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5월 12일
사회주의 국가의 무상음악교육은 과연 진보적인가?
어떤 분이 베네수엘라의 청소년 오케스트라 공연에 대한 감격을 토로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정작 연주보다는 그런 오케스트라들을 무상으로 지원하는 베네수엘라의 예술교육제도에 대해 더욱 큰 감격을 토로했습니다. 사실 나는 그 악단의 연주를 들어보지 못했으니 거기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무상으로 크라~시크를 펑펑 가르쳐 주는 베네수엘라 예찬에 대해서는 한 마디 거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나하면 그렇게 무상으로 크라~시크를 펑펑 가르쳐 주는 것은 베네수엘라 뿐 아니라 나치 독일부터 시작해서 북한에 이르기 까지 거의 모든 전체주의 국가들이 해왔던 일이기 때문입니다. 베네수엘라가 과연 전체주의냐 아니냐 논쟁은 여기서 하지 않습니다. 다만 나는 베네수엘라가 그런 길로 갈 위험이 있다고 우려한다 정도로 해 두렵니다.
사실 그 동안 늘 궁금했던 것이 사회주의를 가장한 권위주의 정권은 왜 항상 무상으로 크라~시크 교육을 제공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소비에트도 그랬고, 북한도 그랬고, 베네수엘라도 그렇습니다. 항상 무상으로 가르치는 것은 두 종류입니다. 크라~시크와 자기 나라의 민속음악입니다. 차베스 덕에 이렇게 음악을 익혔으니 장차 유명해 지더라도 조국일 잊지 않겠노라는 청년의 인터뷰에 그 분은 감격하셨지만, 사실 이런 식의 인터뷰는 소비에트에서도 흔히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국에 감격하던 젊은 음악인이 일단 성취하면 망명길에 올랐죠. 아마 문제는 그들이 아니라 그들의 조국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조국은 그들이 예술가로 성장하려 하지 않는 한 그들을 품어주었고, 예술가로 성장하려는 순간 그들을 억압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 정부가 왜 청소년들이 하고 싶은 음악이 아니라 크라~시크 를 강조해서 가르쳤는가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왜 그들은 록 음악, 힙합, 기타 해괴망측한 온갖 음악이 아니라 크라~시크를 해야 했을까요?
글쓴이와 달리 나는 노래방의 민중적 가치 따위는 없다고 봅니다. 어떤 면에서는 베를린 필을 불러다 수십만원씩 받고 판에 박힌 레파토리를 연주하는 크라~시크 공연이나 노래방은 문화적으로 등가라고 봅니다. 그것들의 가치는 모두 순응을 재생한 하는 것입니다. 바로 비밀은 여기에 있습니다. 순응의 재생산.예술의 거세. 사실 예술은 지금 여기에 불가능한 것을 꿈꾸는 것이며, 그 불가능한 것 때문에 행하는 순간 전복적 힘이 되는 것입니다. 베네수엘라의 예술가라면 마땅히 베네수엘라 너머를 말해야 합니다. 베네수엘라를 차베스를 감사히 여길 것이 아니라.
그러나 그 분은 베네수엘라 청소년 악단과 음악교육 시스템이 "빈곤 청소년들을 일탈에서 예방하는 음악의 힘을 보여주었다"라는 주장까지 하고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뿜을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글의 지은이는 좌파적 관점을 가진것으로 보이지만, 이리 꽉 막히고 갑갑한 마인드는 소비에트 좌파의 그것으로 보입니다. 비유하자면 딱 김규항 류의 수준에서 맴돌고 있습니다.
"일탈을 예방하는 음악의 힘" 따위야 이미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충분히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승화로서의 예술인 것입니다. 무료라고요? 네, 라디오, 티브이의 각종 대중 예술은 모두 무료로 제공되고 있습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자본주의 사회의 대중예술은 그래도 시장의 선택을 받아야 하기에 전복적 힘, 해방적 힘을 완전히 봉쇄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면 하나도 안 팔릴테니까요. 하지만 사회주의 국가의 무상 음악교육은? 철저히 순응적인 기능에 세팅될 수 있습니다. 사실 일탈을 예방하는 음악은 보수의 판타지입니다. 진정 좌파라면 어떤 경우라도 일탈을 꿈꾸는 음악, 예술을 말해야 합니다. 가난한 청소년들이 순화되어 일탈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격하여 자신의 가난의 원인에 대항할 줄 알고, 더 나아가 차베스던 뭐든 간에 권력으로 조작하는 것들에는 모두 대항할 수 있는, 그런 대항을 꿈꾸는것이 바로 예술적 가능성입니다. 적어도 좌파라면 말이죠.
