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5월 03일
종속이론을 어떻게 볼 것인가?
근대화에 대한 맑스의 입장은 종종 오해의 여지를 남긴다. 그는 근대화의 총아라고 할 수 있는 자본주의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 하였다. 그의 사회주의 혁명론에 있어서나 인간 소외론에 있어서나 자본주의는 인간을 비참하게 만드는 주범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맑스는 사회주의, 더 나아가서 공산주의를 건설 할 수 있는 결정적인 조건 역시 자본주의에서 찾았다. 또한 자본주의가 성취한 과학기술과 근대 정치기구들에 대해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따라서 맑스에게 근대화, 근대성이란 퇴니스의 그것처럼 결코 부정적인 것이 아니었다. 자본주의는 근대화의 일종의 부작용이며 그의 변증법적 역사관으로 미루어 볼 때 이러한 부작용은 어느 사회에서나 하나의 부정으로 생길 수밖에 없다. 부정은 모든 존재의 필수 요건이다. 부정은 사회주의에서도 언제든지 생겨날 수 있는 일이다.
맑스는 낙관적인 근대화론자다. 관료제의 병폐를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미신적인 중세로부터 합리적인 근대로의 해방을 강조하는 베버도 마찬가지다. 맑스나 베버가 제시한 근대화의 부정적 요소들을 확대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맑스가 아무리 자본주의를 증오하여도 그가 더 증오하는 것은 봉건제다. 결국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역시 탈근대가 아니라 근대의 연장, 혹은 근대의 최고 정점으로 파악되어야 하며 모든 것을 국가가 관리한다는 사회주의 계획경제야 말로 이성에 의한 환경의 기획과 관리(자연적 환경 뿐 아니라 사회적 환경까지 관리한다는 측면에서)의 최고 종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맑스주의 역시 서구 근대화론의 일환이며 유로센트리즘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따라서 제3세계 국가에게 자본주의의 낙관론을 유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를 선전하는 것 역시 유럽 중심주의라고 비판받을 가능성을 남겨두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종속이론은 새 영역을 일구어 낸다. 종속이론에 따르면 제3세계 등 이른바 주변부 국가들은 Core국가들과 같은 정상적인 근대화를 이룰 수 없다. 제3세계의 근대화의 주도권이 이미 핵심국가들에게 넘어간 상황에서 그들의 근대화는 어디까지나 선진국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기 마련이다. 선진국에 의해 기획되고 진행되는 근대화는 제3세계의 민중들과는 아무런 연관을 가지지 못한다. 이때 선진국의 목적은 당연히 이윤의 추구이지 3세계 민중들의 인권이 아니기 때문에 제3세계의 근대화는 불균형하게 진행된다. 즉 산업혁명의 성과는 이식되나 시민혁명의 결과는 도외시 되는 형태를 취하게 된다. 물론 형식적인 민주주의적 제도나 기구들은 존재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요식에 불과하고 그것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별도의 제도 역시(국가보안법등) 온존하게 된다. 그런데 선진국이 이들 3세계 국가에게 요구하는 산업혁명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하청 업체 내지는 재고 처리 시장에 불과하기 때문에 절대 그 선을 넘을 수 없는 산업구조로 재편되게 된다. 즉 선진국의 경제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근대화된 산업기술화가 진행되는 것이다.
