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5월 21일
교사의 그릇된 사랑
잘못된 사랑
지난 호에 “학생에 대한 사랑”이 교사의 필수적인 덕목임은 분명하지만 결코 쉽게 들먹일 수 없음을 지적하였다. 하지만 “참된 사랑”이라는 표준적인 상을 하나 세우는 것 역시 올바르지 않을 것 같다. 어떤 이상적인 규준을 하나 마련하려는 욕망이야말로, 오성의 습성이야말로 온갖 형이상학적 요설의 근원임을 베이컨, 흄, 칸트 등 많은 철학의 거장들이 지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표준’이야 말로 자신과 다른 것들을 폭력적으로 일치시키거나 배제하는 근대성의 핵심이다.
만약 어떤 표준적인 사랑의 상을 수립하고자 한다면 저마다 자기가 생각하는 사랑을 사랑의 표준으로 내세우면서 이를 강요하려 들 것이다. 더 나아가 자신의 사랑과 다른 것, 혹은 그것에 포착되지 않는 것은 증오나 사랑의 적으로 정의하고 말 것이다. 따라서 참된 사랑을 규정하기 보다는 참되지 못한 사랑을 규정하는 소극적이고 겸손한 방법이 보다 안전하다. 따라서 “잘못된 사랑”의 유형을 먼저 살펴보는 것은 비록 “참된 사랑”의 표준은 보여주지 못해도 “거짓된 사랑”을 회피하는 데는 도움이 될 것이다.
잘못된 사랑의 근원: 분리 불안
에리히 프롬은 잘못된 사랑은 “합일에의 욕망”, “분리의 공포”에 지나치게 사로잡힌 나머지 “합일에의 강박”에 빠지면서 비롯된다고 했다. 합일의 욕망과 분리의 공포는 이미 17세기에 스피노자가 코나투스라는 용어로 표현한 바 있다. 코나투스는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려는 욕망이다. 이 욕망이 승인되는 한 그는 힘을 가진다. 그런데 이 힘은 동료가 많아질수록 배가된다. 인간에게 가장 적당한 동료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같은 인간이다. 따라서 인간은 다른 인간들과 공동체를 구성하고자 하며, 어떤 공동체와 일체감을 느끼고자 하는 강한 욕망을 가지며, 반대로 공동체와 일체감을 느끼지 못할 경우 두려움과 무력감을 느낀다. 이것이 사랑의 근원이다.
그런데 사랑과 합일은 상당한 비용과 시간을 요구한다. 중매결혼보다 연애결혼이 거치는 노정이 험난하고 쌍방에게 더 많은 노고와 고통을 요구하듯, 공동체에 참여하여 일체감을 느끼는 경험 역시 상당한 노고와 비용을 요구한다. 문제는 “분리의 공포”가 너무 강하여 일체감을 느끼기 위한 헌신과 노력을 기다릴 수 없는 경우다. 특히 근대 자본주의 사회는 그 고도의 분업화로 인해 전통적인 모든 공동체를 해체하고 모든 사람들을 개별 노동자와 개별 자본가로 마주 세웠다. 돌아가 쉴 어떤 장소도 없이 벌거벗은 개인으로 세상에 나서게 된 현대인들에게 분리의 공포는 미래형이 아니라 현재형이다. 뭉크의 절규는 이 혼란스러운 세상에 홀로선 개인의 공포를 섬뜻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될 경우 합일의 욕망은 합일의 강박으로 바뀐다.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힌 현대인들은 그 대상이 무엇이든, 그 방법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분리감과 고독감에서 빨리 벗어날 수 있다면 무조건 달려들어 합일하고자 한다. 결혼도 예외는 아니라서, 결혼은 이제 빨리 고독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을 손쉽게 맺어주는 짝짓기 비즈니스로 변모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잘못된 사랑의 근원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무작정 아무에게나 “합일”하고자 하는 강박적 충동과 어떤 능동적인 노력도 투입하지 않고서 일체감이라는 결과만을 획득하려는 게으름이다. 이는 비용의 최소화와 결과의 최대화를 추구하는 자본주의 규칙에 비추어 보면 합리적인 선택으로 둔갑한다.
