임 전쟁에서도 우위를 차지하기 어렵다.
해답은 신자유주의 세력이 교육에 침투한 방법 속에 있다. 그들은 교육목표, 학력, 평가 등 교육의 용어를 멋대로 자기들 식으로 재규정한 뒤 그 프레임 속에 교육자들을 끌어들였다. 그들의 프레임 속에서 맴도는 한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을 만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가 되돌려주어야 한다. 그들의 절대화두인 “경쟁력”을 우리식으로 재규정해야 한다. 즉 “경쟁보다는 협동의 교육을!” “경쟁보다 인성을”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경쟁보다 협동이 더 높은 경쟁력을 보장한다.”, “인성이 경쟁력이다.”, “너희들이 말하는 경쟁은 경쟁이 아니라 갈등이다.” 이렇게 말해야 하는 것이다.
어원으로 살펴본 경쟁
경쟁력을 우리식으로 재규정하기 위해서는 현재 경쟁력이라는 말의 의미, 사용되고 있는 맥락을 분석하고, 다시 그 단어의 역사를 고찰해 보아야 한다. ‘경쟁’은 사전적으로는 그저 “같은 목적에 대하여 이기거나 앞서려고 서로 겨룸”이라는 소극적인 의미만 가지고 있다. 여기에는 겨룸의 결과 다음은 나와있지 않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자들이 사용하는 ‘경쟁’은 그런 정도의 의미로만 사용되지 않는다. 여기에는 승자와 패자의 잔혹하게 갈라지는 운명의 암시가 포함되어있다. 그들의 용법으로 경쟁을 사용하게 되면 승자와 패자가 갈라지며 승자에게는 보상이 패자에게는 파멸이 기다리는 그런 상황이 연상된다. 이런 의미로 경쟁이 사용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경쟁” “경쟁력”이란 말 앞에서는 저절로 오그라들고 위축된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경쟁력”을 “생존의 문제”로 삼아버리는 것이다. 이는 “생존경쟁”, “무한경쟁”따위의 말과 더불어 더욱 강화되어 사람들의 무의식에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 경쟁이라는 단어의 어원을 살펴보면 원래부터 그런 삭막한 의미를 가진 단어가 아니며, 이 단어가 수용되던 당시의 제국주의적 용법이 적용된 것 뿐임을 알 수 있다. 사실 경쟁이라는 단어는 원래 우리말에 없던 말이다. 우리 말에서 원래 경(競)과 쟁(爭)은 서로 다른 단어였다. 이 말들은 각기 달리 사용되었으며 두 말이 결합된 용법은 거의 찾기 어렵다. 경은 제한된 자원(특히 어떤 지위나 관직) 놓고 서로 이를 차지하고자 하는 상황에 사용되었고, 쟁은 서로 시기하여 다투는 상황에 주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19세기 이후 영어의 compete를 번역할 때 ‘경쟁’이라는 용어를 조합함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용법이 정착되었다.
그런데 영어의 compete 역시 오늘날 사용하는 것 같은 승자와 패자를 가리는 의미를 가진 단어가 아니다. 이 단어는 라틴어의 con(함께)과 petere(가다)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그대로 번역하면 “함께 가다”라는 의미가 된다. 즉 서로 다른 주체가 같은 방향을 향해 함께 간다는 것이다. 이때 서로의 속도를 견주는 경우는 있으나 상대방을 탈락시킴으로써 자신만 목적지에 도달한다는 의미는 전혀 들어있지 않다. 오히려 서로의 속도를 견주어 봄으로써 궁극적으로 쌍방 모두가 더 빨리 도착하게 되는 그런 상황을 의미한다. 즉 경쟁은 자신의 경쟁자와 목표·성공을 공유하는 것이지 독점하는 것이다. 이는 흔히 경쟁자로 번역되는 rival의 어원을 살펴봐도 명백하다. 이 단어는 river(강)에서 파생된 단어다. 즉 강을 사이에 두고 있다는 의미로서 평소에는 우기에는 강물을 서로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나, 갈수기 때는 강물의 합리적 활용을 위해 서로 협력하는 그런 관계를 의미한다.
경쟁의 진정한 의미
어원을 살펴보면 경쟁과 협동을 대비시켜 말하는 것이 오류임이 명백해진다. 경쟁과 협동은 서로 대립되는 대신 인간의 공동 행위를 구성하는 요소들로서 상보적인 관계다. 인간은 공통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한편으로는 협동하고 한편으로는 경쟁한다. 협동의 반대편에 있는 관계는 경쟁이 아니라 갈등이다. 갈등은 경쟁이 왜곡되면 쉽사리 발생하며, 타락한 경쟁이라 할만하다.
예를 들면 로마의 정치가들은 로마의 번영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놓고 서로 경쟁했다. 그런데 이것이 상대방을 거꾸러뜨리거나 파멸시킴으로써 성공의 독점을 향한 투쟁이 될 경우 compete가 아니라 conflict, 즉 갈등이 된다. 로마의 예를 들면 마리우스와 술라, 혹은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는 갈등했지 경쟁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예를 들면 이황과 기대승은 경쟁했지만 노론과 소론은 경쟁이 아니라 갈등을 했다.
