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예술은 좌파다

황지우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을 경질시키는 것이 조직적인 음모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그것을 물론 음모가 아니라 거사라고 하겠지. 그런데 그러는 그들의 관점이 너무도 무지하기 짝이없다. 일단 인용을 좀 해 보겠다.

"문화부와 문화계 보수성향 단체와 인터넷 매체들은 한예종 개혁을 명분으로 일사불란한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문화미래포럼(대표 정진수 성균관대 교수)은 지난해 9월 심포지엄을 열어 전문 예술인 양성이란 설립 취지에서 벗어난 한예종의 조직 축소와 구조개혁을 요구하고 지난 3월 <독립신문> 등의 인터넷 매체 등에서 통섭 사업에 대해 집중적으로 의혹을 제기했으며, 그런 내용이 감사의 지적사항으로 고스란히 되풀이 됐다."

여기서 전문예술인 이라는 말에 주목해 보자. 지금 보수성향 단체들이 한예종에 계속해서 딴지와 억압을 가하는 것은 전문 예술인 양성을 넘어 그 이상을 양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문예술인의 너머라! 간단히 말하면 좌파예술인을 양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좌파예술인의 반대말로 교묘하게도 우파예술인이 아니라 전문예술인이라는 말을 배치해 넣었다.

여기서 마르쿠제의 1차원성 테제를 들먹이지 않을 수 없다. 마르쿠제는 20세기 후반 선진 자본주의 사회가 이미 노골적인 계급지배와 착취가 아니라 삶 차원에 스며든 문화적인 지배로 들어섰음을 지적했다. 즉, 노동자들, 피지배계급들을 강제력으로 억압하는 대신 그들이 애초에 현 체제 너머를 생각하지도 않게 만듦으로써 사실상 자발적인 복종을 끌어낸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자율적으로 살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체제에 봉사하게 된다. 이렇게 체제 너머를 상상도 하지 못하게 된 인간이 "1차원적 인간"이다.

이런 1차원성은 너머를 사유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세 활동을 왜곡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첫째는 철학이다. 실제로 19세기까지 철학은 엄밀한 학이 아니었다. 그리고 엄밀한 학이 아니었기에 그 속에는 유토피아가 들어있었다. 철학은 "~이다."의 학일뿐 아니라 "~이라야 한다"의 학이기도 했으며, 논증의 학일뿐 아니라 상상과 직관의 학이기도 했다. 얼마전 대표적인 좌파 논객인 조정환씨가 "결국 우리는 직관을 통해 알수 밖에 없다."라고 말했다고 해서 다른 좌파논객들이 마구 비웃는 경우가 있었는데, 직관과 상상을 철학에서, 학문에서 배제하는 관점이야말로 철학의 1차원화의 핵심이다. 오늘날 철학과 과학은 거의 존재하는 것을 확증하는 역할로 위축되어 있다.

둘째는 정치다. 정치 역시 그 속에 유토피아적 열망이 표출되는 활동이지만, 근대 국가의 정교한 대의제 장치는 교묘하게 직접적인 참여를 봉쇄하고, 참여에의 의지도 봉쇄한다. 그나마 투표나 하면 다행인 소극적이고 순응적인 국민들이 만들어진다. 자신이 가진 권력을 행사하는 능동적 행위인 정치가 단지 대의제 대표를 선출하는 투표 정도로 축소되고 수동화 된다.

셋째는 예술이다. 예술이야 말로 일체의 논증의 단계, 정당화의 단계를 건너뛰고 바로 상상력만으로 유토피아를 그려내는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다. 예술은 현실에 대한 "절대적인 거절"의 의미를 담고 있다. 18세기 고전주의 음악이 정치색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보수적이지 않은 것은 그 음악들이 최고의 조화와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며, 이는 바로 현실에 그러한 경지를 요구하는 강력한 추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만약 이상적인 사회가 된다면 그런 조화와 아름다움은 예술이 아니라 노동을 통해 표현될 것이다. 따라서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은 항상 지배자에게 걸리적 거리는 존재가 된다. 따라서 지배계급은 예술을 이상적인 아름다움에의 끝없는 추구 대신 지금 당장 주어지는 "즐거움"에 한정지음으로써 너머를 상상하는 힘을 박탈한다. 이렇게 예술은 오락이 된다.

