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교육, 아름다운 세상을 위해

 
 40여 평생을 교육과 사색과 연구로 보냈습니다. 이렇게 보낸 평생에 후회도 없고 자랑스러움만 가득합니다. 
 그리고 중학교 교사로 16년, 대학 강사로 5년 동안 가르쳤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책도 네권을 냈습니다. 물론 안 팔리는 학술서적이지만요....

  원래 대문에 아카데미 학당 그림이 걸려 있었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옛 철학자들이 토론하는 모습이 있었습니다만, 잠시 일본 교토에 있는 "철학의 길"을 산책하고 있는 생존해 있는 철학자의 사진을 대문에 올려둡니다. 저 자세와 저 시선으로 세상을 향해 창을 여는 것입니다.

  혹시 여기 들어오신 분들중 뉴라이트 계시면 잘 뒤져서 좌빨 어쩌구 하면서 고발을 하든가 말든가 하시고, 들어 오신분들 중 개념 탑재하신 분들은 이 글에 댓글 달거나, 아니면 방명록 남겨주세요.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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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정변증법 | 2010/12/24 10:38 | 교육에 대해 생각하기 | 트랙백 | 덧글(57)

타이완 여행 (3) - 타이난

루깡에서의 강행군에도 불구하고 타이난을 가기 위해 일찍 일어나야 했다. 무려 5시 53분에 타이중을 떠나 타이난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컴컴할때 들어오는 기차의 모양이 보기 좋았다???

원래는 여유있게 풍경도 보며 다니는게 기차여행의 묘미고, 또 고속철도역이 도심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 있기 때문에 일반 열차를 이용한 것이지만 워낙 일찍 올라탄지라 잠자기 바빴다. 잠깐 눈 감았다가 뜬 것 같았는데 벌써 타이난에 도착하고 있었고, 시간은 어느덧 8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천년이 넘은 문화재가 즐비한 우리나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겠지만 어쨌든 타이난은 타이완의 가장 오래된 도시다. 우리 나라로 치면 경주 쯤 될까? 그렇다고 해서 타이난이 타이완의 발상지라는 따위의 말을 하면 안된다. 다만 정부 조직을 갖춘 집단이 처음 도시를 개설한 곳이라는 게 정확한 뜻일 것이다. 

사실 타이완에 사람들이 거주한 역사는 무척 길다. 오늘날 태평양 여러 섬들에 거주하는 폴리네시안들의 조상뻘 되는 민족들이 거주하고 있었으니. 작은 섬이지만 이들의 명맥은 아직도 남아서 원주민이 무려 9개 부족이나 남았을 정도다. 다만 어떤 통일된 사회를 이루지 않고 마을 단위로 흩어져서 주로 산악지역의 수렵민족으로 살았을 뿐이다. 겨울에 나름 추운 섬 서편보다는 열대기후에 가까운 동편에 몰려 산 경향들이 있었고, 섬 서편은 자연스레 중국(주로 복건성이나 광동성)인들이 건너오게 되었다. 그런데 17세기 경 식민지 경영에 나선 포루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인들이 들어서게 되었고 경합 끝에 네덜란드가 스페인을 몰아내고 이 섬을 통치하게 되었다. 그들의 통치는 가혹했던 모양이다. 그들은 이곳 타이난에 튼튼한 요새를 지어놓고 원주민이나 한족들을 혹사했다고 한다. 이 때 한족의 명나라가 만주족의 청나라에게 멸망하고 명나라의 부흥을 꿈꾸던 정성공이 부흥운동의 근거지로 한족 유민들을 이끌고 이 섬에 상륙했고, 네덜란드와 싸워 이긴 뒤 망명정부를 세웠다. 이 때 부터를 타이완의 나라로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봐야 하니 길게 봐도 400년이 채 안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이난에는 오래된 도시의 느낌을 주는 풍경이 많이 남아 있었다. 우선 기차역부터 남달랐다.


