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 탈근대, 그리고 헤겔(2)

보편성의 마르크스, 해체의 마르크스


마르크스는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젊은 시절 헤겔에 심취했었다. 그리고 이후 헤겔을 수없이 비판했지만, 후세에게 어떻게든지 헤겔과의 연관 속에서 혹은 그  울타리 안에서 자신의 사유의 꽃을 피운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때로는 마르크스 자신이 그러한 오해를 살 만한 언동을 자주 하곤 하였다. 이를테면 "거꾸로 선 헤겔을 바로잡아서 그 합리적 핵심을 취해야 한다."라는 이후 수 많은 논란을 야기한 말이 그렇다.

심지어 마르크스는 보편성 철학의 신화에 과학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세례를 안겨준 사람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에 알려졌던 마르크스주의는 포퍼가 비판한 바와 마찬가지로 과도한 일반화와 거대 이론의 폐해를 고스란히 현실화 시킨 역사주의이며, 개인의 의지를 말살한 숙명론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미 이런 잘못된 경향을 직감한 마르크스는 살아 생전에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라고 절규했지만, 본인의 희망과 달리 마르크스주의자로 자리매김되고 말았다. 이는 과거 동유럽 사회주의권에서 심하게 나타났다. 해방에의 동력, 유토피아적 상상력보다는 차가운 과학, 필연성이 더 중요시 되었다. 노동자계급 편에 서야 하는 이유는 그들의 승리가 필연적이기 때문이며, 사회주의자는 자신들이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법칙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보다 우월하다고 믿어야 했다.

그러나 20세기 중반을 넘어서면서 오랜 시간동안 옹호자 진영에게서나 비판자 진영에게서나 모두 골고루 받아들여져 온 신화, 즉 헤겔이 맑스를 잉태하였다는 신화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사실 지난 포스팅에서 보여주었던 서양 사상에서 보편성과 의지,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저 헤묵은 사상 대전 속에서 마르크스의 위치는 플라톤의 위치와 마찬가지로 대단히 혼란스럽다. 그 단적인 예가 헤겔가의 후예인 레닌주의자들, 그리고 범 헤겔가라고 할 수 있는 루카치, 프랑크푸르트 학파, 니체가의 후예인 푸코, 데리다, 가타리, 실증주의자라 할수 있는 에릭 라이트, 롸이트 밀즈, 심지어는 이 둘을 화해시키려고 하는 레비-스트로스, 부르디외, 기든스(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같은 구조주의자들이 저마다 마르크스를 자기들의 든든한 원군으로 집어넣고 있는 것이다. 이들 중 헤겔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은 찾아 낼 수 있겠지만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은 찾기 어렵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은 결코 비슷한 점을 찾아낼수 없는 전혀 다른 사상의 담지자들이라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결국 이현령 비현령 식의 수많은 마르크스주의를 만들어 내었다. 이런 일대 혼란 속에서 마르크스는 자기 입이 아니라  남의 입을 통해서 알려지게 되었다. 마르크스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말하는 사람들 중 실제 마르크스를 제대로 읽은 사람은 매우 드문 현상이 나타났다. 지구상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면서 가장 적게 읽힌 책이 “자본론”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한국의 경우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70년대에는 반공교재의 저자진들이나, 마르쿠제, 호르크하이머등의 저작을 통하여 마르크스와 만났던 진보적 교수, 강사들이나, 스탈린의 지휘 하에 만들어진 지극히 교조적인 마르크스주의 교과서에 의해 세뇌받은 386세대들이나 혹은 90년대에 주로 프랑스인으로 구성된 구조주의자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입을 통해 마르크스를 만난 문화비평가 그룹들이나 할 것 없이 저마다 마르크스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있고 할 말이 한 마디씩은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중 가장 영향력이 강했던 목소리는 스탈린의 교과서를 암기하다시피했던 386들의 목소리였다. 

