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 독해- 경제학 철학 노트 (6)


원문) 대상적 세계의 실천적 산출, 비유기적 자연의 가공은 인간이 의식적인 유적존재라는 것, 다시 말해 유에 대해서 자신의 본질로서 또는 자신에 대해서 유적 존재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확증한다. 물론 동물도 생산을 한다. 꿀벌, 비버, 개미 등처럼 동물은 둥지, 주거를 짓는다. 그러나 동물은 일면적으로 생산하지만 인간은 보편적으로 생산한다. 동물은 직접적인 육체적 욕구의 지배 하에서만 생산하지만 인간은 육체적 욕구에서 자유롭게 생산하고 그러한 욕구에서 벗어난 자유 속에서만 진정으로 생산한다. 동물은 자기 자신만을 생산하지만 인간은 자연 전체를 재생산한다. 동물의 생산물은 직접적으로 물질적인 신체에 속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생산물에 자유롭게 대항한다. 동물은 자신이 속해있는 종의 규준과 욕구에 따라서만 형태를 만들지만 인간은 모든 종의 규준에 따라 생산할 줄 알고, 어떤 경우에나 대상에 고유한 규준을 도모할 줄 안다. 그런 까닭에 인간은 미의 법칙에 따라 형태를 만든다.


읽기) 따라서 인간은 비유기적 자연에서 그저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의식적으로 가공하여 대상적 세계를 산출한다. 여기서 훗날 비트겐슈타인이 "세계란 경우의 총체다"라는 말의 의미를 알게 될 열쇠를 본다. 인간만 세계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만이 비유기적 자연에 의식적으로 접근하고 그것을 가공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자신에게 의미 있게 된 자아외부의 것들의 총체가 바로 그의 세계다. 이렇게 외적 세계를 창출함으로써 그는 인류의 구성원이 된다. 비버, 꿀벌 들은 정해진 바 대로 생산하지만, 인간은 자연을 보편적으로 파악하고서 생산한다. 동물은 생존본능에 의해 생산하지만, 인간은 생존본능, 육체적 욕구와 무관하게 생산할수 있다. 동물은 생산활동의 결과 자기 종을 계속 재생산하지만, 인간은 새로운 세계를, 자연을 재생산한다. 동물의 생산활동의 결과는 결국 자신의 육체이지만, 인간은 그 결과를 자유롭게 사용할수 있다.

한 마디로 동물은 자연에 의해 정해진 법칙에 의해 생산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의적으로 생산할 수 있다. 즉 인간은 "미적으로 생산"할수 있다. 여기서 이 "미적 생산"은 칸트적 의미다. 칸트는 미의 핵심을 "무관심적 관심"이라고 하였다. 즉, 관심을 가지고 있으나, 그것이 가져다 주는 실질적인 효과, 효용에는 관심이 없는 상태가 바로 미적 관조의 상태다. 그러니 인간은 "당장 생활을 위한 쓸모"가 아니라 "보기에 좋기 위해서도"생산하는 존재며, 바로 이것이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다. 인간의 노동이 꿀벌의 노동과 구별되는 것은 바로 이 "미적인 관조"에 있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보시니 좋더라!" 신이 세계를 창조한 목적도 이와 같았던 것이다. 그런데 포이어바흐는 뭐라 했나? 신은 개별인간이 아닌 인간의 유적 존재, 유가 실체화 된 것이다. 따라서 신이 "보시니 좋더라"한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 "보시니 좋더라"한다는 것이다.



원문) 그러므로 인간은 대상적 세계의 가공에서 비로소 자신을 현실적인 하나의 유적 존재로서 확인한다. 이 생산은 인간의 제작 활동적 유적 생활이다. 이 생산을 통해 자연은 인간의 작품으로서 그리고 인간의 현실성으로서 나타난다. 그런 까닭에 노동의 대상은 인간의 유적생활의 대상화다: 이는 인간이 의식에서처럼 지적으로뿐만 아니라 제작 활동적, 현실적으로도 자신을 이중화하고, 그런 까닭에 자신에 의해 창조된 세계 속에서 자기 자신을 직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외된 노동은 인간에게서 그의 생산의 대상을 박탈함으로써, 인간에게서 그의 유적생활, 그의 현실적인 유적 대상성을 박탈하고 동물에 대한 인간의 장점을 단점으로 변화시켜 그의 비유기적 신체, 자연을 떨어져 나가게 한다.

마찬가지로 소외된 노동은 자기활동, 자유로운 활동을 수단으로 전락시킴으로써 인간의 유적활동을 그의 육체적 생존의 수단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신의 유에 대해 가진 의식은, 소외로 인해, 유적생활이 인간에게 수단이 되는 것으로 변하고 만다.