잘못된 사랑 하나: 나를 상대에게 일치시킴
이런 나태하고 빗나간 사랑의 가장 보편적인 형태가 바로 “자신을 일치시킴”이다. 분리공포에 시달리면서 합일에 대한 강박을 가지고 있는 현대인은 어떤 대상과의 분리를 두려워한 나머지 아예 그 대상과 자신을 일치시키려고 한다. 상대에 대한 조금의 부정적, 비판적 생각도 분리 공포에 밀려 즉각 배제된다. 만약 내가 상대와 조금이라도 다른 점이 나타난다면 이는 분리의 전조로 강조된다. 이는 연인의 생각을 무조건 긍정하는 병적인 사랑으로, 자녀를 위해 자기 인생을 하나도 남겨두지 않는 강박적인 부모 사랑으로, 지도자의 명령에 복종하는 전체주의로,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사도-마조히즘에 이르게 된다. “난 네가 기뻐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할 수가 있어.”라는 만화 대사는 이런 비뚤어진 사랑을 훌륭하게 압축해서 보여준다.
이런 잘못된 사랑은 교사들에게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교사 역시 분리공포를 가지고 있는 현대인이기에, 강박적으로 일치의 대상을 찾는다. 교사들이 손쉽게 찾을 수 있는 일치대상은 학생들, 자기 자녀, 그리고 상급기관(제도)이다. 공교롭게도 이는 교직 발달 순서에 따라 진행된다.
처음 교사는 자기가 맡은 아이들과 자신을 일치시킨다. 종종 많은 젊은 교사들이 아이들에게 무조건적인 헌신을 감행한다. 이를 사회는 “헌신적 사랑”이라고 칭송하기까지 한다. 이들 헌신적인 교사들은 때때로 퇴근시간을 훨씬 넘겨가면서까지 아이들에게 무엇이라도 해주려고 한다. 하지만 이는 학생들과의 대화 속에 서로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자신을 아이들에게 던졌다는 점에서 사랑이라고 부르기 어렵다. 게다가 이들은 아이들과의 일치감에 균열이 생기는 것을 두려워해서 아이들이 현재 서 있는 지평 너머를 보지 않으려 한다. 도대체 0교시, 야자에 시달리는 학생들을 헌신적으로 지도하기 위해 6시반에 출근해서 밤 11시까지 퇴근하지 않고 입시공부를 보살핀, 그러다 순직까지 하는 교사의 모습을 어떻게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이것은 자신의 분리 불안을 학생들과의 일치를 통해 해소하려는 강박증이다.
그러다 조금 더 나이를 먹고 자기 자녀를 가지게 되면 이들의 “사랑”은 순식간에 자기 자녀에게로 넘어간다. 애초에 학생들 역시 단지 가장 가까이 있는 일치감의 대상이었을 뿐, 적극적으로 노력하여 얻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었기에 버리고 교체하는 것도 매우 쉬운 것이다. 이들의 자녀사랑 역시 일방적인 헌신이다. 모든 세계의 중심에 자기 자녀가 서며, 나머지 것들은 자신을 포함하여 그 수단에 지나지 않게 된다. 심지어 엊그제까지 헌신의 대상이었던 학생들마저 자기 자녀를 부양하기 위한 자원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이자 대상에 지나지 않게 된다. 실제로 “헌신적”인 교사들은 “헌신적”인 부모로 쉽게 변신하며, 일단 헌신적인 부모가 되면 결코 헌신적인 교사로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자녀에 대한 사랑도 오래 가지 않는다. 자녀가 독립된 인격으로 성장하여 손쉬운 일치의 대상이 아니게 되자 어김없이 중년의 위기, 정체성의 위기가 닥쳐온다. 바로 이 무렵이 많은 교사들이 승진병을 앓는 시기다. 따지고 보면 승진병은 승진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승진이라는 동일한 목표를 공유하고 있는 집단과의 일치감, 교육청, 교육부, 그리고 장학사 등 일개 교사보다 더 커 보이는 집단이나 존재와의 일치감이 주된 목적이다. 그렇지 않으면 승진병에 걸린 교사들이 교장의 총애를 놓고 다투어야 하는 경쟁 상대인 다른 승진병 교사들과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어 놓고 희희낙낙하는 현상을 이해할 길이 없다.
