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1월 21일
10년전에 썼던 아주 긴 교단 일기
10년전 너무 가슴이 아프고 마음이 심란해서 기나긴 일기 비슷한 글을 썼었나 봅니다. 컴퓨터 하드를 정리하다 우연히 발견한 글인데, 느낀바가 있어 블로그에 올려봅니다.
말 그대로 수필-마구 붓 가는 대로, 나의 실존, 내면세계의 무제한 표출
나는 강남출신이다. 그리고 나는 80년대에 대학을 다녔다. 80년대. 그 시대는 정말 독특한 시대였다. 젊은이들은 믿을수 없겠지만 나는 대학 4년 내내 우리 집이 부유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해야 했고, 심지어는 저주해야 했다. 내가 배 불리 먹고, 넉넉하게 살고, 그리고 여유 있게 국립대학을 다닐 수 있는 것은 천만 노동자의 피눈물 나는 희생과 억압 덕분이라는 그 무거운 부채의식 때문이었다. 이 부채의식은 80년대에 대학을 다녀보지 않은 사람이 쉽게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 시절에 대학을 다녔던 사람이라면 아주 손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나름 다른 강남 녀석들과는 다르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스스로를 자본주의의 뻔뻔한 수혜자가 아니라, 민중을 위해 스스로의 기득권을 버릴 각오가 되어있는 전투적인 지식인이자 노동계급의 전위투사로 여겼다. 그래서 그 한심한 짓을 함께 공유했던 고등학교나 중학교 동창들과도 거의 만나지 않았고, 연락을 끊었다. 친척들, 특히 부유한 외가쪽 친척들을 노동계급의 적으로 간주하고 연락을 끊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 시절은 대학생들이 어떻게 해서든지 서로 가난해 보이려고 애썼던 시절이다. “세련되었다.”라는 말이 결코 칭찬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강남출신이라는 것은 80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나에게는 일종 의 원죄와 같은 것이었고, 그 원죄를 씻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곱절, 몇 곱절 더 헌신적으로 투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무거운 원죄의식, 나 뿐 아니라 거의 모든 거시기 국립대학생들이 가지고 있었던 그 수많은 원죄의식들은 세월이 가고, 나이가 먹어감에 따라 그 탄생의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잊혀져 갔다. 나는 스스로를 6월의 아들이라 부르며, 내가 아스팔트위에 뿌린 청춘의 시간들을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지만, 어쨌든 그건 그냥 지나가 버린 이야기이며, 한 때의 무용담이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잊혀져간 그 시절의 그 기억들, 그 원죄의식이 다시 살아나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시절 웬디스에서 벌였던 그 치기어린 짓거리가 1997년, 당시만 해도 무척 가난한 지역이었던 암사동에 있는 한 중학교에 부임하면서부터 결코 웃어넘길 추억만으로 떠오르지 않게 되었다. 1996년까지 강남구의 도곡 중학교에서 근무하면서 피자를 사주고 베니간스에서 식사를 사 주어도 아무 감동없이 너무도 당연하게 덤덤하게 받아먹던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떡볶이 500원어치에 한없이 감동하는 아이들과 함께 분식집에서 만두와 순대를 먹는 상황에 처하자 그놈의 원죄의식이 다시 솟구쳤던 것이다. 이제는 그것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이제는 거의 잊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원죄의식은 점점 생생하게 되살아나며 나를 밤새 뒤척이게 만들었다.
