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5월 03일
청소년 소설 "아바타"
“이런 썩을!”
폭탄 터지는 소리와 기관총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대고 눈 앞의 모니터가 온통 붉게 물들어 버리자 태호가 주먹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외쳤다. 그리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집어던진 체 앞뒤로 몇 번 흔들어 대었다. 그 동안 무적을 자랑했던 <카운터 스트라이크>연승 기록이 깨지는 순간이다. 15연승? 16연승? 하여간 최근 들어 처음 겪어본 패배다.
-hey! you're excellent soldier! it was a great match! see ya!
자신을 뉴질랜드인이라고 소개했던 상대방에게서 채팅 인사가 왔다.
-you too. good game. by by
태호 역시 자신이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영어단어를 총 동원해 작별인사를 보냈다. 그리고 게임을 중단한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30분간의 격전을 벌린 다음이라서 그런지 머리가 약간 어지럽고 어깨가 쑤셨다. 목을 조금 돌려보고 자기 손으로 어깨를 탁탁 두드린 뒤 태호는 가방을 들쳐 메고 옆자리에서 계속 게임하고 있는 종훈이를 두드렸다.
“야, 최종훈, 그만 좀 해라. 학원 갈 시간이야.”
“음. 음? 알았어.”
종훈이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러나 꿈쩍도 하지 않고 있는 엉덩이의 묵직함으로 보아 전혀 일어설 기척이 아니었다. 도리 없이 태호는 종훈이가 하고 있는 게임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기다려야 했다. 긴장감이라고는 전혀 없이, 일본 애니매이션 투로 예쁘게 꾸며진 캐릭터들이 이리저리 분주하게 옮겨 다니면서 이런저런 아이템들을 줍고 있었다. 가끔 익살스럽기까지 한 명색이 괴물들이 튀어나와 전투가 벌어지기는 했지만 칼질 몇 번에 허무하게 쓰러졌고, 공연히 아이템과 돈만 보태주었다.
“야, 너 이게 재미있냐?”
“아니, 그냥.”
“그럼, 그만 하고 가자니깐?”
“먼저 가. 조금만 더 하면 레벨 올라가니까.”
“야, 재미도 없는 것, 레벨만 자꾸 올리면 뭐 하냐?”
태호가 투덜거렸지만 종훈이는 들은 척도 않고, 예쁜 소녀 캐릭터를 조종하여 별로 위험하지도 않은 모험을 계속하며 아이템을 줍고 경험치를 올리고 있었다. 그러기를 10여분 마침내 예쁜 벨소리와 함께 “레벨이 올랐습니다.”라는 귀여운 목소리가 들렸다. 종훈이가 캐릭터 창을 열자 긴 머리를 찰랑거리는 귀여운 소녀캐릭터의 모습이 나타났다. 레벨 업 배너를 클릭하자 소녀의 모습은 더 귀엽고 매력적으로 바뀌었다.
“어라? 이게 뭐야? 너도 정말 어지간하다.” 그 소녀 캐릭터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태호가 약간은 놀란 듯, 또 나머지 약간은 한심하다는 듯 종훈의 얼굴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캐릭터 이름이 유지연? 너 유지연 걔하고는 헤어졌잖아?”
“헤어져? 누가? 누구 맘대로?”
“누구 맘대로? 걔 맘대로! 너 지연이가 2반 이오종하고 사귀는 거 몰라? 전교생이 다 보는 앞에서 손잡고 다니는 거 못 봤어?”
“웃기지마.”
“관두자. 하여간 너도…. 휴. 뭐라 할 말이 없네.”
“할 말 없으면 하지 마. 그리고 너 학원 간다며?”
“넌 안가?”
“안 가. 너나 가. 난 이제 학원 끊을 거야.”
“맘대로 해라. 난 간다.”
