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3월 30일
부르디외가 가르쳐 주는 것
얼마 전 타계한 삐에르 부르디외는 자본을 단순히 생산수단의 구입을 위해 투자된 화폐라는 경제적 관점에서만 바라본 기존 좌파의 좁은 시야를 넘어 문화, 사회관계 등이 경제자본과 함께 엉켜서 형성한 구조로 파악한 사회학자다. 물론 경제적 자본 뿐 아니라 문화나 사회관계가 지배계급을 결정한다는 통찰은 부르디외보다 수십년 먼저 막스 베버가 이미 이룩한 바 있으니, 부르디외의 업적을 과대평가할 이유는 없다(프랑스 물 먹은 사람들은 프랑스를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어서 한 마디 해 두는 것이다). 그리고 경제, 문화, 사회관계가 서로 상호작용하면서 하나의 중층구조를 이루어서 계급 구성에 영향을 준다는 이론은 사실 알뛰세르의 것이이 이 역시 부르디외의 독창적 업적은 아니다. 그러나 이를 철학적(?) 담론의 수준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의 데이타를 통해 실증적으로 검증하려 한 점이 부르디외의 업적이다(물론 이 점에서도 그 공로를 부르디외 혼자가 아니라 미국의 사회학자 에릭 롸이트와 나누어 가져야 하지만...).
하지만 부르디외의 독창적인 개념은 바로 '자본전환'이다. 즉 경제, 문화, 관계자본의 복합구조가 지배계급을 결정할 뿐 아니라, 경이들 각각을 소유한 계급내 분파는 자신이 보유한 자본이 다른 종류의 자본과도 호환될수 있도록 전환을 꾀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배계급이나 중간계급 내에서는 각각 세 분파가 치열한 경쟁과 투쟁을 벌인다. 노동자 계급은 위의 셋 중 어느것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이 대열에서 밀려난다.
예를 들면 지배계급 내에서도 부르주아들은 자신들이 가진 경제자본을 문화자본으로 전환시키려고 한다. 특히 문화자본 중에서도 학력자본으로 전환시키려고 한다. 과거에는 투자했기 때문에 이윤을 가져갔지만, 오늘날의 부르주아는 공식적으로는 전문경영인으로서 고액의 연봉을 받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서 그들은 회사가 망하지 않는 한 안정적인 고소득을 누릴수 있다. 이렇게 되면서 주로 학력자본을 무기삼아 노동자계급보다 우위에 서 있던 중간계급들에게 비상이 걸렸다. 공부만 열심히 시키면 교사의 자녀가 교수가 되고, 사무직 노동자의 자녀가 변호사가 되는 등의 수직이동이 봉쇄된 것이다. 안 그래도 치열하던 학력경쟁의 터에 과거에는 무관심했던 부르주아의 자녀들이 뛰어들었다. 더구나 이들은 학업능력보다는 경제력에 의해 학력사다리가 결정되도록 갖가지 게임의 왜곡을 시도한다. 심지어는 학력, 지식, 문화의 전반적인 재가치화를 통해 부르주아 문화에 가까울수록 보다 높은 학문, 지식이 되도록 만들어버린다. 이를테면 대학교수 안에서도 경영학 관련 교수들은 높은 지위처럼 되는 반면, 문사철 교수들은 중등 교사와 별 차이 없는 지위로 추락하는 현상들이 그렇다.