진정 좌파라면 예술의 힘에서 그런 승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탈승화를, 판타지를, 존재하지 않고 바랄수 없는 것을 바라는 원망을, 그러나 그 원망과 탈승화가 미적으로 형상화되는 순간 형식화 되려는 것에 맞서는 갈등과 모순의 역동을 말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예술이라는 것 자체가 일종의 일탈입니다. 나는 사회주의든 뭐든간에 조국의 은혜에 감사 따위나 하는 예술가는 쓰레기라고 봅니다. 예술가는 어떤 경우에도 현재의 부정으로서의 유토피아를 지향해야 합니다. 만약 더 이상 꿈꾸고 부정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현실이 환상적이 된다면, 그때는 예술은 소멸되는 겁니다. 예술과 노동은 하나가 되는 것이며, 생산과 창작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즉, 예술은 지금이 아무리 폼나게 보여도 자신이 소멸되지 않는 한 그 현실을 부정하며 더 내다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술이 가능하다는 것, 그것은 이미 이 현실은 부정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부정의 힘을 하나의 의례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권력의 필사적인 노력입니다. 그리고 그런 노력 중 가장 확실한 것은 애초에 권력이 규정한대로, 질서의 틀 안에서만 상상력을 발휘하도록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권위주의국가 전체주의국가는 항상 무료로 예술교육을 합니다. 무료로 예술교육을 받는 대신 그들은 현 체제 너머를 상상할 수 있는 힘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만약 베네수엘라에 진짜 예술가가 있다면 국가가 공짜로 대주는 크라~시크 가 아니라 굳이 자기 돈 들여가며 창고에서 뭔가 다른 것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국가는 그것을 통제하고 억압할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말러 씩이나 연주하는 베네수엘라의 유스오케스트라보다 우리 동네 지하철 역 콘크리트 바닥에 머리박고 빙글빙글 돌아가는 비보이 녀석들이 더 대단해 보입니다. 그리고 장기하와 얼굴들이
사실 그 동안 늘 궁금했던 것이 사회주의를 가장한 권위주의 정권은 왜 항상 무상으로 크라~시크 교육을 제공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소비에트도 그랬고, 북한도 그랬고, 베네수엘라도 그렇습니다. 항상 무상으로 가르치는 것은 두 종류입니다. 크라~시크와 자기 나라의 민속음악입니다. 차베스 덕에 이렇게 음악을 익혔으니 장차 유명해 지더라도 조국일 잊지 않겠노라는 청년의 인터뷰에 그 분은 감격하셨지만, 사실 이런 식의 인터뷰는 소비에트에서도 흔히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국에 감격하던 젊은 음악인이 일단 성취하면 망명길에 올랐죠. 아마 문제는 그들이 아니라 그들의 조국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조국은 그들이 예술가로 성장하려 하지 않는 한 그들을 품어주었고, 예술가로 성장하려는 순간 그들을 억압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 정부가 왜 청소년들이 하고 싶은 음악이 아니라 크라~시크 를 강조해서 가르쳤는가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왜 그들은 록 음악, 힙합, 기타 해괴망측한 온갖 음악이 아니라 크라~시크를 해야 했을까요?
글쓴이와 달리 나는 노래방의 민중적 가치 따위는 없다고 봅니다. 어떤 면에서는 베를린 필을 불러다 수십만원씩 받고 판에 박힌 레파토리를 연주하는 크라~시크 공연이나 노래방은 문화적으로 등가라고 봅니다. 그것들의 가치는 모두 순응을 재생한 하는 것입니다. 바로 비밀은 여기에 있습니다. 순응의 재생산.예술의 거세. 사실 예술은 지금 여기에 불가능한 것을 꿈꾸는 것이며, 그 불가능한 것 때문에 행하는 순간 전복적 힘이 되는 것입니다. 베네수엘라의 예술가라면 마땅히 베네수엘라 너머를 말해야 합니다. 베네수엘라를 차베스를 감사히 여길 것이 아니라.
그러나 그 분은 베네수엘라 청소년 악단과 음악교육 시스템이 "빈곤 청소년들을 일탈에서 예방하는 음악의 힘을 보여주었다"라는 주장까지 하고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뿜을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글의 지은이는 좌파적 관점을 가진것으로 보이지만, 이리 꽉 막히고 갑갑한 마인드는 소비에트 좌파의 그것으로 보입니다. 비유하자면 딱 김규항 류의 수준에서 맴돌고 있습니다.
