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1월 04일
마르크스, 탈근대, 그리고 헤겔(1)
1. 아직도 계속되는 보편성과 자유의지의 사상대전
헤겔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자중 하나였음에도 불구하고 맑스는 그의 노작 자본론의 서문에 작금의 세태가 헤겔을 마치 죽은 개처럼 취급하고 있다고 한탄한 바 있다. 이때 헤겔을 죽은 개 취급했던 인물이 ‘권력의 망치’를 든 니체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20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헤겔 철학은 다시금 “죽은 개” 취급을 받게 되었다. 여기에서 헤겔을 향하여 전면적인 비판의 포화를 퍼붓고 있는 포수들은 키에르케고르, 베르그송, 사르트르 등 실존주의 철학자들과 푸코, 데리다, 리요타르, 들뢰즈, 가타리등 이른바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이다. 그리고 이들의 비판의 핵심은 한결같이 헤겔이 보편성만을 강조하여 인간의 자유의지를 아주 하찮은 것으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이다. 물론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자유의지라는 주관적인 용어보다는 차이라고 하는 점잖은 단어를 즐겨 사용하기는 하지만 이것이 결국 보편과 의지의 대립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들이 모두 많건 적건간에 니체에게서 젖줄을 끌어오고 있음은 부정 할 수 없다.
탈현대 담론의 선구자라 할 미셸 푸코는 현대 합리주의의 본질을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라고 규정하면서, “현대 인간중심주의의 주요한 책임자들은 바로 헤겔과 맑스이다” 라고 지목하고 있다. 몬테규가와 캐풀렛가 사이의 반목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죽음을 넘어선 사랑에 의해 화해에 이르게 되었으나, 아폴론을 숭배하는 헤겔家(家)와 디오니소스를 숭배하는 니체家 사이의 “100년 전쟁”은 어느 쪽에서도 화해의 단서를 찾지 못한 채 오늘날 까지도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포스트 모더니즘의 그 어떤 도발적인 시도에도 불구하고 헤겔은 결코 죽은 개가 되지 않았다. 디오니소스는 어디까지나 아폴론의 지나친 위엄이 가져오는 부작용을 해소하는 보조적인 위치에 있는 것이지 그 자체 아폴론과 대립하는 힘은 아니기 때문이다. 디오니소스는 고도로 이성적으로 체계 지워진 올림푸스 체제에서 공인된 일탈이었지, 결코 올림푸스 체제 자체를 전복하고자 한 새로운 힘이 아니었던 것이다. 헤겔家는 엄연히 여유로운 방어자이며 니체家는 초조한 도전자이다. 이러한 도전자의 초조함과 낭패감이 푸코의 다음과 같은 고백에 잘 나와 있다.
헤겔을 진정으로 탈피하는 일에는 우리가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지불해야만 하는 대가에 대한 정확한 평가가 포함된다. 이는 헤겔이 우리에게 얼마나 가까운가 하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로 하여금 헤겔에 반하여 사고할 수 있게 해주는 것, 이것 조차도 여전히 헤겔주의적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의 반 헤겔주의는 아마도 그가 우리에게 쓰고 있는 이성의 간계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우리는 그가 어느 정도의 간계를 쓸지 그 단수를 가늠해야 한다. 그 계략의 끝에 움직이지 않고 서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자는 바로 헤겔이다.
정말 놀라운 이성의 간계가 아닐 수 없다. 기껏 열심히 비판했는데 그것도 알고 보니 이성의 기획이었다는 것이 아닌가? 맑스에게조차 결코 죽은 개일 수 없었고, 포스트모더니스트들조차 처절하게 낭패시키고 만 이러한 헤겔 철학의 위력은 과연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젊은 시절 헤겔은 “분열이 철학 하고자 하는 욕구의 원천이다. 통합의 힘이 인간의 삶으로부터 사라지고, 대립들이 자신의 생동적인 관계와 상호작용을 상실하고 자립성을 획득할 때, 이때에 철학의 욕구가 발생한다.” 라고 쓰고 있다. 헤겔은 세계의 분열을 발견하고, 이것을 철학이 해결해야 할 문제로 설정하고 있다. 정신과 육체, 신앙과 오성, 자유와 필연성, 유한성과 무한성 등등.