타이난 기차역은 타이중 기차역과 마찬가지로 100년된 건물인데, 깨끗하게 청소하고 보수는 했지만 거의 그대로 남겨두어 마치 타임터널 입구를 보는 것 같았다. 게다가 바로 뒤의 현대식 빌딩과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1월인데도 활짝 핀 꽃들과 야자수는 과연 이곳이 열대기후임을 잘 보여주고 있었고, 하여간 풍경이 보기 좋았다.

또 소방서 역시 만화책에서나 볼 법한 그런 소방서였다. 소방서 옆에는 시립 문학관이 있었는데 그 역시 고색 창연한 옛날 건물이었다. 비록 수백년 된 건물들은 아니었지만, 오래된 도시의 흥취를 느끼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저 낡은 소방서를 무시하면 안된다. 1년에 크고 작은 지진이 십수회, 그리고 대형 태풍이 적어도 7~8회는 정통으로 지나가는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버티고 있는 이 나라 방재 능력이 저 안에 들어 있을 터이니...


그런데 문학관 앞에 있는 자전거 전용도로가 내 눈길을 끌었다. 자전거 도로가 차도 제일 가장자리가 아니라 중간에 그려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차도 가장자리는 주정차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자전거 도로보다 더 합리적으로 보인다. 도로 가장자리에 그려진 우리 자전거 도로는 걸핏하면 불법주정차 차량에 막혀 무용지물이 되기 일쑤였지만, 여기서는 아예 현실적인 요구를 수용한 것이다. 그 대신 노란 색으로 그려진 자전거 도로에는 차 한대도 얼씬하지 않았다.

제일 먼저 찾은 문화재는 공쯔마오(공자묘)다. 타이완의 웬만한 도시마다 공자묘, 관우묘, 천후궁은 다 있지만, 당연히 이곳 타이난의 공자료가 가장 오래되었고, 또 문화재 가치도 높다. 전체적으로 숙연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내고 있었으며, 수백년 된 건물들은 우리나라에 비하면 역사가 짧을수도 있겠지만, 그 수백년의 향기는 고스란히 다 발휘하고 있었다.






공자묘 다음으로 방문한 곳은 한족들이 유달리도 사랑하고 공경하는 관우 사당. 광성제라는 극존칭으로까지 불리고 있는 관우에 대한 이곳 사람들의 사랑은 정말 대단했다. 그런데 관우사당보다 더 눈길을 끌었던 것은 그 앞에서 커다란 참외를 깎고 즙을 내어 파는 할아버지였다. 연세가 80세는 족히 되어 보이는 할아버지와 중년 남자가 부지런히 과일을 깎고 다듬고 있었는데, 설명을 보면 수십년째 이 일을 계속 해 왔다고 한다. 정말 자그마한 가게에서 어찌보면 초라해 보이는 그러나 고집있어 보이는 노인이 묵묵히 수십년간 해 온 일을 끈기있기 같은 자리에서 할 수 있다는 것이 부러웠다. 그 앞에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고, 한 사람이 몇 봉지 이상 살수 없다는 나름의 규칙까지 있는 모양이었다. 이런 끈질긴 장인정신과 사소한 일이라도 자긍심을 가지고 대를 이어가며 계속하는 것이 일본뿐 아니라 타이완에서도 흔한 모양이다. 조금 성공하면 자식은 그 일 안시키고 펜대 굴리게 하려는 우리나라의 풍토와는 좀 다른 뭔가가 있어 보였다. 바로 이런 것들이 비슷한 경제수준, 그리고 최근에 비슷한 정도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 사람들의 표정이나 분위기가 우리 나라보다 좀 더 밝고 안정되어 보이는 까닭인지도 모른다.



