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 고전 읽기 -경제학 철학 노트(7)

원문) 우리는 하나의 정치경제학적 사실, 노동자의 그의 생산의 소외에서 출발하였다. 우리는 이 사실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소외된, 외화된 노동. 우리는 이 개념을 분석하였고, 그에 따라 단순히 하나의 정치경제학적 사실을 분석하였다.
이제 더 나아가 소외된, 외화된 노동이라는 개념이 현실 속에서 어떻게 표현되고 서술되어야만 하는지 살펴보자.

읽기) 지금까지 마르크스는 순전 경제학 범주 내에서 생산과정, 즉 노동을 분석했다. 그리고 그것을 소외된, 외화된 노동으로 정식화하였다. 그렇다면 이제 이것을 경제학이 아니라 현실의 언어로, 일상적인 현상으로 어떻게 서술해야 할까?

원문) 노동의 생산물이 나에게 낯선 것이고 나에게 낯선 힘으로 대립한다면 그것은 누구에게 속하는 것일까?
나 자신의 활동이 나에게 속하지 않으며, 낯선 활동, 강요된 활동이라면 그것은 누구에게 속하는 것인가? 나 이외의 다른 존재에게. 이 존재는 누구일까?
신들일까? 물론 고대에는, 예를 들면 이집트, 인도, 멕시코의 신전건축과 같이 주요 생산이 신에 대한 봉사로 나타날 뿐만 아니라 그 생산물은 신들에게 귀속되었다. 그러나 신들만 노동의 주인이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마찬가지로 자연도 결코 아니었다. 그리고 인간이 자신의 노동을 통해 자연에 숙달되면 숙달될수록 신들의 기적이 산업의 기적에 의해 불필요한 것이 될수록, 인간이 이러한 힘들의 보존을 위해 생산의 기쁨과 생산물의 향유를 포기해야 하다니 이 무슨 모순이란 말인가?

읽기) 이제부터 아주 단순하고 쉬워진다. 노동의 생산물이 나에게 낯선것이 된다면, 내가 만든 생산물이 나에게 대립한다면, 생산물이 스스로 생물이 되어 활동하지 않는 다음에야, 다른 누군가의 것, 다른 누군가에게 속하는 것이 될 것이다. 내가 하고 있는 활동, 노동이 내가 하는 일 같지 않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분명 다른 누군가에게 속하는 것, 즉 내가 다른 누군가를 위해 하는 일일 것이다. 이건 당연하다. 그렇다면 아주 간단한 문제, 내 생산물은 누구에게 속하며, 나의 노동은 누구를 위한 노동인가?
고대에는 신을 위해 그런 일들을 했다. 이것이 포이어바흐의 이론이다. 인간은 자신의 유적인 힘을 신으로 만들었고, 급기야 사진의 긍정적인 힘과 노동을 신에게 돌렸다. 앙코르왓 같은 거대한 건축물을 보면 존재하지 않는 신이 얼마나 많은 인간의 노동력을 가져갔는지, 마야, 아즈텍 같은 경우에는 심지어 살아있는 인간을 제물로 챙겨갔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다. 산업의 기적, 즉 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라 인간은 신에게 자신을 바치지 않는다. 신으로부터 해방! 종교개혁, 칼뱅주의는 바로 신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일하라는 선언이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분명 오늘날 일부 광신도를 제외하면 신을 위해 일하지 않고, 신에게 자신과 그 생산물을 바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한결 여유롭고, 더 풍성해야 하는데, 이게 웬일인가? 자본주의, 후기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떤 면에서는 중세인들보다도 여유가 없다. 그리고 생산, 노동은 점점 고역이 되고있다. 이게 무슨 역설인가?

원문) 노동과 노동의 생산물이 귀속되는, 노동이 그것에게 봉사하며, 노동의 생산물을 향유하는 낯선 존재는 오로지 인간 자신일수밖에 없다. 노동의 생산물이 노동자에게 속하지 않고 낯선 힘으로 그에게 대립한다면, 이는 그 생산물이 노동자 이외의 다른 인간에게 속함으로써만 가능하다.
그의 활동이 그에게 고통이라면, 다른 사람에게는 향유이고, 생활의 기쁨일수밖에 없다. 신들도 자연도 아닌 오직 인간 자신만이 인간을 지배하는 이런 낯선 힘일 수 있다.

읽기) 자, 이제 신은 빼자. 신이 빠졌는데도 불구하고 생산물, 노동이 노동하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다른 사람의 것일수 밖에 없다. 음, 여기에 대해서는 마르크스가 뒤르켐이 제시한 "출현적 현상"으로서 사회, 그리고 하나의 사물로서 "사회적 사실"이라는 개념, 즉 구조주의적 개념을 개발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보니, 내가 빼앗긴다면 누군가가 빼앗는 것이라는 단순한 논리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하여 나의 고통은 너의 기쁨의 관계로 제시하고 있다. 어쨌든 여기서 마르크스는 소외론에서 착취론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보면 된다.