이 세가지는 이미 이 정권에 의해 끊임없이 강조되고 있다. 당장 결실이 나오지 않는 학문, 인문학들에 대한 경멸과 경제, 경영학, 공학 우선주의, 모든 정치 활동의 대의제 기구 내로의 축소 시도, 그리고 마침내 "전문예술인"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는 예술의 기능화와 오락화. 각종 예술단체들의 실적을 흥행실적으로 환원시켜버리면서 대중들에게 상품을 판매하라는 압박. 이 속에서 지금에 대한 거부, 그리고 더 나은 어떤 세상에 대한 상상력의 발동이라는 예술 본연의 활동을 하려는 사람들의 축출. 이 모든 것이 바로 한예종 말살 작전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착각하고 있다. 사람들이 어떤 작품에 열광하는 것은, 즉 흥행이 되는 것은 그 속에서 현실에 대한 거부와 그들에게 호소할수 있는 더 나은 어떤 경지, 삶, 세상에 대한 동경이 있기 때문이다. 즉 예술작품과 현실이 갈등을 일으키기 때문에 그 긴장감을 느끼기 위해 몰려드는 것이다. 현실에 대한 뻔뻔한 미화, 단지 기능으로 축소된 즐거운 자극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작품은 결코 감식가들은 물론 대중들에게도 어필하지 못한다.

그러니 예술작품은 그것이 예술작품이려고 하는 한 좌빨일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적으로 분명 보수우파의 입장을 밝혔던 발작, 보들레르, 토마스만의 작품을이 도리어 좌빨들에게 끊임없이 영감을 주고 인용되는 것이다. 반면 소비에트나 동독 공산당의 명령에 따라 인민들에게 값싼 오락물을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이라는 미명하에 풀빵처럼 뽑아 내었던 소위 좌빨 예술가들은 아직도 그 시절에 향수를 느끼는 일부 좌파 지식인들의 오덕후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듣보잡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만약 사회주의 국가의 예술가들이 사회주의를 비판하고 그 억압을 넘어서는 작품을 남겼다면 그것은 힘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쇼스타코비치 같은 작곡가의 작품이 동시대 소련의 수많은 소위 혁명적 음악가의 작품과 달리 여전히 광채를 띠는 것은 그가 결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음을 반증한다. 아마 그가 서독이나 미국에서 태어났다면 사회주의자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즉 위대한 예술가는 반골인 것이다. 

현실에 대한 절대적인 거절. 그것은 예술의 다른 이름이다. 만약 현실에 순응하는 혹은 그런거 신경쓰지 않고 단지 기능의 전문화에만 신경쓰는 그런 예술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예술에게 더 이상 예술이 되지 말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파들이 그토록 숭상하는 시장이 더 빨리 감지한다. 미드만 보더라도 공화당 코드의 미드는 거의 실패한다. 미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기업인 폭스가 가장 진보적인 애니메이션인 심슨가족을 계속 방영하는 이유도 여기 있는 것이다. 그러니 예술가들에게 억지로 좌빨이 되라고도 혹은 좌빨이 되지 마라고도 요구하지 말라. 한마디로 예술가들에게 거부, 거절을 하지 말라고 요구하지 말라.
 


