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0월 27일
마르크스고전읽기 -경제학 철학 수고(4)
원문) 그러면 노동의 외화는 어디에서 성립하는가?
읽기) 우선 이 문헌헌에 무차별적으로 사용되는 외화, 소외 두 용어를 좀 정리해야겠다. 이 둘은 각기 alienation 과 estrangement 의 번역이다. 이 중 하나는 헤겔의 용어고 다른 하나는 포이어바흐의 용어다. 헤겔의 용어는 이렇다. 원래 정신이 있다. 그런데 이 정신은 스스로를 인식하지 못한다. 이 상태는 그저 있는 상태이며 자신이 있음도 알지 못하는 상태다. 자신이 있음을 인식하려면 자신을 비출 대상이 있어야 한다. 즉, "무언가에 대하여, 무엇"이 되어야 자신의 있음을 알게된다. 이리하여 유명한 대자적 존재라는 말이 나온다. 이로써 정신은 자신의 대상인 외부세계를 만들어낸다. 여기에서 최초의 외화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정신과 그 외부세계는 한몸에서 난 두 현상이지만, 이를 모르는 정신은 그 외부세계에 비추어 본 자신이 실제 자신과 "동일한지"에 대해 확신하지 못한다. 이로써 정신은 "정신"과 "외부세계, 대상"으로 분열되고, 이를 다시 하나로 만들기 위한 기나긴 여정이 시작된다. 이로써 원래 하나라야 마땅한 존재가 자신을 분열된 것으로 파악하는 현상, 자신에게 속한 것을 타자로써 파악하는 현상이 계속된다. 이것이 alienation이다.
소외는 포이어바흐의 용어다. 포이어바흐는 인간이 신을 만들고, 그 신에게 자신의 모든 힘과 좋은 점을 부여한다고 본다. 그리하여 마침내 신은 인간 자신의 산물이 아니라 인간에게 아주 낯선 대상이 되어 인간 앞에 군림한다. 이로써 인간은 자신의 산물인 신의 지배를 받으며, 신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주변화된다. 이것이 인간의 estrangemnet다. 보다시피 결국 이 두 용어를 구별할 이유가 없어보인다. 이 문헌을 처음 번역한 강유원 선생이 이 두용어를 외화, 소외로 번역한 관례를 따랐지만, 그냥 다 '소외'로 읽어도 무방할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마르크스는 노동 과정속에서 일어나는 소외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원문) 첫째, 노동이 노동자에게 외적이라는 것, 즉 노동이 노동자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 그런 까닭에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 속에서 스스로를 긍정하지 않고 부정하며, 행복을 느끼지 않고 불행을 느끼며, 자유롭고 육체적이며 정신적인 에너지를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육체를 소모시키고 그의 정신을 황폐화시킨다. 그런 까닭에 노동자는 노동의 외부에서야 비로소 자기 곁에 있다고 느끼고, 노동 안에서는 이방인이라고 느낀다. 노동하지 않을 때는 집에 있는 것처럼 편안하고, 노동할 때에는 편안하지 않다. 그런 까닭에 그의 노동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강요된, 강제노동이다. 그런 까닭에 노동은 욕구의 충족이 아니라 노동 바깥에 있는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 노동의 낯설음은 어떠한 물질적인 혹은 그 밖의 강제도 존재하지 않게 되자마자, 노동이 마치 역병처럼 기피된다는 것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읽기) 가장 먼저,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이 자신의 적성, 소질, 희망과 무관한 일이라는 현실에 직면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억지로 일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더 기가 막힌 것은 그 일의 결과 자신의 어떤 바람직한 능력이나 특성의 향상이 없다는 것이다. 억지로 죽도록 일했지만, 일하기 전이나 뒤나 자신의 진보와 향상이 없다면 한 마디로 시간낭비 아닌가? 이는 특히 육체노동이 사라진 오늘날 더욱 심각하다. 차라리 중세식 농업노동은 근육과 체력이라도 길렀지만, 오늘날의 노동은 고도의 분업화로 인해 아무리 많이 하더라도 아주 세분화된 단순한 작업에만 숙달될 뿐, 어떤 가치 있는 능력이 향상되지 않는다. 그러니 편협한 마음, 균형잡히지 않은 육체, 국소부위의 신체 손상 등이 노동의 결과다. 