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7월 21일
아, 추억의 전교조
1989년 어느 가을 날이었습니다. 그 때 캠퍼스 안이 술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난데 없이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 젊지만 적어도 대학생은 아닌듯한 분들, 그런데 행색이 노동자 같지는 않은 분들이 한 분, 두 분, 나중에는 수백, 수천분으로 늘어났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사이렌 소리가 울리더니 총학생회장의 상기된 목소리가 울렸습니다. "이제 이곳 광장에서 전교조 서울지부 결성식을 거행할 것입니다." 그러자 그 분들이 일제히 광장으로 모이고, 그 방송을 들은 학생들은 일제히 환성과 박수를 치면서 그 곳에 함께 했습니다.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전교조는 불법이었고, 전교조의 모든 집회는 원천 봉쇄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습적으로 집회를 내어주자 열 받은 경찰들이 학교를 완전히 봉쇄했습니다. 어느덧 밤이 되고 선생님들은 다음날 수업을 위해 귀가해야 했지만 경찰들은 학교를 철통같이 에워싸고 아무도 학교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수배중인 이수호, 이부영 교사를 내어 놓으면 봉쇄를 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럴수는 없는 노릇이죠. 그래서 사범대 학생회에서는 이수호, 이부영 선생님을 먼저 탈출 시키기로 했습니다. 저하고, 지금 한신대에 계시는 배성인, 그리고 몇몇 학생들이 쇠파이프 하나씩 들고 호위를 맡아서 두 분을 학교 근처 산길을 통해 탈출 시켰습니다. 말이 쉽지, 깜깜한 밤에 산길을 등불도 없이 넘어간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중간에 산길을 감시하는 경찰 두 명이 배치되어 있었지만 우리가 수적으로 우위에 있었기 때문에 간단히 제압하고 무전을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한 밤의 어드벤쳐 끝에 두 분을 무사히 탈출시켰습니다. 나와 전교조의 첫번째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전교조가 되기 위해 대학을 다녔고, 별안간 국립대 발령이 폐지되고 임용고시가 생기자 시험 안치고도 대기업 갈 수 있는 기회를 박차고 굳이 시험을 쳐서 교사가 되었습니다. 학교에 부임한 다음 나를 꼬시는 전교조 교사가 없자, 스스로 지회 사무실에 찾아가서 도리어 왜 신규 교사가 왔는데도 꼬시지도 않느냐며 선배들을 힐난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전교조였기에 2003년부터 수 없이 나에게 회의를 주고, 나를 힘들게 하고, 때로는 어제의 그 자긍심은 다 까먹고 도리어 조합원이라는 것에 자괴감까지 들더라도 끝까지 버텨왔습니다. 하지만 작금의 상황, 성폭행 2차 가해, 그것을 놓고 벌어지는 이전구투, 프락치 논쟁 등등은 정말 견디기 어렵게 만듭니다. 특히 본부 간부로 근무했던 1년은 전교조 지도부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볼 수 있는 기회였고, 내 인생의 큰 상처로 남았습니다. 정말 힘듭니다. 그래서 그만 두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럴때 마다 이명박 정부는 전교조를 탄압하여 떠나는 걸음을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2차시국선언 까지 했습니다. 그 전에 있었던 연가투쟁 등에 걸렸던 거 등등 병합한다면 어쩌면 본의 아니게 방학이 늘어날지도 모르고 월급이 깎일지도 혹은 요즘 이 정부 하는 짓으로 봐서는 장기간 연구휴식년(?)을 얻게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탄압받는 동지들을 두고 등을 돌린다는 미안함은 이제 덜어도 될 것 같습니다. 이 미안함을 털어 놓고 이제는 좀 정리를 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나의 교육운동은 계속 될 것이고, 오히려 저 지배자들에게 더 위협적으로 계속 될 것입니다.
이글루스 가든 - 자유로운 아이들, 아름다운 교육을...
그때까지만 해도 전교조는 불법이었고, 전교조의 모든 집회는 원천 봉쇄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습적으로 집회를 내어주자 열 받은 경찰들이 학교를 완전히 봉쇄했습니다. 어느덧 밤이 되고 선생님들은 다음날 수업을 위해 귀가해야 했지만 경찰들은 학교를 철통같이 에워싸고 아무도 학교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수배중인 이수호, 이부영 교사를 내어 놓으면 봉쇄를 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럴수는 없는 노릇이죠. 그래서 사범대 학생회에서는 이수호, 이부영 선생님을 먼저 탈출 시키기로 했습니다. 저하고, 지금 한신대에 계시는 배성인, 그리고 몇몇 학생들이 쇠파이프 하나씩 들고 호위를 맡아서 두 분을 학교 근처 산길을 통해 탈출 시켰습니다. 말이 쉽지, 깜깜한 밤에 산길을 등불도 없이 넘어간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중간에 산길을 감시하는 경찰 두 명이 배치되어 있었지만 우리가 수적으로 우위에 있었기 때문에 간단히 제압하고 무전을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한 밤의 어드벤쳐 끝에 두 분을 무사히 탈출시켰습니다. 나와 전교조의 첫번째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전교조가 되기 위해 대학을 다녔고, 별안간 국립대 발령이 폐지되고 임용고시가 생기자 시험 안치고도 대기업 갈 수 있는 기회를 박차고 굳이 시험을 쳐서 교사가 되었습니다. 학교에 부임한 다음 나를 꼬시는 전교조 교사가 없자, 스스로 지회 사무실에 찾아가서 도리어 왜 신규 교사가 왔는데도 꼬시지도 않느냐며 선배들을 힐난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전교조였기에 2003년부터 수 없이 나에게 회의를 주고, 나를 힘들게 하고, 때로는 어제의 그 자긍심은 다 까먹고 도리어 조합원이라는 것에 자괴감까지 들더라도 끝까지 버텨왔습니다. 하지만 작금의 상황, 성폭행 2차 가해, 그것을 놓고 벌어지는 이전구투, 프락치 논쟁 등등은 정말 견디기 어렵게 만듭니다. 특히 본부 간부로 근무했던 1년은 전교조 지도부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볼 수 있는 기회였고, 내 인생의 큰 상처로 남았습니다. 정말 힘듭니다. 그래서 그만 두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럴때 마다 이명박 정부는 전교조를 탄압하여 떠나는 걸음을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2차시국선언 까지 했습니다. 그 전에 있었던 연가투쟁 등에 걸렸던 거 등등 병합한다면 어쩌면 본의 아니게 방학이 늘어날지도 모르고 월급이 깎일지도 혹은 요즘 이 정부 하는 짓으로 봐서는 장기간 연구휴식년(?)을 얻게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탄압받는 동지들을 두고 등을 돌린다는 미안함은 이제 덜어도 될 것 같습니다. 이 미안함을 털어 놓고 이제는 좀 정리를 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나의 교육운동은 계속 될 것이고, 오히려 저 지배자들에게 더 위협적으로 계속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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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 2009/07/21 10:55 | 트랙백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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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서울지부 결성식에서 서울대 학생들의 도움이
컸었기에. 그 시절 나도 '젊음'으로 참여했었군요.
아무튼 미안하다는 말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