사실 나는 대학교 때 치열하게 싸우고 고생했던 것으로 원죄를 충분히 대속 했다고 생각하며 나름대로 떳떳했었다. 그래서 도곡 중학교에 발령이 났을 때 고향에 돌아온 것 같은 편안함 속에서 근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선릉역과 역삼역 사이에 자리 잡은 그 동네는 지하철 3호선의 종점이 양재에서 수서로 바뀌었다는 것 빼고는 내가 학교 다닐 때의 모습에서 거의 변하지 않았고, 아이들은 교복이 생겼다는 것을 빼면 나의 어린 시절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 아이들은 얼굴을 보면 그 즉시, 저놈은 내 어린 시절이군, 아 저놈은 내 친구 진수의 어린 시절 같고 하며 손쉽게 친근감을 느낄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은 나의 갸냘픈 향수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나는 그곳에서 마치 나의 어린 시절 같은 그런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지금까지의 내 인생에서 이물질처럼 끼어있던 대학 4년, 아니 5년간의 기억에서, 그 아픔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얼마나 행복했던가? 거칠고 교양 없고, 오직 바라는 건 엄마들의 돈 봉투뿐인 선생들, 아니면 “나는 도덕적이야, 나는 깨끗해.” 라고 하면서 은근히 강남 아이들의 좋은 가정환경을 시샘하고, 그 시샘과 열등감을 “이 동네 아이들은 도대체가 선생을 우습게 알고, 지만 아는 이기주의자들이야! 여기에서 무슨 교육을 해? 난 가난한 동네로 갈거야!”라는 말속에 풀어내는 촌스러운 선생들 속에서 부대끼던 아이들에게 나는 선생이자, 동네 오빠였으며, 그리고 향토의 선배이자 자신들의 미래 모습이었으며, 혹은 흉내 내고 싶은 하나의 모델이었다.
아이들 눈에는 얼마나 멋지게 보였겠는가? 좋은 집안에 명문대 출신으로 방송국이란 직장도 마다하고서 백묵을 잡은, 젊고 전혀 구질구질하거나 꾀죄죄하지 않은 선생님. 컴퓨터 게임도 할 줄 알고, 시끄러운 메탈 사운드도 즐기고, 아이들의 문화도 이해하고 즐길 줄 아는 선생님.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건 거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것 역시 내가 노력한 결과였다. 교재연구만 하면 선생의 준비가 다 끝난 것인가? 천만의 말씀! 자신을 문화적으로, 심지어는 스타일로도 만들어야 한다.
어쩌면 나는 그 5년간을 가장 솔직한 나의 참 모습 속에서 살았는지 모른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엘리트 코스를 계속 밟아온, 생활에 부대끼지 않고, 여유있게, 정말 가르치는게 재미있어서 가르치는 신선놀음하는 선생. 온갖 문화생활을 자유롭게 누리며, 교사의 봉급을 전혀 박봉이라고 생각하지 않아도 되며, 도대체가 미래의 걱정거리가 하나도 없는 그런 부드러운 교사. 그곳에서 근무했던 것이 나의 불행이었는지 모른다. 나를 계속해서 온상 속의 화초로 머물게 만드는.
그러나 나는 너무 솔직하다. 그래서 “잘 사는 애들은 더 이상 돌볼 필요가 없잖아? 그래서 나는 어려운 아이들이 사는 가난한 동네로 가서 참 교사의 보람을 찾겠어!”라고 감히 말하지 않는다. 솔직히 그런 용기도 나지 않고, 진짜 어렵고 거친 그런 아이들을 다루고 힘이 되어줄 자신도 없다. 내가 그들에 대해서 쥐뿔도 모르면서 뭘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건 촌 출신 선생들이 강남 아이들 앞에서 사정없이 헤매고 상처받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그런데, 강남 애들 앞에서 병신 되는 건 “부잣집 애들이라 싸가지 없다.”라는 말로 합리화가 되고, 가난한 아이들 앞에서 헤매는 건 교사의 기본적인 양식이 부족한 것으로 은근히 말이 흘러가는 이 웃기는 현실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렇게 생각하며 나는 도곡 중학교에서의 5년을 행복하게 보냈다. 상상과는 너무도 다른 아이들의 모습에 당황하는 전남 영암 출신 교사에게 조언도 해 주고 하면서, 학교에서 가장 힘들다는 학생부 교내지도계를 계속 하면서도 말이다.
