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5월 21일
원래 예술은 좌파다
황지우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을 경질시키는 것이 조직적인 음모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그것을 물론 음모가 아니라 거사라고 하겠지. 그런데 그러는 그들의 관점이 너무도 무지하기 짝이없다. 일단 인용을 좀 해 보겠다.
"문화부와 문화계 보수성향 단체와 인터넷 매체들은 한예종 개혁을 명분으로 일사불란한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문화미래포럼(대표 정진수 성균관대 교수)은 지난해 9월 심포지엄을 열어 전문 예술인 양성이란 설립 취지에서 벗어난 한예종의 조직 축소와 구조개혁을 요구하고 지난 3월 <독립신문> 등의 인터넷 매체 등에서 통섭 사업에 대해 집중적으로 의혹을 제기했으며, 그런 내용이 감사의 지적사항으로 고스란히 되풀이 됐다."
여기서 전문예술인 이라는 말에 주목해 보자. 지금 보수성향 단체들이 한예종에 계속해서 딴지와 억압을 가하는 것은 전문 예술인 양성을 넘어 그 이상을 양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문예술인의 너머라! 간단히 말하면 좌파예술인을 양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좌파예술인의 반대말로 교묘하게도 우파예술인이 아니라 전문예술인이라는 말을 배치해 넣었다.
여기서 마르쿠제의 1차원성 테제를 들먹이지 않을 수 없다. 마르쿠제는 20세기 후반 선진 자본주의 사회가 이미 노골적인 계급지배와 착취가 아니라 삶 차원에 스며든 문화적인 지배로 들어섰음을 지적했다. 즉, 노동자들, 피지배계급들을 강제력으로 억압하는 대신 그들이 애초에 현 체제 너머를 생각하지도 않게 만듦으로써 사실상 자발적인 복종을 끌어낸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자율적으로 살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체제에 봉사하게 된다. 이렇게 체제 너머를 상상도 하지 못하게 된 인간이 "1차원적 인간"이다.
이런 1차원성은 너머를 사유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세 활동을 왜곡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첫째는 철학이다. 실제로 19세기까지 철학은 엄밀한 학이 아니었다. 그리고 엄밀한 학이 아니었기에 그 속에는 유토피아가 들어있었다. 철학은 "~이다."의 학일뿐 아니라 "~이라야 한다"의 학이기도 했으며, 논증의 학일뿐 아니라 상상과 직관의 학이기도 했다. 얼마전 대표적인 좌파 논객인 조정환씨가 "결국 우리는 직관을 통해 알수 밖에 없다."라고 말했다고 해서 다른 좌파논객들이 마구 비웃는 경우가 있었는데, 직관과 상상을 철학에서, 학문에서 배제하는 관점이야말로 철학의 1차원화의 핵심이다. 오늘날 철학과 과학은 거의 존재하는 것을 확증하는 역할로 위축되어 있다.
둘째는 정치다. 정치 역시 그 속에 유토피아적 열망이 표출되는 활동이지만, 근대 국가의 정교한 대의제 장치는 교묘하게 직접적인 참여를 봉쇄하고, 참여에의 의지도 봉쇄한다. 그나마 투표나 하면 다행인 소극적이고 순응적인 국민들이 만들어진다. 자신이 가진 권력을 행사하는 능동적 행위인 정치가 단지 대의제 대표를 선출하는 투표 정도로 축소되고 수동화 된다.
셋째는 예술이다. 예술이야 말로 일체의 논증의 단계, 정당화의 단계를 건너뛰고 바로 상상력만으로 유토피아를 그려내는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다. 예술은 현실에 대한 "절대적인 거절"의 의미를 담고 있다. 18세기 고전주의 음악이 정치색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보수적이지 않은 것은 그 음악들이 최고의 조화와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며, 이는 바로 현실에 그러한 경지를 요구하는 강력한 추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만약 이상적인 사회가 된다면 그런 조화와 아름다움은 예술이 아니라 노동을 통해 표현될 것이다. 따라서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은 항상 지배자에게 걸리적 거리는 존재가 된다. 따라서 지배계급은 예술을 이상적인 아름다움에의 끝없는 추구 대신 지금 당장 주어지는 "즐거움"에 한정지음으로써 너머를 상상하는 힘을 박탈한다. 이렇게 예술은 오락이 된다.
