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5월 07일
새로움은 곧 진보인가, 진보는 곧 새로움인가?
20세기 중반 이후 나타난 사회 변동이론의 가장 핵심적인 화두는 역시 다음의 두가지로 압축되는 것 같다. 하나는 사회가 정말 어떤 순서에 따라 역사적으로 변화 하는가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사회의 변동의 시컨스상 뒤의 것이 반드시 앞의 것 보다 우월하다고 말할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물론 스펜서나 맑스는 사회의 변동에 일정한 순서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뒤의 단계는 반드시 앞의 단계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즉 인류 역사의 진보와 유토피아적 희망에 대해 의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20세기 들어서 두 차례의 큰 세계 대전과 온갖가지 근대화의 재앙을 겪은 뒤 많은 사람들이 인류의 진보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따라서 사회 변동을 보는 눈도 크게 세가지로 갈라졌다.
1)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점차 진보된다는 것에 대한 믿음을 여전히 간직한 사람들. 신 진화론자. 2)근대화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며 근대화가 반드시 더 낳은 단계로의 진보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포스트 모더니스트들. 3)이 둘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하며 근대화의 성과를 계승하면서 그 부정을 극복하는 길을 모색하는 사람들. Agency Theory.
신 진화론자들의 주장은 물론 맑스나 스펜서와 같은 고전적인 진화론자의 주장과는 다르다. 렌스키로 대표되는 신 진화론자들은 사회 전체의 등급보다는 사회의 각 부분부분의 수준에 더 많은 신경을 쓴다. 즉 고전적 진화론자의 주요 관심이 이 사회가 인류 사회의 진화 단계에서 몇 번째 단계에 와 있는가 하는데 있었다면 신 진화론자의 주요 관심은 이 사회의 어느 부분이 다른 부분들에 비해 어느 정도 진화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사회 전체의 등급매기기는 아무런 의미가 없고, 고전적 진화론자가 자주 빠져들었던 함정인 유로센트리즘의 위험도 적다. 고전적 진화론자들은 자신들의 근대 산업사회가 인류의 필수적인 단계중 하나인 것으로 간주하고 아직 거기에 도달하지 못했던 나머지 지역의 사회들을 모조리 야만으로 간주했던 전과가 있었지만 신 진화론자들은 이런 오류를 피해갈수 있는 여지들을 남겨 두었다. 렌스키는 자랑스럽게 신 진화주의는 사회에 대한 도덕적 단죄의 오류를 피해갈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물론 A라는 사회가 B라는 사회보다 산업이라는 영역에서는 더 많이 진보했고, B라는 사회는 그 대신 종교라는 영역에서 더 많이 진보했다라고 말하기는 쉽고, 이는 얼핏보면 대단히 평등해 보인다. 그러나 과연 그럴 것인가? 사회의 각 영역에는 보다 치명적인 영역이 있고, 혹은 보다 부수적인 영역이 있는 것은 아닐까? 따라서 치명적인 영역에서의 진보가 결국 사회 전체의 진보를 이끄는 것은 아닐까? 혹은 보다 치명적인 영역에서 진보를 이룬 사회가 그렇지 않은 사회에 비해 더 진보되었다라고 궁극적으로는 고전적 진화론처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질문에 신 진화주의는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난점을 지닌다. 그리고 마침내는 기술-경제적 영역이 다른 영역의 변화를 견인한다는 거의 맑스주의에 가까운 결론에 빠져들고 만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술-경제적 영역이 사회 전체의 수준을 결정한다는 편향에는 빠지지 않으려고 상당히 노력한 흔적을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출발점은 상당히 달랐으나 도착점은 고전적 진화주의와 거의 비슷해 진 결과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의 서로 다른 속도와 방향의 진화를 인정함으로써 인류의 지평을 넓히고 고전적 진화주의가 잘 빠져들던 결정론적인 오류를 많이 극복 할 수 있게 했다는 데에 신 진화주의는 나름의 의의가 있다.