그런데, 우리 집의 주소가 송파구라는 이유로 강남에서 나가게 되었다. 마침 도곡에서 정을 끊으라고 그랬는지 모르지만, 강남의 교사진은 점점 고령화 되었고, 돈 뜯어 먹는데 귀신인, 아부하는데 귀신인, 정말 그 아이들 가르치기엔 너무너무 턱없이 모자란, 그래서 강남 아이들의 선생에 대한 기본적인 싸가지 없음을 만드는 가장 주범인 그런 미친 늙은이들로 교무실은 갈수록 도둑놈 소굴처럼 변해갔다. 난 단안을 내렸다. 이 거지같은 것들과 함께 일하느니 내가 여기를 떠나자. 그래서 유임하라는 교장의 만류를 뿌리치고(그 속이야 뻔하지 않은가? 일에서의 열외를 권리처럼 주장하는 늙은이들로 학교가 가득 차니 일 시켜 먹을려고 붙잡는 거지), 구청을 옮기기로 했다. 학교를 옮기는 것에 대한 불안함이나 두려움은 없었다. 강남이 내가 20년을 살아온 곳이라면, 송파구는 내가 그 나머지 인생을 살아온 곳이었으며, 대체로 그 문화나 분위기가 비슷했으니까(그러고 보면 나는 단지 두 개의 구에서 내 인생의 대부분을 살아왔다. 우물 안 개구리란 속담은 나 들으라고 나온 말인가 보다). 그리고 인접해 있는 강동구 역시 대체로 비슷하거나 약간 못하리라 생각했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송파구에서 10년 가까이 살았으면서도 바로 옆에 있는 강동구는 그때까지 거의 가 본적이 없었다는 사실도 그때 문득 깨달았다. 검단산 갈 때 버스 창밖으로 구천면 길 일대의 풍경을 바라보거나, 기차표 끊으러 길동에 있는 강동 우체국에 몇 번 같던 것, 한일 시네마가 있는 천호 사거리, 시네월드 개관한 뒤 강동 구청 앞에 몇 번 갔던 것, 그 정도가 거의 전부였던 것 같다. 그래서 막연하게 송파구건 강동구건 어쨌건 다 8학군인데 그만하면 할 만 하겠지 뭐.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착임계를 쥐고 암사동에 도착했을 때 그 느낌은…. 한국어의 빈약한 어휘로는 뭐라고 표현할 어휘의 부족을 느낄 정도였다. 영어로는 mental cataclysmic 뭐 이렇게 쓸까?
그때의 내 심정을 적절하게 표현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정말 여러가지 생각으로 온통 엉켜 있었으니. ‘서울에 이런 곳도 있었나? 과연 내가 이런 곳에서 적응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 이 걱정은 자신은 쥐뿔도 없으면서 자신이 근무하던 곳의 학생들과 눈높이만 비슷해져 가지고 “내가 오륜에 있을 때는, 내가 가원에 있을 때는…. 하는 그런 선생들이 하는 종류의 걱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의 실존적인 혼란과 걱정이었다. 나 자신을 알기에 당연히 해야만 하는 걱정이었다. 그러나 반면에 ‘그래. 이런 곳이 당연히 있지. 난 대학교 때 이곳보다 더 어려운 사당동이나 봉천동의 달동네에서 소위 민중운동이란 것을 했던 사람이 아닌가? 어쩌면 이런 곳에서야말로 진짜 교사의 역할이 중요한 것인지도 모르지.’ 하는 기대감 같은 것도 은근히 가슴속에서 솟아 나왔다. 물론 그 기대감이 고통으로 바뀌는데 걸리는 시간은 석 달이면 충분했지만 말이다.