그런데 그들 386들이 학습했던 이른바 이 정통 마르크스주의는 근본적으로는 헤겔주의에 닿아있었다. "헤겔의 논리학을 모르고서는 자본론을 이해할 수 없다"는 레닌의 철학노트의 한 마디는 너무도 당연히 마르크스 사상의 중요한 개념들을 헤겔의 범주들과 연결시키고 도식화시켰다.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자처하는 구 소비에트의 철학 교과서는 크게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변증법적 유물론”은 양질전화의 법칙, 정반합의 법칙, 부정의 부정의 법칙등 헤겔철학의 일부를 완전히 도식으로 만들어서 마치 수능대비 요점정리처럼 가르쳤다. "역사적 유물론"은 생산력과 생산관계, 토대와 상부구조, 계급투쟁 같은 개념들을 도식으로 가르쳤다. 세상에는 모두 모순이 있고, 이 모순은 대립하는 계급으로 나타나고, 이 대립은 혁명이라는 양질전환의 법칙에 따라 새로운 생산양식으로 지양되고, 하는 식으로 가르쳤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변증법적으로 구성된" 세계의 속성이기 때문에 필연적이었다. "자유는 필연의 인식"이라는 헤겔의 경구가 졸지에 마르크스주의의 경구로 변신하였다.

더 나아가서 이 교과서는 헤겔의 변증법에 포이에르바하의 유물론을 그리고 거기에 영국의 고전경제학을 더한 것이 마르크스주의이며 그중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헤겔의 변증법이라고 못을 박았다. 졸지에 마르크스의 사상은 그 주체가 정신이 아니라 물질로 바뀐 헤겔사상으로 둔갑하고 말았다. 즉 헤겔 사상의 연장, 또는 전도 정도로, 거의 대부분의 길을 함께 가다가 관념론만 유물론으로 바꾼 것으로(스탈린주의), 혹은 헤겔 변증법의 낙관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성격을 현실적이고 생동감 있게 바꾼 것으로(루카치) 간주되어 왔던 것이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의 입을 통해 알려진 마르크스주의에 기초하여 포퍼는 플라톤, 헤겔을 단죄할 때 부록처럼 마르크스를 집어 넣어 함께 심판하기에 이르렀다.

포퍼가 이 세 사람이 열린사회의 적이라며 단죄한 공통점은 결국 보편성, 그리고 그 보편성에서 야기되는 숙명성과 개인 말살 등이었다. 그런데 포퍼보다 헤겔에 더욱 강하게 도전했던, 아니 거의 헤겔을 분쇄하려고 했던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해체주의가 자신들의 젖줄 중 하나로 마르크스를 언급하는 것을 보면, 마르크스를 이렇게 전체주의의 원조처럼 단죄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의구심이 생길수밖에 없다. 게다가 역사상 가장 잔인했던 전체주의자들은 한결같이 마르크스를 혐오하고 증오했는데, 그게 과연 단지 우연이었을까? 심지어 공식적으로 마르크스주의 국가였던 소비에트, 동유럽에서 마르크스의 원전을 읽으려면 특별한 허가를 받아야 했고, 특히 북한에서 더욱 그렇다는 사실 역시 단지 우연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에는 오히려 전체주의에 반대되는 개별성의 그리고 해체의 힘이 숨어 있을 것이라는 가설을 세워볼 수도 있다.  그 해체의 힘 때문에 마르크스는 해체주의자들의 존경을 그리고 전체주의자들의 증오를 받았을 수 있다.

이제, 우리는 그 동안 보편성과 동일성에 사로잡힌 마르크스가 아니라 해체와 차이가 번득이는 마르크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마르크스를 이해하는 새로운 아이디어와 개념들을 캐어내게 할 수 있고, 비록 낡은 이론 취급을 받지만 분명 현존하는 어느 철학사상보다 세계 설명력이 큰 마르크스의 사상을 소중한 유산으로 활용할 새로운 길을 보여줄 수 있을것이다.

(음, 이렇게 말은 거창하게 해 놓고, 그 다음에 어찌해야 할지 막막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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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정변증법 | 2008/11/10 13:12 | 철학, 사회학 탐구 | 트랙백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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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사띠현정 at 2008/11/10 13:35
놀라운 해석! 맑스주의에서 "전체주의와 반대되는 개별성의 그리고 해체의 힘이 숨어 있을 것이라는 가설"을 찾아낸다! "해체의 힘 때문에 해체주의자들의 존경을" 받았다는 대목이 놀랍군요.