결국 학생들에 대한, 자기 자녀에 대한 무한헌신과 승진병은 모두 같은 질병의 다양한 증상, 혹은 그 발병 경과에 다름 아니다. 이들은 모두 노력이 결여되어 있으며, 그저 손에 잡히는 대상을 향해 자신을 무조건 일치시키려 하고 있다. 이것이 더욱 발전하면 어떤 특정 집단이나 인물과 자신을 완전히 동일시하는 전체주의나 사도-마조히즘으로 발전하게 됨은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물론 이러한 왜곡된 사랑은 교사뿐 아니라 학생에게도 나타난다. 교사가 요구하는 지시사항을 무조건 따르거나 좀 더 나아가 교사가 좋아할 것이라 판단한 말과 행동을 자기 의사와 무관하게 미리 행하는, 즉 알아서 기는 아이들이 그들이다. 만약 사랑받을 만한 말과 행동을 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받지 못한다면 이들은 심한 분노를 느껴 상대방을 미워하게 되거나, 더 철저히 수동적이 되는 길을 택한다. 관심 받기 위해 일부러 말썽을 부리거나 꾀병을 앓는 아이가 되는 것이다.
잘못된 사랑 둘: 상대를 나에게 일치시킴
나를 상대에게 일치시키는 것이 사랑의 수동적 왜곡이라면, 상대를 나에게 일치시키는 것은 능동적 왜곡이다. 두 경우 모두 상호작용이 인정되지 않으며, 나와 사랑 대상간의 독립성과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두 경우 모두 어느 한쪽을 다른 한쪽에게 일방적으로 일치시키고자 하는 것이며,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사이비 사랑이다. 전자는 자신에 대한 폭력이며, 후자는 상대에 대한 폭력이라는 점에서 다를 뿐이다.
상대를 나에게 일치시키기 위해서는 상대를 완전히 소유해야 한다. 상대를 완전히 소유하기 위해서는 그의 의지와 기호가 소멸되고 그 빈자리가 나의 그것으로 채워져야 한다. 이는 사랑의 자본주의화라 할 만한 방식이다. 16세기까지만 해도 공공장소에 주로 전시되던 예술작품이 18세기 이후에는 개인이 소장할 수 있는 형태로 변모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예술 애호가의 상이 훌륭한 작품을 순례하듯 찾아다니는 사람에서 많은 작품을 소장한 사람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최고 미덕은 소유이며 사랑도 예외가 아니다. 사랑한다면 가져야 한다. 그리고 가지려면 상대는 완전한 소유의 대상, 즉 사물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그릇된 사랑의 최악의 형태인 네크로필리아(necrophilia: 시체를 사랑하는 것)적 사랑이 나타난다. 영화 “헬레나를 상자에 넣기”에는 한 여성을 온전히 갖고자 그녀의 사지를 절단하는 비뚤어진 사랑이 묘사되고 있다. 꼭만 실제 칼과 톱으로 사지를 절단해야만 네크로필리아가 아니다. 상대의 의지와 행위와 지성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그것과 일치될 것을 욕구하는 것은 이미 마음속에서 상대의 사지는 물론 눈과 혀까지 뽑아버린 것과 마찬가지다. 사랑이 “널 갖고 싶어.”라던가 “널 60년 할부로 사고 싶어”라는 광고카피가 사람들에게 먹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실제로 근대의 사랑은 상대방을 소유하는 것, 가지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헤겔이 말한 “노예의 변증법”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상대를 완전히 소유하려면 상대가 자신과 완전히 일치되어야 한다. 하지만 자기 생각 없고, 의지 없는 상대는 죽은 상대나 마찬가지다. 반응이 없는 죽은 상대와의 사랑은 허무하다. 상대를 노예로 만듦과 동시에 자신은 기껏해야 노예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된다. 결국 이 사랑은 노예, 사물이 된 상대에 대한 경멸로 바뀌게 되며, 새로운 살아있는 사랑의 대상을 찾아 떠나며, 새로이 찾은 대상을 사물, 소유물로 만들고 만다. 이는 영원히 고독한 사랑이며, 영원히 목마른 사랑이며, 한 마디로 사랑이 아니다.
