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5월 07일
교육주체의 소통을 위한 이론적 기반
“교육주체 소통하여 참교육을 이룩하자.”라는 구호는 그 동안 수없이 외쳐왔었다. 그러나 소통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문제가 생길 때 마다, 조직이 지리멸렬해질때 마다 “소통을 강화하라”라는 문제제기는 수없이 던져져왔다. 그러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소통이라고 하는 것이 “소통합시다.”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통은 고도의 아니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최고의 행위이며 운동의 수단이나 조건이 아니라 그 자체 운동의 완성이며 목적이다. 따라서 교육주체간의 소통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간단하게나마 소통 그 자체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으며, 이 소고는 그 이해를 돕기위한 하나의 시선을 제공하고자 하는 것이다.
소통의 사회성
소통이라는 것은 최소한 두 주체 이상의 관계다. 이 관계가 지속된다는 것은 이미 사회적인 것이며, 따라서 소통의 종류와 내용 역시 사회적인 소산이며, 동시에 사회의 동인이 된다(Hardt & Negri, 2004).
이처럼 소통은 사회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미 소통주체의사회적, 개인사적, 문화적 배경을 전제로 하고 있다. 원칙적으로 이 배경들이 서로 공통성을 가지지 못하면 의사소통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예컨대 전혀 다른 기호체계와 언어체계를 가진 사람들끼리는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전혀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끼리도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사람들은 그런 상황에서도, 심지어는 동물하고도 의사소통을 한다. 그것은 인간이 상대방의 신호나 언표를 그의 문화적 배경에 비추어 해석하고 또한 자신의 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수용할 수 있는 소통적 합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Habermas, 1981).
의사소통적 화행
따라서 서로 말을 주고받는다고 해서 소통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교육주체, 특히 부모-자식간에 혹은 교사-학생간의 소통노력에서 가장 많이 발생하는 오류다. 소통할 채비가 되어 있지 않은 대화의 증가는 단지 짜증스러운 경험일 뿐이다. 인간이 하는 말은 적어도 다음의 다섯 가지가 있다.
•명령적 화행: 화자가 청자에게 자기가 원하는 상태를 산출하도록 움직이려 함. 성공가능성에 근거하여 비판.
•서술적 화행: 화자는 객관세계의 어떤 사실을 재현. 사실성에 근거하여 비판.
•규제적 화행: 화자는 공동의 사회세계 안에서 정당하다고 인정되는 상호관계 산출. •규범적 정당성에 근거하여 비판.
•표출적 화행: 화자가 자신의 주관세계를 청자에게 노출. 진정성에 근거하여 비판.
•의사소통적 화행: 의사소통과정에 대한 성착적 관계(주제와 기여에 따른 대화의 체계적 구성, 대화 역할의 분배, 대화 순서의 조절 등)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대화하고 접촉했느냐는 양적인 문제가 아니라 어떤 종류의 대화를 했느냐 하는 질적인 문제다. 명령적 화행으로만 점철된 대화가 아무리 시간이 많다 한들 제대로 소통했다고 보기 어려울 것이며, 표출적 화행으로만 일관하는 화자처럼 짜증나는 상대도 없을 것이다. 더구나 그 상대가 교사일 경우 학생이 이를 어떻게 제지할 것인가? 이렇게 왜곡된 소통에서 균형을 잡아줄 의사소통적 화행이 작동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소통이 아니다.
의사소통적 화행과 사회 구조
그러나 권력의 불균형이 존재하는 관계에서 화행의 균형을 찾기란 대단히 어렵다. 대화가 일어나고 있는 사회적 관계의 구조와 대화의 종류는 밀접하게 상호작용한다. 대단히 경직된 사회적 관계 속에서 의사소통적 화행이 일어나기 어렵지만, 의사소통적 화행이 일단 일어나기 시작하면 경직된 관계도 무너지는 것이다. 이러한 상호관계의 변화를 [그림 1]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제일 왼쪽에 있는 구조가 군대나 관료제에서 볼 수 있는 구조다. 여기에는 상급과 하급자의 구별이 명백하며 대화의 상대도 명료하게 정해져 있다. 기본적으로 모든 대화는 1:1로 이루어지며 이때 1:1관계는 비평형관계(asymmetry)다. 모든 대화는 허브(hub)를 거쳐 소통되게 되며, 허브는 각 수준별의 권력을 가진다. 이러한 구조를 군대라고 하자. 가운데 있는 구조는 이 군대 구조가 해체된 것이다. 해체되었기에 의사소통적 화행의 여지가 생기며, 거꾸로 군대에서 의사소통적 화행이 나타나면서 이렇게 해체되어 간다. 상당히 유연화되어 있으나 여전히 허브는 존재한다. 제일 오른쪽에 있는 구조가 네트워크다. 여기에는 위계가 없으며 모두가 모두를 상대로 대등하게 소통한다. 의사소통적 화행이 완벽히 자리잡을수 있으며, 거꾸로 지속적인 의사소통적 화행의 제기가 이러한 구조로 경직된 조직을 해체시켰다.(안타깝게도 전교조는 그 역방향으로 퇴행하고 있다는 감이 든다.)
