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5월 07일
교사를 좀먹는 고통들
불과 5,6년 전만 해도 한국 교사의 고통이라고 하면 박봉과 격무, 그리고 낮은 사회적 지위를 꼽았었다. 그러나 이제는 일부 교사들을 제외하면 아무도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80년대만 해도 사범대학에 딸을 보낸 학부모는 사범대학생과 딸이 연애해서 선생하고 결혼할까봐 걱정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선생이라는 이유로 예비 장모에게 괄시받는 남교사는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교사들은 생기가 없고 시들어가고 있다. 도대체 그것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1.전문직에서 단순 노무직으로: 음흉하게 자행되는 장치들
교사는 전문직이다. 다른 직종보다 높은 수준의 도덕성과 책무성이 요구되고 있으며 임용과정도 까다롭다. 그러나 정작 교실이나 교무실에서 스스로 전문직이라고 느끼지 못한다면 이는 말짱 헛소리다. 아니 본인은 전문직이라고 느끼지도 못하는데 전문직에 준하는 책무성만 강조되니 스트레스만 높아진다.
왜 교사는 전문직이라고 느끼지 못하는가? 교사를 그리고 학교를 여전히 자신들이 통제한다는 권력의 쾌감으로 마스터베이션을 하려는 교육 관료들의 분탕질 때문이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자신들이 기획 하는 자가 되고 교사들을 단순 집행자로 만들고자 한다. 그러나 그들의 그런 음모는 얼마나 유치한 방식으로 진행되는가? 그들은 기획할 능력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교수들, 관변학자들과 동맹을 맺어 그들이 만든 내용과 절차를 교사가 있는 그대로 이행하도록 강요한다.
옛날 교사들이 박봉에 시달리던 시절, 교과서를 덮어버리고 호수로 아이들을 데리고 나간 담임선생님 이야기, 진도는 잊어버린 체 역사이야기만 구수하게 풀어내던 늙으신 선생님 등의 추억담들이 있다. 필경 그분들은 비록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지위가 지금보다 훨씬 낮았겠지만 기획하고 집행하는 즐거움을 맛보았을 것이다.
한번 사람들에게 물어보라. 학교선생님에 대한 추억을. 교과서 가르치던 내용을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추억을 많이 남기는 선생님은 교과서 하다말고 삼천포로 빠져서 한 시간 내낸 삼천포에 머무르는 선생님이다. 왜 그럴까? 실제 교사가 삼천포에서 더 즐겁고 행복했기 때문이며 학생도 그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시간이 갈수록 삼천포로 갈 여지가 줄어들고 있다. 교육과정은 재량을 준다고 하면서도 오히려 교사가 의무적으로 채워야 할 항목과 수치만 늘려놓았다. 커다란 백지에 손으로 “훌륭하고 장래가 촉망되는 학생”이라고 쓰는 교사보다, 정해진 절차에 따라 온갖가지 누가기록을 마우스를 딸깍대며 입력하는 교사가 스스로를 단순노무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학교의 조직표를 보라. 교감과 같은 자리에 행정실장이 자리 잡고 있는 경우가 많이 있다. 원칙적으로는 신규교사가 4년만 근무하면 행정실장과 동급이다. 그러나 학교 그림표에서는 육성회 잡급과 같은 위치에 교사들이 배치되어 있다. 게다가 잊을만하면 한 번씩 내려오는 공직자 근태 어쩌고 하는 공문은 “네가 전문직이라고? 꿈 깨라. 너는 말단 공무원이다.”라고 웅변한다.
신자유주의의 흐름에 따라 교육이 점점 표준화되고 마침내 전국 공통의 학력평가로 학교를 비교 평가한다고 나서면, 교사의 교육 여지는 더욱 줄어들 것이다. “예상되는 문제의 답이나 가르쳐 주는” 수업을 하면서 누가 자신을 전문직이라고 여기고, 누가 행복한 일을 하고 있다고 여기겠는가? 학원 강사는 문제 많이 맞추면 돈이나 벌지.