관우묘 건너편에는 타이완의 발상지라고도 할 수 있는 적간루(츠칸러우)가 있다. 정성공이 네덜란드인을 물리치고, 네덜란드의 요새 위에 중국식 건물을 올려서 본부로 사용했던 건물이다. 그런데 공교로운 것은 이 개국영웅 정성공이 일본에서 태어났으며, 어머니가 일본인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이는 중국문화와 일본문화의 교묘한 혼합지대가 된 타이완의 오늘날의 모습을 개국 당시에 이미 예견한 것이 아닐까?
츠칸러우 건너편에는 지금은 천후궁 사원으로 사용하고 있는 당시의 궁전이 있다. 정성공은 명나라의 마지막 왕족을 데려다가 이곳에 왕궁을 짓고 명나라의 명맥을 잇고 더 나아가 만주족을 몰아낼 힘을 기르고자 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명나라 왕족들은 왜 만주족에게 패할수 밖에 없었는지를 스스로 증명하는 나약하고 무도한 지배계급에 불과했으며, 결국 타이완의 망명정부는 정성공의 아들 대에 청나라에 항복하고 말았다.

자, 이제 돌아 볼 곳은 다 돌아 보았으니 이제는 먹을 차례다. 타이완을 대표하는 면 요리가 두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타이페이의 우육면(뉴러우멘)이며 또 하나는 바로 타이난의 단짜멘이다. 아마도 일본의 라면과 같은 뿌리가 아닐까 싶은데, 비교적 엷게 뽑은 면발과 깊은 맛이나는 국물, 고기 고명, 그리고 거기에 큼직한 피시볼 한 덩이와 삐딴 한 덩이를 얹어주고 60원(2200원 정도)을 받았다. 전국에서 가장 이름난 단짜멘 원조집인 두사오웨에서... 아래 오른쪽에 있는 사진은 큰 식빵의 속을 파서 스튜를 부어 먹는 관짜반이라는 타이난의 간식거리다. 아, 간식이라고는 하지만 정말 배 터진다. 하지만 배가 터져도 먹어야 한다. 타이완 관광은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먹기 위해서 하는 것이니까.


식사를 마쳤으면 디저트를 해야 한다. 타이완의 디저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누가 뭐래도 두부 푸딩에 시럽을 끼얹어 먹는 두화다. 정말 이 두화는 한국에 돌아오면 가장 먼저 그리워지기 시작하는 타이완 음식 중 하나다. 왼쪽에 있는 두화는 우유와 타피오카를 사용한 일종의 버블 두화? 오른쪽에 있는 것은 단팥과 시럼을 사용한 전통 두화다. 어느 것이나 다 맛있다. 두화 맛의 관건은 단맛이 아니라 두부푸딩을 어떻게 만드느냐에 있는 것이다. 나는 심지어 홍콩에서 오직 두부 한덩이에 설탕 좀 얹어주는 극 심플 두화를 먹어본적도 있다. 두부가 디저트가 될 정도로 감미롭다는 것.. 생각만해도 흐뭇하다. 건강에도 좋지 않은가?

by 부정변증법 | 2010/02/08 10:25 | 여행 이야기 | 트랙백 | 덧글(2)

타이완 여행(2) -루캉

타이중에 있는 허름한 호텔인 밍쓰다판덴에 짐을 푼뒤 오래된 도시 루캉을 방문하기 위해 다시 타이중 기차역으로 향했다. 여기에서 한 시간에 3~4회 운행되는 구분차(대도시를 중심으로 단,중거리를 운행하는 완행열차)를 타고 짱화로 향했다. 이 구분차에서 인상적인 것은 기관사 외에 또 한분이 탑승해서 순전 문을 열고 닫는 일만 한다는 것이다. 역에 도착하면 열쇠를 돌려서 문을 열고 승하차가 다 마무리 되었는지 눈으로 확인한뒤 열쇠를 돌려 문을 닫았다. 이렇게 세심하게 사람이 기차를 통제하는 모습은 일본에서도 본 적이 있는데, 확실히 일본문화와 비슷한 점이 많다. 짱화에서 내려 길 건너에 있는 작은 터미널에서 루캉행 버스에 올랐다. 낡은 버스는 용케 잘 달려서 루캉 터미널에 나를 떨궈주었다.