태호는 pc방 의자에 비스듬한 자세로 반쯤 드러눕다시피 한 모습으로 마우스를 까딱까딱 누르고 있는 종훈의 모습을 안타까운 듯, 한심한 듯 잠시 바라보다 등을 돌렸다. 그의 등 뒤로 이 세상의 모든 무기들은 다 동원 되었지 싶은 총포도검의 합성음이 잠시 울리다 사라졌다.
♥ ♥ ♥ ♥ ♥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종훈이는 부시시한 모습으로 열쇠를 비틀어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섰다. 동대문에서 새벽장사 하는 부모님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집에 없었고, 텅 빈 집과 덩그라니 하나 켜져 있는 현관의 등불만이 그를 맞아주었다. 종훈이가 아무도 없는 깜깜한 집에 밤늦게 들어오는 것이 안타까워 엄마가 켜 두고 나간 것이리라. 그러나 종훈이는 아무도 없는 환한 집 보다 가족이 기다리고 있는 깜깜한 집이 더 그립다.
방 한 구석에 어차피 별로 든 것도 없는 책가방을 내 동댕이치고 종훈은 마치 자석에라도 끌려가듯 컴퓨터 전원 스위치를 눌렀다. 컴컴한 방에 마이크로소프트 로고가 모니터를 밝히며 어슴프레한 빛을 흘려내었고, 종훈의 긴 회색 그림자가 힘없이 늘어섰다가 컴퓨터 화면이 바뀔 때마다 색깔을 바꿔 입었다.
유령같이 그림자를 흘리며 종훈은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리고 마치 정해진 프로그램이 작동하는 것처럼 불길한 마스크 모양의 게임 아이콘을 클릭했다. 아이디와 비번을 치고 접속하자 그의 게임 아바타가 화면에 나타났다.
“지연…”
마치 종훈이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는 양, 둥근 눈망울에 날씬한 몸매를 하고 있는 게임 아바타가 그를 향해 윙크인지 비웃음인지 모를 표정을 던져주었다.
♥ ♥ ♥ ♥ ♥
“저어, 이런 말 하기는 미안하지만.” 지연이 애교스럽게 눈 꼬리를 치켜 올렸다. “우리가 가고 있는 방향이 틀린 것 같거든요? 저기 희미하게 보이는 게 수평선 처럼 보이는데…. 우리가 가려던 곳은 안개산맥이 아니었던가요?”
“허, 그러게요.” 종훈이 멋 적게 머리를 긁었다. “어떤 놈이 이정표에다가 장난을 쳤나봐요. 에이. 이런 멍청한 장난질에 당하다니.”
“너무 자책하지 말아요.” 지연이 우아한 걸음으로 종훈에게 다가왔다. “온갖 술수가 난무하는 땅 페이룬에서 그 정도 안 당해 본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아, 천사가 따로 없어!
종훈은 가슴 깊숙한 곳으로부터 위안을 느끼며 지연을 슬쩍 훔쳐보았다. 연분홍색 로브 사이사이로 살짝 드러난 하얀 살결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고, 자주색 투구 아래로 흘러내린 긴 머리카락이 바람을 받아 춤추듯 흩날리고 있었다.
“자아, 이러고 있어봐야 별 도움이 안 되니까.” 지연의 차가우면서도 부드러운 손이 종훈의 어깨 위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일단 아까 그 이정표까지 되돌아가죠. 이 바닷바람이 좋긴 하지만, 오늘 안에 안개산맥에서 스승님을 만나야 하니까.”
“저야 뭐.” 종훈이 약간 부끄러워하며 웃었다. “길이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좋은걸요? 그럼 지연 신관님과 함께하는 시간도 길어지니까.”
“어머, 종훈 기사님도….”
지연이 말끝을 흐리며 미소로 화답했다. 그 미소에 종훈은 지금까지 겪었던 모든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한 순간에 소멸되는 환희를 느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종훈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상해요. 뭔가 위화감이 느껴져요. 이런 느낌, 이런 느낌을 언제 받았더라…. 아! 이레니쿠스! 이런 함정이다!”
