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 독해 -경제학 철학 수고(3)

원문)  이제 대상화, 노동자의 생산, 그리고 그러한 대상화에서 발생하는 소외, 대상의 상실, 노동자의 생산물의 상실을 더 상세하게 고찰하기로 하자.

노동자는 자연, 감성적인 외부세계 없이는 아무것도 창조 할 수 없다. 그것은 노동자의 노동이 그 안에서 실현되며 활동이 이루어지며, 그것에서 그리고 그것을 매개로 생산하는 소재다.

그러나 노동은 스스로 실행할 대상이 없다면 생활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자연은 노동에게 생활수단을 제공하며, 다른 한편으로 자연은 더 좁은 의미의 생활수단, 즉 노동자 자신의 육체적 생존의 수단도 제공한다.


읽기) 마르크스는 소외를 구체적인 인간 활동 과정속에서 찾고자 함으로써 포이어바흐를 넘어선다. 만약 인간이 종교를 만들어서 스스로소외시키고 있다면 그 원인은 만들어진 종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를 만들게 한 인간의 활동 속에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노동을 할수록 소외되고 있다면,  그 원인은노동 개념의 분석이 아니라, 실제 인간의 노동이라는 활동 속에서 찾아야 한다. 이를 위해 마르크스는 노동소외를 구체적인노동활동의 과정을 통해 설명하고자 한다. 이는 유물론적 입장을 취한다는 뜻이다. 그의 유물론 선언은 "노동자는 자연, 감성적인 외부세계 없이는 아무것도 창조 할 수 없다"는 말 속에 나타난다. 인간이 무엇을 창조한다는 것은 감각적으로파악할수 있는 외부세계에 무엇인가를 작용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외적인 자연, 즉 물질적 세계가 없으면 아무것도 창조할 수없다. 작용을 가할 대상이 없는 일은 무의미하다. 따라서 자연이 먼저냐 의식이 먼저냐 하는 문제는 무의미하다. 자연이 존재하지않는다면 도대체 인간의 의식이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작용할 대상이 먼저 있고, 작용해야 할 이유가 있고, 그리고 나서 작용에대한 구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물질적 세계, 즉 자연은 인간 노동의 동기이자, 대상이며, 동시에 노동에 필요한 소재이기도 하다.게다가 자연은 생활수단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생활수단은 두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인간으로서, 즉 살아있는육체로서 존속할수 있는 수단이며, 다른 하나는 생산하는 힘으로서 존속할수 있는 수단이다.

원문)그러므로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을 통해서 더 많은 외부세계, 감성적 자연을 획득할수록 그는 이중적 측면에서 생활수단을 빼앗기는데,첫째 감성적 외부세계가 점점 더 그의 노동에 속하는 대상, 그의 노동의 생활수단이기를 그친다는 것, 둘째, 감성적 외부세계가점점 더 직접적인 의미의 생활수단, 노동자의 육체적 생존을 위한 수단이기를 그친다는 것이다.


읽기) 자연이 두 측면의 생활수단이기 때문에 노동자의 소외도 두 측면에서 나타난다. 노동을 할수록 더욱 상실한다는 것은 단지 갈수록 가난해진다는 의미가 아닌 것이다.

노동자는 노동을 하면 할수록 자기 외부의 세계가 자신이 통제하고 작용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님을 느끼게 된다. 외부 세계는 자신의노동에 속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노동이 외부세계에 속해있는 한 마디에 불과하다. 과거 전원의 농민들이 느꼈을법한 자연에나의 노력을 가해 얻을 수 있는 뿌듯함 같은것은 기대할 수 없다. 또한 자연에서 이런 저런 소재들을 찾아서 노동을 개선할 수있었던 시절도 옛일이 되었다. 노동자는 이미 어디선가 준비된 도구들을 이미 준비된 사용법에 따라 사용해야 한다.

또한 노동자는 노동을 할수록 자신의 외부세계가 삶에 필요한 여러 생존수단의 원천이 아니라 온통 위험과 악의로 가득찬 냉혹하고무정한 세계로 마주섬을 느끼게 된다. 즉 세상이 포도청이 되는 것이다. 이 세상은 내가 살아갈 무대이자, 내가 그 구성원인전체가 아니라 나로 하여금 계속해서 노동하기를 강요하는 포도대장이 된다. 노동자는 포도대장이 요구하는 노동을 해야만 간신히생존에 필요한 수단을 얻는다. 그야말로 자연상태에서 이 세상은 그를 절멸시킬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는 위험의 집합이다."길바닥에 나 앉는다"라는 말에는 "길바닥은 안전하지 않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물먹고,물마시고, 팔을 베고 누웠으니..."자연과의 합일 같은 삶은 허용되지 않는다. 