어떤 교사는 아이들의 비위를 맞추어야 한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한다. 아니, 대부분의 교사가 그럴 것이다. 흔히 하는 “내가 저들 비위까지 맞춰줘야 해?” 하는 푸념을 수없이 들어왔고, 그 푸념에 관해서만큼은 20대에서 50대 까지 (60대는 곧 짤릴거니까 빼자)세대차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암사동에서 제일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엉뚱하게도 도대체 비위를 맞출 필요가 없다는 점이었다. 강남이나 다른 비교적 부유한 동네에서 주눅들어가며 아이들의 거만하고 차가운 시선만을 주로 받아왔다고 느끼던 저 위축되고 컴플렉스로 가득한 교사들에게는 교사에게 순종적이고 학부모도 찍 소리 안하는 암사동의 아이들이 너무도 귀엽고 사랑스러웠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강남에서도 이미 아이들의 신뢰와 사랑을 가득 받아가며 5년을 보냈었다. 게다가 그것은 거저 얻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기 위해서 수도 없이 아이들의 비위를 맞추어야 했다. 난 기꺼이 아이들의 비위를 맞추었고, 또한 그러면서 아이들을 내 페이스에 끌어들이고, 그것이 교육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이들로부터 다른 교사들이 받지 못하는 차별대우와 편애를 받아 왔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그게 없었다. 모든 선생이 같았다. 선생이라는 이유만으로 기본적인 점수를 따고 들어가는 곳이었다. 선생들 입장에선 얼마나 행복한가? 사랑도 거저 얻고, 귀여운 아이들도 거저 얻으니. 그러나 나에게는 그것이 견딜 수 없는 답답함이었다. 나는 선생으로서 할 일이 거의 없어졌다. 다른 사람에겐 없는 뭔가가 저 사람에게는 있다라는 강력한 무기를 바탕으로 아이들을 휘어잡고, 수많은 복제품을 만들어 내고, 많은 인재를 키워왔던 나의 할 일은 일거에 사라져 버렸다. 그저 교사 자격증과 나라에서 주는 월급 명세서만으로도 아이들에게서 공경받고, 어깨 으쓱할수 있고, 인사 잘 받고, 뭐 이러는데, 뭐가 아쉬워서 거기에 다른걸 보태나?
나는 확실히 게을러졌다. ‘음. 내일 수업 땐 무슨 이야기를 할까? 다음 시험 때는 어떤 기상천외 황당한 문제로 모두를 놀래킬까?’ 이런 행복한 고민은 나에게서 점점 멀어져갔다. 나태, 권태로움. 이것은 나에게는 쥐약이다. 나는 전력질주를 사랑한다. 나는 탈진되는 것을 즐긴다. 이곳은 너무 재미가 없다. 설상가상으로 나는 이곳 아이들의 생각 속으로 들어 갈 수가 없었다. 나와 그들 사이에는 너무도 작은 공통분모만이 존재했다. 사람이고, 한국말 쓰고, 같은 교실을 사용하고, 나는 말하고 그들은 받아 적고. 물론 잘 따르고 사랑스러운 아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상대가 내가 아니라 그 어떤 선생이더라도 그랬을 것이다. 구 아무개와 김 아무개 앞에서 인사하는 아이들을 보면 정말 기가 찬다. 도곡에선 모르는 척 지나가다 뒤통수에 펔큐나 안하면 다행이다. 도대체 자기들을 개 돼지 취급하는 사람과, 정말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을 단지 선생이라는 이유로 차별하지 않는다면, 이건 스스로 개 돼지 취급을 자청하는 일이 아닌가?
