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 비판-높은 보상과 허약한 위상

학교 교사직은 1998년 이래 벌써 10년째 최고로 선망 받는 직종을 유지하고 있다. 사범대학에 편입학하려는 인문, 자연계학생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교육대학에는 고등학교 전교 1,2등 했다는 신입생들로 득실거린다. 아직도 70년대에나 통할법한피해자적 관점, 즉, 교사가 다른 직종에 비해 열악한 사회, 경제적 지위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교사들이 더러있지만, 객관적인 현실은 그 반대임을 보여준다. 너도나도 공무원 되기를 욕망하는 것이 거의 사회문제로까지 지적되는 마당에,교사가 공무원 중 가장 좋은 대우를 받고 있음은 너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식시장에서 특별한 이유 없는 상승장이 지나치게 오래 계속되면 오히려 불안해 지듯이 갑작스럽게 올라간 교사의 사회, 경제적지위가 10년이 넘도록 계속되니 이제 그것도 슬슬 불안해 진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지위가 계속 유지될지 미지수기 때문이다.오히려 최근 교사의 역할은 여러 가지 조건에서 교사의 지위가 현저히 낮았던 70년대에 비해 도리어 더 취약해지고 열악해졌다.모든 지표는 하락장을 가리키는데 상승장이 유지되고 있다면 이는 대폭락의 전조일수도 있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하락의 조짐이며, 교사의 사회적 위상을 약하게 만들고 있을까? 그 첫번째 원인은 당연히 비대해진 사교육기관, 특히 학원 기관화다. 학원은 90년대까지만 해도 일부 기업화된 재수학원을 제외하면 학교 진도에 맞춰 시험 준비나 해주던문자 그대로 보충 학습소며, 문자 그대로 과외였다. 그랬던 학원이 이제는 나름의 독자적인 교육과정을 갖춘 하나의 기관이 되었다.EBS과외에서 그 조짐이 보이던 학원의 기관화는 이제 학원이 자신의 표준을 받아들이도록 학교에게 강요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학부모에게 학교는 공교육기관이고 학원은 사교육기관으로, 즉 모두 기관으로서 병렬관계로 여겨진다. 아니 학원을 더 신뢰하고 있다.학교에는 미덥지 않은 학교 교사가 있고, 학원에는 확실한 학원 강사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학생들은 둘 다 “선생님”으로부른다. 그들은 학교 교사와 학원 강사를 “선생님”으로 여기는 정도에서 아무런 차등이 없다. 다만 학교는 공식적인 졸업장을발급하는 기관이며, 매우 저렴하며, 학원과 달리 쉽게 옮겨다닐 수 없는 곳이라는 점에서만 다를 뿐이다. 학원은 직접 돈 주고구입한 교육이며, 학교는 세금을 통해 간접적으로 구입한 교육일 뿐이다.

 

두번째 원인은 사회 전반적으로 “선생님”이 그 종류와 양이 엄청나게 늘어났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까지 여러 교육기관,사회복지기관, 문화기관, 대안교육기관, 심지어는 보육시설이나 학습지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선생님들을 만난다. 그렇게 만나게되는 선생님들은 전문성과 열정의 측면에서 학교 교사들보다 나았으면 나았지 결코 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학교 교사는 가히“선생님 인플레이션”이라 부를 수 있는 이 홍수 속에 단지 하나의 섬에 불과하다. 국어사전에 “선생님: 학교 교사나 의사를 높여부르는 말”이라고 명기되었던 시절은 이미 지나가 버렸고, 다시 돌아오기도 힘들 것 같다.

 

마지막으로, 가장 강력한 그러나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 원인은 국가 권력이 유연화되고 있는 글로벌라이제이션이다. 세계대전의 비극을겪으면서 여러 국가들은 전쟁이 단지 당사국들만의 사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평화는 국가 수준을 넘어서는 초국적 협동과조정을 통해 유지될 수 있는 것이며, 이를 위한 초국적 기구를 요구한다. 이러한 상황은 21세기 들어 더욱 확대되었다. 자본의세계화와 노동의 이주가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분쟁조절, 평화유지는 물론 환경, 생태, 보건 그리고 최근에는 경제, 문화, 교육에이르기까지 국가수준을 훌쩍 넘어버린 초국적인 사안들이 빈번하게 나타났다. 이러한 초국적 사안들의 빈번화는 당연히 전지구적이면서국가와 민족을 초월한 인류 보편적인 가치들을 증가시켰다. 왕왕 이러한 초국적, 보편적 가치는 개별 국가의 이해관계와 충돌하기도하는데, 이때 개별국가가 도덕적 정당성을 유지하기가 어렵다.