원문)따라서 이러한 두 가지 측면에 의해 노동자는 그의 대상의 노예가 된다: 먼저 그가 노동의 대상, 즉 노동을 얻는다는 것,다음으로 그가 생존수단을 얻는다는 것. 따라서 그의 대상이 그가 우선 노동자로 그 다음은 육체적 주체로서 존재할 수 있도록허락한다. 이러한 노예상태의 절정은 그가 노동자일 때만 자기 자신을 육체적 주체로서 유지할 수 있으며, 육체적 주체일 때만노동자라는 것이다.


읽기)이 두 측면의 결과는 노동자가 자신이 전혀 통제할 수 없는 외적 대상을 향해 외적 대상이 요구하는 노동을 해야 하는 그런상황이다. 여기서 그 순서가 전도되어 있다. 노동자는 자신의 생존수단을 얻기 위해 그 원천인 외적 세계에 작용을 가하는 것이아니라, 외적 세계에 작용을 가할수 있기 때문에 비로서 생존수단을 얻을수 있게 된다. 즉, 노동자가 아닌 육체적 주체는 생존권을요구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마라!"라는 자본주의의 가장 냉혹한 슬로건이 바로 여기에서 나오는것이다. 그런데 노동의 대상인 외적 세계는 노동자가 통제할 수 없는 대상이 되어 있다. 도리어 외적 세계가 노동자의 노동의가치를 판단한다. 따라서 노동자는 생존수단을 얻으려면  


원문)정치경제학 법칙에 따르면 자신의 대상 속에서 노동자의 소외는 이렇게 표현된다: 노동자는 더 많이 생산할수록 더 적게 소비해야한다. 그가 더 많은 가치를 창조할수록 그는 더 무가치해지고 가치가 없어진다. 그의 생산물이 더 정형화될수록 그는 더욱 기형화된다. 그의 대상이 문명화될수록 그는 더욱 야만화 된다. 노동이 더 강력해질수록 노동자는 더욱 무력해진다. 노동이 더 지능적으로될 수록 노동자는 더욱 어리석어지고 자연의 노예가 된다.


읽기) 정치경제학 법칙에 따르면이라는 단서는 조금 애매하다. 오히려 정치경제학 법칙에 은폐된 현실에서는이라고 읽는것이 더 타당할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과 자신의 복지가 반비례하거나 최소한 무관하다는 현실을 경험하게 된다. 노동자가 더욱많이 노동할수록, 그는 근대 기계문명을 더욱 발전시키며, 따라서 노동자는 점점 무가치해진다. 이는 21세기에 더욱 첨예하게나타났다.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수많은 사무직 노동자를 무가치하게 만들고, 다시 프로그래밍 하는 프로그램이 나와서 프로그래머가무가치해지고, 하는 식으로... 오늘날 지식정보노동이란 결국 인간 노동의 필요를 줄이는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기 떄문에, 노동을열심히 할수록 노동자의 가치가 전체적으로 떨어지게 된다는 이 말에 딱 들어맞는다. 

또한 이러한 근대적 노동은 체계적이고 정형화된 분업을 발전시키기 때문에 인간 노동자는 점점 그 속에서 특별한 한 부분에만전문화되게 된다. 그리하여 노동 전체는 점점 고차원적이 되지만, 그럴수록 그 복잡해진 노동 전체를 이해하기 어려워지는 개별노동자들은 그 속에서 노예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 분야를 총괄적으로 알고 행할 수 있었던 장인은 사라진다. 배울 것이 적던시절의 교육자와 배울 총량이 엄청나게 많아진 시절의 교육자를 비교해 보라. 그리하여 나누어 가르치고, 나누어 가르치다보니 나눈부분이 아닌 다른 부분에는 무관심해지고, 결국 교육 전반에 대해서 조망하지 못하게 된 분업화된 교육노동자들을 보라.


원문)정치경제학은 노동자와 생산의 직접적인 관계를 고려하지 않음으로써 노동의 본질 안에 있는 소외를 은폐한다. 노동은 부자를 위해서는경이로운 작품을, 궁전을, 아름다움을 생산하지만, 노동자를 위해서는 헐벗음, 움막, 불구를 생산한다. 그것은 노동을 기계로대치하지만 노동자의 일부를 야만적 노동으로 되돌리며, 나머지는 기계로 만들어 버린다. 그것은 정신을 생산하지만 노동자를 위해서는정신박약과 백치를 생산한다.