이런 새로운 북새통 속에서 중간계급은 자신들의 학력자본을 더욱 증가시킴으로써, 즉 더 빡세게 공부함으로써 이 위기를 극복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 결과는 사회 전반에 만연한 학력 인플레이션이다. 그 결과 10년전과 동일한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그때보다 훨씬 더 높은 등급의 학력 수준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는 직업없이 학업에 열중해야 하는 기간이 30대 이후까지 연장될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만으로도 중간계급이 부르주아와 싸워 이기기에는 턱없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개미지옥같은 학력경쟁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2000년대 들어 비로소 계급 구조가 공고해지기 시작한 한국사회는 부르주아들이 안정적으로 자기 2세들에게 상류 계급의 지위를 물려주는 수단으로 "명품 교육자본" 전략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민중계급으로 추락할지 모른다는 공포에 휘말린 중간계급들이 격렬하게 반응하면서 이른바 미친 교육의 광풍이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답은 무엇인가? 글쎄? 그걸 다른 사람을 통해 들으려 한다면 이미 문제 해결의 기미는 사라지는 것이다. 답은 사실 스스로 이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부르주아들이 관심 가지지 않는 새로운 영역을 재가치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부르주아가 재가치화 하려는 시도에 맞서는 것이다. 전문경영인의 지식이라는 것이 별 유별난게 아니라 월급 조금 더 받으면 될 정도임을, 그들의 현란한 리스크 관리 기법이라는게 지난 금융위기에서 보인 것 처럼 앙상하기 짝이 없는 것임을 끊임없이 제기하는 것이다. 즉 동일한 목표를 향해 부르주아와 함께 절망적인 물량전으로 승부를 볼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영역을 끊임없이 재가치화 해 나가는 것이다.
물론 불안할 것이다. 하지만 그 불안때문에 더 큰 불안을 가져올 게임에 말려들어서는 안된다. 초등학교에서 인성교육한다고 하니 등수를 몰라서 불안해 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럴 경우는 인성이 등수보다 우선한다고 재가치화 하면 되는 것이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천만에, 이미 현실도 그렇다. 보지 않아서 모를 뿐이지. 이미 인플레이션 된 학력은 별 변별력이 없다. 굳이 몇몇 한정된 직업을 고집하지 않는다면, 세상에는 아름답게 살아갈 방법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없으면 만들면 된다. 모르긴 해도 하나 만드는 쪽이 이 치열한 경쟁에서 이기는 쪽 보다 더 쉬울 것이다.
이상이 부르디외의 통찰력을 빌려서 서술해본 교육문제의 핵심이다. 어쩌면 부르디외를 빙자한 나의 사유일지도 모르겠다. 혹은 내가 오독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여기서는 요 정도 해 두고 나머지는 좀 더 공부한 다음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
이글루스 가든 - 자유로운 아이들, 아름다운 교육을...
하지만 부르디외의 독창적인 개념은 바로 '자본전환'이다. 즉 경제, 문화, 관계자본의 복합구조가 지배계급을 결정할 뿐 아니라, 경이들 각각을 소유한 계급내 분파는 자신이 보유한 자본이 다른 종류의 자본과도 호환될수 있도록 전환을 꾀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배계급이나 중간계급 내에서는 각각 세 분파가 치열한 경쟁과 투쟁을 벌인다. 노동자 계급은 위의 셋 중 어느것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이 대열에서 밀려난다.
예를 들면 지배계급 내에서도 부르주아들은 자신들이 가진 경제자본을 문화자본으로 전환시키려고 한다. 특히 문화자본 중에서도 학력자본으로 전환시키려고 한다. 과거에는 투자했기 때문에 이윤을 가져갔지만, 오늘날의 부르주아는 공식적으로는 전문경영인으로서 고액의 연봉을 받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서 그들은 회사가 망하지 않는 한 안정적인 고소득을 누릴수 있다. 이렇게 되면서 주로 학력자본을 무기삼아 노동자계급보다 우위에 서 있던 중간계급들에게 비상이 걸렸다. 공부만 열심히 시키면 교사의 자녀가 교수가 되고, 사무직 노동자의 자녀가 변호사가 되는 등의 수직이동이 봉쇄된 것이다. 안 그래도 치열하던 학력경쟁의 터에 과거에는 무관심했던 부르주아의 자녀들이 뛰어들었다. 더구나 이들은 학업능력보다는 경제력에 의해 학력사다리가 결정되도록 갖가지 게임의 왜곡을 시도한다. 심지어는 학력, 지식, 문화의 전반적인 재가치화를 통해 부르주아 문화에 가까울수록 보다 높은 학문, 지식이 되도록 만들어버린다. 이를테면 대학교수 안에서도 경영학 관련 교수들은 높은 지위처럼 되는 반면, 문사철 교수들은 중등 교사와 별 차이 없는 지위로 추락하는 현상들이 그렇다.