"일탈을 예방하는 음악의 힘" 따위야 이미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충분히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승화로서의 예술인 것입니다. 무료라고요? 네, 라디오, 티브이의 각종 대중 예술은 모두 무료로 제공되고 있습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자본주의 사회의 대중예술은 그래도 시장의 선택을 받아야 하기에 전복적 힘, 해방적 힘을 완전히 봉쇄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면 하나도 안 팔릴테니까요. 하지만 사회주의 국가의 무상 음악교육은? 철저히 순응적인 기능에 세팅될 수 있습니다. 사실 일탈을 예방하는 음악은 보수의 판타지입니다. 진정 좌파라면 어떤 경우라도 일탈을 꿈꾸는 음악, 예술을 말해야 합니다. 가난한 청소년들이 순화되어 일탈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격하여 자신의 가난의 원인에 대항할 줄 알고, 더 나아가 차베스던 뭐든 간에 권력으로 조작하는 것들에는 모두 대항할 수 있는, 그런 대항을 꿈꾸는것이 바로 예술적 가능성입니다. 적어도 좌파라면 말이죠.
진정 좌파라면 예술의 힘에서 그런 승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탈승화를, 판타지를, 존재하지 않고 바랄수 없는 것을 바라는 원망을, 그러나 그 원망과 탈승화가 미적으로 형상화되는 순간 형식화 되려는 것에 맞서는 갈등과 모순의 역동을 말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예술이라는 것 자체가 일종의 일탈입니다. 나는 사회주의든 뭐든간에 조국의 은혜에 감사 따위나 하는 예술가는 쓰레기라고 봅니다. 예술가는 어떤 경우에도 현재의 부정으로서의 유토피아를 지향해야 합니다. 만약 더 이상 꿈꾸고 부정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현실이 환상적이 된다면, 그때는 예술은 소멸되는 겁니다. 예술과 노동은 하나가 되는 것이며, 생산과 창작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즉, 예술은 지금이 아무리 폼나게 보여도 자신이 소멸되지 않는 한 그 현실을 부정하며 더 내다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술이 가능하다는 것, 그것은 이미 이 현실은 부정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부정의 힘을 하나의 의례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권력의 필사적인 노력입니다. 그리고 그런 노력 중 가장 확실한 것은 애초에 권력이 규정한대로, 질서의 틀 안에서만 상상력을 발휘하도록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권위주의국가 전체주의국가는 항상 무료로 예술교육을 합니다. 무료로 예술교육을 받는 대신 그들은 현 체제 너머를 상상할 수 있는 힘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만약 베네수엘라에 진짜 예술가가 있다면 국가가 공짜로 대주는 크라~시크 가 아니라 굳이 자기 돈 들여가며 창고에서 뭔가 다른 것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국가는 그것을 통제하고 억압할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말러 씩이나 연주하는 베네수엘라의 유스오케스트라보다 우리 동네 지하철 역 콘크리트 바닥에 머리박고 빙글빙글 돌아가는 비보이 녀석들이 더 대단해 보입니다. 그리고 장기하와 얼굴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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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 2009/05/12 22:18 | 교육에 대해 생각하기 | 트랙백(1) | 덧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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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구스타보 두다멜 이야기.
사회주의 국가의 무상음악교육은 과연 진보적인가? 구스타보 두다멜의 이야기가 왠지 나치 휘하에서 지휘하던 푸르트뱅글러의 논란과 겹쳐보여서 트랙백 해봤습니다. (물론 두다멜이 푸르트벵글러급 거장이란 말은 아닙니다만) 역시 이럴때 가장 편한 방법은 들어보는 거지요. 음질이 좋지 않긴 합니다만 웹 상에서 음악 이야기를 진행해야 하는 상황에서 유튜브는 정말 찬양해 마땅한 솔루션입니다. 논란(?)이 되고 있는 볼리바르 유스에서의 ......more
음... 소련이 파블로프의 연구를 지원했고, 이에 반하는 이론들을 일부러 억압했던 것이 생각나기도 하는군요. 교육을 통해 실현하는 이상을 갈구했던 국가였지요. 저는 이런부분에서 소련의 사회주의가 진정한 의미의 좌파와는 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에겐 단적으로 상상력이 없었지요.
하지만 베네수엘라의 잘난 클래식이든 혹은 비보이나, 혹은 장기하나, 어느쪽을 좋아하든 선택의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문제의 논점은 그 자유의 시각, 상상의 힘이겠지요. 물론 그런것들은 개인의 시각에 의해 '규정'되지만, 그것을 어떠한 범주에 엮여있는 양태로 보지 않고, 그것 자체로써만 본다면 말러를 연주하는 오케스트라는 아주 아름다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예술 교육 그 자체보다 체제 순응을 위한 교육의 일환이라는 것에 더 주목해야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