진화주의가 다양한 영역에서의 근대화를 주장함으로써 근대화 담론의 폭을 넓힌 반면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근대화의 성과를 결정적으로 부정한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근대화의 대가를 차이의 소멸로 바라본다. 물론 이 점은 고전적 진화론자, 특히 헤겔이나 맑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헤겔이나 맑스는 이 보편성의 확대를 매우 고무적인 현상으로 여긴 반면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개별적인 차이의 소멸로 바라보며 매우 부정적으로 간주한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고전적 진화론자와 같은 현상을 단지 다르게 말한 것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물론 차이의 소멸, 점점 정교화되고 조직화되는 사회 특히 근대 국가에 의한 개인의 통제, 개성의 상실등등은 상당히 고통스러운 일이 될 수도 있고 이러한 점들은 매우 날카로운 지적이라고 할수 있다. 또 이러한 지적들은 근대화의 신화에 상당한 규모의 균열을 내었으며 그 결과 근대화의 성과에 만족해서 자아도취 상태에 빠질 수도 있었던 인류에게 강력한 경고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아나키스트가 아니라는 점은 아이러닉 하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계속해서 보편화에 대항하는 차이만을 강조할뿐, 이 차이가 극대화 되었을 경우 나타날 수 있는 수 많은 혼란과 고통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체계적으로 관리되는 고도의 합리적 기구를 부정하면서도 아나키즘을 거부한다면 이는 개개인이 모두 보편적 이성을 가지고 있다는 칸트적인 믿음에 기초하지 않고서는 지지될 수 없는 이론이다. 그런데 포스트 모더니즘은 근대화의 각종 부작용의 원인을 바로 이성과 합리성에서 찾는다. 결국 포스트모더니즘은 하나의 안티로서만 가치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행위자 이론은 위의 두 가지 편향을 모두 넘어 서려고 한다. 기든스나 후기 하버마스의 사상에서 보이듯이 여기에서 주요 관심사는 사회적 행위자, 즉 사람이다.(이는 개인일수도 있고 집단일수도 있다.) 그런데 이 행위자의 자의적은 행위에 사회를 맡기는 것도 반대하고 그렇다고 이른바 합리화의 정점인 근대적 국가기구의 깔끔한 통제에 사회를 맡기는 것도 반대한다. 행위자의 자의적 행위에 사회를 맡긴다면 사회의 변동은 어떤 단계도 어떤 진화도 있을수 없는 그야말로 예측불허의 변동을 하게 될 것이다(이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그리고 합리적 총괄기구에 사회를 맡긴다면 체계적이고 단계적인 직선 방향의 진보가 차례로 이루어 질것이다(이는 한 번도 이루어진 적이 없다). 행위자 이론은 이 모두를 거부한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진화론자다. 인류 사회는 어떤 법칙적인 단계에 따라 진화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단계는 철의 법칙이 아니다. 법칙과 행위자가 만나야 성립되는 것이다.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는것과 같은 사회 변동의 법칙과 단계는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그 법칙은 어떤 상황에서 사람들이 그렇게 행동한다면이라는 단서를 달고 있다. 사회 변동의 그 필연을 이룰 것인지의 여부가 사회적 행위자, 즉 사람의 결단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회에는 그 변동을 이루자는 사람과 그러지 말자는 사람들이 공존할 것이며 이들은 협상을 통하여 서로의 세력을 넓혀 갈 것이다. 그러나 그 법칙은 사회적 행위자들과 협상해야만 성립되는 법칙이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모든 사회적 행위자들은 자신을 통제하려는 근대화의 새장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완전히 자의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그들의 행동의 폭은 자신이 협상할수 있는 상대방, 즉 철의 법칙의 테두리 안에 있다.
이렇게 행위자 이론은 나름의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위자 이론 내부에서도 결국은 분열이 일어날 수 밖에 없다. 법칙이 행위자와 협상해야만 법칙으로 성립한다는 쪽에 무게중심을 주는 쪽이라면 결국은 개인주의나 자원론으로 빠질 수밖에 없으며, 개인적 행위자가 계속 철의 법칙과 협상해야 자유로운 개인으로 남을 수 있다는 쪽을 강조하는 쪽이라면 그들은 결국 진화론에 빠지고 말 것이다. 혹은 하버마스의 경우처럼 개인, 체계 어느 쪽에도 무게중심을 두지 않고 단지 협상(소통) 자체에만 무게중심을 두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오히려 형식주의라는 비판을 받을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사회가 마치 독자적인 생명체인 양 스스로 진보한다고, 그리고 그 진보의 방향은 반드시 인간의 행복을 증진 할 것이라고 믿는 순진함과 인류의 진보를 부정하는 비관론의 양 극단을 모두 극복 할 수 있는 가능성이 행위자 이론에 남겨져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20세기 들어서 두 차례의 큰 세계 대전과 온갖가지 근대화의 재앙을 겪은 뒤 많은 사람들이 인류의 진보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따라서 사회 변동을 보는 눈도 크게 세가지로 갈라졌다.