이런 새로운 북새통 속에서 중간계급은 자신들의 학력자본을 더욱 증가시킴으로써, 즉 더 빡세게 공부함으로써 이 위기를 극복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 결과는 사회 전반에 만연한 학력 인플레이션이다. 그 결과 10년전과 동일한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그때보다 훨씬 더 높은 등급의 학력 수준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는 직업없이 학업에 열중해야 하는 기간이 30대 이후까지 연장될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만으로도 중간계급이 부르주아와 싸워 이기기에는 턱없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개미지옥같은 학력경쟁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2000년대 들어 비로소 계급 구조가 공고해지기 시작한 한국사회는 부르주아들이 안정적으로 자기 2세들에게 상류 계급의 지위를 물려주는 수단으로 "명품 교육자본" 전략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민중계급으로 추락할지 모른다는 공포에 휘말린 중간계급들이 격렬하게 반응하면서 이른바 미친 교육의 광풍이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답은 무엇인가? 글쎄? 그걸 다른 사람을 통해 들으려 한다면 이미 문제 해결의 기미는 사라지는 것이다. 답은 사실 스스로 이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부르주아들이 관심 가지지 않는 새로운 영역을 재가치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부르주아가 재가치화 하려는 시도에 맞서는 것이다. 전문경영인의 지식이라는 것이 별 유별난게 아니라 월급 조금 더 받으면 될 정도임을, 그들의 현란한 리스크 관리 기법이라는게 지난 금융위기에서 보인 것 처럼 앙상하기 짝이 없는 것임을 끊임없이 제기하는 것이다. 즉 동일한 목표를 향해 부르주아와 함께 절망적인 물량전으로 승부를 볼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영역을 끊임없이 재가치화 해 나가는 것이다.
물론 불안할 것이다. 하지만 그 불안때문에 더 큰 불안을 가져올 게임에 말려들어서는 안된다. 초등학교에서 인성교육한다고 하니 등수를 몰라서 불안해 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럴 경우는 인성이 등수보다 우선한다고 재가치화 하면 되는 것이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천만에, 이미 현실도 그렇다. 보지 않아서 모를 뿐이지. 이미 인플레이션 된 학력은 별 변별력이 없다. 굳이 몇몇 한정된 직업을 고집하지 않는다면, 세상에는 아름답게 살아갈 방법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없으면 만들면 된다. 모르긴 해도 하나 만드는 쪽이 이 치열한 경쟁에서 이기는 쪽 보다 더 쉬울 것이다.
이상이 부르디외의 통찰력을 빌려서 서술해본 교육문제의 핵심이다. 어쩌면 부르디외를 빙자한 나의 사유일지도 모르겠다. 혹은 내가 오독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여기서는 요 정도 해 두고 나머지는 좀 더 공부한 다음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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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 2009/03/30 22:45 | 교육에 대해 생각하기 | 트랙백 | 덧글(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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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7906
인플레가 급진적으로 이루어진 학력은 저도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사람들은, 혹은 기업은 그 차이를 만들어내고자 하게 되지요. 그래서 20대 스펙이라는 단어가 생기게 된 걸 겁니다.
안타까운것은 몇몇 한정된 직업 외의 직업들조차도 재단할 자신들의 기준을 상실함으로써 저런 스펙들을 기준으로 삼게 되가는 현실이겠지요. 지하철공사 매표원들의 학력을 볼 때마다 복장이 터집니다.
내용에 공감하며 저같은 중간계급도 안되는노동자가계급인 제가 강남에서 혼자 살면서 이 속에 겹겹히 쌓여 경제자본과 사회자본 모두를 가지고 있는 견고한 집단에 도전하기조차 어렵다는 두려움을 느낍니다...좋은 글 잘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