읽 기) 이제 앞에서 한참 논의했으니 이 대목은 읽어내기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자신과 마주선 대상적 세계를 가공하면서 그 속에서 자신의 상을 보게 된다. 따라서 인간의 생산활동은 단지 생존수단을 얻는 과정이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는 자신을 표현하는 작업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노동과 작업, 노동하는 동물과 제작하는 인간을 구별한 아렌트의 치밀한 논의가 보충되어야 한다.

그 런데 소외된 노동은 이 소중한 인간의 제작활동을 박탈한다. 왜냐하면 소외된 노동에서 인간은 생산의 대상을 타인의 소유로 내어주고 있기 때문이며, 타인의 목적에 따라 생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노동자는 자신의 의식, 자신의 표현으로서 창조적인 생산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주어진 규준에 따라 반복되는 생산, 즉 동물이나 다름없는 그런 생산을 하게 된다. 노동자는 꿀벌이나 비버다. 그런데 정해진 규준을 정확히 지키는 점에서는 의식있는 존재인 인간은 무의식적 존재인 꿀벌보다 한결 뒤떨어진다. 그런데 이 대목이 논리적으로는 조금 문제가 된다. 인간이 소외된 노동에서 유적 생활, 자유로운 활동을 육체적 생존의 수단으로 만든다기 보다는 아예 박탈당한다고 보는 것이 더 논리적으로 잘 이어지기 때문이다. 즉, 소외된 노동에서 인간은 마치 동물처럼 주어진 동작을 정해진 순서대로 해야 한다. 자기 의식, 자기 표현욕 등은 억제되어야 한다. 이 억제는 육체적 생존을 위해서다.


원문) 따라서 소외된 노동은:

(3) 인간의 유적 존재, 자연뿐만 아니라 인간의 정신적인 유적 능력을 그에게 낯선 본질, 그의 개인적 생존의 수단으로 만든다. 소외된 노동은 인간에게서 인간 고유의 신체, 마찬가지로 그의 바깥의 자연, 마찬가지로 그의 정신적, 인간적 본질을 소외시킨다.

(4) 인간이 자신의 노동의 생산물, 자신의 생명활동, 자신의 유적 존재에서 소외되어 있다는 것에서 생겨나는 직접적인 결과의 하나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소외다. 인간이 자기 자신과 대립하는 경우에는 다른 인간이 그에게 대립하는 것이다. 자신의 노동, 자신의 노동의 생산물,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에서 타당한 것은, 다른 인간, 다른 인간의 노동, 그리고 노동의 대상에 대한 관계에서도 타당하다.

일반적으로 인간이 자신의 유적 존재에서 소외되어 있다는 명제는 어떤 인간이 그들 각자가 인간적 본질에서 소외되어 있는 것처럼 다른 인간으로부터 소외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그리고 일반적으로 인간이 자신과 맺는 일체의 관계에서의 소외는 우선 그가 다른 인간과 맺고 있는 관계 속에서 드러난다.

그러므로 소외된 노동의 관계 속에서 각각의 인간들은 자기 자신을 노동자로서 존재하도록 하는 관계를 기준으로 삼아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가늠한다.


읽 기) 이리하여 소외의 세번째 규정과 네번째 규정이 나왔다. 소외된 노동은 인간을 인류(인간의 본성)로부터 소외시킨다. 그 결과 인간은 자신을 인류로서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인간들 역시 외적 대상, 즉 생존의 수단으로만 보게 된다. 인간이 인류로서 자신과 대립하고 있으니, 타인과 대립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마르크스는 개별 인간들과 구별되는 추상적인 "인류"라는 실체가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그 인류는 신이 되기 때문이다. 인류란 인간과 인간의 관계들이 맺어질때 나타나는 하나의 현상이다. 훗날 뒤르켐은 이를 "출현적 현상으로서 사회"라고 멋들어지게 정의했다.


인간이 인류로부터 소외되고 있다는 것은 결국 인류라는 사람이 아니라 구체적인 다른 사람으로부터 소외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으로부터 소외되고 있다는 것은 그가 다른 인간과 맺고 있는 관계에서 소외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현대사회학의 핵심 쟁점인 상호주관성, 서로주체성 등의 논의를 펼친다면 지나치게 복잡해 질것이니 생략하자. 어쨌든 이렇게 소외된 노동자들은 자신을 주체적으로 바라볼 수 없고, 자신의 조건, 즉 노동하는 동물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자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 관계 속에서만 인식할 수 있다. 즉, 그는 자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모두 판매하기 위해 내어 놓은 노동력으로 보며, 단지 생존수단을 얻기 위해 자기본질을 수단으로 삼는 존재로 보며, 따라서 서로를 자기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 본다. 이것이 바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인 것이다.



by 부정변증법 | 2008/10/31 13:02 | 마르크스 읽기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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