루캉은 지금은 많이 퇴색했지만 100년전만 해도 번창했던 항구도시다. 그런데 그 100년전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이제는 관광지로 바뀌어버린 곳이다. 먼저 방문한 곳은 타이완에서 가장 오래된 마쭈 사원이라는 대천후궁이다. 섬나라라 그런지 이 바다 여신을 섬기는 사원이 무척 많았는데, 타이난에 있는 것과 루캉에 있는 이곳이 가장 유명하다. 그런데 나한테 인상적이었던것은 사원 자체가 아니라 사원 근처의 분위기였다. 온통 각종 음식점과 간식점으로 들어차서 시끌벅절한 것이 무슨 지역 축제라도 열린것 같았다. 그만큼 이 사람들은 신앙생활이 일상생활과 결합되어 있다는 뜻일까? 대부분의 사원도 산속에 있거나 그런것이 아니라 도시 한 가운데 마치 숨통처럼 자리잡고 있어서 특별히 찾는다기 보다는 오며가며 잠깐 들리는 곳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얼추 배가 고파오는지라(새벽 5시에 나와서 비행기 타고 타이페이 와서 다시 타이중 까지 와서 다시 루캉까지 왔으니...) 사원 앞에서 뭘 좀 사먹기로 했다. 이 지역 특산물이 굴이라서 그런지 온통 굴탕, 굴전 투성이었다. 그래서 굴탕과 굴전이 각각 1900원 정도 하기 때문에 다 시켰다. 양이 적을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웬걸? 이런게 나왔다.!
합쳐서 3800원에 불과한 이 두접시를 비우면서 굴을 한 100마리는 잡아먹었지 싶다. 도대체 이렇게 팔고도 이문이 남을까?




이제 배도 채웠겠다, 도보여행을 시작했다. 구곡항(주취깡)을 걸어보는 것이 이번 관광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100년전의 골목길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곳이다. 정말 문자그대로 "그대로"다. 가게집 하나 들어서지 않고, 그저 골목길이다. 100년전의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 이런것도 안 부수고 그냥 두면 결국은 이렇게 관광자원이 되는 것이다. 마치 타임터널을 걸어가는 듯한 느낌을 주는 그런 특별한 장소가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어떤 안내판도 거창한 표식도 없이 그저 그대로 있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덕분이 그 입구를 찾는건 좀 힘들었다. 어쩌면 뭔가 화끈한 볼거리를 좋아하는 한국 남성들에게는 정말 시시한 곳이 될수도 있겠지만, 나한테는 그 무엇보다도 아기자기하고 유쾌한 도보길이었다.


주취깡이 끝나는 지점에서 용산사(룽산쓰)를 만날수 있다. 사실 타이완의 거의 모든 도시에 용산사가 있지만, 루캉의 용산사는 그 중 가장 오래된 곳으로 약 400년 된 건물이다. 역사가 짧은 타이완에서는 400년 이상된 유적은 거의 없다. 그 대신 보존이 잘 되어 있다. 이때 보존은 원형을 유지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주변까지 그 시대의 분위기를 내고 있다는 뜻이다. 일본의 호류지를 방문했을때 우리나라 불국사와 달리 주변의 음식점이나 매점이 거의 없어서 호젓하고 고즈넉함을 유지하고 있어서 강한 인상을 받았는데, 이 용산사도 400년 밖에(?) 안되었지만 오래된 사찰의 느낌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부석사처럼 산속에서가 아니라 번잡한 도시 한 복판에서!