그러니 항상 휴식은 달콤하고 일요일은 행복하고 월요일은 마음이 무겁다. 인간은 항상 노동하지 않기를 꿈꾸며, 심지어 노동하는 순간에도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하는 이유는 "먹고살기 위해서", 즉 생존수단을 얻기 위해서다. 이로써 노동은 수단이 된다. 노동의 목적은 노동을 통해 충족하게 될 욕구가 아니라, 노동의 결과 받게 될 임금을 통해 충족하게 될 욕구다. 즉 노동을 하는 목적과 실제 노동과는 무관하다. 그러니 자발적으로 열심히 일할 노동자는 없다. 그래서 강제가 사라지면 노동도 사라진다. 계약한 노동시간을 떼우고 월급만 받을수 있으면 그만이지, 그 노동의 결과야 어찌되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런 의미에서 자신의 노동 결과물에 고도의 관심을 기울였던 기술자, 장인과 근대의 노동자는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쉬는 것보다 일하는 것이 더 편하다"라고 말했던 모차르트의 말은 오늘날 점점 먼 이상이 되어가고 있다. 도리어 "월급이 나오고 보는 사람이 없다면 되도록 놀고싶다"는 것이 오늘날의 노동자다. 당연하지 않은가? 내가 원한 일도, 내가 발전하고 계발되는 일도 아닌데다, 하면할수록 나의 심신을 망치는 일인데, 왜 자발적으로 하겠는가?
원문) 외적인 노동, 인간이 스스로를 외화하는 노동은 자기희생이며, 고행이다. 마지막으로 노동자에 대한 노동의 외재성은 노동이 노동자 자신의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것이라는 것, 노동이 그에게 속하지 않는다는 것, 그가 노동에서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속한다는 것에서 나타난다. 종교에서 인간적인 상상력, 인간적인 두뇌, 인간적인 심정의 자기 활동이 개인에게 독립되어, 즉 낯선 신적인 또는 악마적인 활동으로서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듯이 노동자의 활동 역시 자기 활동이 아니다. 노동자의 활동은 다른 사람에게 속하며 노동자 자신의 상실이다.
읽기) 사정이 이러하니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노동을 강제받아야 하며, 온갖 감시장치를 통해 땡땡이를 치지 못하도록 통제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노동의 결과, 그 생산물을 통해 이득을 보는 존재가 노동자 자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을 판매했고, 그 댓가로 임금을 받았다. 그러니 그 노동은 근무시간 동안은 노동자의 것이 아니라 그것을 구입한 사람, 즉 자본가의 것이다. 돈을 받았기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자기 몸이 남의 마음에 따라 남의 목적을 위해 그리고 남이 정해준 시간과 리듬에 따라 일해야 한다는 것은 대단한 고역일수밖에 없다. 차라리 노예는 애초에 자기가 남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노예에게는 어떤 분열도 소외도 있을수 없다. 그러나 노동자, 소위 자유 노동자는 자유 시민이지만, 일하는 시간 동안에는 다른 사람의 소유물처럼 된다. 생각은 자유민인데 몸은 노예다. "나"는 여전이 내것이로되 "나의 활동"은 내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그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는 마치 종교에서 사람들이 자신들의 좋은 활동은 신 덕분, 나뿐 활동은 악마 때문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활동은 대체 어디 있으며, 활동이 모두 남의 것인 자신은 대체 무엇인가? 결국 이는 자신의 상실이다. 노동자는 노동하는 순간부터 자신을 상실하며, 근무시간이 끝나면 그 때 자신으로 돌아온다.
원문) 그런 까닭에 인간(노동자)은 그의 동물적인 기능들, 먹고, 마시고, 생식하는 것에서만, 기껏해야 그의 거주와 의복 등에서만 자발적으로 활동한다고 느끼고, 그의 인간적인 기능들에서는 자신을 동물로 느낀다는 결과가 나온다. 동물적인 것이 인간적인 것으로, 그리고 인간적인 것이 동물적인 것으로 된다.
먹는 것, 마시는 것, 생식하는 것 등은 물론 참으로 인간적인 기능들이다. 그러나 그러한 일들을 인간적인 활동의 다른 영역에서 분리하고 최후의, 유일한 궁극목적으로 만드는 추상에서는 그러한 일들이 동물적이다.