 

애초에 학교가 개인을 위한 기관이 아니라 공동체의 문화와 가치를 전수하는 사회화 기관이었음을 명심하자. 적어도 20세기 까지는 그전수의 주체가 되는 공동체는 당연히 국가였고, 전수해야 할 가치와 문화는 그 나라의 것이었음을 명심하자. 그런데, 전 지구적가치들의 증가는 민족국가 고유의 특수한 가치들의 영역을 좁히며, 전수해야 할 가치와 문화를 담고 있는 공동체로서 국가의 위상을낮춘다. 교육 내용은 국경을 넘어 점점 보편화 되어가며, 따라서 이를 감당하는 주체로서 국가의 위상은 점점 축소된다. 이렇게되면 사실상 국가의 후원을 받아 독점적 교육기관으로서 지위를 누려온 학교의 위상이 추락하거나 상대화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이제 교육은 다른 나라 혹은 국제기관이 제공하는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서도 받을 수 있는 것이 되었다. 다행히(?) 우리나라는비영어권 국가라서 이러한 위협이 상대적으로 약하게 느껴지지만 갈수록 향상(?)되어가는 젊은 세대의 영어능력을 감안하면 마냥낙관할 수 없다. 학교의 기능은 빠른 속도로 초국적 학습 네트워크에게 이양되어 갈 것이며, 이미 그렇게 되고 있다.

 

이렇게 여러 가지 국내외적인 주변 정황은 학교가 독점적 교육기관으로서 위상을 분명히 하고 있었던 7,80년대에 비해 학교 교사의위상을 훨씬 더 취약하게 만들고 있다. 안타깝게도 교사의 지위는 권위주의적 정권하에서 더 튼튼하고 높았던 것이며, 비록 박봉에시달렸을지언정 교사에 대한 신뢰와 존경은 그 시절에 더 확고했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그 시절을 그리워할 필요는 없다.권위주의 정권하에서는 학교, 교사뿐 아니라 관공서 공무원의 위세도 등등했으니까. 그것은 교사의 지위가 튼튼한 것이 아니라 국가의권력이 강했던 것이니까.

어쨌든 2008년 현재 교사의 사회, 경제적 지위는 7,80년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높아져 있으며, 그 위상은 비교도 되지않을 만큼 취약한 상황이다. 취약한 위상과 높은 보상, 이것은 명백한 불균형이다. 그리고 근대사회는 이런 불균형을 용납하지않는다. 필경 “보이는 손”이 작동해서 이 불균형을 바로잡을 것이다. 이제 잔치는 끝나가고 있다.

 

문제는 이 불균형이 어떤 방향으로 바로잡히는가 하는 것이다. 다음의 두 방향 밖에 없을 것이다. 1) 교사의 위상에 비해 지나치게높은, 혹은 높다고 여기는 보상을 삭감한다. 2) 교사가 보상에 걸맞게 위상을 높이도록 한다. 상식적으로 1)보다는 2)가바람직하다. 그러나 의외로 2)보다는 차라리 1)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심지어 그 중에는 교사들도 상당수 있다. 편의상이런 교사들을 ‘소시민형’이라고 부르자. 그리고 2)의 길을 선호하는 교사를 ‘전문직형’이라고 부르자.

 