난 그런 아이들이 정말 싫었다. 그런 순진한 아이들이 정말 싫었다. 조금 더 영악해 지고, 세상을 똑바로 알고, 그럼으로써 이 어려운 삶 속에서 빠져나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랬다. 그러나 이곳에서 만난 선생들은 두 종류가 대부분이었다. 한 종류는 이런 가난한 아이들을 경멸하는 부류였고, 또 다른 부류는 이런 아이들의 순진함, 혹은 어리석음을 ‘순수’라고 이름 붙여주며, 계속 그대로 유지되기를 바라는 부류였다. 아이들이 계속 이렇게 소위 ‘순수’하게 자라면 그 끝이 어떻게 될 것인지 한번 생각해 보기나 했을까? 나는 어떤 사람의 교육정도, 집안 수준 등을 쉽게 알아맞추는 편이다. 그런데 이 동네 아이들을 경멸하고 무시하는 교사들 중에는 마치 엄청 상류층인 것처럼 행세하고 아이들 앞에서 그것을 뽐내는 가소로운 사람도 있었다. 이곳 아이들을 무시하는 발언을, 거의 인종 차별 수준의 발언을 무수히 뱉아 대면서 말이다. 내가 견적을 어떻게 내냐고? 난 그 사람의 옷, 차 같은 것은 보지 않는다. 그 사람의 눈과 이마를 본다. 눈에는 그 사람의 정신세계가 훤히 디스플레이 되고 있으며, 이마는 그 사람 개인의 역사책이 적혀있다. 이런 나의 견적은 거의 틀림이 없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이 마치 가난한 사람의 대변자인 것처럼 입만 열면 싸가지 없는 강남 아이들과 ‘순수’한 이곳 아이들을 비교하며, 마치 자신만이 이 아이들을 사랑할 수 있으며, 자신은 이 아이들을 위해 태어난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정작 이 아이들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는 게 가만히 보면, 쓸데없는 수다나 떨며 놀거나, 무자비하게 구타하거나, 기본적인 커뮤니케이션도 실패해서 수업을 중단하고 짜증을 내는 일 따위다. 결국 이 아이들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이 아이들 중에 자기와 비위가 맡는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밖에 안 되는데, 그게 뭐가 대단하다고 큰소리인가? 그런데도 나는 그런 큰소리를 들으면 기가 죽는다. 내 속에서부터 완벽하게 다듬지 않으면 큰 소리 치지 못하는 내 성격상, 나는 그런 소리를 들으면 기가 죽는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뭔가 배울 것을 찾는다. 그러나 정작 현실로 들어가면 오히려 내가 한 수 가르쳐야 할 판이다. 참 황당한 일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짜증을 내건 무릎을 멍이 들도록 두드려 패건 여전히 인사를 잘 한다. 뒤돌아 가는 사람을 불러서까지. 정말 인사를 위해 태어난 아이들 같다. 물론 나도 인사를 많이 받는다. 그러나 나는 그 인사가 하나도 반갑지 않다.
그래도 올해는 작년보다는 좀 적응이 된 것 같다. 아이들과의 커뮤니케이션도 작년보다는 좀 원활하게 되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아이들의 미래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내 자식들이 아닌데도 난 내가 이 아이들의 앞길을 헤쳐주고 싶다. 뭔가 눈이 훤하게 뜨이는 그런 길을 열어주고 싶다. 그리고 가르쳐 주고 싶다. “자, 봐라! 저기가 행복으로 가는 길이다.” 이렇게 말이다. 적어도 그 부분에서는 강남 애들이나 암사동 애들이나 마찬가지다. 강남 애들도 용돈이 좀 많다는 것 뿐, 기본적으로는 똑 같은 불행 속에 있으니까. 그 불행은 하필이면 하고 많은 나라들 중에서 한국에 태어났다는 원죄니까. 하지만 아이들은 묻지 않는다. 묻기라도 하면 함께 그 앞길의 희망을 찾기 위해 노력이라도 할텐데. 제발 물어봐라 하고 부탁을 해도 묻지 않는다. 그저, 그냥 이대로가 좋다고 한다. 아니 차라리 그냥 이대로가 좋다고라도 말 했으면 좋겠다. 그것조차도 아니다. 한마디로 그냥 같이 시간이나 때우자고 한다. 특별한 말썽꾼이 아니면 특별한 말을 할 기회도 없다. 그럼 그들은 정말 만족하고 있는 것일까? 정말 말 그대로 ‘순수’ 한 것이고, 영원히 그렇게 ‘순수’하게 살려고 하는 것일까?