2. 현실과 제도의 모순
교사는 모순된 위치에 있다. 교사는 현실적으로는 다른 어떤 공공기관 종사자보다 자율적으로 노동하고 있으며 전문직으로 대우받고 있다. 학교장은 구청장이나 관공서 기관장처럼 직원들에 대한 구속력이 거의 없다. 학교의 대소사는 회의를 통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으며, 교사들의 여론이 학교장의 의사결정에 실제 영향을 준다. 교사는 근무시간에 대해 간섭받지 않으며 출근부도 없고 각종 잡다한 일지도 쓰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환상적인 처우가 권리로 주어지는가? 아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교사는 매사를 하나하나 규제받고 통제받아야 하는 말단 공무원이나 노동자처럼 자리 잡아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사들이 자율적인 삶과 노동을 즐기는 것은 현실적으로 통제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교실에 모두 CCTV를 설치해서 누군가가 시종일관 체크하지 않는 한 교사를 통제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이게 교사 자율성의 비밀이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갖가지 쓸모없는 페이퍼 웍이다. 실제로 했는지 안했는지, 또 정해진 대로 했는지 안했는지 직접 통제 할 수 없으니, 이를 각종 공문보고를 통해 통제하려는 것이다. 물론 교사들은 이런 공문보고내용과 실제 교실에서 행하는 수업이 크게 다르다. 안해도 한 것으로, 한 것은 안 한 것으로 작성해서 제출한다. 문제는 이렇게 공문보고를 함으로 인해 교사는 교실에서 느꼈던 자율적 노동의 행복을 잃어버린다. 이 실효성이라곤 전혀 없는 각종 페이퍼 웍(단순한 서식을 대충 채워야 하는)은 교사가 사실은 자신이 통제받는 관료제의 부속품임을 상기시키는 장치로 기능한다.
이렇게 교사는 모순된 위치에서 정체성을 찾지 못한다. 주어진 폼만 채우며 정해진 것만 하며 매사를 규제받는 관료제의 말단인가, 아니면 자신의 나름대로 노동을 행하며, 그 과정에 대해 간섭받지 않는 전문직인가? 자기개발에 열심인 교사일 수록 이 혼란과 갈등은 가중된다. 교실에서 신나는 수업, 교무실의 권위적인 배치. 학교 밖 각종 단체에서 대접받으며 참석했다가, 학생 거주지 동 기호 조사 따위의 단순 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의 기묘한 콘트라스트.
이 모순은 사회적으로도 나타난다. 사회는 교사를 전문직으로 부르면서 노무직으로 대접한다. 즉 전문직에 요구되는 의무는 비전문적 방식(여론 재판)으로 요구되면서, 정작 전문직의 당연한 권리인 자율적 기획과 노동의 기회는 철저히 차단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많은 교사들이 실제로 전문성 있는 역량을 보이지도 못한다. 하지만 이는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며, 그걸 이유로 영원히 그럴 것이라 재단할 수 없는 일이다. 설사 교사들이 전문성 있는 역량을 보인다 하더라도 그걸 공식화 할 장치도 없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 틈새를 교대, 사대 교수들, 뇌동하는 교육시민단체들이 꿰차고 교육계를 대변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어떤 골빈 부자가 아무 단체나 동네 학원이나 만들고 대충 돈 벌고 무슨 무슨 교육연대 하나 만든 다음에 교육전문가로 행세하는 모습을 보면 교사의 불행은 더욱 깊어진다.
3. 기획하지 못하는 실행(이론과 실천의 분리)
교사의 전문성 발현기회 차단은 이들에게 교육의 기획을 박탈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리고 이 흐름이 더욱 악화되어 실행의 방법을 선택 할 수 있는 범위마저 좁아지고 있다.
자신이 기획하고 선택하지 못한 일이 규칙적으로 반복될 때 인간은 지루함을 느낀다. 그리고 이런 현상이 몇 달이고 몇 해고 계속되면, 결국 일 그 자체의 의미는 사라지고, 그 일의 결과 받게 되는 돈이 목적이 된다. 즉 일 하지 않는 시간동안 쓸 돈을 벌기 위해 하루 중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일하면서 보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소외 현상이며 많은 교사들이 겪고 있는 고통의 근원이다.