이글루스 가든 - 시사진보가든...시사비평을 통해 ...

by 부정변증법 | 2009/05/21 22:32 | 예술의 향기 | 트랙백(1) | 핑백(1) | 덧글(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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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자작나무통신- 예산읽기.. at 2009/05/24 01:47

제목 : 문화부 주장과 딴판인 한예종 종합감사보고서
문화체육관광부가 지난 5월18일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한예종) 황지우 총장을 징계위원회에 회부한다는 소식이 언론을 통해 흘러나왔습니다. 당시 문화부가 내세운 근거를 기억하시는지. 그날 오후 6시30분 무렵 문화부 최종학 감사관과 통화한 내용을 적은 수첩 메모를 그대로 옮겨 보겠습니다. 처분요구서 오늘 학교로 보냈다. 12건 처분요구, 대부분 제도개선. 황 총장 관련 사안이 관심사. 개인적 비리. 학교발전기금 무단사용, 사진(사진개인전) 찍으러 ......more

Linked at 본격. 교육까는 블로그 : 정.. at 2009/05/22 21:35

... 가장 쉬운 방법입니다. 기득권, 즉 지배계층이 서민, 즉 피지배계층에게 돈을 쥐어주면서 그들의 지위를 굳건히 하는 가장 편안하고 안정된 방법이죠. 이는 부정변증법님의 원래 예술은 좌파다 라는 글에 나와있는 1차원적인간을 만드는것과 같은데, 기본 소득을 보장 해 줌으로써 정부에 대한 반감이나 불만따위를 모두 없애는 역할을 하죠. 기본 소득이 있으 ... more

Commented by Lavaflow at 2009/05/21 23:00
헐.... 포스트가 여행밸리로 갔어요;;
Commented by 유치찬란 at 2009/05/22 00:15
예술이라. 상상력의 해방(?)이겠지요. 이것은...

예술은 현실에 대한 거절이라는 것은 공감이 갑니다만, 요즘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결을 읽고 있는데 마음이 좀 그렇더군요. "소설은 사회에 대해 말하는 것을 그만두게 되었다.", "이것은 한국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라고 하더군요. 읽으면서 이런 저런 생각이 들고 있습니다.
단순히 예술이 저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한국만의 일이 아니고, 정권이나, 천민자본주의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물론 쥐새끼의 영향이 개 가속화 시키는 것 같기는 합니다만..)
다양한 매채가 나타남으로 인해 예술 자체가 상상력을 해방하는, 혹은 사회나 진실에 대해 말하는 그러한 역할을 잃어버리는 것 같기도 합니다.(다양한 매채는 그 역할을 받지 않지만..OTL)
Commented by 지나가다 at 2009/05/22 02:01
개념글
Commented by 나인테일 at 2009/05/22 02:25
그렇지만 비탈리 쿠프리 같은 키보디스트가 소련에서 그런 음악을 했다면 수용소행이었습..(.....)
솔제니친은 수용소 진짜로 다녀오기도 했군요.

예술이 진보일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빨갱이이진 않은 것 같습니다.
Commented at 2009/05/22 02:31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鷄르베로스 at 2009/05/22 03:02
현실에 대한 절대적인 거절은 절대 아니죠
비주류가 주류로 올라선 이후에도 꾸준히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하면서 팬층을 늘리거나 혹은 두텁게 하는 것 또한 지향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건 꼭 올디스 밧 구디스'도 아니고
그렇다고 프로그레시브음악이 진보적이라는 얘기가 아닌거죠.

까놓고 정치적인 입장에서 서로들 자기들 편하게 갖다붙이는 짓거리들만 안했으면 합니다만...
지지하는 정당에 따라 불매운동이니 손가락질하는거 우습지않습니까?
Commented by 부정변증법 at 2009/05/22 09:48
유치찬란// 음. 사회에 대해 말하지 않을수가 없을겁니다. 꿈같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그건 이미 사회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직설적으로 사회에 대해 말하고 있는 작품들이 사실상 사회에 대해 말하지 않고 있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예술작품은 사회를 고발하던, 이상향을 제시하던 간에 일단 미적 호소력, 즉 형식적 측면을 갖추어야 수용되니까요. 이러한 미적 형식이 승화의 의미를 담고 있는가, 아니면 단지 쾌감을 생산하는 기술에 그치느냐에 이미 사회에 대하여 말하고 있느냐 아니냐 갈라집니다. 그런점에서 소비에트 미학이야 말로 예술더러 사회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강요했던 셈입니다.