그것은 잘 모르겠다. 그런데, 학교가 끝나도 좀체 집에 들어가지 않고, 계속 교복을 입은 체 학교에서, 학교 근처에서 배회하다가, 겨우 저녁 먹을 시간이나 되어서야 집에 들어가는 아이들이 너무도 많다. 그 동기는 너무도 ‘불순’하다. 학교가 좋아서가 아니라 집이 싫은 것이다. 그들도 자기 집이 싫은 것이다. 자기들의 삶이 싫은 것이다. 그나마 학교가 더 좋은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뭘 어떻게 할수 있지? 내가 이런 고민을 한다고 뭐가 달라지지? 안타까움만이 가득하게 아니 아찔하게 밀려온다. 그런 내 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아빠한테 휴대폰 사야 하니까 50만원만 내놔라 라고 했는데 아빠가 안 줘서 아빠랑 대판 싸웠다며, 아빠한테 미안하다며 흐느끼는 도곡 졸업생의 메시지가 내 삐삐를 뒤흔들며 녹음되어 있다.
나의 원죄. 이 이상한 생각이 나를 짓누른다. 나는 내가 가르치는 이 아이들에게 내가 누렸던 그런 치기어린 장난조차도 다 누릴 수 있게 하고 싶다. 이 아이들이 안 되면 이 아이들의 아이들이라도. 쉽게 말해서 "돈 많이 벌게 하고 싶다. 출세하게 하고 싶다. 남보란 듯이 에헴하고 살게 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더 이상 ‘순수’하지 않게 만들고 싶다. 그놈의 ‘순수’파 선생들은 너희들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을 희롱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고 싶다. 뻔하지 않은가? 그 선생들 자신 이미 ‘순수’하지 않은 웬만큼 넉넉하게 살고 있지 않은가? 그것을 포기할 수 있는가? 그 안락한 삶을 포기할 수 있는가? 그리고 자신들의 자녀가 과연 그렇게 ‘순수’하게 자라게 하고 싶은가? 그들은 자신들의 아이들은 ‘순수’하지 않게 자라서 출세하기를 바랄 것이다. 그리고 이곳의 아이들은 ‘순수’하게 자라서 자신들의 아이의 노예로 삼으려고 하는 것이다. 헌법상으로는 평등하지만 분명히 노예가 존재하는 자본주의의 속성을 이용하여. 정말 무섭고 나쁜 건 이런 사람들이다. 무시하는 사람들이 차라리 낳다. 적어도 그들은 위선자들은 아니니까. 그들은 자신들이 적이라는 것을 공개하니까. 하지만 이 순수파는 위험하다. 적이 적이 아닌척 하고 있으니, 아니 벗인척 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니 이 ‘순수’파들도 위선자는 아니다. 자신이 위선자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위선자들이다.
하고 한날 자기 집 가난하다며 강남 애들에 대해서 이를 박박 갈며, 소녀가장(?)으로서의 고통을 늘 투덜거리던 어느 여선생은 난데없이 대학원 입학고사를 준비한다. 그것도 등록금 비싸기로 악명높은 곳을. 도대체 이해 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 이게 선생들의 본모습이다. 다 그런 것이란 말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는 괜히 건방 떨며 ‘순수’를 말하지 않는 것이다. 아니 못하는 것이다. 난 순수니 가난이니 하는 말을 못하겠다. 나는 나 자신의 한계를 인정한다. 그래. 난 강남 촌놈이다. 그런데 그게 어쨌다는 거냐? 난 강남 촌놈으로서의 나 자신을 인정한다. 그래서 진지하게 나와 다르게 살아온 아이들과 접근을 시도한다. 내 마음은 사실 이렇다. “솔직히, 미안하지만 나는 너희들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건 불가항력이야. 하지만, 이해하려고 노력하겠단다. 너희들이 나를 좀 도와주렴. 그래서 우리 서로 거리를 좁혀 나가자.”이렇게 말이다. 난 감히 처음부터 신뢰, 사랑, 순수 따위를 입에 담을 용기가 없다. 그러나 분명 진보는 있다. 나는 분명히 작년보다는 아이들과 더 가까워 졌다. 그래서 이제는 그 ‘순수’파들을 압도하고 아이들을 내 것으로 만들었다. 안타까운 것은 함께 헤쳐 나갈 그 길을 나도 찾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지만.