원문) 자기 자신에 대한 인간의 관계는 다른 인간에 대한 그의 관계를 통해서 비로소 그에게 대상적이고 현실적이라는, 앞서 제시한 명제를 좀 더 살펴보자. 따라서 인간이 낯설고 적대적이며, 강력한, 그에게 독립적인 대상으로서 그의 노동의 생산물, 그의 대상화된 노동에 관계할 때, 이 관계는 다른 사람이 낯설고 적대적이며, 강력한, 그에게 독립적인 대상의 주인임을 암시한다. 만약 그가 부자유스러운 것으로서 자신의 고유한 활동에 관계하고 있다면, 이는 그가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는 지배, 강제, 질곡 아래에서의 활동과 관계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 그리고 자연으로부터의 모든 인간의 자기 소외는 인간이 자신과 자연을 자신과 구별되는 다른 사람에게 위치시키는 관계 속에서 나타난다. 그런 까닭에 종교적인 자기 소외는 필연적으로 사제에 대한 평신도의 관계 속에서, 또는 여기서는 영적인 세계가 문제이므로 중보자 등에 대한 평신도의 관계 속에서 나타난다. 실천적이고 현실적인 세계에서 자기 소외는 다른 사람에 대한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관계를 통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 소외가 생겨나는 매개는 그 자체로 실제적이다. 그러므로 소외된 노동을 통해서 인간은 그 자신과 낯설고 적대적인 힘인 생산 대상의 관계를 만들어 놓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 자신의 생산과 자신의 생산물에 대해 맺고 있는 관계, 그리고 그가 이러한 다른 사람과 맺고 있는 관계도 만들어 놓는다. 그가 자기 자신의 생산을 그의 현실성 박탈로, 그의 형벌로, 그가 자기 자신의 생산물을 상실로, 그에게 속하지 않는 생산물로 만들어 놓는 만큼, 그는 생산과 생산물에 대한 생산하지 않는 사람의 지배를 만들어 놓는다. 그가 자기 자신의 활동을 자신에게서 소외시키듯이, 그는 낯선 사람이 그 자신의 것이 아닌 활동을 획득하게 한다.

읽기) 즉, 소외된 노동은 다른 누군가가 그 노동의 주인임을 보여준다. 그것이 소외된 노동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사실 이 부분은 마르크스의 독창적 아이디어라기 보다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에 나오는 유명한 '주인과 노예의 비유'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주인과 노예의 비유를 포이어바흐의 유물론과 연결지음으로써 독특한 결론을 얻은 것이다.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비유는 존재론적이다. 실제 주인과 노예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이라기 보다는 존재론을 설명하기 위한 비유인 것이다. 그 내용은 자립적 의식인 주인은 스스로를 주체로 확인하는 의식이면서 동시에 노예인 비자립적 의식을 통해서 자신을 의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즉, 주인이 자신의 자유를 의식하기 위해 그 대립물, 자유롭지 못한 사람, 노예에 비추어서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헤겔은 이를 지양되어야 할 분열로 보며, 소외로 본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이를 의식에 대한 비유가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로 돌려 놓았다. 그리고 이를 자립적 의식, 주인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비자립적 의식, 노예의 입장에서 바라본 것이다. 비자립적 존재, 노예, 그리고 노동자는 자신의 비자립성을 앞에서 제시한 소외의 형태로 경험한다. 죽도록 일을 하는데, 그 결과물은 자기에게 속하지 않는다. 일하는 주체는 자신인데, 그 일, 그 활동이 자신을 고통스럽게 한다. 그리고 인류라는 말을 알고 있는데, 자신은 그 구성원이 아닌것 같다. 더욱 기가 막힌것은 열심히 일하면 일할수록 자신을 옥죄는 그런 고통스런 현상은 더 강화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현상에 불과하다. 그 현상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자기 아닌 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노동을, 자신의 노동생산물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소외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향유가, 헤겔식의 말을 빌리면, 자신의 소외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존재의 확인, 자아실현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헤겔의 주인-노예 변증법의 그 다음 이야기를 전개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이 관계가 주인에게도 부정적인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주인의 경우 자신의 존재를 확증하기 위한 거울이 천하디 천한 노예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도리어 주인이 노예에게 의존적인 관계가 된다. 노예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다 해서 주인이 자아실현을 하지는 않는다. 반면 노예는 직접 자연에 자기 힘을 가해 노동을 함으로써 자아실현을 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이 대목을 거부하는 것으로 보인다. 노예는 자연에 자기 힘을 가해 자아실현을 할 수 있을런지 모르지만, 근대 산업 노동자는 그 마저도 불가능하다. 생산수단이 자연이 아니라 이미 다른 누군가의 소유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주인이 자아실현이 불가능하다는 헤겔의 정식도 거부하지는 않는다. 결국 자본주의는 자본가와 노동자 모두가 소외되는 그런 체계로 규정될수밖에 없다.
스탈린주의자들과 결국은 스탈린을 정당화한 알뛰세르는 마르크스의 이 책, 경제학철학 초고를 거부했다. 그리고 소외론은 관념론적 마르크스, 잉여가치론이 진정한 마르크스라고 분리하였다. 그러나 이 대목은 그들의 해석이 잘못되었음을 보여준다. 소외론과 착취론(잉여가치론)은 한 몸인 것이다. 그것은 현상과 본질의 관계에 있다. 착취로 인해 소외가 발생하며, 다시 이 소외가 그 착취관계를 강화하는 것이다.
어쨌든 여기서 마르크스는 자신의 평생을 지배하는 방법론을 획득했다. 그것은 현상을 먼저 관찰하고, 그 현상들의 관계를 기술한 뒤, 그 이면에 숨어있는 본질을 추적하는 것이다. 그것을 그는 나중에 정치경제학비판 서설에서 "추상에서 구체"라는 용어로 정식화 하였다. 그러나 이 문헌에서는 그러한 마르크스의 방법론의 정수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추상적인 수준에서 논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방향은 분명히 보이고 있다.

by 부정변증법 | 2008/11/05 09:45 | 마르크스 읽기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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