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 물음을 던지는 존재, "당신은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앨 고어의 "불편한 진실"에 보면 고어의 고백이 나온다. 아들이 교통사고로 입원해 있던 한달간, 성공과 명예를 추구하며 바쁘게 살던 그 상황에서 잠시 벗어난 순간 문득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남은 인생의 시간을 무엇을 하며 채울 것인가?"를 진지하게 물어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것이 고어가 환경운동에 투신한 이유이며, 오늘날의 앨 고어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많은 함의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많은 함의를 압축하면 "인생은 하나의 물음과 그것에 대한 답의 모색과정이다."라는 말로 압축될 것이다. 그런데 물음을 던지고 답을 찾는 과정은 다른 말로 하면 '탐구'라고 하니, 인생은 부단한 탐구의 과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탐구란 허공 속에서 허황된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 답을 찾는 과정에서 소요되는 여러 정서적, 지적인 자원을 획득하는 과정을 포함한다. 자신이 사용할 정서적, 지적 자원을 획득하는 과정을 일컬어 "학습"이라 한다. 따라서 인생은 기나긴 학습의 과정이다. 학습 하기에 인생이며, 인생이기에 학습한다. 존 듀이는 삶(경험)과 교육을 분리된 과정으로 보는 것이 잘못임을 끊임없이 지적했다.

이제 눈을 교사에게 돌려본다. 교사는 무엇인가? 가르치는 것을 자신의 업으로 삼는자다. 그런데 이 직업의 역사는 매우 짧다. 100여년 전만해도 가르치기만 하는 업은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그 시대에도 초심자는 배워야 했다. 그러나 초심자를 가르치는 것만 일로 삼고 있는 그런 직업은 따로 있지 않았다. 초심자를 가르치는 자는 그 자신도 그 분야에서 계속 일하고, 수련하는 자였다. 즉 그 자신도 끊임없이 학습하는 그런 자였다. 이는 이른바 장인들의 세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흔히 최초의 직업적 근대 교육자라고 불리는 코메니우스도 그의 교육학적 업적이 가려져서 그렇지 당대의 철학적 논쟁에 꼬박꼬박 참여하고 스피노자, 라이프니쯔와 어깨를 나란히 한 대철학자였다. 이 전통의 그림자는 아직까지도 대학 교수와 고등학교 철학교사가 같은 자격증을 사용하는 프랑스에서, 혹은 수준 높은 인문학 계역 과목을 가르치는 교사를 professor라고 부르는 영국이나 미국에 남아있다. 이 그림자 속에는 여전히 그 분야에서 정진하고 학습하면서 학생들을 그 길에 입문시키는 그런 지식인의 상이 남아있다.

이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다. 일제 강점기에만 해도 적어도 민족 사학의 교사들은 일종의 연구자의 상을 가지고 있었다. 일반 민중들이 생소해하고 어려워하는 새로운 지식의 세계에 먼저 뛰어들어 연구하고 그 결과물들을 신참들에게 전해주는 그런 지식의 선도자들이었다. 따라서 교사란 많은 답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아니라 많은 물음을 가지고 있는 존재다. 물음이 많기에 공부를 하고, 그래서 남을 가르치는 것이다. 이런 전통은 교사에게 지식의 선구자가 아니라 기존의 것을 전달하는 도구의 지위를 강요받던 70,80년대에 엄청난 불만과 분노로 누적되었고, 그 결과가 전교협, 전교조로 터져나왔던 것이다. 초창기 전교조 운동의 선구자들은 누구보다도 많은 질문을 가지고 있었던 교사들이었다. 당연한 것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비판의 수술대위에 과감히 올려 놓았던 그런 지식인들이었다.

그러나 이 전통은 지금 어디로 갔는지 알 길이 없다. 이제 교사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설명하지 못하고 의문을 품지도 않는다. 전교조 지도자들도 이제는 20년전에 자신들이 나름 찾았다고 생각했던 답을 의심하지 않고 그것을 도그마로 만들어버렸다. 질문을 던졌다는 이유로 해직까지 감수했던 그들은 이제 수많은 질문들을 금기의 영역에 가두어 두는 정신적 만행까지 저지르고 있다. 하물며 다른 교사들이야?