그런데 헤겔이 문제 삼았던 분열은 전통적인 철학적 주제들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시대를 사상적으로 파악하는 것”을 철학의 구체적 과제라고 여겼던 헤겔에게는 당대의 사회현실 또한 분열로 경험되었던 것이다. 헤겔은 자신의 눈앞에 전개되고 있는 근대 시민사회를 분열로서 파악했다. 특히 근대 시민사회의 분열은 헤겔에게는 그대로 놔두면 파국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시민사회의 분열을 지양할 과제를 자신의 철학에, 그리고 철학적 사유의 주체로서의 이성(Vernunft)에 부과했다. 이로써 헤겔 철학의 가장 거대한 힘인 “이성을 통한 세계의 통합.”, 그것도 단순한 통합이 아닌 “변증법적인 통합.”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보편적인 통합의 담지자로 국가가 등장하게 되었다. 헤겔 철학의 거대한 힘은 바로 통합하는 힘이며 이 통합이 단순한 총합이 아니라 이성의 작용이 개별 의지조차 보편의지를 만들어버리는 역사적이고 변증법적인 통합이라는 것이다.
물론 헤겔 철학의 구체적인 내용들은 상당히 많은 부분이 비현실적이고 오류라고 할 수 있고, 또 그 거대한 시작에 비해 너무도 허무하고 보수적인 마무리가 아쉬움을 남겨 주기도 한다. 아울러 이 거대한 역사적 과정이 인간의 사회적 현실이 아니라 사유와 관조 속에서 이루어지고 또 해결된다라고 하는 공상적인 관념론도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정-반-합의 과정 속에 합이 가지고 있는 근거 없이 긍정적인 성격도 지나치게 낙관적이라고 비판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약점들에도 불구하고 개별적인 것들로 보이는 세계, 특히 인간 사회의 수많은 존재들이 외부에서 강제로 던져지는 경직된 원리가 아니라 개별자 내부에 내재되어 있으며 상호관계 속에서 발현되어 나가는 그러면서도 보편성을 지양하는 이성의 작용을 통해 변증법적인 역사의 소산이라는 것을 밝혔다는 점에서 헤겔은 여전히 난공불락의 요새를 구축하고 있다.
이러한 굳건한 요새를 바탕으로 루카치, 아도르노, 하버마스같은 헤겔의 후예들이 자신들의 기량을 뽐내었다. 물론 그들은 네오 맑스주의자들이라 불린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맑스주의자 보다는 헤겔주의자라고 불러야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과 대립된 축에는 알뛰세르, 발리바르, 푸코, 가타리 같은 비 헤겔주의적인 맑스주의자들도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들을 대립시키는 기준은 헤겔이지 맑스가 아니다. 사실 루카치가 그토록 강조하는 진정한 맑스주의, 그러니까 “보편적인 총체성과의 관련 속에서 구체적인 개별자들의 존재를 파악하고, 이들을 고정된 전체-부분이 아니라 상호 침투, 부정하는 변증법적인 과정 속에 파악하는 것.”도 사실은 진정한 헤겔주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를 가지고 헤겔의 후예들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회(심지어는 외계인 사회가 있다면 그들조차)의 모든 현상을 공통된 원리 속에서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설명이 올바른 것인지 오류인지는 별개의 문제이고, 다만 여기에서는 설명 할 수 있다는 것이 핵심이다. 지금은 죽은 개 취급을 받는 맑스주의의 그 놀라왔던 확장력의 비밀을 상기해 보자. 몇 십년 만에 지구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학문에 맑스주의가 도입되었었다. 그리고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과 무관하게 여전히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그 만큼 맑스주의가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회현상들을 설득력 있게 설명해 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맔스의 철학은 스스로 고백했듯 헤겔의 철학에서 주어와 술어의 위치를 바꾸고, 사변적인 헤겔의 언어를 독일어로 바꾼 것이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헤겔의 여러 후예들은 그것이 계몽의 변증법이 되었든, 부정의 변증법이 되었든, 소통적 합리성이 되었든 간에 또 그 내용이 옳건 틀리건 간에 이 원리를 가지고 거의 모든 사회현상을 자신의 논리구조 내에서는 빈틈 없이 설명해 내었다.