나인테일// 당연히 수용소 행이죠. 그런데 님께서 사용하시는 진보가 제가 사용하는 좌파와 같은 뜻입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좌파라는 말을 못해서 진보라는 모호한 말에 그 뜻을 담아서 사용했거든요. 진보는 사실 당파성이 없는 말입니다. 경제성장은 경제진보, 기술개발은 기술진보 등 어디에나 사용할수 있죠. 좌파가 훨씬 명확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소련은 좌파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국가자본주의죠. 나치와 닮은꼴에 불과합니다.

르베로스// 비주류가 주류로 올라선 다음에도 그 현실을 다시 거부할때 성장하겠죠. 그렇지 않으면 예술가에서 스타로 전락하고 말겁니다. 올디스가 새로운 미를 발견하기 위해 동원될때는 구디스가 되고, 단지 익숙한 즐거움을 제공하기 위해 동원되면 전락된 것이죠.
Commented by 저련 at 2009/05/22 10:29
사실에 대한 서술만 하는 입장은 분석쪽에선 자연주의자(naturalist)라고 부릅니다. 정당한 지식에 대한 탐구인 규범적 인식론과 올바른 행동에 대한 탐구인 규범적 윤리학을 폐절하자는 뭐 그런. 아시다시피 인식론과 윤리학은 철학의 중대한 분과인데, 자연주의자가 성공했다면 두 분과는 각각 심리학과 인류학/민속학 또는 정치학으로 환원되어버렸겠죠.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것으로 보면, 성공적으로 학계를 장악하지는 못하고 있는 듯 합니다.

제 경우 조의 직관 언급이 뜨악했던 것은 그가 직관을 과연 정당한 지점에서 사용하고 있느냐는 지점이었습니다. 화음이 어긋난 음악을 듣고 뭔가 이상하다고 바로 느끼는 그런 것, 통사 구조를 제대로 실현시키지 못하는 비문을 보고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는 그런 능력이 결국 직관인데, 다시 말해서 이미 지니고 있는 개념적 틀에 따라 대상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인데, 이른바 '촛불성'이 과연 그런 판단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냐는 점은 심각한 논란에 부쳐져야 하는 것임에도 너무 과감하기 짝이 없었다고 생각합니다(그리고 조도 웃긴게, 이런 논의에는 칸트 <순수이성비판>을 권하는게 일반적일텐데 무슨 들뢰즈를..).
아마도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이 조가 주장하는 직관이 근거하는 개념 체계를 가리키는 것일텐데, 이것만으로는 너무 모호한 지칭이라 뭐가 그것에 근거한 작동이고 뭐가 그렇지 않은지를 구분할 수 조차 없을 듯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그 이론이 설명력이 있는지 없는지, 그리고 다른 이론들에 비해 왜 나은지도 알 수 없게 되고. 이후 글에서 좀 개념 체계에 대한 묘사가 진행되고 있는 듯 하긴 합니다만, 여전히 이 이론이 왜 다른 이론보다 설명력이 어떤 지점에서 높은지에 대한 설득은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은 듯 하네요.
Commented by 부정변증법 at 2009/05/22 12:23
조와 들뢰즈의 관계에 대해서는 저 역시 불만입니다. 실제 네그리의 "제국/다중"이론은 정보화 혁명이 가져온 토대상의 변동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정치경제학의 일종으로 보이며, 그런 한에서 다른 이론에 비해 실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구좌파의 이론이나 부르주아 이론보다 더 적확히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 블로그 오른쪽에 걸어 놓은 "정체성 권력" 같은 책들과 "제국"이 연결되어야 할텐데. 그래서 그 논증이 겉돌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조는 이에게 "촛불은 중간계급이 아니잖아!"라고 말했고, 이는 조에게 "촛불이 다중이라는 증거대봐." 했던 것인데 엉뚱하게 벤야민에 들뢰즈에 철학적인 춤을 추면서, 현대사회학의 거장들은 신기하게도 피해다녔던 것이죠.