종훈의 당황한 목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그들이 서있는 둘레로 불길이 원을 그리며 일어서더니 장막을 이루면서 완전히 에워싸고 말았다.
“화염의 장막!” 지연이 침착한 모습으로 나풀거리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걱정 말아요. 이 정도는 쉽게 처리 할 수 있어요.” 그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하, 아름다운 마법사를 데리고 나타나셨군.” 거칠고 구역질나는 바리톤 음성이 들리더니 검은 망토를 걸친 키가 큰 중년 남자가 불길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레니쿠스! 그 때 확실히 숨통을 끊어 놓았어야 했는데.” 종훈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칼을 움켜쥐었다.
“호오, 고귀한 기사 종훈. 이거 정말 오랜만이로군. 하하하, 이거,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겠는 걸? 그대의 고귀한 자비심 덕에 이 몸이 이렇게 돌아올 수 있었으니 말이지. 전보다 몇 배는 더 강해져서 말이야. 하하하하!” 이레니쿠스가 거미처럼 느물거리는 길고 가는 손가락을 마치 하프라도 연주하는 듯이 흔들어대었다. “그러니까 이제는 저 아름다운 마법사도 별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이란 말이지.”
이레니쿠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들을 에워싸고 있던 불길에서 한 줄기 섬광이 번득이며 주문을 외우고 있던 지연을 덮쳤다. 지연의 몸이 종잇장처럼 맥없이 붕 떠오르더니 종훈의 발 앞에 풀썩 쓰러졌다. 그리고 고통스러운 기침과 함께 검붉은 핏덩이를 토해내었다.
“지연 신관님!”
“괜찮아요. 쿨럭.”
지연이 연신 기침을 해대면서 억지로 웃는 얼굴을 만들어 보였다.
“이레니쿠스!” 종훈이 허리에 차고 있던 장검을 뽑아 들었다. 장검에서 파란 광채가 솟구치자 불길의 원이 마치 두려움이라도 느끼는 듯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오늘만은 내게서 자비를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아, 홀리 소드! 어떤 마법이라도 해제할 수 있다는 거룩한 무기. 크크. 하지만 내가 그 정도 대비도 하지 않았을 것 같은가?”
이레니쿠스가 비웃으며 손을 치켜 올리자 땅 속에서 시커먼 형상들이 기분 나쁜 소리를 흥얼거리며 솟아올랐다.
“트롤들!”
“자아, 어쩌실텐가? 고귀한 기사 나으리. 그대가 날 공격한다면 저 아름다운 마법사는 트롤들의 간식거리가 되고 말걸세! 자, 이 더러운 땅 귀신 트롤들아, 부드러운 고기가 저기 있다.”
이레니쿠스가 손을 휘두르자 키가 3미터는 넘어 보이는 트롤들이 일제히 지연을 향해 달려들었다. 종훈은 있는 힘껏 장검을 휘두르며 트롤들을 막았다. 그의 검이 허공을 스칠 때 마다 하얀 빛이 번득이며 트롤의 두꺼운 가죽이 예리하게 갈라졌다. 그러나 트롤은 워낙 몸집이 큰데다가 상처도 순식간에 아물었기 때문에, 종훈의 공격은 트롤을 잠시 주춤거리게 할 뿐, 이내 회복된 트롤들이 다시 덤벼들었다.
“하아, 트롤들을 먼저 상대하시겠다? 그대는 지금 나를 무시하고 있는가, 아니면 눈물겨운 사랑 때문인가?”
이레니쿠스가 야비한 웃음을 던지더니 종훈을 향해 손을 내 뻗었다. 그의 마디만 앙상한 거미가시 같은 손가락 끝에서 살아 꿈틀거리는 것 같은 안개가 뻗어 나오더니 종훈을 향해 꿈틀거리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한 모금만 호흡하더라도 치명적인 타격을 받는 사악한 마법 <지옥의 숨결>이었다. 이 치명적 안개는 인간의 체온에 반응하여 표적이 된 사람 둘레를 떠나지 않기 때문에 더욱 위험한 존재였다.