읽기) 여기서 마르크스의 유명한 문장이 등장한다. 하루 중에서 근무하는 시간을 제외한 시간동안 노동자는 무엇을 하는가? 당신들은 무엇을 하는가? 당시 10시간 노동법도 간신히 통과될까 말까한 시절임을 명심하자. 그러면 9시 출근에 8시 퇴근이란 뜻이다. 그럼 남은 시간, 즉 자유 의지로 살수 있는 시간 동안 무엇을 하겠는가? 먹고, 자고, 싸고, 생식한다.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작업장에서 자신이 아니라 남의 것, 즉 가축이나 노예였던 노동자는 간신히 되돌아온 자유시간에는 결국 동물적인 일을 할 시간만 남아있는 것이다. 노동을 한다는 것은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는 매우 중요한 징표다. 그런데 인간은 그 노동 시간동안 가축이다. 먹고, 자고, 싸고, 생식하는 것은 인간의 동물적 속성이다. 그런데 그 시간동안 인간은 자신을 살아있다고 느낀다. 여러분도 생각해 보라. 9시부터 6시까지 사이에 자신이 살아있음을, 가장 활력있는 순간이 언제인지, 학생들이 1교시부터 6교시 까지 사이에 가장 생생하게 살아있는 시간이 언제인지? 그것은 점심시간다. 즉, 먹는 시간이다.
물론 마르크스는 먹고, 마시고, 생식하는 것을 끊고 고차적인 정신세계를 찾아가자는 종교를 설파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나름 가치있는 활동이다. 그러나 그 활동들이 삶의, 그리고 그 많은 시간을 소모하는 노동과 고역의 최종 목적이라면, 그렇다면 그것은 동물적인 활동이다. "목구멍 포도청"때문에 일하는 인간은 동물이다. 그리고 "목구멍을 포도청으로 임명하는"왕국은 동물의 왕국이다.
원문) 우리는 두 가지 측면에서 실천적인 인간 활동의 소외의 행위, 노동을 고찰하였다. (1) 노동자에게 낯선 대상으로서 그리고 노동자를 지배하는 대상으로서 노동의 생산물에 대한 노동자의 관계. 이러한 관계는 동시에 낯설고 그에게 적대적으로 대립하는 세계로서 감성적 외적 자연적 대상에 대한 관계다. (2) 노동의 내부에 있는 생산행위에 대한 노동의 관계. 이러한 관계는 낯설고 노동자에게 속하지 않는 활동, 고통으로서 활동, 무력으로서 힘, 거세로서 생식에 대한 노동자 자신의 관계이며, 이 활동은 노동자 자신과 대립하며, 그에게서 독립적이고 그에게 속하지 않는 활동으로서 노동자 자신의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에너지와 그의 인격적 생명 (도대체 활동 이외의 생명이란 무엇인가?)이다. 앞에서 서술했던 것이 대상의 소외였다면, 이것은 자기 소외다.
우리는 이제 두 개의 규정에서 소외된 노동의 세 번째 규정을 이끌어내야만 한다.
읽기) 이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에서 인간 소외를 두가지 끌어내었다. 하나는 저번에 살펴본 바와 같은 자신의 생산물이 낯선 것이 되고, 도리어 자신을 지배하는 현상이다. 다음은 그 생산을 하는 과정 속에서 노동자가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지 못하는 상황이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 아닌가?"라고 반문할지 모른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다시 되묻는다. "활동을 제외한 생명이란 무엇인가?" 즉 "일을 제외한 삶, 결국 먹는 일만 남은 삶은 무엇인가?" 앞의 것, 즉 노동 생산물이 낯선 것이 되어 도리어 노동자를 지배하는 상황은 대상의 소외, 노동 대상이 남의 것이었기에 비롯된 것이지만, 두번째 소외는 이제, 노동 과정, 노동 시간 동안 노동자 자신이 자신의 것이 아니게 된 상황, 하루 중 가장 인간적이고 활동적인 시간과 능력을 순전 타인에게 내어주고 기껏 먹고, 자고, 생식하는 활동만 자신에게 남겨둔 분열적 상황이다. 이는 노동자와 노동대상의 분열이 아니라 노동자 자신의 분열이다. 이를 마르크스는 자기소외라고 부른다.