"해체와 차이가 번득이는 맑스"에 주목 새로운 아이디어와 개념! 소중한 유산으로 활용할 새로운 길!

마지막 괄호안의 문장은 안 적어도 되었을 성 싶은데. 하여튼 대단한 발견이고 자본 제대로 안읽은 저도 한번 님의 관점에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Commented by 사띠현정 at 2008/11/10 13:39
참고로 한국 불교에 조용히 일고 있는 '남방 위빠사나' 운동에 대하여 소개해 드립니다. 이 '운동'의 핵심에 '각묵스님'이라는 분이 한 분인데, 이 분의 남방불교에 대한 '이해'중 하나가 '해체주의'라는 것이죠!

북방불교는 '이것'을 찾고 발견하는 과정을 '깨달음'으로 상정하지만, 남방불교에서는 '이것'과 같은 것이란 존재하지 않고 연기의 법칙에 따라 생멸하는 '법'들이 있을 따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찾은 북방과 '법'의 생멸법칙을 꿰뚫는 남방의 차이인데, 남방붕교의 해체주의에 맞닿는 측면이 생명체를 오온의 가화합으로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오온의 가화합'중에서, '마음' 이것은 '불변'이라고 상정하고 이것을 '성품, 여래장, 불성, 참마음, 진여' 등등 '실체론'화 하여 찾은 과정이 북방의 체계인데, 남방에서는 '마음' 조차도 생멸하는 '디지털'에 불과할뿐 모든 '것'은 가장 단순한 '법'으로 환원되고 결국 '해체'된다는 것, 그 '법' 조차 연기의 법칙에 따라 생멸할 분이며 '마음'도 그와같은 여러 '법'중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인식!

이 해체주의 남방불교와 님이 찾아낸(낼) 해체적 맑스주의 어떤 연관이 있지 않을까요?
Commented by RedGhost at 2008/11/10 19:00
이종영씨의 책인 정치와 반정치에서는 맑스와 헤겔이 보편성 - 특수성 - 개별성 도식에서 개별성을 긍정했다고 하더군요. 반대로 개별성을 부정한 루카치를 비판하고요.
Commented by 『한군』 at 2008/11/10 19:03
이진경 선생이 꾸준히 헤겔로부터 맑스를 분리하는 작업을 하고 있으시죠.
Commented by 다이몬 at 2008/11/11 00:34
상당히 타당한 지적이고 몇몇 학자들이 이러한 논의를 했습니다. 과연 맋시즘이 알튀제의 과학이나 고답적인 헤겔식 도식과 같냐는 문제에 대해서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그의 후기 작품들같은 경우에는 그가 생각보다 아나키즘을 옹호하는 현상도 나타날 뿐더러, 일반성과 보편성과 과학성이라는 것의 틀거리에 대해 회의적이였다는 해석도 존재를 합니다. 어떤 이들은 레닌이나 엥겔스의 목소리가 맋스의 목소리로 잘못 해석되었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어쨋든 최근 영국에서 21세기에 새로운 맋스의 귀환을 이야기 했듯이, 맋시즘의 근원에 있는 자본주의의 근원에 대한 해체의 힘은 유효하다고 봅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프로레타리아와 계급혁명과 같은 교조적 해석이 아니라, 맋시즘을 얼마나 더 융통성 있게 현대에 적응시키고 다양성과 특이성을 고민할지가 문제시가 된다고 보여집니다.
Commented by 한단인 at 2008/11/11 01:47
예전에 '서발턴과 역사학 비판' 읽은 적이 있는데 그때 그 책에서 [자본의 '해체'를 통한 해방적 관점을 '서구적 모던'에 대한 해체로 방향을 돌린] 인도 사회주의 역사학자들에 의해서 서발턴 연구자 집단이 결성된 걸 보고 놀랐던게 생각난다능..

대략 그런 사정이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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