1)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점차 진보된다는 것에 대한 믿음을 여전히 간직한 사람들. 신 진화론자. 2)근대화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며 근대화가 반드시 더 낳은 단계로의 진보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포스트 모더니스트들. 3)이 둘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하며 근대화의 성과를 계승하면서 그 부정을 극복하는 길을 모색하는 사람들. Agency Theory.
신 진화론자들의 주장은 물론 맑스나 스펜서와 같은 고전적인 진화론자의 주장과는 다르다. 렌스키로 대표되는 신 진화론자들은 사회 전체의 등급보다는 사회의 각 부분부분의 수준에 더 많은 신경을 쓴다. 즉 고전적 진화론자의 주요 관심이 이 사회가 인류 사회의 진화 단계에서 몇 번째 단계에 와 있는가 하는데 있었다면 신 진화론자의 주요 관심은 이 사회의 어느 부분이 다른 부분들에 비해 어느 정도 진화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사회 전체의 등급매기기는 아무런 의미가 없고, 고전적 진화론자가 자주 빠져들었던 함정인 유로센트리즘의 위험도 적다. 고전적 진화론자들은 자신들의 근대 산업사회가 인류의 필수적인 단계중 하나인 것으로 간주하고 아직 거기에 도달하지 못했던 나머지 지역의 사회들을 모조리 야만으로 간주했던 전과가 있었지만 신 진화론자들은 이런 오류를 피해갈수 있는 여지들을 남겨 두었다. 렌스키는 자랑스럽게 신 진화주의는 사회에 대한 도덕적 단죄의 오류를 피해갈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물론 A라는 사회가 B라는 사회보다 산업이라는 영역에서는 더 많이 진보했고, B라는 사회는 그 대신 종교라는 영역에서 더 많이 진보했다라고 말하기는 쉽고, 이는 얼핏보면 대단히 평등해 보인다. 그러나 과연 그럴 것인가? 사회의 각 영역에는 보다 치명적인 영역이 있고, 혹은 보다 부수적인 영역이 있는 것은 아닐까? 따라서 치명적인 영역에서의 진보가 결국 사회 전체의 진보를 이끄는 것은 아닐까? 혹은 보다 치명적인 영역에서 진보를 이룬 사회가 그렇지 않은 사회에 비해 더 진보되었다라고 궁극적으로는 고전적 진화론처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질문에 신 진화주의는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난점을 지닌다. 그리고 마침내는 기술-경제적 영역이 다른 영역의 변화를 견인한다는 거의 맑스주의에 가까운 결론에 빠져들고 만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술-경제적 영역이 사회 전체의 수준을 결정한다는 편향에는 빠지지 않으려고 상당히 노력한 흔적을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출발점은 상당히 달랐으나 도착점은 고전적 진화주의와 거의 비슷해 진 결과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의 서로 다른 속도와 방향의 진화를 인정함으로써 인류의 지평을 넓히고 고전적 진화주의가 잘 빠져들던 결정론적인 오류를 많이 극복 할 수 있게 했다는 데에 신 진화주의는 나름의 의의가 있다.