이제 슬슬 해도 떨어지려 하고 다리도 아프기에 타이중으로 돌아가리로 했다. 타이중으로 돌아가기 위해 중심가에 있는 버스 정류장으로 갔는데 굳이 여기 저기 찾을 필요없이 도시 전체가 100년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마치 "놈놈놈" 같은 영화 세트장 같은 분위기였다. 자동차 대신 전차가 땡땡 거리고 지나간다면 딱이었다. 루캉. 참 흥미로운 곳이다.
타이중으로 돌아와서 오늘의 흥분되고 고달픈 여행의 피로를 달래고 싶었지만, 마치 우리나라 대전처럼 특징없이 사람만 많이 모인 타이중은 특별한 매력이 없는 도시라 딱히 갈 곳이 없었다. 하지만 그 속에서 나름 분위기 있고 고요하다는 칭밍이지에를 찾아 나섰다. 짱화은행 앞에서 타이중항을 향해 내달리는 간선도로로 달리는 버스를 타고 소고백화점 다음 정류장에서 내리면 된다고 프론트의 후덕한 아주머니가 약도를 그려주셨다. 그리하여 찾게된 칭밍이지에는 정말 오늘의 번잡한 일정을 정리하고 힘을 돋궈주는 우아한 공간이자 쉽터였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물가가 다소 비싸고(여기 기준으로....), 생각보다 거리가 작았다는 점. 어쨌든 여기 가로등불 아래 우아한 야외 카페에서 차를 한잔 하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by 부정변증법 | 2010/02/04 09:22 | 여행 이야기 | 트랙백 | 덧글(9)

일본의 몰락을 기대하지 말자


지난번에도 이런 취지의 포스팅을 했지만 불필요하게 본문중에 언급한 삼성관련 논란으로 호도되면서 주인장이 감당할 수 없는 난전으로 바뀌어가는지라 잠시 비공개 처리했습니다. 충분히 고민되지 않은 글을 섣불리 올려서 본의아니게 네티즌들을 혼란스럽게 한 점 양해 부탁 드립니다. 어쨌든 우리가 일본의 불행을 보면서 마치 우리의 행복이 도래할것같이 표정관리할 처지가 아니라는 점은 명백히 해야겠습니다. 무엇보다도 도요타가 일본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우리의 현대기아나 삼성이 차지하는 비중에 비해 엄청나게 작은데다가, 미국 시장 수출이 가지는 의미 역시 엄청 작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놀라운점은 세계에서 가장 수출을 많이 하는 나라에서 속하고, 가장 많은 무역흑자를 기록하는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무역의존도가 주요국 중에 가장 낮은 나라에 속한다는 점입니다.
 


먼저 위쪽 그래프를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2007년 현재 세계 주요국의 무역의존도입니다. 무역의존도는 수출수입의 합을 그 나라의 국내총생산으로 나눈 것입니다. 즉 국민소득 대비 무역액의 비율입니다.
보다시피 우리나라의 무역의존도는 75.1%입니다. 그만큼 내수시장이 작다는 것이며 무역의 비중이 크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글로벌 경제 변동에 따른 위험에도 크게 노출되어 있습니다.

주요국 중 우리만큼 무역의존도가 큰 나라는 독일 정도입니다. 대만이 120%로 우리보다 크고, 싱가폴이나 홍콩은 수백퍼센트에 달하지만 이 화교권 나라들은 본토와의 독특한 특수 관계에 있기 때문에 저 수치를 그대로 해석하기는 어렵습니다. 예컨대 대만의 텐런밍차라는 차 제조회사가 중국 운난성에 농장을 엄청나게 가지고 있는데, 이런게 다 무역으로 잡히는 겁니다. 그 외에도 무수한 대만과 홍콩 싱가포르 자본이 광동성, 복건성에 현지 공장들과 사업체를 세우고 있는데, 이들은 이걸 내수활동처럼 생각하지만 엄연히 통계상으로는 무역으로 잡힙니다. 북한의 인구가 한 5억쯤 된다면 개성공단에서 제조되는 물품이 모조리 무역으로 체크되는 상황을 생각하면 될겁니다. 게다가 이들 나라는 규모가 작은 나라들입니다. 이중 가장 큰 대만이 벨기에, 네덜란드 급의 규모이며 유럽에서도 이들 나라의 무역의존도는 프랑스, 독일보다 훨씬 큽니다.