최근 젊은이들이 교직을 선호하는 경향이 높아지고 있는데, 과연 그것이 수업과 지도라는 일하는 시간 때문인지, 아니면 공강 시간과 방학이라는 일 하지 않는 시간 때문인지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아무리 휴가가 길고 비는 시간이 많다고 하더라도 일 하는 시간에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인생은 불행하다. 교사들은 촘촘하게 작성된 교육과정에 의해, 그리고 동학년 동교과 교사들의 보이지 않는 상호감시에 의해, 그리고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가해지는 학교 관리자들의 압력에 의해 이런 불행한 인생을 살고 있다.
4. 자유의 공포
문제는 교사들이 촘촘하게 정해진 교육과정과 교재, 표준화된 수업방법 및 평가방법의 수동적 적용이 더 편하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으며, 이것을 선호하는 교사들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주적이고 창의적인 교사가 여기에 답답함을 느끼더라도 이를 뚫고나가기가 대단히 어렵다.
만약 스스로 교육과정과 내용을 개발하거나 선택하고 수업 및 평가방법을 개발하면 만만치 않은 자료구입비 등 금전적 지출과 연구시간 등 여유시간의 축소를 감소해야 한다. 그리고 많은 교사들은 적지 않은 월급과 많은 여유시간을 즐기는 중산층의 안락함을 흔드는 것을 터부시한다. 따라서 교육방법의 혁신, 참교육 등을 주장하는 교사들을 대놓고 반박하지는 못하더라도 은근히 백안시 하는 경향이 있다. 마치 혁명가를 고발한 농노처럼.
이는 프레이리가 말한 노예들의 자유에 대한 공포다. 오랜 노예생활을 한 사람이 주인의 가치관을 내면화 하듯이, 교사들은 교육 관료의 가치관과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는 경향이 많다. 따라서 이들이 최근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에 거부감을 보인다 해서 그들을 착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교육 관료의 입장에서 보이는 거부감이며 새로운 것은 일단 거부하는 학습된 보수주의에 다름 아니다. 만약 신자유주의가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며 정착한다면 그들은 경영자의 가치관을 내면화하기 시작할 것이다. 자유의 공포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그것은 귀차니즘이다.
5. 성장 기회의 차단
교사는 다른 직종과 달리 아무리 오래 근무해도 고용이 불안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 대신 아무리 커리어가 증가해도 내면적인 성장과 외적인 존경이 증가하지 않는다. 이것은 중년의 위기와 겹칠 때 무시할 수 없는 파괴력을 보이며, 교사의 만성적인 귀차니즘의 근원이다. 도대체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그것이 누적되는 명예와 보람의 근원이 되지 못한다면 귀차니스트가 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로티는 학교교사의 가장 큰 문제로 일상적인 수업과 지도가 아니라 비일상적인 수업과 지도에 더 큰 보람을 느낀다는 점을 지적했다. 학교 교사는 보통 학생을 상대로 보통의 수업을 하는 것이 주 임무다. 그런데 많은 교사는 문제아라든가 수재같은 특별한 학생을 통해 보람을 느끼는 경향이 있다. 이는 지극히 일상적인 교육에서 지루함을 느끼고 그것을 자기 인생에 축적되는 보람으로 보지 않는다는 의미다.
교사가 수십 년의 교육경력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성장을 확인할 수 없다면, 그래서 중년기에 이르러 자신의 인생이 무엇인가 성취했다고 느낄 수 없다면, 그 다음에 오는 현상은 심리적인 시들어감이다. 많은 교사들이 중년기에 이르러 심리적 시듦과 승진 혹은 대학 교수되기 중 하나를 선택하는 기로에 선다. 아니면 취미생활을 통해 또 다른 탈출구를 찾는 길이 있다. 여교사의 경우는 정체성을 교사가 아니라 ‘엄마’에 둠으로써, 즉 교직을 일종의 부업이나 아르바이트로 간주하면서 이 위기를 통과한다. 현 상태에서 교사로서 늙어가면서 시들지 않을 방도를 찾기는 무척 어렵다
# by | 2008/05/07 00:18 | 교육에 대해 생각하기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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