사회교사가 사회책에 나온 내용을 가르친다. 그러나 그 내용을 사회과학적으로 탐구해 본적은 없다. 그 내용이 해당 사회과학 분야에서 어떤 위치와 의의를 가지고 있는지, 다른 설명이나 논쟁은 없는지 따져본 적도 없다. 사회라는 교과를 왜 배워야 하는지를 수능의 주요과목이라는 것 외에는 다른 이유를 대어 설명하지도 못한다. 과학교사가 과학책에 나온 내용을 가르치지만, 스스로 어떤 이론을 세워서 작은 실험이라도 해 본적이 없다. 자기 분야의 새로운 학설이나 실험결과가 나왔을때 그걸 자기 것으로 만들어 나가는 능동적인 학습을 하지도 않는다. 과학을 왜 배워야 하는지, 심지어는 과학이 무엇인지도 설명하지 못한다. 그들은 사회라는 과목을 과학이라는 과목을 가르치고는 있으나 그들이 가르치는 내용이 실제로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더욱 심각한것은 기술, 가정, 체육 같은 과목들이다. 기술교사가 있다. 그러나 그는 기술자가 아니다. 그렇다고 기술에 대해 비평할수 있는 존재도 아니다. 기술이라는 교과서가 있지만 도대체 이게 뭘 가르치고 배우는건지 딱 부러지게 말할수 없다. 체육교사가 있다. 그는 무엇을 가르치는가? 신체를 건강하게 단련시키는 것을 가르치는가, 아니면 스포츠 기능을 가르치는가, 아니면 유신시대의 흔적인 국민동원 집체 훈련의 흔적을 이어가고 있는가?

이들의 공통점은 교육과정에 따라 편성된 교재를 가르친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고민한 결과물도 아니고, 그들이 학습한 결과물도 아니다. 새 교과서가 나오면 재빨리 그걸 읽고 대충 요약해서 학생들에게 전달할 뿐이다. 그게 전부다. 그래서 교사라는 말보다 선생이라는 말이 보편적이 되었는지 모른다. 단지 조금 먼저 알았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권위의식은 여전히 100년 전의 스승의 대우를 바라고 있다. 그래서 충돌이 일어나는 것이다.학생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그냥 교과서를 읽으면 다 알수 있는 내용을 조금 먼저 알았다는 이유로 앞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에게 그 정도의 대접만 해 주어도 충분하지 않은가? 왜 그 이상의 권위를 요구하는가?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니 "선생님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따위의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이다.

교사들은 우선 질문하는 존재로 돌아와야 한다. 그리하여 스스로 학습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가르침의 의미도 되살아나고 가르치는 존재로서 자신의 삶도 가치있어지며, 학습하고 가르치는 귀중한 경험을 가로막는 낡은 장벽들의 무엇인지도 알게되면서, 무엇에 대해 분노하고 무엇을 비판해야 하는지도 알게된다.

그렇다면 무슨 질문을 먼저 할까?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질문은

"나는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그 다음 질문은 "그것은 가르칠만한 가치가 있는가, 있다면 무엇인가?" 가 될 것이다.
이글루스 가든 - 자유로운 아이들, 아름다운 교육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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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정변증법 | 2008/12/04 14:17 | 교육에 대해 생각하기 | 트랙백 | 덧글(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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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정훈군 at 2008/12/04 14:34
정말 멋집니다.
전 교사는 아니지만 야학이나 성당 교리등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경험을 해봤는데. 굉장히 어렵더군요.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게. 내가 가르치는 것이 옳은 것인지. 과연 이것이 아이들에게 어떻게 작용할 것인지. 나는 누군가를 가르칠만한 존재인지. 내가 알고 있는 미약한 지식을 넘어서는 절대적 진리를 알지 못하면서 무언가대해 말한다는 게 얼마나 우스울지등등. 정식 직업도 아닌데 항상 고뇌하게 되더군요.

정말 쉽지 않은 직업이라고 생각하고 훌륭한 교사는 존경받아 마땅하고 그만큼 대접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근데 요즘 너무 쉽게 쉽게 가르치는 사람들이 많아서 안타까울뿐이죠.