이 두 가지 규정에서 마르크스는 다시 세번째 소외를 제시하고자 한다.(다음 시간에)
읽기) 우선 이 문헌헌에 무차별적으로 사용되는 외화, 소외 두 용어를 좀 정리해야겠다. 이 둘은 각기 alienation 과 estrangement 의 번역이다. 이 중 하나는 헤겔의 용어고 다른 하나는 포이어바흐의 용어다. 헤겔의 용어는 이렇다. 원래 정신이 있다. 그런데 이 정신은 스스로를 인식하지 못한다. 이 상태는 그저 있는 상태이며 자신이 있음도 알지 못하는 상태다. 자신이 있음을 인식하려면 자신을 비출 대상이 있어야 한다. 즉, "무언가에 대하여, 무엇"이 되어야 자신의 있음을 알게된다. 이리하여 유명한 대자적 존재라는 말이 나온다. 이로써 정신은 자신의 대상인 외부세계를 만들어낸다. 여기에서 최초의 외화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정신과 그 외부세계는 한몸에서 난 두 현상이지만, 이를 모르는 정신은 그 외부세계에 비추어 본 자신이 실제 자신과 "동일한지"에 대해 확신하지 못한다. 이로써 정신은 "정신"과 "외부세계, 대상"으로 분열되고, 이를 다시 하나로 만들기 위한 기나긴 여정이 시작된다. 이로써 원래 하나라야 마땅한 존재가 자신을 분열된 것으로 파악하는 현상, 자신에게 속한 것을 타자로써 파악하는 현상이 계속된다. 이것이 alienation이다.
소외는 포이어바흐의 용어다. 포이어바흐는 인간이 신을 만들고, 그 신에게 자신의 모든 힘과 좋은 점을 부여한다고 본다. 그리하여 마침내 신은 인간 자신의 산물이 아니라 인간에게 아주 낯선 대상이 되어 인간 앞에 군림한다. 이로써 인간은 자신의 산물인 신의 지배를 받으며, 신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주변화된다. 이것이 인간의 estrangemnet다. 보다시피 결국 이 두 용어를 구별할 이유가 없어보인다. 이 문헌을 처음 번역한 강유원 선생이 이 두용어를 외화, 소외로 번역한 관례를 따랐지만, 그냥 다 '소외'로 읽어도 무방할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마르크스는 노동 과정속에서 일어나는 소외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원문) 첫째, 노동이 노동자에게 외적이라는 것, 즉 노동이 노동자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 그런 까닭에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 속에서 스스로를 긍정하지 않고 부정하며, 행복을 느끼지 않고 불행을 느끼며, 자유롭고 육체적이며 정신적인 에너지를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육체를 소모시키고 그의 정신을 황폐화시킨다. 그런 까닭에 노동자는 노동의 외부에서야 비로소 자기 곁에 있다고 느끼고, 노동 안에서는 이방인이라고 느낀다. 노동하지 않을 때는 집에 있는 것처럼 편안하고, 노동할 때에는 편안하지 않다. 그런 까닭에 그의 노동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강요된, 강제노동이다. 그런 까닭에 노동은 욕구의 충족이 아니라 노동 바깥에 있는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 노동의 낯설음은 어떠한 물질적인 혹은 그 밖의 강제도 존재하지 않게 되자마자, 노동이 마치 역병처럼 기피된다는 것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읽기) 가장 먼저,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이 자신의 적성, 소질, 희망과 무관한 일이라는 현실에 직면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억지로 일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더 기가 막힌 것은 그 일의 결과 자신의 어떤 바람직한 능력이나 특성의 향상이 없다는 것이다. 억지로 죽도록 일했지만, 일하기 전이나 뒤나 자신의 진보와 향상이 없다면 한 마디로 시간낭비 아닌가? 이는 특히 육체노동이 사라진 오늘날 더욱 심각하다. 차라리 중세식 농업노동은 근육과 체력이라도 길렀지만, 오늘날의 노동은 고도의 분업화로 인해 아무리 많이 하더라도 아주 세분화된 단순한 작업에만 숙달될 뿐, 어떤 가치 있는 능력이 향상되지 않는다. 그러니 편협한 마음, 균형잡히지 않은 육체, 국소부위의 신체 손상 등이 노동의 결과다. 그러니 항상 휴식은 달콤하고 일요일은 행복하고 월요일은 마음이 무겁다. 