진화주의가 다양한 영역에서의 근대화를 주장함으로써 근대화 담론의 폭을 넓힌 반면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근대화의 성과를 결정적으로 부정한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근대화의 대가를 차이의 소멸로 바라본다. 물론 이 점은 고전적 진화론자, 특히 헤겔이나 맑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헤겔이나 맑스는 이 보편성의 확대를 매우 고무적인 현상으로 여긴 반면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개별적인 차이의 소멸로 바라보며 매우 부정적으로 간주한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고전적 진화론자와 같은 현상을 단지 다르게 말한 것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물론 차이의 소멸, 점점 정교화되고 조직화되는 사회 특히 근대 국가에 의한 개인의 통제, 개성의 상실등등은 상당히 고통스러운 일이 될 수도 있고 이러한 점들은 매우 날카로운 지적이라고 할수 있다. 또 이러한 지적들은 근대화의 신화에 상당한 규모의 균열을 내었으며 그 결과 근대화의 성과에 만족해서 자아도취 상태에 빠질 수도 있었던 인류에게 강력한 경고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아나키스트가 아니라는 점은 아이러닉 하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계속해서 보편화에 대항하는 차이만을 강조할뿐, 이 차이가 극대화 되었을 경우 나타날 수 있는 수 많은 혼란과 고통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체계적으로 관리되는 고도의 합리적 기구를 부정하면서도 아나키즘을 거부한다면 이는 개개인이 모두 보편적 이성을 가지고 있다는 칸트적인 믿음에 기초하지 않고서는 지지될 수 없는 이론이다. 그런데 포스트 모더니즘은 근대화의 각종 부작용의 원인을 바로 이성과 합리성에서 찾는다. 결국 포스트모더니즘은 하나의 안티로서만 가치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행위자 이론은 위의 두 가지 편향을 모두 넘어 서려고 한다. 기든스나 후기 하버마스의 사상에서 보이듯이 여기에서 주요 관심사는 사회적 행위자, 즉 사람이다.(이는 개인일수도 있고 집단일수도 있다.) 그런데 이 행위자의 자의적은 행위에 사회를 맡기는 것도 반대하고 그렇다고 이른바 합리화의 정점인 근대적 국가기구의 깔끔한 통제에 사회를 맡기는 것도 반대한다. 행위자의 자의적 행위에 사회를 맡긴다면 사회의 변동은 어떤 단계도 어떤 진화도 있을수 없는 그야말로 예측불허의 변동을 하게 될 것이다(이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그리고 합리적 총괄기구에 사회를 맡긴다면 체계적이고 단계적인 직선 방향의 진보가 차례로 이루어 질것이다(이는 한 번도 이루어진 적이 없다). 행위자 이론은 이 모두를 거부한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진화론자다. 인류 사회는 어떤 법칙적인 단계에 따라 진화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단계는 철의 법칙이 아니다. 법칙과 행위자가 만나야 성립되는 것이다.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는것과 같은 사회 변동의 법칙과 단계는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그 법칙은 어떤 상황에서 사람들이 그렇게 행동한다면이라는 단서를 달고 있다. 사회 변동의 그 필연을 이룰 것인지의 여부가 사회적 행위자, 즉 사람의 결단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회에는 그 변동을 이루자는 사람과 그러지 말자는 사람들이 공존할 것이며 이들은 협상을 통하여 서로의 세력을 넓혀 갈 것이다. 그러나 그 법칙은 사회적 행위자들과 협상해야만 성립되는 법칙이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모든 사회적 행위자들은 자신을 통제하려는 근대화의 새장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완전히 자의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그들의 행동의 폭은 자신이 협상할수 있는 상대방, 즉 철의 법칙의 테두리 안에 있다.
이렇게 행위자 이론은 나름의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위자 이론 내부에서도 결국은 분열이 일어날 수 밖에 없다. 법칙이 행위자와 협상해야만 법칙으로 성립한다는 쪽에 무게중심을 주는 쪽이라면 결국은 개인주의나 자원론으로 빠질 수밖에 없으며, 개인적 행위자가 계속 철의 법칙과 협상해야 자유로운 개인으로 남을 수 있다는 쪽을 강조하는 쪽이라면 그들은 결국 진화론에 빠지고 말 것이다. 혹은 하버마스의 경우처럼 개인, 체계 어느 쪽에도 무게중심을 두지 않고 단지 협상(소통) 자체에만 무게중심을 두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오히려 형식주의라는 비판을 받을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사회가 마치 독자적인 생명체인 양 스스로 진보한다고, 그리고 그 진보의 방향은 반드시 인간의 행복을 증진 할 것이라고 믿는 순진함과 인류의 진보를 부정하는 비관론의 양 극단을 모두 극복 할 수 있는 가능성이 행위자 이론에 남겨져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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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 2008/05/07 00:26 | 철학, 사회학 탐구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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