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 읽기 : 포이어바하에 관한 테제 1번

드디어 여기까지 왔습니다. 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는 사실 저서가 아닙니다. 다만 마르크스가 끄적여 놓은 메모입니다. 포이어바흐의사상을 도구로 삼아 현실을 분석하고 비판하는 극단까지 추구했던 마르크스가 느낀 낭패감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돌파구가 어렴풋이드러난 자기해명적인 글입니다. 이 메모가 작성된 시기는 '독일이데올로기'와 비슷합니다. '독일이데올로기'는 마치 이 메모의후속편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그럼 하나 하나 읽어보겠습니다. 원문은 www.marxists.org 에서 공유된 파일을사용했습니다. 아마 최인호 선생의 번역이 아닐까 싶지만 확인은 못했습니다.

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 1번


원문읽기) 이제까지의모든 유물론(포이에르바하의 것을 포함하여)의 주된 결함은 대상, 현실(Wirklichkeit), 감성(Sinnlichkeit)이단지 '객체 또는 관조(Anschauung)'의 형식 하에서만 파악되고, '감성적인 인간 활동, 즉 실천'으로서, 주체적으로파악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활동적' 측면은 유물론과 대립되는 관념론―이것은 물론 현실적이고 감성적인 활동 그 자체는알지 못한다―에 의해 추상적으로 전개되었다.

첫줄부터 아주 난관입니다. 이 글은 마르크스가 남 읽으라고 쓴 글이아니라 철학박사인 자기 혼자, 혹은 기껏해야 자신을 비평할 수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쓴 글이기 대문에 그때까지의 서양철학의흐름은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 읽는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우선 이때까지의 유물론에 주목합니다. 알려진 바와 달리마르크스는 유물론자가 아닙니다.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에 심취한 적은 있으나 그는 "인류 역사의 자연사적 파악"으로 자기 학문을정의했으며, 이는 오늘날 식으로 말하면 "사회과학"입니다.마르크스가 철학의 존재론적 주제인 "유물론""관념론" 논쟁중 유물론의 손을 들었다, 이런 속류적 해석은 버려야 합니다. 이 보다 앞서 발표된 "신성가족"은 "관념론 비판"이라 불러도 될것입니다. 거기서 그는 "천지가 개벽하는 요란한 변화가 오직 머리속에서만 이루어지는"독일의 관념론자를 비판하다 못해 조롱합니다.하지만 그는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 반드시 건너야 하는 불의 강(Feuer Bach)"인 유물론의결함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 이 테제 전반은 유물론(심지어 그토록 존경한 불의 강 까지 포함한) 비판인 것입니다. (여담:비판했지만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에 대한 존경을 철회하지 않습니다. 인터내셔널 창설시 초청까지 할 정도였고, 거절 당했지만기회주의자, 은둔주의자 하며 비난하지도 않았습니다. 조금만 생각이 다르면 수정주의, 개량주의, 이탈자, 배신자 하며 활켜대는훗날 자칭 좌파들의 꼴사나운 모습과 다르죠. 그는 포이어바흐처럼 학술적인 인물은 공경했습니다. 그가 경멸한 사람은 머리는 텅빈채결사투쟁만 외치는 바쿠닌 파, 그리고 운동판에서조차 자리와 명예를 탐하는 라살레류였습니다)
이제까지의 모든 유물론은 저 멀리 그리스의 데모크리투스, 에피쿠루스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아시다시피 고대 그리스 최초의 철학은 세계의기원이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물음은 우리의 인식과정과 관련됩니다. 우리는 감각기관의 자극을 받아 머리속에 표상을 획득함으로써 인식합니다. 이를테면 우리는 돼지저금통을 보지만, 실제는 우리 머리속에 맺힌 돼지저금통의 표상을 보고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표상이 실제 돼지저금통의 반영인가 아니면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관념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따라 전자가 유물론, 후자가 관념론이 됩니다. 좀 더 무리하게 단순화시키면 유물론자는 "이 세상은 우리가 감각지각하는 바 대로의것"이라 주장하는 것이며, 관념론은 "이 세상은 우리 머리속의 관념이 감각자극에 의해 소환, 재구성 된 것"입니다. 이 차이는별 것 아닌것 같지만, 상당합니다. 유물론은 보편성의 근거로 실제 존재를 듭니다. 즉 나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돼지저금통을돼지저금통으로 인식하는 것은, 돼지저금통 그 자체가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만물은 똑 같은 원자들의 합성물이니,어떤 사물이 특정방식으로 인식된다면 그건 그 사물이 그렇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관념론은 그근거로 모든 사람들의 정신의 보편성을 듭니다. 돼지저금통이 어떤 물건인지는 몰라도 그것을 그렇게 인식하게끔 하는 어떤 공통의정신적 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공통의 정신적 요소는 신, 본유관념, 순수이성, 절대정신으로 불려왔습니다. 따라서 진정한인식은 감각지각이 전해주는 그 표상이 아니라 그 공통의 정신적 요소를 인식함에 있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은 감각적으로 보이는바, 그 대로가 아닐수 있습니다. 일체유심조? 그 정도 까지는 아니더라도 말입니다.
따라서 유물론과 관념론은 세계의비참함에 대한 관점도 다릅니다. 비참한 현실은 유물론자에게 비참한 현실일 뿐입니다. 그러나 관념론자에게는 다른 무엇일수있습니다. 생각의 틀만 바꾸면, 혹은 그 현실에 깃든 정신, 신의 선한 의지나 목적만 읽어내면 비참한 현실은 그 이상의 다른무엇입니다. 이런 이유로 마르크스는 관념론이 지배계급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해왔다고 비판했던 것입니다.