인간은 항상 노동하지 않기를 꿈꾸며, 심지어 노동하는 순간에도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하는 이유는 "먹고살기 위해서", 즉 생존수단을 얻기 위해서다. 이로써 노동은 수단이 된다. 노동의 목적은 노동을 통해 충족하게 될 욕구가 아니라, 노동의 결과 받게 될 임금을 통해 충족하게 될 욕구다. 즉 노동을 하는 목적과 실제 노동과는 무관하다. 그러니 자발적으로 열심히 일할 노동자는 없다. 그래서 강제가 사라지면 노동도 사라진다. 계약한 노동시간을 떼우고 월급만 받을수 있으면 그만이지, 그 노동의 결과야 어찌되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런 의미에서 자신의 노동 결과물에 고도의 관심을 기울였던 기술자, 장인과 근대의 노동자는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쉬는 것보다 일하는 것이 더 편하다"라고 말했던 모차르트의 말은 오늘날 점점 먼 이상이 되어가고 있다. 도리어 "월급이 나오고 보는 사람이 없다면 되도록 놀고싶다"는 것이 오늘날의 노동자다. 당연하지 않은가? 내가 원한 일도, 내가 발전하고 계발되는 일도 아닌데다, 하면할수록 나의 심신을 망치는 일인데, 왜 자발적으로 하겠는가?
원문) 외적인 노동, 인간이 스스로를 외화하는 노동은 자기희생이며, 고행이다. 마지막으로 노동자에 대한 노동의 외재성은 노동이 노동자 자신의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것이라는 것, 노동이 그에게 속하지 않는다는 것, 그가 노동에서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속한다는 것에서 나타난다. 종교에서 인간적인 상상력, 인간적인 두뇌, 인간적인 심정의 자기 활동이 개인에게 독립되어, 즉 낯선 신적인 또는 악마적인 활동으로서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듯이 노동자의 활동 역시 자기 활동이 아니다. 노동자의 활동은 다른 사람에게 속하며 노동자 자신의 상실이다.
읽기) 사정이 이러하니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노동을 강제받아야 하며, 온갖 감시장치를 통해 땡땡이를 치지 못하도록 통제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노동의 결과, 그 생산물을 통해 이득을 보는 존재가 노동자 자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을 판매했고, 그 댓가로 임금을 받았다. 그러니 그 노동은 근무시간 동안은 노동자의 것이 아니라 그것을 구입한 사람, 즉 자본가의 것이다. 돈을 받았기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자기 몸이 남의 마음에 따라 남의 목적을 위해 그리고 남이 정해준 시간과 리듬에 따라 일해야 한다는 것은 대단한 고역일수밖에 없다. 차라리 노예는 애초에 자기가 남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노예에게는 어떤 분열도 소외도 있을수 없다. 그러나 노동자, 소위 자유 노동자는 자유 시민이지만, 일하는 시간 동안에는 다른 사람의 소유물처럼 된다. 생각은 자유민인데 몸은 노예다. "나"는 여전이 내것이로되 "나의 활동"은 내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그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는 마치 종교에서 사람들이 자신들의 좋은 활동은 신 덕분, 나뿐 활동은 악마 때문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활동은 대체 어디 있으며, 활동이 모두 남의 것인 자신은 대체 무엇인가? 결국 이는 자신의 상실이다. 노동자는 노동하는 순간부터 자신을 상실하며, 근무시간이 끝나면 그 때 자신으로 돌아온다.
원문) 그런 까닭에 인간(노동자)은 그의 동물적인 기능들, 먹고, 마시고, 생식하는 것에서만, 기껏해야 그의 거주와 의복 등에서만 자발적으로 활동한다고 느끼고, 그의 인간적인 기능들에서는 자신을 동물로 느낀다는 결과가 나온다. 동물적인 것이 인간적인 것으로, 그리고 인간적인 것이 동물적인 것으로 된다.
먹는 것, 마시는 것, 생식하는 것 등은 물론 참으로 인간적인 기능들이다. 그러나 그러한 일들을 인간적인 활동의 다른 영역에서 분리하고 최후의, 유일한 궁극목적으로 만드는 추상에서는 그러한 일들이 동물적이다.
