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놈의 서민이란 말 좀 집어 치워라

대통령께서 서민 행보를 시작하셨다. 한나라 당에서는 "이제 화두는 서민으로 바뀌었다."라며 자화자찬하기 바쁘다. 마치 장군님께서지나가는 말로 한 마디 하면 그걸 가지고 무슨 국정지표가 어쩌구 하고 호들갑 떠는 북조선노동당 꼴을 보는 것 같다. 극과 극은닮는다는 것일까? 그거야 뭐 머리나쁘고 창의력이 부족하면 도리 없는 일이니 그렇다 치자. 그런데 다만 기분 나쁜 것은 서민이라는말이다.

아래 왼쪽의 사진은 이문동 시장에서 오뎅 사먹는 이명박 대통령이다. 오른쪽 사진은 시장이 아니라 청와대에서 식사하는 노무현 대통령이다. 이렇게 시장까지 가서 오뎅을 사먹어도 별로 서민스럽지 않은 대통령이 있는 반면, 청와대 식당에서 정장하고 식사해도 충분히 서민적인 대통령이 있다.

나는 어느쪽이 더 좋다 나쁘다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만약 노무현 대통령이 귀족 흉내를 내고 다녔다면 정말 꼴불견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그 사고방식과 기질이 전혀 서민과는 거리가 먼 이명박 대통령이 저렇게 서민 행세를 하는 것은 꾸어 입은 옷같이 어색하며 심지어는 위협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렇든 저렇든 상관없다. 나는 서민이라는 말을 매우 싫어한다. 서민에는 두 가지 뜻이 있는데 두 가지 모두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첫번째 뜻은 양반이나 왕족이 아닌 일반 백성이라는 신분제적 의미다. 예를 들면 "무슨대군을 폐하여 서인으로 하라."이런 어명에서 사용되는 맥락이다. 두번째 뜻은 경제적으로 중간계급 이하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냥 간단히 노동계급이라 하면 될 것을, 혹은 빈곤계층이라 하면 될 것을 구태여 서민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노동계급, 빈곤층이란 말을 사용할 경우 드러나는 날카로운 정치성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오바마만 하더라도 거침없이 "Working Class" 란 말을 사용하는데, 이를 사용하지 못하는 한국 정치의 낙후성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말이 서민이다. 

노무현이 서민이라고 말할때는 주로 후자의 의미였다. 간단히 말하면 가난하고 못사는 사람들을 대변하겠다는 말을 "서민 정치인"이라는 말로 표현했을 것이다. 그런데 기실 노무현은 스스로 "서민"이라는 말을 혹은 "서민적 정책"이라는 말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그를 서민대통령으로 만든 것은 국민들이었지 본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오히려 서민만을 편들어주기 어려운 대통령이라는 자리의 어려움을 많이 힘들어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그는 참여정치를 지향했기 때문에 서민이 아니라 권리의 주체인 '시민'이라는 말을 더 선호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이명박이 서민이라고 말할때는 전자의 의미로 보인다. "내가 스스로 이렇게 낮은 사람들 처럼 놀아준다." 뭐, 대략 이런걸 보여주려는 것이다. 그래서 노무현이 서민적인 모습을 보이기 위해 굳이 서민적인 장소가 필요하지 않았던 것과 달리 이명박에게는 그런 장소, 천한것들이 사는 후줄군하고 구리구리한 장소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니 이문동 주민들은 이명박이 자신들의 동네를 선택한 것에 분노해야 마땅하다. 사실 서민적인 먹거리 파는 곳은 매우 많다. 청와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인사동이나 정부청사 뒷골목에만 가도 천지 삐까리다. 아니면 신천역이나 강남역 일대에도 천지 삐까리다. 그러나 굳이 엉뚱한 동네까지 간 이유는 저 낮은 곳으로 갔다는 증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저 낮은 곳에서, 저 낮은 것들이 먹는 음식을 먹어준다.....