하지만 여기 부임한 지 1년, 이제 분명한 것은 나도 슬금슬금 사랑을 말할 수가 있게 되어 간다는 것이다. 작년보다 더 많이 아이들의 정신세계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기에 말이다. 도곡의 아이들과는 금세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었지만, 여기에서는 좀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어쨌건 간에 요즘에 들어서야 나는 교실에서 사랑을 말한다. 요즘에 들어서야 사랑을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마, 내가 이 아이들을 한해 더 가르친다면, 더 많이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물론 사랑 받기도 하면서. 마찬가지로 나는 아이들의 사랑을 느낀다. 그렇다. 분명 아이들은 나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이제야 슬금슬금 차별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 원래 사랑이란 차별대우 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나의 가슴은 아이들이 던져주는 사랑을 받아먹고 점점 부풀어 오른다. 작년에는 이걸 얻지 못해서 그토록 고통스러웠던 것이다. 아마 내년에는 나는 도곡에 있었던 시절만큼 행복해 질 것이다. 2년간의 적응기간을 거치고 마침내 말이다. 나는 이런 내 자신을 인정한다. 이제 이런 내 자신이 부끄럽지 않다. 그놈의 원죄의식도 이제는 던져 버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사랑이 커 갈수록 안타까움도 더욱 커간다. 이제 아이들도 슬슬 나에게서 그 무엇인가를 바라기 시작한다. 그들은 이제야 내가 아무렇게나 인사하던, 단지 우리학교 선생들 중의 하나가 아님을 인정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다른 선생들한테는 얻을 수 없는 그 무엇이 있기를 바란다. 자신들에게 꿈과 희망과 그 길을 보여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나는 아직 그걸 모른다. 나는 아이들의 입장에 서서 미래를 바라본다. 계속해서. 그러나 모르겠다. 아아! 뭘 어떻게 해야 할까? 안타까움은 그냥 안타까움으로 남는다. 사랑은 사랑으로 남는다. 그래서 요즘에는 공부에 도통 관심 없는 아이들이 난리 법썩을 떨거나 1/3은 엎어져 자는 통에 그냥 콩가루가 되어버린 망친수업이 끝날 무렵이 되면 눈물이 난다. 7반이던가 어디선가 그 눈물 맺힘을 들키고 말았다. 아! 그래서 오늘 6반애들이 평소와 달리 그렇게 점잖게 있었구나!
하지만 그렇게 조용히 안해도 되는데, 아무리 떠들어도 괜찮은데.... 이젠 아이들 입에서 “선생님 만한 분 다시없어요.”란 말을 듣고야 말았기에. 일단 이게 되었으면, 반은 된 거니까. 꼭 중학교 다닐 때가 아니더라도 좋다. 이놈들이 늙어 죽을 때 까지. 아니 내가 그렇게 오래 살까? 시간은 얼마나 걸려도 좋다. 난 기어코 길을 찾고야 말 것이다. 내가 세상을 뒤집어엎는 혁명의 괴수가 되어야 한다면 까짓 거 그것도 할 것이다. 그래서 감방 속에 처박히더라도, 난 그렇게 할 것이다. 난 결코 ‘순수’ 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사랑은 알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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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 2008/11/21 10:42 | 교단 일기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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