읽기) 여기서 마르크스의 유명한 문장이 등장한다. 하루 중에서 근무하는 시간을 제외한 시간동안 노동자는 무엇을 하는가? 당신들은 무엇을 하는가? 당시 10시간 노동법도 간신히 통과될까 말까한 시절임을 명심하자. 그러면 9시 출근에 8시 퇴근이란 뜻이다. 그럼 남은 시간, 즉 자유 의지로 살수 있는 시간 동안 무엇을 하겠는가? 먹고, 자고, 싸고, 생식한다.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작업장에서 자신이 아니라 남의 것, 즉 가축이나 노예였던 노동자는 간신히 되돌아온 자유시간에는 결국 동물적인 일을 할 시간만 남아있는 것이다. 노동을 한다는 것은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는 매우 중요한 징표다. 그런데 인간은 그 노동 시간동안 가축이다. 먹고, 자고, 싸고, 생식하는 것은 인간의 동물적 속성이다. 그런데 그 시간동안 인간은 자신을 살아있다고 느낀다. 여러분도 생각해 보라. 9시부터 6시까지 사이에 자신이 살아있음을, 가장 활력있는 순간이 언제인지, 학생들이 1교시부터 6교시 까지 사이에 가장 생생하게 살아있는 시간이 언제인지? 그것은 점심시간다. 즉, 먹는 시간이다.
물론 마르크스는 먹고, 마시고, 생식하는 것을 끊고 고차적인 정신세계를 찾아가자는 종교를 설파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나름 가치있는 활동이다. 그러나 그 활동들이 삶의, 그리고 그 많은 시간을 소모하는 노동과 고역의 최종 목적이라면, 그렇다면 그것은 동물적인 활동이다. "목구멍 포도청"때문에 일하는 인간은 동물이다. 그리고 "목구멍을 포도청으로 임명하는"왕국은 동물의 왕국이다.
원문) 우리는 두 가지 측면에서 실천적인 인간 활동의 소외의 행위, 노동을 고찰하였다. (1) 노동자에게 낯선 대상으로서 그리고 노동자를 지배하는 대상으로서 노동의 생산물에 대한 노동자의 관계. 이러한 관계는 동시에 낯설고 그에게 적대적으로 대립하는 세계로서 감성적 외적 자연적 대상에 대한 관계다. (2) 노동의 내부에 있는 생산행위에 대한 노동의 관계. 이러한 관계는 낯설고 노동자에게 속하지 않는 활동, 고통으로서 활동, 무력으로서 힘, 거세로서 생식에 대한 노동자 자신의 관계이며, 이 활동은 노동자 자신과 대립하며, 그에게서 독립적이고 그에게 속하지 않는 활동으로서 노동자 자신의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에너지와 그의 인격적 생명 (도대체 활동 이외의 생명이란 무엇인가?)이다. 앞에서 서술했던 것이 대상의 소외였다면, 이것은 자기 소외다.
우리는 이제 두 개의 규정에서 소외된 노동의 세 번째 규정을 이끌어내야만 한다.
읽기) 이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에서 인간 소외를 두가지 끌어내었다. 하나는 저번에 살펴본 바와 같은 자신의 생산물이 낯선 것이 되고, 도리어 자신을 지배하는 현상이다. 다음은 그 생산을 하는 과정 속에서 노동자가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지 못하는 상황이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 아닌가?"라고 반문할지 모른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다시 되묻는다. "활동을 제외한 생명이란 무엇인가?" 즉 "일을 제외한 삶, 결국 먹는 일만 남은 삶은 무엇인가?" 앞의 것, 즉 노동 생산물이 낯선 것이 되어 도리어 노동자를 지배하는 상황은 대상의 소외, 노동 대상이 남의 것이었기에 비롯된 것이지만, 두번째 소외는 이제, 노동 과정, 노동 시간 동안 노동자 자신이 자신의 것이 아니게 된 상황, 하루 중 가장 인간적이고 활동적인 시간과 능력을 순전 타인에게 내어주고 기껏 먹고, 자고, 생식하는 활동만 자신에게 남겨둔 분열적 상황이다. 이는 노동자와 노동대상의 분열이 아니라 노동자 자신의 분열이다. 이를 마르크스는 자기소외라고 부른다.
이 두 가지 규정에서 마르크스는 다시 세번째 소외를 제시하고자 한다.(다음 시간에)
# by | 2008/10/27 09:44 | 마르크스 읽기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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