물론 평소의 종훈이었다면 홀리 소드로 얼마든지 막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종훈이 이 안개를 상대한다면 아직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지연은 트롤들의 손에 갈기갈기 찢어지고 말 것이었다. 종훈은 일단 칼을 꼿꼿이 세운 체 다음 행동을 결정하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었다.
그때 지연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들과 트롤들, 이레니쿠스를 포함한 반경 수십 미터가 한 낮의 태양보다 몇 배나 밝은 찬란한 빛의 물결로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빛의 물결이 넘실거릴 때 마다 트롤들을 하나 둘 먼지가 되어 버렸고, 지옥의 숨결은 연분홍색의 따뜻한 향기가 되어 부드럽게 흩어졌다.
“성스러운 절대 광막!” 이레니쿠스의 입에서 공포스러운 한 마디가 터져 나왔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선한 정령들과 신의 정수를 모두 소환하는 강력한 마법. 흑마법과 조금이라도 연결된 대상을 모두 중화시켜 그 존재를 소멸해 버리는 절대선의 정화. 그러나 이 마법을 소환한 사람은 그 힘을 견디지 못해 목숨을 내어 놓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백 마법 최후의 비기.
“이럴 수가 저 계집이! 아, 이럴 수가.”
이레니쿠스는 자기 몸에서 수십 년 간 연마했던 흑마법의 에너지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휘청거림도 잠시, 종훈의 홀리 소드가 섬광을 일으카며 그의 몸뚱이가 예리하게 세로로 갈라지며 장작처럼 쓰러졌다. 그렇게 이레니쿠스의 사악한 육신은 몇 번 꿈틀거리다가 마침내 회색 안개가 되어 산산히 흩어져버렸다.
이레니쿠스를 완전히 해치운 것을 확인한 종훈은 칼을 집어던지고 지연을 향해 달려갔다. 지연은 허리를 반쯤 들어 올린 체 엎드려 있었다. 그녀의 상체를 간신히 지탱하며 땅을 딛고 있는 가느다란 팔의 굴곡에서는 핏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지연 신관님!” 종훈이 지연을 붙들어 일으켰다. 이미 그녀의 몸에는 한 줌의 힘도 남아있지 않는 듯, 그의 품에 안기자마자 두 팔이 축 아래로 처지고 말았다.
“무사하셨군요.” 지연이 입가로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들릴듯 말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되었어요.”
“되긴 뭐가 되요? 난 당신을 잃을 수 없단 말이에요! 왜 그런 무리한 마법까지 쓰셨나요?”
“저도 종훈 기사님을 잃을 수 없었….”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지연의 눈이 감기며 고개가 아래로 쳐져버렸다. 종훈은 이 순간 아무 말도 입밖에 튀어나오지 않는 것이 너무 슬펐다. 수 많은 전투로 거칠어진 그의 얼굴 위로 작은 강물 두 줄기가 흘러내렸다.
♥ ♥ ♥ ♥ ♥
새벽 네 시, 아무도 없는 텅 빈 아파트. 작은 방 하나에서만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빛은 컴퓨터 모니터가 반짝이는 빛이었고, 스피커에서는 계속 똑 같은 음악이 반복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종훈은 한 손에 마우스를 움켜쥔 체 의자에 목을 기대고 잠들어 있었다. 그의 눈가에는 흐르다 말라 굳어버린 눈물 자욱이 모니터 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모니터에는 “당신의 캐릭터가 죽었습니다. 경험치와 아이템의 20%를 삭감하고 다시 시작하시겠습니까?”라는 문자가 유령처럼 둥실둥실 떠나녔다.