나중에 포스팅 하겠지만, 조정환 선생의 "미네르바의 촛불"은 왜 썼으며 무슨 말을 쓰려고 했는지는 알겠지만, 이론이 아직 체계화되지 못하고, 성실하게 조사한 민속지적 자료와 그 이론이 아직 서로를 강화하지 못하는 단계에서 너무 서둘러 책으로 나온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분석과 종합 사이.... 결국 "판단력 비판"을 읽을수 밖에 없게 됩니다.
Commented by 키시야스 at 2009/05/23 09:14
예술은 좌파적이라기보단 진보적이라고 하는게 더 정확하지 않을까요? 글 자체에서는 용어 사용에 대한 비판이 들어가신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좌파적이라기보단 전 진보적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Commented by 부정변증법 at 2009/05/24 06:19
보수,진보 그리고 우파, 좌파의 프레임을 좀 정리할 필요가 있는데, 저는 지금까지 진보라고 지칭되던 경향성을 의도적으로 좌파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과거에 좌파라고 불리던 경향성중 북한, 소련과 관련된 것들은 구좌파라고 부르고 있고요. 그 이유는 별도로 정리하겠습니다.
Commented by 키시야스 at 2009/05/24 06:22
네 의도는 이해하고 있었으나, 저도 아버지가 미술 비평을 하시는지라 ^^. 용어 정리 감사합니다. 저같은 경우에는 소련, 북한 지지자들에게 민주주의적 우파 좌파를 붙여주는것을 전 꺼리는지라, 통제주의자들로 통칭하고 있답니다.
Commented by 이런저런 at 2009/05/26 17:15
예술은 현실에 대한 "절대적인 거절"의 의미를 담고 있다. 18세기 고전주의 음악이 정치색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보수적이지 않은 것은 그 음악들이 최고의 조화와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며, 이는 바로 현실에 그러한 경지를 요구하는 강력한 추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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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의 대미사나 베토벤의 장엄미사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저는 아름다운 음악을 감상한다고 해서 항상 현실 부정의 의지가 도출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Commented by 저련 at 2009/05/26 18:16
주제넘지만 댓글을 달자면 절대적 미는 현상을 그대로 재현하는 서술이 아닌 그것을 지도하는 규범이라는 점에 기초하여 주인장께선 논변을 펼치신 듯 합니다. 님의 의문은 음악가 자신의 지향성과 음악을 듣는 사람의 지향성 사이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붙잡지 못하였기에 나타난 것으로 전 봅니다. 그러니까, 저 음악가들은 절대적 미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실을 절대적으로 "거절"하고 있다면, 음악을 듣는 사람이 만일 저들의 악곡을 절대적 미라고 간주한다면 음악가들의 태도와는 다르게 현실을 긍정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겠죠.
Commented by 이런저런 at 2009/05/27 14:16
음악가 자신의 지향성과 음악을 듣는 사람의 지향성 사이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붙잡지 못하였기에 나타난 것으로 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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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양자 사이에 시대, 문화적 배경이 다르니 차이점이 있을 수 밖에 없지요. 저는 오히려 그 차이를 긍정하고, 그 지향성을 한가지로만 규정하는 것 자체에 의문이 든다고나 할까요.

Commented by 저련 at 2009/05/27 18:12
역사적 맥락에 의존해서 지향하는 것이 결정된다는 입장에 더 호의적이신 듯 한데, 이는 그리 엄밀하지 못한 입장입니다. 지향성의 구체적인 내용은 물론 달라질 수 있겠습니다. 19세기 서유럽에서 현악사중주가 날렸다면 21세기 초 한국에서는 소녀시대가 날리고 있는 것 처럼. 그러나 제가 언급하는 지향성은 좀 더 형식적이고 보편적인 것입니다. 음악가와 음악을 듣는 사람이 지닐 수 있는 형식을 언급하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런 식의 아이디어는 미지수가 있는 부등식을 예로 들면 이해하는 데 좋을 것 같습니다. '10<x+8'이라는 부등식의 미지수는 (2를 초과하는) 무한개의 수입니다. 그러니까 저 형식을 만족하는 구체적인 내용은 무한개입니다. 그러나 그 수가 2를 초과해야만 한다는 조건이 저 식에는 있습니다. 이게 형식적 부분입니다.
물론 이른바 형식적 측면에서도 음악가도 절대적 미를 추구하지 않을 수 있겠고, 감상자도 거리를 두고 비평을 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 반대의 경우도 얼마든지 상정할 수 있는 것이죠. 역시 주제넘은 댓글이지만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Commented by 이런저런 at 2009/05/27 19:33
제 말을 계속 오해하고 계십니다.