이 세가지는 이미 이 정권에 의해 끊임없이 강조되고 있다. 당장 결실이 나오지 않는 학문, 인문학들에 대한 경멸과 경제, 경영학, 공학 우선주의, 모든 정치 활동의 대의제 기구 내로의 축소 시도, 그리고 마침내 "전문예술인"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는 예술의 기능화와 오락화. 각종 예술단체들의 실적을 흥행실적으로 환원시켜버리면서 대중들에게 상품을 판매하라는 압박. 이 속에서 지금에 대한 거부, 그리고 더 나은 어떤 세상에 대한 상상력의 발동이라는 예술 본연의 활동을 하려는 사람들의 축출. 이 모든 것이 바로 한예종 말살 작전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착각하고 있다. 사람들이 어떤 작품에 열광하는 것은, 즉 흥행이 되는 것은 그 속에서 현실에 대한 거부와 그들에게 호소할수 있는 더 나은 어떤 경지, 삶, 세상에 대한 동경이 있기 때문이다. 즉 예술작품과 현실이 갈등을 일으키기 때문에 그 긴장감을 느끼기 위해 몰려드는 것이다. 현실에 대한 뻔뻔한 미화, 단지 기능으로 축소된 즐거운 자극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작품은 결코 감식가들은 물론 대중들에게도 어필하지 못한다.
그러니 예술작품은 그것이 예술작품이려고 하는 한 좌빨일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적으로 분명 보수우파의 입장을 밝혔던 발작, 보들레르, 토마스만의 작품을이 도리어 좌빨들에게 끊임없이 영감을 주고 인용되는 것이다. 반면 소비에트나 동독 공산당의 명령에 따라 인민들에게 값싼 오락물을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이라는 미명하에 풀빵처럼 뽑아 내었던 소위 좌빨 예술가들은 아직도 그 시절에 향수를 느끼는 일부 좌파 지식인들의 오덕후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듣보잡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만약 사회주의 국가의 예술가들이 사회주의를 비판하고 그 억압을 넘어서는 작품을 남겼다면 그것은 힘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쇼스타코비치 같은 작곡가의 작품이 동시대 소련의 수많은 소위 혁명적 음악가의 작품과 달리 여전히 광채를 띠는 것은 그가 결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음을 반증한다. 아마 그가 서독이나 미국에서 태어났다면 사회주의자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즉 위대한 예술가는 반골인 것이다.
현실에 대한 절대적인 거절. 그것은 예술의 다른 이름이다. 만약 현실에 순응하는 혹은 그런거 신경쓰지 않고 단지 기능의 전문화에만 신경쓰는 그런 예술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예술에게 더 이상 예술이 되지 말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파들이 그토록 숭상하는 시장이 더 빨리 감지한다. 미드만 보더라도 공화당 코드의 미드는 거의 실패한다. 미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기업인 폭스가 가장 진보적인 애니메이션인 심슨가족을 계속 방영하는 이유도 여기 있는 것이다. 그러니 예술가들에게 억지로 좌빨이 되라고도 혹은 좌빨이 되지 마라고도 요구하지 말라. 한마디로 예술가들에게 거부, 거절을 하지 말라고 요구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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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 2009/05/21 22:32 | 예술의 향기 | 트랙백(1) | 핑백(1) | 덧글(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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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문화부 주장과 딴판인 한예종 종합감사보고서
문화체육관광부가 지난 5월18일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한예종) 황지우 총장을 징계위원회에 회부한다는 소식이 언론을 통해 흘러나왔습니다. 당시 문화부가 내세운 근거를 기억하시는지. 그날 오후 6시30분 무렵 문화부 최종학 감사관과 통화한 내용을 적은 수첩 메모를 그대로 옮겨 보겠습니다. 처분요구서 오늘 학교로 보냈다. 12건 처분요구, 대부분 제도개선. 황 총장 관련 사안이 관심사. 개인적 비리. 학교발전기금 무단사용, 사진(사진개인전) 찍으러 ......more
... 가장 쉬운 방법입니다. 기득권, 즉 지배계층이 서민, 즉 피지배계층에게 돈을 쥐어주면서 그들의 지위를 굳건히 하는 가장 편안하고 안정된 방법이죠. 이는 부정변증법님의 원래 예술은 좌파다 라는 글에 나와있는 1차원적인간을 만드는것과 같은데, 기본 소득을 보장 해 줌으로써 정부에 대한 반감이나 불만따위를 모두 없애는 역할을 하죠. 기본 소득이 있으 ... more
예술은 현실에 대한 거절이라는 것은 공감이 갑니다만, 요즘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결을 읽고 있는데 마음이 좀 그렇더군요. "소설은 사회에 대해 말하는 것을 그만두게 되었다.", "이것은 한국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라고 하더군요. 읽으면서 이런 저런 생각이 들고 있습니다.