Commented by 부정변증법 at 2008/12/05 05:53
교사든 아니든 누구나 아이들과 성장하며 교감하는 사람은 모두 교육자입니다. 알량한 정보 전달하는 그런 사람들은 그 지위가 아무리 높아도 교육자는 아니죠
Commented by 나의르미 at 2008/12/04 16:21
좋은 글이네요. 읽으면서 조금은 지친 주변의 선생님들이 떠올라요.

저의 경우는, 지금 학교에 오게되어서 첨엔 많이 힘들었는데(수능보는 학생이 없는 고등학교에요) 세학기 지나니까 입시와 상관 없는 곳에서 영어를 가르칠 기회를 갖게되어 행운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납득하지 않으면 절대로 하지 않는 아이들이기에, 나부터 왜 이걸 해야하는지 이유를 찾아야 하니까 고민을 많이 할 수 있었거든요. ^^ (계속 현재진행형일듯 이 고민;;)
Commented by 부정변증법 at 2008/12/05 05:54
아이들에게 질문을 던질수 있게 만들기.. 결국 프레이리가 말한 문제제기식 교육이죠. 수능보는 고등학교에서도 질문을 던질수 있어야 하는데....
Commented by Bohemian at 2008/12/04 18:16
물음이 있는 사람이 가르쳐야한다...
가르치는 사람이 되려는 사람으로, 나는 '공부'에 관심이 있는 자인가 반성해봅니다.
Commented by 부정변증법 at 2008/12/05 05:54
반성한다는 것은 이미 공부하는 것이죠
Commented by 한단인 at 2008/12/04 20:51
글을 쓰신 목적과 크게 관련은 없겠으나...

예전에 공부에 전혀 관심없던 군대 후임이 왜 학교 공부를 해야하는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물은 것에 대해 전 제대로 답을 해줄 수 없었는데 이 대목이 적확한 답이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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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많은 함의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많은 함의를 압축하면 "인생은 하나의 물음과 그것에 대한 답의 모색과정이다."라는 말로 압축될 것이다. 그런데 물음을 던지고 답을 찾는 과정은 다른 말로 하면 '탐구'라고 하니, 인생은 부단한 탐구의 과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탐구란 허공 속에서 허황된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 답을 찾는 과정에서 소요되는 여러 정서적, 지적인 자원을 획득하는 과정을 포함한다. 자신이 사용할 정서적, 지적 자원을 획득하는 과정을 일컬어 "학습"이라 한다. 따라서 인생은 기나긴 학습의 과정이다. 학습 하기에 인생이며, 인생이기에 학습한다.
Commented by 부정변증법 at 2008/12/05 05:59
문제는 이게 왜 공부해야 하는지에는 답이 되어도, 그게 왜 학교냐에 대한 답은 못된다는 것입니다.
Commented by 한단인 at 2008/12/05 12:25
적어도 공부에 아주 관심이 없는 아이들에게는 조금이라도 소용되지 않겠습니까?
Commented by 부정변증법 at 2008/12/05 12:39
도저히 학습할 시간과 여유가 안되는 계급에게 학교가 필요합니다. 학교 정책도 바로 그런 점에 입각해야 합니다.
Commented by 보리밭 at 2008/12/04 21:19
제 가르침에 대해 반성하고 다시 고민합니다. 교사들에게 이런 마음들이 점점 사라져가는 것 같아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Commented by 부정변증법 at 2008/12/05 05:55
저도 점점... 결국 이 교직을 붙들고 늘어지고 있는 이유가 목구멍만 남게 될때 정말 비참해 지는건데... 많은 선생님들이 이미 비참한 상태에 있으면서도 그걸 모르고 있으니... 그러면서도 '노동자'라는 말에는 거부감을 가지고 있으니..
Commented by 아큐라 at 2008/12/04 22:50
영어교사에게는 사치스러운 담론입니다. ㅠㅠ

2학기 들어 새로이 원어민이 왔는데 전임자는 그래도 테솔을 이수해서인지 경력이 그래도 있어서인지 뭔가 수업을 했는데, 이번 원어민은 아주 미치겠습니다. 애들도 정말 갈수록 악다구니같고 괴물같고,,, 아예 제가 수업 중간에 빠지고 내버려 둔 적도 있어요.