저는 예술가의 미 추구 의지를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예술 작품의 아름다움을 느낀 감상자들이 항상 현실을 부정하거나 거절하느냐라는 것에 의문이 든다고나 할까요?

또 미사곡의 예를 든 거는 현실 부정을 하지 않은 작품을 예술이라고 부르면 안 되는가하는 겁니다.
Commented by 저련 at 2009/05/27 20:46
첫 문제는 대충 합의가 가능할 듯 합니다. 제 말에서 감상자들에 대한 명제가 가리키는 사태가 어떤 특정한 감상자 또는 감상자 모두에게 속한다고 하는 양화사는 없었기에 제가 첫 댓글에서 한 말은 가정에 불과합니다. 가정을 쓴 이유는 양화사를 붙인다고 해도 이런 주장 이상을 하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감상자들에게 어떤 지향성이 있다면 그것은 현실 긍정일 수 있다." 조동사에 주목하시면 되겠습니다. 양상이 가능이니까, 긍정이든 부정이든 상관 없는 것입니다.

미사곡에 대해 평가하려면 미사가 현실 부정인지 아닌지부터 합의가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미사를 현실을 긍정하는 것이라고 보는 입장은 크게 과감한 가정이라고 생각합니다.
Commented by 부정변증법 at 2009/05/28 08:30
두분의 토론이 주인장을 놀라게햇네요^^ 먼저, "예술은 현실에 대한 "절대적인 거절"의 의미를 담고 있다."라는 말은 +/- 식의 개념이 아닙니다. 다만 현실의 지금 여기와 다른 그 무엇의 의미입니다. 현실의 반대일수도 있고 비슷하지만 조금 다를수도 있고, 아예 무관할수도 있지만 어쨌든 '현재와는 다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거절은 '절대적'입니다.

모차르트의 미사솔렘니스c단조, 베토벤의 미사솔렘니스(두 작품은 사실 제목이 같습니다)같은 경우 그것이 미사곡이라는 이유로 당시 사회질서에 순응적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베토벤의 경우는 순전 의뢰에 의한 작품일 뿐이며, 모차르트의 미사는 당대에도 오페라, 교향곡 등의 양식으로 점철되어 교회의 노여움을 샀으니까요. 모차르트의 C단조 미사의 라우다무스테 같은 경우는 카덴짜 까지 붙어있는 콜로라투라 아리아죠. 여기에는 그레고리안 찬트, 헨델, 바하등 독일의 진지한 음악에 다시 이탈리아의 선율적 음악, 교회음악, 교향곡, 오페라 등 당시에 존재하던 온갖 양식의 음악들이 망라되어 용광로처럼 들끓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미 이는 미사라는 당대의 맥락을 초월해 버린 것이며, 이런 미사곡은 교회가 지배하던 시절에는 위험한 곡이 됩니다.
사실 미사 자체가 현실을 초월하자는 원망을 담고 있는 행위인데, 모차르트의 미사는 그 초월을 성직자가 아니라 미적체험을 통해 스스로 할수 있는 것처럼 만들기 때문이죠.

그런데 신기한 것은 당시에 위험했던 이 미사곡, 혹은 선동적인 작품으로 분류된 피가로의 결혼 같은 작품이 여전히 생기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이 작품들은 어떤 초월, 자유에의 원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가사를 한 줄도 이해하지 못해도 말입니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보여주듯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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