단순히 예술이 저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한국만의 일이 아니고, 정권이나, 천민자본주의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물론 쥐새끼의 영향이 개 가속화 시키는 것 같기는 합니다만..)
다양한 매채가 나타남으로 인해 예술 자체가 상상력을 해방하는, 혹은 사회나 진실에 대해 말하는 그러한 역할을 잃어버리는 것 같기도 합니다.(다양한 매채는 그 역할을 받지 않지만..OTL)
솔제니친은 수용소 진짜로 다녀오기도 했군요.
예술이 진보일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빨갱이이진 않은 것 같습니다.
비주류가 주류로 올라선 이후에도 꾸준히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하면서 팬층을 늘리거나 혹은 두텁게 하는 것 또한 지향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건 꼭 올디스 밧 구디스'도 아니고
그렇다고 프로그레시브음악이 진보적이라는 얘기가 아닌거죠.
까놓고 정치적인 입장에서 서로들 자기들 편하게 갖다붙이는 짓거리들만 안했으면 합니다만...
지지하는 정당에 따라 불매운동이니 손가락질하는거 우습지않습니까?
나인테일// 당연히 수용소 행이죠. 그런데 님께서 사용하시는 진보가 제가 사용하는 좌파와 같은 뜻입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좌파라는 말을 못해서 진보라는 모호한 말에 그 뜻을 담아서 사용했거든요. 진보는 사실 당파성이 없는 말입니다. 경제성장은 경제진보, 기술개발은 기술진보 등 어디에나 사용할수 있죠. 좌파가 훨씬 명확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소련은 좌파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국가자본주의죠. 나치와 닮은꼴에 불과합니다.
르베로스// 비주류가 주류로 올라선 다음에도 그 현실을 다시 거부할때 성장하겠죠. 그렇지 않으면 예술가에서 스타로 전락하고 말겁니다. 올디스가 새로운 미를 발견하기 위해 동원될때는 구디스가 되고, 단지 익숙한 즐거움을 제공하기 위해 동원되면 전락된 것이죠.
제 경우 조의 직관 언급이 뜨악했던 것은 그가 직관을 과연 정당한 지점에서 사용하고 있느냐는 지점이었습니다. 화음이 어긋난 음악을 듣고 뭔가 이상하다고 바로 느끼는 그런 것, 통사 구조를 제대로 실현시키지 못하는 비문을 보고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는 그런 능력이 결국 직관인데, 다시 말해서 이미 지니고 있는 개념적 틀에 따라 대상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인데, 이른바 '촛불성'이 과연 그런 판단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냐는 점은 심각한 논란에 부쳐져야 하는 것임에도 너무 과감하기 짝이 없었다고 생각합니다(그리고 조도 웃긴게, 이런 논의에는 칸트 <순수이성비판>을 권하는게 일반적일텐데 무슨 들뢰즈를..).