생산의 변동과 운동의 변화 과제
그런데 21세기 들어 기업과 정부가 오히려 이런 변화에 앞장서고 있다. 많은 기업과 관공서가 강조하는 이른바 팀제, 책임경영제는 군대를 해체해서 게릴라 조직으로 바꾸겠다는 것이다. 반면 더욱 앞서나가는 최첨단 기업들은 이미 네트워크화 되고 있다(구글, 미래에셋, 매킨토시 등). 관료와 자본이 민주주의자가 되기로 개과천선한 것은 물론 아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돈이 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경제는 비물질노동이 잉여가치(이윤)의 결정적인 부분을 차지한다. 비물질노동은 정신노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물의 결과가 단순한 물질적 소비가 아니라는 의미다. 여기에는 지식, 정보산업은 물론 각종 문화, 정서 산업, 그리고 각종 의사소통산업이 포괄된다. 즉 그 상품을 소비함으로써 변형되는 주체, 그리고 그 상품을 소비함으로써 맺게되는 관계가 상품의 사용가치가 되는 것이다(Hardt & Negri, 2001). 흔히 말하는 “물건이 아니라 감동을 팔고”,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고객을 얻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가장 요긴하게 요구되는 노동자는 손재주 많고 능력있는 노동자가 아니라 관계를 맺고 발전시킬 수 있는, 즉 고객을 흐뭇하게 만들고 네트워크를 확장시킬 수 있는 노동자다(기업 채용 시스템의 변천을 살펴보라). 상대를 기쁘게 하고 관계를 발전시킬수 있는 능력, 이것이 결정적인 생산력이며, 또한 생산의 결과다.
운동의 조직도 결국 상부구조다. 따라서 생산이 변화하면 투쟁도 변해야 한다. 자본가들이 곳곳에 대공장이라는 기지를 조직할 때, 이에 맞서는 노동자들도 거대한 산별노조를 세우고 노동자 군대로 맞섰다. 이제 자본이 정서와 관계를 무기로 사회 전역의 화폐지배의 네트워크를 건설할 때 노동자들 역시 정서와 관계가 화폐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삶의 네트워크를 만들어가야 한다.
과거에는 소통을 강화하는 것은 투쟁을 위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소통을 강화하는 것, 그리고 소통을 사회 전역으로 확산시키는 것, 그것 자체가 투쟁이다. 그 속에서 나도 변하고 세상도 변하는 것이다. 그리고 소통을 강화하고 확산시킨다는 것은 그저 말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앞서 제기한 대화의 질을 높이고, 대화가 이루어지는 구조를 바꾸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남은 과제
이제 남은 과제는 무엇일까? 모두가 그 답은 너무 잘 알고 있다. 비대칭적이었던 관계를 바로잡는 것이다. 학생은 교사, 부모 모두에게 약자다. 이 사이에서는 정보가 대등하게 교환되는 것이 아니라 한쪽 방향으로 흐른다. 이 흐름을 공평하게 맞추기 위한 의사소통적 화행이 필요하지만, 이것을 약자의 책임으로 돌릴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교사와 학부모의 경우도 이견이 많겠지만 교사가 강자다. 정보는 교사에서 학부모로 흐르지, 언감 교사를 가르치겠다고 덤비는 학부모는 그리 많지 않다. 따라서 학부모에게 교사는 늘 부담스러운 말상대다. 문제는 많은 교사들이 학부모에 대해 자신들이 약자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교육담론이 학부모들을 후벼 판 부분은 “교육수요자”라는 용어다. 이것이 그대로 “소비자는 왕이다”로 연결되면서, 그 동안의 비대칭적 관계의 설움을 풀어버리는 계기를 마련해준 것이다. 교사들, 특히 신자유주의와 맞서 싸우려는 교사들은 이 점을 분명히 명심해야 한다. 신자유주의 담론에 포섭된 학부모들을 원망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에게서 일방적으로 흐르는 정보의 흐름을 교정하고, 의사소통적 화행을 먼저 제기해야 한다.
이제 남은 과제가 너무 교사에게 부당해 보일수도 있겠다. 교사는 학생과 학부모에게 먼저 의사소통적 화행을 제기함으로써 대화의 불균형을 시정해야 한다. 학부모는 학생에게 그리해야 한다. 이렇게 소통의 균형을 되찾은 다음에야 비로소 소통이 가능하고, 그 속에서 공통성을 확보하고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삶의 정치’도 가능할 것이다. 이렇게 삶의 정치력이 누적 되었을 때 비로소 교사에 대해 비대칭적 권력으로 군림해온 관료제와의 관계도 네트워크화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 보다 하고 싶은 구체적인 말은 더 많았지만, 주어진 시간이 짧고, 서울의 연구소 사람을 광주까지 불러 내린 이유가 무엇인가 고민하다가 매우 원론적이고 이론적인 소고를 작성하였다. 내용이 어려울 수도 생소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요약하면 이렇다.
1. 말을 많이 나누는 것 보다는 그 말의 질과 말이 이루어지는 구조가 중요하다.
2. 교사가 먼저 양보해서 학생, 학부모와의 비대칭적 대화를 개선해야 한다. 즉 의사소통적 화행을 적극 제기해야 한다.
3. 단지 대화의 개선뿐 아니라 이 과정 속에서 네트워크적 관계를 구축해 나가야 한다.
참고문헌
Habermas, J.(1981). Die Theorie der Komminikativen Haendlung. Bd. 1. Frankfurt: Suhrkamp. 장춘익 역(2005).『의사소통행위 이론 1권』. 서울: 나남출판.
Hardt, M.& Negri, A.(2001). Empire. Boston: Harvard Univ. Press. 윤수종 역(2004). 『제국』 서울: 이학사.
Hardt, M.& Negri, A.(2004). Multitude. Oxford: Ocford Univ. Press.
# by | 2008/05/07 00:18 | 교육에 대해 생각하기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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