그러니 그가 펼칠 서민정책이라는 것도 대략 그림이 그려진다. 그건 "내가 특별히 인심 써서 베풀어 준다"는 의미의 정책이 될 것이다. 그러니 서민들이 원하는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생각하기에 서민들에게 좋은 것을 베풀어 줄 것이다. 서민들은 일자리를 원하지만 각하께서 생각해 보니 서민들에게 더 필요한 것은 고용의 유연성이다. 그러니 서민들에게 고용의 유연성을 베풀어준다. 서민들은 소통을 희망하는데 각하께서 생각해보니 서민들에게 더 필요한 것은 각하의 주옥같은 생각을 좀 더 쉽게 알수 있는 그런 홍보물이다. 그러니 대한늬우스를 베풀어 주시는 것이다. 이런 게 다 서민 정책이다. 어차피 서민정책은 저 아랫것들에게 베풀어주는 것이니, 주는 놈 마음이다. 이러거나 저러거나 서민은 권리의 주체가 아니라 항상 시혜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서민이라는 말이 싫다. 획 하나 빼서 시민이라 불러야 한다. 서민정책이 아니라 시민주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한나라당이 주장하는 서민정책, 서민행보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진보정당도 한심해 보인다. 당신들이 진짜 서민이냐 운운하지 말고, 서민정책이라는 말 속에서는 권리의 주체인 시민을 멸시하는 시각이 들어있는 것 아니냐며 따져 물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서민 정책이 아니라 우리는 시민 주권을 세우고자 한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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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정변증법 | 2009/07/05 22:57 | 사회에 대해 생각하기 | 트랙백 | 덧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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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천지화랑 at 2009/07/05 23:10
한가지 빼먹으신 게 있군요.
"난 니들이랑 똑같은 위치에서 시작했어."라는 심리를 생각해야겠죠.
그리고 결과는 "그리고 여기까지 왔으니 니들도 할 수 있을거임. ㅇㅋ?"
Commented by 유치찬란 at 2009/07/05 23:25
나는 했는데 니넨 왜 못하냐? 주류담론이 지향하는 말중 하나겠지요.
사실 한국의 경우 아직도 유교적인 패러다임이랄까.(대통령=왕?) 이런게 많이 남아있는 듯 하여, 저렇게 해도 반감이(나이드신 분들한테는) 적은 것 같습니다. 그만큼 대통령한테 권력이 집중되어 있기도 하고....OTL...

실상 자신을 위에서 내려다보는(베푼다는) 폭력적인 정치적 사고가 진행될 때, 앞으로의 정치는 볼만하겠지요. 우리 MB님은 엘리티시즘으로 가고 싶은걸까요? 근데 정작 엘리티시즘이라지만 엘리트가 개병신이니..(정작 자신은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요. 그게 더 무섭고요. 그러면서 시민들한테 이해못하는 병신이라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겠지요.)
Commented by 비르투 at 2009/07/06 09:54
서민이란 말이 우리나라에선 영 애매하게 사용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경제적 의미로는 노동계급 또는 빈곤층, 정치적 의미로는 시민이라고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문단도 동감해요!
민주당의 떡볶이 태클을 보면...야당들 다 한나라당의 프레임 안에서 놀아나는 것 같아요ㅜㅜ
Commented at 2009/07/06 10:39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롱산 at 2009/07/06 12:21
'서민정책이 아니라 시민주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촌철살인 명구입니다
Commented by 서민이란건 at 2009/07/06 13:53
뭔가 꿀리는 짓을 했을때 `나는 서민이라고! 봐달라고!' 이럴때 쓰는말.. 예를 들면 불법노점상을 운영하거나 주택담보대출이 규제되서 더이상 집투기를 못 할때.. '난 집이 3채밖에 없는 서민이라고! 서민괴롭히지마라!'
Commented by 부정변증법 at 2009/07/11 23:06
요즘 제가 정말 시간과 경황이 없어서 댓글 토론에 응하기 어려운 점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나마 1주일에 포스팅 하나 하는 것도 근근히 명맥 유지하는 중이라서... 꾸벅... 그래도 찾아주시는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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