따라서 종속이론에 따르면 제3세계에 있어서 근대화의 가장 중요한 계기는 바로 이 왜곡된 탯줄을 잘라내는 것이다. 이 왜곡된 탯줄에 달려 있는 한 3세계의 근대화의 정상적 진행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맑스에 따르면 온전한 근대화의 성과 없이, 즉 대규모 공장제 산업혁명과 근대적 민주정치의 토양 없이 사회주의 혁명을 이룬다는 것은 단지 공상이다. 따라서 제3세계에게 사회주의 역시 대안이 될 수 없다.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모두 서양의 근대화된 형태의 다양한 버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결국 종속이론에 입각한 제3세계의 다양한 좌파 정권들이 아무리 사회주의라는 슬로건을 내 걸고 있다 하더라도(쿠바, 니카라구아, 북한, 베트남, 중국 등등) 맑스는 그들 나라를 결코 사회주의 국가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사회주의는 단지 경제적 정치적 제도가 아니라 일종의 고도화된 근대성의 개념이기 때문이고, 이들 나라의 근대화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음은 너무도 명백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바라볼 경우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윌슨주의든 맑스주의든 모두 서구 중심의 사고방식이며 서구 중심의 근대화라는 다소 편협한 결론이 도출될 수 있고, 그렇게 될 경우 종속이론이 쉽게 결합할 수 있는 사상은 너무도 당연하게도 민족주의이다. 따라서 종속이론에 입각한 다양한 버전의 근대화론이 아무리 좌파적 색채를 가진다 하더라도 이는 궁극적으로 민족주의이지 결코 사회주의가 아닐 것이다. 바로 이 점을 염두에 두어야 북한이나 베트남 같은 사회를 올바로 이해 할 수 있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소련 역시 성격이 다른 또 하나의 유럽 중심주의 제국주의 종주국에 불과한 것이며 이들 중 누구를 따른다 할지라도 정상적 자본주의, 혹은 정상적인 사회주의로 성장할 가능성은 없다는 것이다. 임마누엘 월러스틴은 이에 근거하여 미국과 소련을 똑 같이 제국주의의 다른 버전으로 바라보는 극단적 종속이론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사정이 이렇다 하여 3세계 민중들이 근대화에 대한 전면적 반대로 나타나는 편향은 어떻게 제거할 것인가? 이미 이슬람 근본주의에서 보여지는 노골적인 전근대화 현상에 대해 제국주의의 종속을 벗어나 민족에 알맞은 삶을 찾았다며 축하를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화의 입장에서 이들의 전근대화에 대해 비판해야 할 것인가? 실제 전세계적인 관점에서는 이는 우려할만한 상황이다. 서양인들이 근대화를 통해 이룩해 낸 것들은 단지 서구 중심적인 이유로 배척될만한 것들이 아니며, 종속으로 부터의 탈피라는 이유만으로 편협한 민족주의와 대체될만한 성질의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정도 수준의 편협함은 굳이 복잡한 종속이론을 들먹일 필요도 없이 구한말 위정척사파의 늙은 선비들의 눈에도 충분히 보였던 사실이다.
가치란 절대적일까? 아니면 상대적일까? 아무래도 종속 이론가들과 그 지지자들은 지나치게 가치를 민족 상대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자본주의의 발달과 그것이 가져온 사상적인 그리고 정치적인 근대화는 분명 범인류적으로 가치있는 것임을 지나치게 숨기려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속이론이 나름의 가치를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은 지배 피지배, 착취 피 착취의 대립을 국가내의 계급들이 아니라 국가와 국가간의 민족과 민족간의 관계로 확장시켜 바라볼 수 있게 해주었다는 것일 것이다.
맑스는 낙관적인 근대화론자다. 관료제의 병폐를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미신적인 중세로부터 합리적인 근대로의 해방을 강조하는 베버도 마찬가지다. 맑스나 베버가 제시한 근대화의 부정적 요소들을 확대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맑스가 아무리 자본주의를 증오하여도 그가 더 증오하는 것은 봉건제다. 결국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역시 탈근대가 아니라 근대의 연장, 혹은 근대의 최고 정점으로 파악되어야 하며 모든 것을 국가가 관리한다는 사회주의 계획경제야 말로 이성에 의한 환경의 기획과 관리(자연적 환경 뿐 아니라 사회적 환경까지 관리한다는 측면에서)의 최고 종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맑스주의 역시 서구 근대화론의 일환이며 유로센트리즘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따라서 제3세계 국가에게 자본주의의 낙관론을 유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를 선전하는 것 역시 유럽 중심주의라고 비판받을 가능성을 남겨두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종속이론은 새 영역을 일구어 낸다. 종속이론에 따르면 제3세계 등 이른바 주변부 국가들은 Core국가들과 같은 정상적인 근대화를 이룰 수 없다. 제3세계의 근대화의 주도권이 이미 핵심국가들에게 넘어간 상황에서 그들의 근대화는 어디까지나 선진국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기 마련이다. 선진국에 의해 기획되고 진행되는 근대화는 제3세계의 민중들과는 아무런 연관을 가지지 못한다. 이때 선진국의 목적은 당연히 이윤의 추구이지 3세계 민중들의 인권이 아니기 때문에 제3세계의 근대화는 불균형하게 진행된다. 즉 산업혁명의 성과는 이식되나 시민혁명의 결과는 도외시 되는 형태를 취하게 된다. 물론 형식적인 민주주의적 제도나 기구들은 존재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요식에 불과하고 그것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별도의 제도 역시(국가보안법등) 온존하게 된다. 그런데 선진국이 이들 3세계 국가에게 요구하는 산업혁명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하청 업체 내지는 재고 처리 시장에 불과하기 때문에 절대 그 선을 넘을 수 없는 산업구조로 재편되게 된다. 즉 선진국의 경제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근대화된 산업기술화가 진행되는 것이다.