결국 동·서양 모두를 따져 보아도 경쟁이라는 말에는 단지 서로 견주어 본다는 정도의 의미가 들어있지 상대방을 물리친다는 의미는 들어있지 않다. 홀로 달리는 것보다 함께 달리는 것이 기록 향상에 도움이 되는 것처럼, 경쟁은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는데 활력이 되는 것이다. 만화영화 “내일의 조(허리케인 조)”에서는 경쟁이 갈등이 되는 상황이 아니라 갈등이 경쟁이 되는 상황이 잘 묘사되고 있다. 처음에는 단지 싸워 이겨야 하는 싸움 상대가 그 싸움을 복싱이라고 하는 스포츠의 틀에서 룰을 지키며 행하게 되자 서로의 기량을 향상시키는 우정의 대상으로 바뀌게 된다. 이 경쟁자들은 경기에서는 최선을 다해 상대를 공격하지만 경기장 밖에서는 서로의 경기력 향상을 위해 조언을 하고 함께 궁리도 한다. 이게 참된 경쟁이고 경쟁자다.
지금까지 경쟁이 상대에게 승리하기 위해 다투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견주어 봄으로써 공동의 목적을 더 잘 달성하는 과정임을 살펴보았다. 경쟁의 의미를 이런 식으로 받아들이면 경쟁력의 의미도 서로 싸워 이길 수 있는 승부개념이 아니라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는데 자극이 될 정도의 능력이라는 의미로 바꿔 말해야 한다. 즉 상대와 견주었을 때 동기부여가 될 수 있는 정도의 능력이 경쟁력이다. 이는 상대를 물리쳐서 이길 수 있는 힘을 뜻하지 않는다. 따라서 요즘 유행하는 국제경쟁력이라는 말도 달리 해석해야 한다. 이는 다른 나라와 실력을 견주어볼만한 수준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지 다른 나라들을 모두 물리치고 1등 아니면 까무라치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즉, 흔히 말하는 선의의 경쟁인데, 사실상 선의의 경쟁이라는 말은 동어반복이다. 경쟁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 선의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앞에 선의라는 말을 덧붙이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오히려 정상적인 경쟁과 대비되는 “악의적 경쟁”이라는 말을 따로 만들어 쓰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그리고 요즘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에 경도된 교육당국에서 입만 열면 떠들어내든 경쟁이 바로 이 악의적 경쟁임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경쟁의 왜곡
이렇게 건전한 의미를 가지고 있던 경쟁이라는 단어가 살벌한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자본주의가 그 팽창의 극치를 달리던 제국주의 시절이다. 그 바탕에는 칼뱅의 개신교 사상과 오독된 다윈주의가 깔려 있다. 칼뱅의 구원 예정설은 구원 티켓이 한정적임을 강조했고, 그의 세속주의는 종교적 의례의 효험을 부정함으로써 세속에서 더 많은 재산을 획득하는 것이 구원 티켓을 얻었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지게 만들었다. 이로써 재산의 획득은 한정된 구원 티켓을 얻기 위한 치열한 경쟁대상이 되었다. 구원이 아니면 지옥이기에 이 경쟁은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겨루어 봄” 수준의 목가적인 경쟁이 될 수 없었다. 물론 칼뱅은 누군가가 구원을 받았다는 확실한 증거나 증표 따위는 없다고 했지만, 사람들은 증표를 갈구하며 이는 끝없는 불안증을 불러 일으켜 재산 경쟁을 가열시켰다. 어차피 구원받을 수가 한정되었다면 구원에 이르는 지름길은 내가 잘되는 것이 아니라 남을 탈락시키는 것이다. 이로써 “만인의 만인에 대한 질투” 상태가 도래했다.
제국주의자들은 다양성과 역사의 무작위성, 우연성을 강조했던 다윈의 학설을 오독하여 인류의 역사가 “생존경쟁”, “약육강식”의 지독한 싸움터라는 이른바 사회진화론을 통해 강대국의 약소국 침략을 합리화했다. 이 시기에 서양의 언어가 우리나라에 전해졌음을 염두에 둔다면, 특히 우리나라가 당시 약소국으로서 생존에 위협을 느끼던 상태였음을 감안한다면 compete를 번역할 때 왜 이 단어를 치열하고 살벌한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하필이면 수 천년 역사 중 경쟁이라는 말이 가장 잘못된 방식으로 사용되던 그 무렵에 이 단어가 우리말에 흘러들어왔던 것이다.
참된 경쟁을 위하여
이제 경쟁의 참뜻과 왜곡의 원인을 알았으니, 이 지독한 오용을 중단하고 그것이 가지고 있는 건전한 의미를 살려야 한다. 경쟁을 회피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때로 경쟁하고 때로 협동하면서 공통의 목표를 보다 효과적으로 달성하기를 희망하며, 실제 그렇게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상대를 밟고 서며, 상대를 누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잘못된 경쟁은 거부해야 한다. 우리는 경쟁을 회피하기 위해 신자유주의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경쟁을 막고, 경쟁을 19세기적 의미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신자유주의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런데, 혹자는 이렇게 물어 올 수 있다. “경제를 생각하라. 경쟁의 의미가 아무리 왜곡되었다 할지라도, 현재 정글 같은 세계경제질서에서 한국이 살아남으려면 그런 왜곡되고 잔혹한 경쟁에 뛰어들어야 하고 그럴 능력을 갖춰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러자면 먼저 교육경쟁력부터 높여야 하지 않겠는가?” 여기에 대한 대답은 “경제논리로 교육을 말하지 말라.” 보다는 “그런 논리는 최근의 경제적 변화를 반영하지 못한 낡은 경제논리다. 당신들이 말하는 그런 경쟁력은 21세기 신경제 질서에서 오히려 경쟁력을 갉아먹는 장벽이다.”가 더 효과적일 것이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서 계속 논의하고자 한다.
이글루스 가든 - 자유로운 아이들, 아름다운 교육을...
# by | 2008/06/19 11:13 | 교욱에 대해 생각하기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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