폭탄 터지는 소리와 기관총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대고 눈 앞의 모니터가 온통 붉게 물들어 버리자 태호가 주먹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외쳤다. 그리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집어던진 체 앞뒤로 몇 번 흔들어 대었다. 그 동안 무적을 자랑했던 <카운터 스트라이크>연승 기록이 깨지는 순간이다. 15연승? 16연승? 하여간 최근 들어 처음 겪어본 패배다.
-hey! you're excellent soldier! it was a great match! see ya!
자신을 뉴질랜드인이라고 소개했던 상대방에게서 채팅 인사가 왔다.
-you too. good game. by by
태호 역시 자신이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영어단어를 총 동원해 작별인사를 보냈다. 그리고 게임을 중단한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30분간의 격전을 벌린 다음이라서 그런지 머리가 약간 어지럽고 어깨가 쑤셨다. 목을 조금 돌려보고 자기 손으로 어깨를 탁탁 두드린 뒤 태호는 가방을 들쳐 메고 옆자리에서 계속 게임하고 있는 종훈이를 두드렸다.
“야, 최종훈, 그만 좀 해라. 학원 갈 시간이야.”
“음. 음? 알았어.”
종훈이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러나 꿈쩍도 하지 않고 있는 엉덩이의 묵직함으로 보아 전혀 일어설 기척이 아니었다. 도리 없이 태호는 종훈이가 하고 있는 게임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기다려야 했다. 긴장감이라고는 전혀 없이, 일본 애니매이션 투로 예쁘게 꾸며진 캐릭터들이 이리저리 분주하게 옮겨 다니면서 이런저런 아이템들을 줍고 있었다. 가끔 익살스럽기까지 한 명색이 괴물들이 튀어나와 전투가 벌어지기는 했지만 칼질 몇 번에 허무하게 쓰러졌고, 공연히 아이템과 돈만 보태주었다.
“야, 너 이게 재미있냐?”
“아니, 그냥.”
“그럼, 그만 하고 가자니깐?”
“먼저 가. 조금만 더 하면 레벨 올라가니까.”
“야, 재미도 없는 것, 레벨만 자꾸 올리면 뭐 하냐?”
태호가 투덜거렸지만 종훈이는 들은 척도 않고, 예쁜 소녀 캐릭터를 조종하여 별로 위험하지도 않은 모험을 계속하며 아이템을 줍고 경험치를 올리고 있었다. 그러기를 10여분 마침내 예쁜 벨소리와 함께 “레벨이 올랐습니다.”라는 귀여운 목소리가 들렸다. 종훈이가 캐릭터 창을 열자 긴 머리를 찰랑거리는 귀여운 소녀캐릭터의 모습이 나타났다. 레벨 업 배너를 클릭하자 소녀의 모습은 더 귀엽고 매력적으로 바뀌었다.
“어라? 이게 뭐야? 너도 정말 어지간하다.” 그 소녀 캐릭터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태호가 약간은 놀란 듯, 또 나머지 약간은 한심하다는 듯 종훈의 얼굴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캐릭터 이름이 유지연? 너 유지연 걔하고는 헤어졌잖아?”
“헤어져? 누가? 누구 맘대로?”
“누구 맘대로? 걔 맘대로! 너 지연이가 2반 이오종하고 사귀는 거 몰라? 전교생이 다 보는 앞에서 손잡고 다니는 거 못 봤어?”
“웃기지마.”
“관두자. 하여간 너도…. 휴. 뭐라 할 말이 없네.”
“할 말 없으면 하지 마. 그리고 너 학원 간다며?”
“넌 안가?”
“안 가. 너나 가. 난 이제 학원 끊을 거야.”
“맘대로 해라. 난 간다.”