‘소시민형’ 교사들은 필경 전문 교육자로서의 자부심보다는 안정된 직장인으로서의 안락감을 선택하는 그런 교사들일 것이다. 즉지금보다 보상이 삭감되는 한이 있더라도, 더 많은 일과 책임은 걸머질 수는 없다는 재빠른 계산을 하고 있는 소시민들일 것이다.안타깝게도 현장에는 전문직형 보다는 소시민형 교사들이 많아 보인다. 그 이유는 전문직형의 길을 선택할 경우 걸머져야 할 책임의무게 때문이다. 전문직형을 선택하게 되면 보상은 지금대로 유지되거나 올라가겠지만, 전문직다운 소양과 지식, 끊임없는 자기 연찬과성장, 아이들 인권의 수호, 필요하다면 투쟁까지도 마다하지 않는 단단한 각오 등 거의 무제한의 책임이 요구될 것이다. 게다가금전적 보상보다는 존경과 미학적 만족이라는 고차적 가치관을 받아들여야 하는 도덕적 전환까지도 요구된다. 그러니 상당수의 교사들은이 어려운 길을 선택하느니 차라리 노동시간이 조금 길어지고, 임금수준이 조금 줄어들더라도, 책임을 회피하는 길을 선택하는것이다. 이것은 에리히 프롬이 말한 대중들의 본능적인 “자유에의 공포”를 감안한다면 하등 놀랄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이렇게소시민들이, 소시민형 문화가 팽배한 교직사회가 전문직스러운 대우를 받고 있다면, 교사보다 더 높은 대우를 받고 있는 의사,변호사는 내버려두고 왜 하필 교사에게 사회적 질타와 질시가 쏟아지는지 그 이유도 명백해진다. 의사, 변호사는 흥망성쇠의 책임을자신이 걸머진다. 의사, 변호사에게 요구되는 책무성은 단지 공무원 수준의 책무성만 주어지는 교사와 비할 바가 아닌 것으로여겨진다. 간단히 말하면 사회 전반적으로 의사, 변호사가 교사보다 훨씬 힘들고 불안정한 조건에서 일하고 있다고 여긴다.

 

물론 많은 교사들은 자신을 소시민형 교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전문직형의 길을 선뜻 선택하지도 않는다. 안타깝게도제3의 길은 보이지 않는다. 지금의 모습은 자칫하면 교사들이 “책임은 노동자 수준으로, 대우는 전문직 수준으로”를 외치고 있는것으로 보이기 십상이다. 이런 요구는 당연히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며, 교사들이 전문직 수준의 소양과 지식을 갖추고 있으며, 그수준의 책임을 걸머질 태세와 능력이 있음을 스스로 입증하지 않는다면, 일반직 노동자들에게 가해지고 있는 이른바 유연화,구조조정, 즉 비정규직화 등의 고용 압박이 사회적 질시와 선동과 함께 압박해 올 것이다.

 

우리는 “전문직형”의 길을 선택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전문직은 지난달에 필자가 이미 밝혔듯이 profession이라는의미로 전문가라는 의미의 expert와 의미가 다르다. 전문가는 주어진 과업의 절차와 방법에 정확히 숙달되어 있을 뿐이지만,전문직은 그 과업의 목적 자체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그것에 따라 절차와 방법을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다. 전문가가 참고하는대상은 규정집과 매뉴얼이지만, 전문직이 참고하는 대상은 구체적인 상황이다. 전문가는 이론은 없이 방법에만 숙달되어 있지만,전문직은 방법을 적용하면서 새로운 이론을 구성한다. 따라서 전문직으로서 교사는 이미 결정된 교육내용, 교육방법을 충실히 재현하는대신, 학생들의 구체적인 상황과 자신의 철학에 따라 새로운 교육내용, 교육방법을 실천을 통해 형성해야 한다. 요컨대 교사는교육학의 소비자가 아니라 교육학의 생산자다.

물론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다. 교사가 교육학의 생산자는커녕, 기성 교육학의 충실한 소비자 노릇만 그나마 성실한 교사 축에 들 수있는 것이 현실이다. 교사의 책상에서 참고서, 교과서 외에 보다 심층적이고 학술적인 전문서적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그러나 실제 많은 교사들은 학습하고 연구하고픈 의욕이 있으며, 이것을 가로막는 각종 장벽에 좌절감을 경험하고 있다. 교원노조와교직단체는 바로 이런 장벽을 제거하고 교사들의 학습과 연구를 지원하는 든든한 배경이 되어주어야 할 것이다. 또한 교사들은자신들을 교육학의 생산자로 재인식하고 이를 실천 속에서 입증해야 할 것이다. 이 길만이 교사를 단순 노무직으로 격하하려는 각종구조조정 음모를 물리치고, 잃어버린 사회적 위상과 신뢰를 다시 찾을 수 있는 길이 될 것이다.

by 부정변증법 | 2008/05/07 00:27 | 교단 일기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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