이런 수업을 위해 들어가는 예산이 거의 1인당 1억에 가깝다니,,, 나의 세금은 대체 ㅜㅜ
Commented by 부정변증법 at 2008/12/05 05:58
지구제국의 시대에서 저항은 지구적으로 조직되어야 하겠죠. 영어는 매우 중요합니다. 자신들의 상황, 불의한 상황을 영어를 통해 지구적으로 인식할수 있다면... 나는 우리나라 진보진영의 지리멸렬이 영어와 컴퓨터에 둔해서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Commented by 아큐라 at 2008/12/05 08:38
허걱~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저는 영어를 가르친다는 의식은 이미 사라졌고요. 광고나 우화나 그저 정보에 불과한 기사들도 새로이 (번역이 아니라) 해석을 하고 뒤집어 재해석을 하는 과정을 '보여 주기'를 주로 시도하는데요. 뭐 다 제 탓이겠지만, 애들의 주목과 관심을 얻는데는 늘 실패합니다.
Commented by 부정변증법 at 2008/12/05 08:59
이번 촛불국면에서 정부의 거짓부렁을 번번히 영어 원문 입수를 통해 폭로하는 집단지성의 힘을 보면서 영어의 중요성을 실감했습니다. 어떤 어휘를 통해서 영어를 배우는가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프레이리의 문해교육처럼, 아이들에게 문제제기가 되는 어휘들에서부터 출발한다면 영어도 대단히 중요한 과목이 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고등학교쯤 되면.... 저는 사회 시간에도 외국 시사잡지 같은 거 발췌해서 나눠주기도 하는데, 영어샘들이 절대 안 도와주더라고요. 사실, 장차 만쓸리 리뷰, 뉴레프트 리뷰 같은 보물 창고들을 이용할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않고서 어떻게 진보진영의 발전을 이끌어내겠습니까?
Commented by 제절초 at 2008/12/05 08:48
저는 그래서 늘 先生이 되고 싶었습니다.
제가 교단에 서면 올바른 선생이 될 수 있을까요.
저에게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이 하나의 의미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Commented by 부정변증법 at 2008/12/05 08:59
학교 밖에서도 선생은 늘 가능합니다. 물론 학교 안에서라면 더 유리하겠지만
Commented by 아큐라 at 2008/12/05 12:39
2004년 입시에서 서울대 면접 영어 제시문에 '공산당 선언'이 나온 적이 있지요. 그 이후에 좀 빨간 글이나 '세계 인권 선언'같이 그야말로 중도적인 글을 수업에 이용해봤는데요. 결론만 간단히 말하자면, 부정변증법 님이 생각하시는 수준은 보통공민교육에서는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높은 기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하신 '문제제기가 되는 어휘들'은 내년에도 영어수업을 하고 있게 된다면, 수업에 아주 많은 참고와 시사가 될 것 같네요. 고맙습니다.
Commented by 라이히 at 2008/12/06 17:28
잘 읽었습니다. 물음을 던지는 존재? 너무 밋밋한거 아닙니까? 선가에서 스승이야 물음을 던지는 존재라고 할수 있겠지만, 국가의 에이젼트인 현상을 너무 미화하는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치유하는 글쓰기란 책을 보니 이런류의 댓글이 project라고 하더군요...이해해주십쇼...ㅋㅋㅋ). 샘님의 글을 읽으면서 왜일까, 칸트 흔적이...^^ 솔렌,세인...! 선생들이여, 이 돌팍들이여, 존나 공부좀 해라...니들이 공부좀 하면서 갈쳐라...이런 꾸짖음을 '존재'적 차원, 형이상학적 명제에서 쎄려재끼시니 대충 매져키즘으로, 나좀 쎄려주시오, 그러면, 나는 오르가즘 느끼리라...는 꼰대들에게는 매우 뜬금스런 글인듯도 싶습니다만, 존재가 아닌 뜨거운 욕동들, 아랫도리부터 시작해서 구성해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 우린 꼰대 이야기는 너무 많이하고(예를 들어 전교조), 학습, 배움 이야긴(학생들이란 존재들?)너무 덜하지 않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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