태호는 pc방 의자에 비스듬한 자세로 반쯤 드러눕다시피 한 모습으로 마우스를 까딱까딱 누르고 있는 종훈의 모습을 안타까운 듯, 한심한 듯 잠시 바라보다 등을 돌렸다. 그의 등 뒤로 이 세상의 모든 무기들은 다 동원 되었지 싶은 총포도검의 합성음이 잠시 울리다 사라졌다.
♥ ♥ ♥ ♥ ♥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종훈이는 부시시한 모습으로 열쇠를 비틀어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섰다. 동대문에서 새벽장사 하는 부모님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집에 없었고, 텅 빈 집과 덩그라니 하나 켜져 있는 현관의 등불만이 그를 맞아주었다. 종훈이가 아무도 없는 깜깜한 집에 밤늦게 들어오는 것이 안타까워 엄마가 켜 두고 나간 것이리라. 그러나 종훈이는 아무도 없는 환한 집 보다 가족이 기다리고 있는 깜깜한 집이 더 그립다.
방 한 구석에 어차피 별로 든 것도 없는 책가방을 내 동댕이치고 종훈은 마치 자석에라도 끌려가듯 컴퓨터 전원 스위치를 눌렀다. 컴컴한 방에 마이크로소프트 로고가 모니터를 밝히며 어슴프레한 빛을 흘려내었고, 종훈의 긴 회색 그림자가 힘없이 늘어섰다가 컴퓨터 화면이 바뀔 때마다 색깔을 바꿔 입었다.
유령같이 그림자를 흘리며 종훈은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리고 마치 정해진 프로그램이 작동하는 것처럼 불길한 마스크 모양의 게임 아이콘을 클릭했다. 아이디와 비번을 치고 접속하자 그의 게임 아바타가 화면에 나타났다.
“지연…”
마치 종훈이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는 양, 둥근 눈망울에 날씬한 몸매를 하고 있는 게임 아바타가 그를 향해 윙크인지 비웃음인지 모를 표정을 던져주었다.
♥ ♥ ♥ ♥ ♥
“저어, 이런 말 하기는 미안하지만.” 지연이 애교스럽게 눈 꼬리를 치켜 올렸다. “우리가 가고 있는 방향이 틀린 것 같거든요? 저기 희미하게 보이는 게 수평선 처럼 보이는데…. 우리가 가려던 곳은 안개산맥이 아니었던가요?”
“허, 그러게요.” 종훈이 멋 적게 머리를 긁었다. “어떤 놈이 이정표에다가 장난을 쳤나봐요. 에이. 이런 멍청한 장난질에 당하다니.”
“너무 자책하지 말아요.” 지연이 우아한 걸음으로 종훈에게 다가왔다. “온갖 술수가 난무하는 땅 페이룬에서 그 정도 안 당해 본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아, 천사가 따로 없어!
종훈은 가슴 깊숙한 곳으로부터 위안을 느끼며 지연을 슬쩍 훔쳐보았다. 연분홍색 로브 사이사이로 살짝 드러난 하얀 살결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고, 자주색 투구 아래로 흘러내린 긴 머리카락이 바람을 받아 춤추듯 흩날리고 있었다.
“자아, 이러고 있어봐야 별 도움이 안 되니까.” 지연의 차가우면서도 부드러운 손이 종훈의 어깨 위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일단 아까 그 이정표까지 되돌아가죠. 이 바닷바람이 좋긴 하지만, 오늘 안에 안개산맥에서 스승님을 만나야 하니까.”
“저야 뭐.” 종훈이 약간 부끄러워하며 웃었다. “길이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좋은걸요? 그럼 지연 신관님과 함께하는 시간도 길어지니까.”
“어머, 종훈 기사님도….”
지연이 말끝을 흐리며 미소로 화답했다. 그 미소에 종훈은 지금까지 겪었던 모든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한 순간에 소멸되는 환희를 느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종훈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상해요. 뭔가 위화감이 느껴져요. 이런 느낌, 이런 느낌을 언제 받았더라…. 아! 이레니쿠스! 이런 함정이다!”