이러한 헤겔家의 위력 앞에서 니체家의 역할은 극히 미미해 보인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이성의 한 유형으로서의 호르크하이머가 계몽적 이성과 명백히 구별해 내었던 도구적 이성에 대한 비판이 이성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무리하게 확대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혐의가 엿보인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헤겔家의 철학이 동일성을 절대시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반대로 포스트모더니즘은 차이를 절대시하고 있다.
물론 그 동안 망각되어왔던 차이를 철학의 주제로 전면에 부각시킨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부인할 수 없는 기여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차이를 통해서 세계를 바라보는 것은 이전보다 세계를 훨씬 더 폭넓고 새롭게 보게 한다. 그것은 세계를 바라보는 지평을 한층 더 열어주었으며, 그만큼 더 해방적 사유를 풍부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차이의 과도한 절대화는 ‘차이 속의 차이’를 들여다보는 것을 막는다. 차이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승인 가능한 긍정적인 차이와 용인될 수 없는 부정적인 차이가 있다. 예컨대 자연과 인간의 존재론적인 차이가 전자에 해당된다. 인간과 다른 자연을 인간과 동일한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과정 속에 인간의 문명이 탄생하였다. 여기에서는 분명 “차이의 원리”가 필요하다. 그에 반해 차별과 분열을 낳는 차이는 지양되어야 할 차이다. 동등해야 할 인격을 상하로 갈라놓는 빈부의 차이는 극복되어야 할 차이에 속한다. 그리고 만일 시민사회의 부정성이 분열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이 분열은 통합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동일성의 원리”는 무차별적으로 거부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차이를 극복한다는 차원에서 여전히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요청된다.
이제야 푸코의 고백이 무엇을 통탄하고 있는지 분명해진다. 니체家는 있는 힘껏 헤겔家를 공격했지만 결국은 헤겔의 논리 속에서의 비판이었고, 헤겔의 세계를 풍부히 하고 지평을 넓혀 주었으며, 마침내는 헤겔에 대한 Antithesis에서 헤겔과의 Synthesis가 되어 버림으로써 지양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야말로 땅을 치게 만드는 이성의 간계이다. 헤겔의 후예들은 여전히 위풍당당하게 그들의 눈에 보이는 모든 현상들을, 심지어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 까지도 포함해서 보편성과의 변증법적인 관계 속에서 설명 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역사적으로는 어떻게 설명 할 수 있을까? 이는 헤겔과 니체 개인의 대립, 개인적 속성의 대립이 아니다. 이는 서양의 지성사에서 끊임없이 변주되어 오던 이성과 의지의 대립이며, 궁극적으로 의지가 이성의 품안으로 포섭되어가는 과정의 반영이다. 또 맑스주의식으로 표현하면 이성적인 생산관계에 기반한 계급이 궁극적으로 자의적 생산관계에 기반한 계급을 포괄해가고 소멸시켜 가는 과정이다. 그런데 이 이성과 의지는 저마다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성과 의지는 서로를 필요로 하며 서로 대자적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서양의 역사는 이 이성과 의지의 긴장과 상호 부정의 역사에 다름 아니다.
# by | 2008/11/04 19:42 | 철학, 사회학 탐구 | 트랙백(1)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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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헤겔이 죽은 개인가?
마르크스, 탈근대, 그리고 헤겔(1)부정변증법님의 훌륭한 글을 읽으면서, 헤겔이 과연 죽은개가 되었을까 하는 점에 대해 저도 몇자 적어보려 합니다. 헤겔은 분명 죽은 개는 아닙니다. 이성의 간계 역시 헤겔의 용어지요. 중요한 것은 니체 역시 승리하지는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마치 오바마가 완전한 승리를 거두지 못하는 것처럼요) 헤겔에 대적하는 사상가들이 왜 그에게 대적해야만 했는지를 보다 면밀히 보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서구 철학에서 가장 중요......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