원문읽기)포이에르바하는―사유객체와는 현실적으로 구별되는―감성적 객체를 원했다. 그러나 그는 인간활동 자체를 '대상적' 활동으로는 파악하지못했다. 따라서 그는 『기독교의 (Wesen des Christenthums)본질』에서 오직 이론적인 태도만을 참된 인간적태도로 보고, 반면에 실천은 단지 저 불결한 유대적 현상형태 속에서만 파악 하고 고정시켰다. 따라서 그는 ‘혁명적인’,‘실천적·비판적인’ 활동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여기서 감성이라는 단어는 독일 철학의 독특한 용어인 Sinnlichkeit의 번역입니다. 그 의미상으로는 감각과 가깝지만 칸트이래 독일 인식론에서는 완전히 수동적인 감각적 지각이란 있을 수 없다고 봅니다. 여기에는 지각하여 표상을 만들어내는 인간의 정신적인 능력이 개입되기 때문입니다. 즉 외부에서 감각기관을 통해 자극이 들어오면 그것이 우리 정신에서 어떤 표상으로 떠오르게 되는데 이 모든 일련의 과정을 감성적 과정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표상을 개념화하는 과정이 지성적 과정이 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복잡하게 따지지 않고 그냥 감각적이라고 읽어도 큰 무리는 없습니다. 다만 이것은 어떤 개념이나 논리가 개입되지 않고 그 자체로 인식한 것이라는 의미라고 보면 됩니다.


포이어바하는 유물론자이며 관념을 배격했기 때문에 이미 정신에 박혀있는 개념작용인 지성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순수한 감각적 대상, 인간의 관념이 만들어낸 가상이 아니라 실제 존재하는 대상을 원했습니다. 칸트라면 우리가 인식한 것은 감각기관이 들여온 감성적 대상이 아니라 그것을 우리의 지성작용과 판단력을 통해 재구성한 것이라고 말했겠지만, 포이어바하는 그런 정신의 재구성이 아니라 순수한 물적 존재, 즉 감각적 대상을 인식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칸트 관념론의 매우 중요한 고갱이 하나를 버리게 됩니다. 그것은 감각대상을 능동적으로 재구성하는 인간의 주체적인 능력입니다. 순전한 유물론의 입장을 고수한 나머지 포이어바하는 인간의 정신을 다만 감각기관이 전달해주는 물질의 자극을 수용하는 감각수용기로 격하시키고 만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감각세계를 능동적으로 재구성하여 인식하지 못하며, 따라서 거기에 개입하여 어떤 능동적 활동도 하지 못합니다. 다만 세계가 전해주는 그 감각표상을 수용하여 이른바 '객관적'인식을 할 뿐입니다.

따라서 이론적 태도, 즉 외부세계, 자연세계,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태도만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외부세계의 객관성을 무시하고 거기에 주관적으로 개입하려는 태도, 즉 실천적 태도는 돈에 혈안이되고 종교에 미친 유태인들이나 할 일입니다. 따라서 포이어바하에게는 사회의 현상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사회과학적 태도는 인간적인 것이지만, 그 사회에 자신의 주관적인 열망을 투여하여 이를 변혁하려는 사회운동은 매우 불결한 행동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음. 제가 제대로 읽은 건지 모르겠습니다. 많은 질정을 바라겠습니다.


이글루스 가든 - 시사진보가든...시사비평을 통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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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정변증법 | 2009/10/09 20:01 | 마르크스 읽기 | 트랙백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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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저련 at 2009/10/13 22:37
짧아서 원전을(박종철출판사판) 잠깐 읽어봤는데, 논변이라기보다는 맵핑에 가까운 듯 한 작업입니다. 하여간, 경제체제라는 인공물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왜 맑스의 계승자를 자임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유물론자라는 표현을 고집하려 하는지 이해하기 힘든게 사실입니다. 우리 실천을 규정하는 1차적 술어들이 경제적인 술어들이라는 것이 대충 그 입장 같은데, 진짜로 그런 것인지 별로 치열한 논변도 하지 않는 것 같은데 말이죠.
Commented by 부정변증법 at 2009/10/14 10:35
저련님께서 읽으실때 마다 무척 떨립니다. 예리한 도움 부탁드립니다.
Commented by 카나리아 at 2009/11/30 13:17
그건 '변증법적' 유물론 이라서 그런거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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