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5월 07일
학교와 관료제
학교의 관료제는 엄격한 위계질서, 문서화되고 공식화된 업무절차, 명확한 업무의 경계라는 교과서적인 정의수준을 넘는다. 학교에 구현되고 고착된 관료제는 목적의 효율적 달성을 위한 도구적 절차를 한 치의 낭비 없이 수행하기 위해 구축된 근대적 분업체계, 또 이 체계에 반영된 근대적 사유방식이다.
이는 다른 영역에 대해 빈틈도 여지도 없으며, 업무를 총체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맡은 부분만 기계적으로 수행하는 성찰없는 전문화다. 이렇게 업무가 규칙적으로 반복되면 조작가능한 사물처럼 굳어진다. 이렇게 업무가 굳어지게 되면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들 역시 업무와 동일화되면서 사물이 되어버리며, 마찬가지로 타인을 사물로서 대하게된다. 관료제는 그 체계 내에서 일하는 사람들, 그들의 생각, 의사소통을 모두 사물로 간주하여 이미 결정된 체계적인 절차에 종속시키고 수단화한다. 이는 심지어 관료제 최상층에 있는 사람 역시 예외는 아니다. 이렇게 사물화된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 언제든 대체 가능한 하나의 견본에 불과하다.
그런데 학교에 뿌리내린 관료제는 두 가지 문제를 야기한다. 하나는 관료제가 교육의 목적에 효과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교육의 목적은 ‘인간의 성장’이며, 이는 ‘사물의 확장·변형’을 위한 효율적인 도구로서 조직된 관료제에 걸맞지 않는다. 인간행위자는 나름의 체계를 해석하고 전략적으로 행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관료제가 학교에서 무력화되는 것은 아니다. 관료제의 지배를 받은 교육주체들은 체계 전체에 대한 통찰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료제에 대한 저항은 기껏해야 교육과정 무시하고 교실에서는 자기 편한 대로 수업하는 교사의 모습으로, 혹은 교육과정상의 목적을 무시하고 입시교육에 올인하는 학생·학부모들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결국 관료제는 교육목적의 달성도, 혹은 개인의 성장도 모두 왜곡시키는 체계가 된다.
다른 하나의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료제는 스스로 증식하고 스스로 고착하는 독자적 체계로 자리잡는다는 것이다. 관료제는 마치 마이더스왕 처럼 학교의 손 닫는 모든 영역을 자신의 모습으로 복제해 버린다. 게다가 이 속에서 행위하는 교사들의 사유양식까지 복제해버린다. 관료제에 익숙해진 교사는 그 자체 하나의 관료제이며 자신이 접하는 곳곳에 이를 퍼뜨리는 관료제의 촉수로 기능하게 된다. 그의 이성은 철저히 ‘도구적 이성’에 의해 지배되며, 눈 앞에 보이는 것은 지식이든, 학생이든 조작의 대상으로 생각하여 일사불란한 체계가 아니면 불안해 지고 급기야 자신마저 조작의 대상으로 만든다. 그는 위계질서, 획일적 명령 체계하에 있을때 더 편안함을 느끼며 자율적 상황을 두려워하는 자유의 공포에 감염된다. 활발한 학생활동보다는 모두 졸고 있을지언정 정돈된 교실을 선호하며, 스스로 교재를 만들고 수업을 구상하는 기회보다는 체계적으로 구성된 교과서, 완성된 지도안과 수업자료의 제공을 선호하는 교사들의 모습이 바로 너무 오래 길들여져 관료제 그 자체가 되어버린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런데 교사는 교실에서 독립적인 노동을 하는 특수 직종이기 때문에 관료제에서 이탈이 가능하다. 물론 체계는 이런 가능성을 봉쇄하기 위한 장치를 가지고 있다. 관료제는 교사들이 실제 자신의 위치보다 더 낮게 말단의식을 가지기를 바라며, 학교의 각종 업무분장과 의사전달 통로는 경력 십수년의 교사가 말단 행정직원과 동급 내지는 아래에 위치하는 것처럼 착각을 생산한다. 이렇게 최말단의 위치를 감내하기 어려운 교사는 무조건 자신보다 아래에 누군가를 두어야 하며 이 경우 그것은 어김없이 학생들이 된다. 관료제의 노예가 된 교사의 처지와 학생들의 억압자로 군림하는 교사는 동일한 현상의 양 면인 것이다. 이렇게 교사는 관료제를 내면화 하고 이를 학생들에게 퍼뜨리는 도구가 된다.
# by | 2008/05/07 00:20 | 교육에 대해 생각하기 | 트랙백 | 덧글(0)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