 그런데 놀라운 경우는 일본입니다. 일본의 무역의존도는 28.6%에 불과해서 사실상 수출국이라기 보다는 내수국에 가깝습니다. 이는 내수에 거의 의존한다는 의미이며 내수시장이 가장 큰 나라인 미국과 맞먹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본이 경제 어렵다 어렵다 푸념하는 것을 곧이 곧대로 들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일본은 장차 노령층에 편입될 베이비붐 세대의 구매력이 짱짱합니다. 이들은 은퇴하더라도 소비 대열에서 이탈하지 않습니다. 반면 우리나라의 베이비붐 세대는  은퇴와 동시에 개털 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안그래도 약한 내수시장이 더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다음은 2009년 기준 주요국 무역의존도입니다. 거의 변화가 없음을 확인할 수 잇습니다. 싱가폴은 여전히 300%대이며, 대만은 120%대입니다. 즉 이 나라들의 경제 펀더멘탈에 큰 변화가 없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중국, 독일, 일본, 미국 역시 무역의존도에 큰 변화가 없습니다.
그런데 유독 우리나라의 무역의존도는 무려  92.3%로 대폭 상승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수출입의 폭증이라기 보다는 내수시장의 위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은 도요타의 미국 시장에서의 주춤거림, 혹은 소니의 글로벌화 실패등에서 타격을 받기는 하겠으나 그 충격파는 1/3에 불과합니다. 미국이 어마어마한 무역 적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경제대국인 까닭 역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쌩쌩하게 돌아가고 방대한 자국 시장이 살아있는 한 이런 나라들은 언제든지 권토중래할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더 중요한 것은 이런 나라들은  자국시장의 비중이 그만큼 크기 때문에 주로 자국 시장의 점유율을 놓고 경쟁을 벌이게 됩니다. 따라서 기업들의 경쟁의 효과 즉 소비자 잉여는 자국 국민들이 보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사태가 일어날 경우 거의 날것 그대로의 충격을 받게 됩니다. 조그만 충격에도 출렁거리게 됩니다. 더 나쁜 것은 자국의 기업들이 10%의 비중도 안되는 자국시장에서의 경쟁보다 외국시장에서의 경쟁에 치중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경쟁의 과실은 자국 소비자들이 아니라 외국의 소비자들이 보게 됩니다.
현대차에 대한 내수소비자들의 그 어마어마한 불만이 싸그리 묵살당하고 있는 현실, 얼마나 푸대접 받고 있는가 하는 현실에 대해 네티즌들의 성토대회를 열면 아마 그 자리에서 서버가 폭주할 정도일겁니다. 일본에서는 이런 일이 있을수 없습니다. 도요타의 가장 좋은 차는 일본에서 소비되기 때문입니다. 그 덕을 한국의 도요타 구매자들도 보았고요. 따라서 일본인들은 도요타가 잘되면 덕을 볼 것이고 잘못되면 큰 손해를 볼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현대차나 삼성이 아무리 떼돈을 번들, 그들은 자기들에게 뗴돈을 쥐어주는 외국의 고객들을 우대할 것이며, 국내 고객들은 그저 만일에 사태에 대비한 적금정도로 생각할겁니다. 만약 현대차가 망한다면? 오히려 자동차 시장의 독점체제가 무너지고 한국이 세계 자동차 회사들의 각축장이 되면서 소비자들은 더 저렴한 가격에 더 좋은 자동차를 구입할 기회를 가지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런 이유들에서 저는 이번 토요타 사태를 보면서 일본 고소하다 한국만세를 외치는 것이 더더군다나 현대차 만세=한국만세로 연결시키는 일부 언론의 태도가 대단히 무리할 뿐 아니라 음험하다고까지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남의 나라일에 박수치면서 혹시 떡고물 떨어지지 않을까 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우리 대기업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을 푸대접하지 못하게 할까를 고민해야 할 것이며, 어떻게 그 떡고물들이 그들 수중에서 사라지지 않고 우리 나라 안에서 유용하게 쓰일수 있게 할까를 고민해야 할것입니다.

이글루스 가든 - 시사진보가든...시사비평을 통해 ...

by 부정변증법 | 2010/02/03 19:03 | 사회에 대해 생각하기 | 트랙백(1) | 덧글(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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