종훈의 당황한 목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그들이 서있는 둘레로 불길이 원을 그리며 일어서더니 장막을 이루면서 완전히 에워싸고 말았다.
“화염의 장막!” 지연이 침착한 모습으로 나풀거리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걱정 말아요. 이 정도는 쉽게 처리 할 수 있어요.” 그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하, 아름다운 마법사를 데리고 나타나셨군.” 거칠고 구역질나는 바리톤 음성이 들리더니 검은 망토를 걸친 키가 큰 중년 남자가 불길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레니쿠스! 그 때 확실히 숨통을 끊어 놓았어야 했는데.” 종훈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칼을 움켜쥐었다.
“호오, 고귀한 기사 종훈. 이거 정말 오랜만이로군. 하하하, 이거,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겠는 걸? 그대의 고귀한 자비심 덕에 이 몸이 이렇게 돌아올 수 있었으니 말이지. 전보다 몇 배는 더 강해져서 말이야. 하하하하!” 이레니쿠스가 거미처럼 느물거리는 길고 가는 손가락을 마치 하프라도 연주하는 듯이 흔들어대었다. “그러니까 이제는 저 아름다운 마법사도 별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이란 말이지.”
이레니쿠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들을 에워싸고 있던 불길에서 한 줄기 섬광이 번득이며 주문을 외우고 있던 지연을 덮쳤다. 지연의 몸이 종잇장처럼 맥없이 붕 떠오르더니 종훈의 발 앞에 풀썩 쓰러졌다. 그리고 고통스러운 기침과 함께 검붉은 핏덩이를 토해내었다.
“지연 신관님!”
“괜찮아요. 쿨럭.”
지연이 연신 기침을 해대면서 억지로 웃는 얼굴을 만들어 보였다.
“이레니쿠스!” 종훈이 허리에 차고 있던 장검을 뽑아 들었다. 장검에서 파란 광채가 솟구치자 불길의 원이 마치 두려움이라도 느끼는 듯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오늘만은 내게서 자비를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아, 홀리 소드! 어떤 마법이라도 해제할 수 있다는 거룩한 무기. 크크. 하지만 내가 그 정도 대비도 하지 않았을 것 같은가?”
이레니쿠스가 비웃으며 손을 치켜 올리자 땅 속에서 시커먼 형상들이 기분 나쁜 소리를 흥얼거리며 솟아올랐다.
“트롤들!”
“자아, 어쩌실텐가? 고귀한 기사 나으리. 그대가 날 공격한다면 저 아름다운 마법사는 트롤들의 간식거리가 되고 말걸세! 자, 이 더러운 땅 귀신 트롤들아, 부드러운 고기가 저기 있다.”
이레니쿠스가 손을 휘두르자 키가 3미터는 넘어 보이는 트롤들이 일제히 지연을 향해 달려들었다. 종훈은 있는 힘껏 장검을 휘두르며 트롤들을 막았다. 그의 검이 허공을 스칠 때 마다 하얀 빛이 번득이며 트롤의 두꺼운 가죽이 예리하게 갈라졌다. 그러나 트롤은 워낙 몸집이 큰데다가 상처도 순식간에 아물었기 때문에, 종훈의 공격은 트롤을 잠시 주춤거리게 할 뿐, 이내 회복된 트롤들이 다시 덤벼들었다.
“하아, 트롤들을 먼저 상대하시겠다? 그대는 지금 나를 무시하고 있는가, 아니면 눈물겨운 사랑 때문인가?”
이레니쿠스가 야비한 웃음을 던지더니 종훈을 향해 손을 내 뻗었다. 그의 마디만 앙상한 거미가시 같은 손가락 끝에서 살아 꿈틀거리는 것 같은 안개가 뻗어 나오더니 종훈을 향해 꿈틀거리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한 모금만 호흡하더라도 치명적인 타격을 받는 사악한 마법 <지옥의 숨결>이었다. 이 치명적 안개는 인간의 체온에 반응하여 표적이 된 사람 둘레를 떠나지 않기 때문에 더욱 위험한 존재였다.