이런 끔찍한 사랑과 교사는 무관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네크로필리아적 사랑은 사실 거의 모든 교사가 조금씩은 앓고 있는 질병이다. 많은 교사들이 조용한 교실, 정돈된 교실을 원한다. 숨소리 밖에 들리지 않는 교실에서 직각으로 줄을 맞춘 아이들이 교사가 원할 때만 대답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침묵하고 있기를 희망한다. 한 마디로 죽은 교실을 원한다. 많은 교사들이 수업시간이 아닐 때는 애교를 부리면서 와서 안기고, 수업시간에는 교사들의 은어대로 “그림같이” 앉아 있는 그런 학생을 희망한다. 즉 교사가 원할때만 살아있는 그런 움직이는 시체를 갈망한다. 교사는 이렇게 일사분란하게 통제된 학생과 학급에게 일치감을 느끼면서 자신의 고독감과 분리불안을 해소하려고 한다.
심지어 이는 교육운동 진영에도 나타난다. 대동단결이라는 단 한마디에 지도부와의 이견은 묵살되며 배제된다. 운동단체의 지도부는 어느 새, 과거의 동지들을 자신의 결단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투쟁에 나서는 그런 대오로 간주하게 된다. “한 분도 빠짐없이.”라는 수식어, “전원 동참하자.”라는 구호 속에는 엄청난 폭력과 네크로필리아가 숨어있다. 자본가가 노동자를 살아있는 인간이 아니라 단지 가변자본으로 소유하기 위해 그들의 일사분란한 복종을 요구했듯이 교육운동 지도자들이 수 많은 동료교사들을 자기 이념의 올바름의 증거물로서, 혹은 정치력의 지표로서 소유하고자 한 것은 아닐지 깊은 반성이 필요할 것이다.
이들 두 종류의 잘못된 사랑은 모두 근대사회의 고독과 분리불안에서 빨리 벗어나고자 한 성급함과 나태함에서 비롯된 동전의 양면 같은 현상이다. 따라서 자신을 일치시키는 자, 즉 무조건적으로 헌신하고 복종하는 자는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타인을 일치시키는 자, 즉 무조건적인 억압과 통제를 가하는 자가 된다. 교장, 교육청에게 순종적인 교사들일수록 학생들에게 일사 분란, 그림 같음, 완전한 침묵을 요구한다. 학생들에게 자기 생활이 없을 정도로 헌신하는 교사가 동시에 학생들에게 가장 억압적인 교사이기도 하다. 얼핏 보면 모순적으로 보이는 이 현상들은 사실은 같은 현상의 두 측면이다. 사랑 하나 제대로 못하고 이런 질병을 앓는 이유는 분리 불안에서 빨리 벗어나고자 하는 성급함이 빚어낸 사랑 강박이다. 하지만 이를 비난할 수 없다. 인간은 결코 홀로 살수 없는 동물인데, 근대 사회는 인간을 홀로 서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노력과 강박을 구별해야 한다. 우리는 고독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랑”을 해야한다. 그 노력은 나를 알고, 상대를 알고, 우리가 처한 상황을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잘못된 사랑을 나태한 사랑이라고 부른 것도 바로 이 앎의 과정, 알고자 노력하는 과정을 생략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앎의 대상이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것이기에 그것은 죽은 사실들의 암기가 아니라 끊임없는 교호작용이며 생성의 과정이 되는 것이다. 이제 다시 질문을 던져본다. “나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내가 가르치는 내용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즉 그들을 얼마나 잘 아는가? 즉 그들과 얼마나 상호작용하며 알고자 노력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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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 2008/05/21 14:41 | 교육에 대해 생각하기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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