읽기)이 부분은 조금 당혹스럽다. 마르크스가 소외의 주 원인으로 제시한 것은 근대 산업의 분업이다. 노동자가 열심히 일할수록 산업이발전하고, 그럴수록 분업은 더욱 정교해지기 때문에 그 한 마디로 전락한 인간은 노동과정의 전체를 알지 못하는 불구가 되며,전반적이고 종합적인 인격과 지식 대신 사회 분업의 한 분야에만 특화된 지적 불구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전체적인 노동의결과물은 문명이고 정신이지만 개별 노동자는 정신박약과 백치만을 받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부자들이 과연 그 댓가로 경이로운작품과 아름다움을 받는 것일까? 여기서 마르크스는 고대 아테네의 부자들과 자본주의의 부자들을 혼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자본주의의부자들은 아름다움과 경이로운 작품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강박적으로 화폐에 집착한다. 하긴, 아무런 사용가치 없이 단지화폐만을 추구하는 자본가 정신에 대해 밝혀지려면 이 글이 작성된 시대로부터 50년이 더 지나 막스 베버가 나와야 했으니마르크스에게 그것을 추궁할 수는 없다. 어쨌든 분업은 자본가 역시 한 마디에 불과한 존재로 만들었다. 자본주의에서 완전한총체성을 갖춘 인간은 없다. 요컨대 자본주의는 부자, 노동자 할 것 없이 모두 불구와 백치로 만든다.


원문)노동의 생산물에 대해 노동이 가지는 직접적인 관계는 노동자와 그의 생산 대상과의 관계다. 생산 대상과 생산 자체에 대한 자산가의관계는 이러한 첫 관계의 결과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것을 확증한다. 우리는 이 다른 측면은 나중에 살펴볼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노동의 본질적인 관계가 무엇인지 묻는다면, 우리는 생산에 대한 노동자의 관계를 묻는 것이다.


읽기) 당연히 어떤 노동과 그 생산물의 관계는 노동자와 그 생산 수단, 생산 대상의 관계다. 이 당연한 것이 정치경제학에서는 사라진다.경제학자의 눈에는 어떤 노동이 있고, 그 결과물인 생산물이 있다. 소위 투입이 있으면 산출이 있는 것이다. 즉 사물과 사물의관계만 나타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실제 과정은 노동자가 재료와 기계를 조작하고 있는 구체적인 노동과정이며, 이 과정은 앞에서살펴본 바와 같이 소외의 과정인 것이다.


원문)우리는 지금까지 하나의 측면, 다시 말해서 자신의 노동의 생산물에 대한 노동자의 관계에서만 노동자의 소외, 외화를 고찰해 왔다.그러나 소외는 생산의 결과에서뿐 아니라 생산의 과정, 생산적 활동 자체의 내부에서도 나타난다. 노동자가 생산 과정 자체에서 자기자신을 소외시키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가 자신의 활동의 생산물에 대해 낯선 것으로 대립할 수 있겠는가? 확실히 생산물은 활동의,생산의 요약일 뿐이다. 그러므로 노동의 생산물이 외화라면 생산 자체는 활동적인 외화, 활동의 외화, 외화의 활동일 수밖에 없다.노동의 대상의 소외 속에는 노동의 활동에서 소외, 외화가 요약되어 있을 뿐이다.


읽기)그리하여 마르크스는 노동 생산물이 노동자를 지배하게 되는 이 기막힌 현실을 더 추적해 들어가기로 한다. 이는 결국 노동과정에서찾아낼 수 밖에 없다. 노동을 할수록 그 생산물이 노동자를 소외시키는 것은 노동과정이 소외의 과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콩을심었으니 콩이 나는 것이다. 노동 생산물이 노동자를 소외시킨다는 것은, 기나긴 소외된 노동 과정의 결과에 불과하다. "노동의 대상의 소외 속에는 노동의 활동에서 소외, 외화가 요약되어 있을 뿐이다." 이 한 문장이 이 문단 전체를 요약하고, 이후이 책 전반을 요약하고 있다. 이리하여 마르크스의 해부용 칼은 공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다. 이상하게 경제학자들은 고용계약,자본투입, 그리고 산출을 말하지만 정작 노동과정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노동에 투입된 돈과 산출된 가치만을 따지기 때문이다.마르크스는 그 이유가 노동과정의 소외를 은폐하기 위함이라고 준엄하게 꾸짖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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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정변증법 | 2008/10/26 21:55 | 마르크스 읽기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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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착선 at 2008/10/26 23:47
이 부분 노동자가 망치를 만드는걸로 비유해서 들어본거 같은 기억이....
Commented by 부정변증법 at 2008/10/27 08:02
그 비유를 소개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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