물론 평소의 종훈이었다면 홀리 소드로 얼마든지 막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종훈이 이 안개를 상대한다면 아직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지연은 트롤들의 손에 갈기갈기 찢어지고 말 것이었다. 종훈은 일단 칼을 꼿꼿이 세운 체 다음 행동을 결정하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었다.
그때 지연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들과 트롤들, 이레니쿠스를 포함한 반경 수십 미터가 한 낮의 태양보다 몇 배나 밝은 찬란한 빛의 물결로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빛의 물결이 넘실거릴 때 마다 트롤들을 하나 둘 먼지가 되어 버렸고, 지옥의 숨결은 연분홍색의 따뜻한 향기가 되어 부드럽게 흩어졌다.
“성스러운 절대 광막!” 이레니쿠스의 입에서 공포스러운 한 마디가 터져 나왔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선한 정령들과 신의 정수를 모두 소환하는 강력한 마법. 흑마법과 조금이라도 연결된 대상을 모두 중화시켜 그 존재를 소멸해 버리는 절대선의 정화. 그러나 이 마법을 소환한 사람은 그 힘을 견디지 못해 목숨을 내어 놓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백 마법 최후의 비기.
“이럴 수가 저 계집이! 아, 이럴 수가.”
이레니쿠스는 자기 몸에서 수십 년 간 연마했던 흑마법의 에너지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휘청거림도 잠시, 종훈의 홀리 소드가 섬광을 일으카며 그의 몸뚱이가 예리하게 세로로 갈라지며 장작처럼 쓰러졌다. 그렇게 이레니쿠스의 사악한 육신은 몇 번 꿈틀거리다가 마침내 회색 안개가 되어 산산히 흩어져버렸다.
이레니쿠스를 완전히 해치운 것을 확인한 종훈은 칼을 집어던지고 지연을 향해 달려갔다. 지연은 허리를 반쯤 들어 올린 체 엎드려 있었다. 그녀의 상체를 간신히 지탱하며 땅을 딛고 있는 가느다란 팔의 굴곡에서는 핏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지연 신관님!” 종훈이 지연을 붙들어 일으켰다. 이미 그녀의 몸에는 한 줌의 힘도 남아있지 않는 듯, 그의 품에 안기자마자 두 팔이 축 아래로 처지고 말았다.
“무사하셨군요.” 지연이 입가로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들릴듯 말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되었어요.”
“되긴 뭐가 되요? 난 당신을 잃을 수 없단 말이에요! 왜 그런 무리한 마법까지 쓰셨나요?”
“저도 종훈 기사님을 잃을 수 없었….”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지연의 눈이 감기며 고개가 아래로 쳐져버렸다. 종훈은 이 순간 아무 말도 입밖에 튀어나오지 않는 것이 너무 슬펐다. 수 많은 전투로 거칠어진 그의 얼굴 위로 작은 강물 두 줄기가 흘러내렸다.
♥ ♥ ♥ ♥ ♥
새벽 네 시, 아무도 없는 텅 빈 아파트. 작은 방 하나에서만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빛은 컴퓨터 모니터가 반짝이는 빛이었고, 스피커에서는 계속 똑 같은 음악이 반복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종훈은 한 손에 마우스를 움켜쥔 체 의자에 목을 기대고 잠들어 있었다. 그의 눈가에는 흐르다 말라 굳어버린 눈물 자욱이 모니터 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모니터에는 “당신의 캐릭터가 죽었습니다. 경험치와 아이템의 20%를 삭감하고 다시 시작하시겠습니까?”라는 문자가 유령처럼 둥실둥실 떠나녔다.
# by | 2008/05/03 19:24 | 예술의 향기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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