따라서 종속이론에 따르면 제3세계에 있어서 근대화의 가장 중요한 계기는 바로 이 왜곡된 탯줄을 잘라내는 것이다. 이 왜곡된 탯줄에 달려 있는 한 3세계의 근대화의 정상적 진행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맑스에 따르면 온전한 근대화의 성과 없이, 즉 대규모 공장제 산업혁명과 근대적 민주정치의 토양 없이 사회주의 혁명을 이룬다는 것은 단지 공상이다. 따라서 제3세계에게 사회주의 역시 대안이 될 수 없다.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모두 서양의 근대화된 형태의 다양한 버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결국 종속이론에 입각한 제3세계의 다양한 좌파 정권들이 아무리 사회주의라는 슬로건을 내 걸고 있다 하더라도(쿠바, 니카라구아, 북한, 베트남, 중국 등등) 맑스는 그들 나라를 결코 사회주의 국가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사회주의는 단지 경제적 정치적 제도가 아니라 일종의 고도화된 근대성의 개념이기 때문이고, 이들 나라의 근대화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음은 너무도 명백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바라볼 경우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윌슨주의든 맑스주의든 모두 서구 중심의 사고방식이며 서구 중심의 근대화라는 다소 편협한 결론이 도출될 수 있고, 그렇게 될 경우 종속이론이 쉽게 결합할 수 있는 사상은 너무도 당연하게도 민족주의이다. 따라서 종속이론에 입각한 다양한 버전의 근대화론이 아무리 좌파적 색채를 가진다 하더라도 이는 궁극적으로 민족주의이지 결코 사회주의가 아닐 것이다. 바로 이 점을 염두에 두어야 북한이나 베트남 같은 사회를 올바로 이해 할 수 있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소련 역시 성격이 다른 또 하나의 유럽 중심주의 제국주의 종주국에 불과한 것이며 이들 중 누구를 따른다 할지라도 정상적 자본주의, 혹은 정상적인 사회주의로 성장할 가능성은 없다는 것이다. 임마누엘 월러스틴은 이에 근거하여 미국과 소련을 똑 같이 제국주의의 다른 버전으로 바라보는 극단적 종속이론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사정이 이렇다 하여 3세계 민중들이 근대화에 대한 전면적 반대로 나타나는 편향은 어떻게 제거할 것인가? 이미 이슬람 근본주의에서 보여지는 노골적인 전근대화 현상에 대해 제국주의의 종속을 벗어나 민족에 알맞은 삶을 찾았다며 축하를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화의 입장에서 이들의 전근대화에 대해 비판해야 할 것인가? 실제 전세계적인 관점에서는 이는 우려할만한 상황이다. 서양인들이 근대화를 통해 이룩해 낸 것들은 단지 서구 중심적인 이유로 배척될만한 것들이 아니며, 종속으로 부터의 탈피라는 이유만으로 편협한 민족주의와 대체될만한 성질의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정도 수준의 편협함은 굳이 복잡한 종속이론을 들먹일 필요도 없이 구한말 위정척사파의 늙은 선비들의 눈에도 충분히 보였던 사실이다.
가치란 절대적일까? 아니면 상대적일까? 아무래도 종속 이론가들과 그 지지자들은 지나치게 가치를 민족 상대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자본주의의 발달과 그것이 가져온 사상적인 그리고 정치적인 근대화는 분명 범인류적으로 가치있는 것임을 지나치게 숨기려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속이론이 나름의 가치를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은 지배 피지배, 착취 피 착취의 대립을 국가내의 계급들이 아니라 국가와 국가간의 민족과 민족간의 관계로 확장시켜 바라볼 수 있게 해주었다는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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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 2008/05/03 19:10 | 뉴레프트/탈근대사상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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