아마도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이 조가 주장하는 직관이 근거하는 개념 체계를 가리키는 것일텐데, 이것만으로는 너무 모호한 지칭이라 뭐가 그것에 근거한 작동이고 뭐가 그렇지 않은지를 구분할 수 조차 없을 듯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그 이론이 설명력이 있는지 없는지, 그리고 다른 이론들에 비해 왜 나은지도 알 수 없게 되고. 이후 글에서 좀 개념 체계에 대한 묘사가 진행되고 있는 듯 하긴 합니다만, 여전히 이 이론이 왜 다른 이론보다 설명력이 어떤 지점에서 높은지에 대한 설득은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은 듯 하네요.
나중에 포스팅 하겠지만, 조정환 선생의 "미네르바의 촛불"은 왜 썼으며 무슨 말을 쓰려고 했는지는 알겠지만, 이론이 아직 체계화되지 못하고, 성실하게 조사한 민속지적 자료와 그 이론이 아직 서로를 강화하지 못하는 단계에서 너무 서둘러 책으로 나온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분석과 종합 사이.... 결국 "판단력 비판"을 읽을수 밖에 없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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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의 대미사나 베토벤의 장엄미사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저는 아름다운 음악을 감상한다고 해서 항상 현실 부정의 의지가 도출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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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양자 사이에 시대, 문화적 배경이 다르니 차이점이 있을 수 밖에 없지요. 저는 오히려 그 차이를 긍정하고, 그 지향성을 한가지로만 규정하는 것 자체에 의문이 든다고나 할까요.
이런 식의 아이디어는 미지수가 있는 부등식을 예로 들면 이해하는 데 좋을 것 같습니다. '10<x+8'이라는 부등식의 미지수는 (2를 초과하는) 무한개의 수입니다. 그러니까 저 형식을 만족하는 구체적인 내용은 무한개입니다. 그러나 그 수가 2를 초과해야만 한다는 조건이 저 식에는 있습니다. 이게 형식적 부분입니다.
물론 이른바 형식적 측면에서도 음악가도 절대적 미를 추구하지 않을 수 있겠고, 감상자도 거리를 두고 비평을 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 반대의 경우도 얼마든지 상정할 수 있는 것이죠. 역시 주제넘은 댓글이지만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저는 예술가의 미 추구 의지를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예술 작품의 아름다움을 느낀 감상자들이 항상 현실을 부정하거나 거절하느냐라는 것에 의문이 든다고나 할까요?
또 미사곡의 예를 든 거는 현실 부정을 하지 않은 작품을 예술이라고 부르면 안 되는가하는 겁니다.
미사곡에 대해 평가하려면 미사가 현실 부정인지 아닌지부터 합의가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미사를 현실을 긍정하는 것이라고 보는 입장은 크게 과감한 가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모차르트의 미사솔렘니스c단조, 베토벤의 미사솔렘니스(두 작품은 사실 제목이 같습니다)같은 경우 그것이 미사곡이라는 이유로 당시 사회질서에 순응적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베토벤의 경우는 순전 의뢰에 의한 작품일 뿐이며, 모차르트의 미사는 당대에도 오페라, 교향곡 등의 양식으로 점철되어 교회의 노여움을 샀으니까요. 모차르트의 C단조 미사의 라우다무스테 같은 경우는 카덴짜 까지 붙어있는 콜로라투라 아리아죠. 여기에는 그레고리안 찬트, 헨델, 바하등 독일의 진지한 음악에 다시 이탈리아의 선율적 음악, 교회음악, 교향곡, 오페라 등 당시에 존재하던 온갖 양식의 음악들이 망라되어 용광로처럼 들끓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미 이는 미사라는 당대의 맥락을 초월해 버린 것이며, 이런 미사곡은 교회가 지배하던 시절에는 위험한 곡이 됩니다.
사실 미사 자체가 현실을 초월하자는 원망을 담고 있는 행위인데, 모차르트의 미사는 그 초월을 성직자가 아니라 미적체험을 통해 스스로 할수 있는 것처럼 만들기 때문이죠.
그런데 신기한 것은 당시에 위험했던 이 미사곡, 혹은 선동적인 작품으로 분류된 피가로의 결혼 같은 작품이 여전히 생기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이 작품들은 어떤 초월, 자유에의 원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가사를 한 줄도 이해하지 못해도 말입니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보여주듯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