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교육, 아름다운 세상을 위해

 
 40여 평생을 교육과 사색과 연구로 보냈습니다. 이렇게 보낸 평생에 후회도 없고 자랑스러움만 가득합니다. 
 그리고 중학교 교사로 16년, 대학 강사로 5년 동안 가르쳤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책도 네권을 냈습니다. 물론 안 팔리는 학술서적이지만요....

  원래 대문에 아카데미 학당 그림이 걸려 있었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옛 철학자들이 토론하는 모습이 있었습니다만, 잠시 일본 교토에 있는 "철학의 길"을 산책하고 있는 생존해 있는 철학자의 사진을 대문에 올려둡니다. 저 자세와 저 시선으로 세상을 향해 창을 여는 것입니다.

  혹시 여기 들어오신 분들중 뉴라이트 계시면 잘 뒤져서 좌빨 어쩌구 하면서 고발을 하든가 말든가 하시고, 들어 오신분들 중 개념 탑재하신 분들은 이 글에 댓글 달거나, 아니면 방명록 남겨주세요.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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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정변증법 | 2009/12/20 01:06 | 교육에 대해 생각하기 | 트랙백 | 덧글(54)

젊은 교사에게 드리는 편지 (7) 째째함의 우상

그 동안 이런 저런 사정, 사실은 저의 게으름으로 인해 편지가 좀 늦어졌습니다. 죄송합니다. 이제부터 다시 꾸준하게 편지 드리겠습니다.


쫀쫀함, 째째함의 우상

불과 10년전만 해도 교사가 되겠다고 희망하는 남학생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시절의 공기를 여전히 마시고 있는 부모들은 딸에게는 교사가 되라고 강요하다시피 하면서 아들이 교사가 되겠다고 하면 손사래를 칩니다. 심지어 자기 딸이 교육대학에 다닌다고 자랑하는 어느 어머니는 그런 한편 혹시 딸이 남교사와 결혼하게 될까봐 그게 제일 걱정이라고 어처구니 없는 말을 합니다. 소위 “남자가 째째하게 선생이나 한다.”라는 통념 때문입니다. 수도권보다 지방에서, 또 영남권보다 호남권에서 이런 통념이 더 강한 것 같습니다.

그럼 도대체 이런 해괴한 이데올로기는 어디서 왜 생긴 것일까요?
사실 교사가 큰 뜻을 품고 할 만한 일은 아닙니다. 교사는 뭔가 확인 가능한 큰 실적을 올리고, 경우에 따라 짜릿한 모험까지 감수해야 하는 그런 직업은 결코 아닙니다. 그런게 좋은 사람은 문자 그대로 ‘벤처’기업을 창업하거나 종소기업의 기획팀 등에서 일하면 됩니다. 그래서일까요? 교사는 흔히 야망과는 거리가 멀고, 안정되긴 하지만 지루하고 활동의 폭도 집-학교로 한정되고, 만나는 사람도 교사나 학생들로 제한되어 세상물정에 어둡게되는 그런 직업으로 여겨집니다.
물론 이런 통념은 부분적으로 사실인 면도 있지만, 대부분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통념이 유포된데는 사회적 편견 뿐 아니라 교사들 자신의 책임도 상당히 있습니다. 즉, 교사의 일 자체가 째째한 것이 아니라, 그 동안 교사들이 째째하게 일해왔기 때문에 이런 통념이 유포된 것입니다.
전두환이 쿠데타를 일으켰을때 미국의 극동담당자는 “한국인들은 쥐와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그게 한국인에 대한 세계의 통념이었습니다. 한국인은 지도자를 따라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쥐떼같은 겁장이들로 보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어떤 미국인도 한국인을 이렇게 보지 않습니다. 그건 이후 518과 610을 통해 한국인의 역동성과 용기를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잘못된 통념은 행동을 통해 뜯어고칠수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교사는 째째하다 따위의 생각을 버리십시오. 교사는 학교-집을 오가면서 아이들이나 상대하는 작은 세계에서 지루하지만 안정적인 생활을 누리면서 쪼잔한 일이나 한다는 생각을 버리십시오. 만약 여러분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고, 다수 교사들이 여전히 째째하게 산다면 교사에게 주어지는 교사의 높은 대우는 곧 삭감되어 ‘째째한 수준’이 되고 말것입니다.
교육사를 한번만 훑어 보아도 교사는 표면적으로는 째째해 보일지 몰라도 실제로는 웅혼한 일을 하는 사람임을 알 수 잇습니다. 이런 점이 잘 보이지 않는 이유는 그 동안 역사를 보는 관점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 역사는 항상 정치와 전쟁을 중심으로 알려졌습니다. 우리는 위대한 정복자를 웅혼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광개토대왕은 웅혼해 보이지만 실제 그가 한 일은 창조가 아닙니다. 오히려 파괴에 가깝습니다. 실제 역사를 이끈 사람들은 이런 파괴자가 아니라 그들이 이런 정복을 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한 창조자들이지만 이들은 역사의 전면에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창조자들의 관념이 널리 보급되고 대를 이어 전달되어 보편화되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빠르게 진화할 수 있었던 원동력입니다. 생물학적 진화에만 의존하는 동물이 수십세대에 걸쳐야 하는 적응과정을 인간은 문화를 통해 단 한두세대만에 해치울수 있습니다. 집단 중 한 두사람의 창조적 존재가 있어도 이들의 업적은 문화로 보편화되고 세대를 거쳐 전수됩니다. 이 모든 과정은 인간이 “교육”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일 뿐 아니라 교육하는 동물인 것입니다. 인류가 이렇게 지구상에서 번성할 수 있는 것은 용기, 힘, 투쟁 따위가 아니라 문화와 교육의 힘인 것입니다.
용맹과 무력만을 숭상하고 문화와 교육을 등한시한 민족이 얼마나 허무하게 스러져 갔는지 우리는 힉소스, 히타이트, 아시리아, 흉노, 몽골의 성쇠를 통해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반면 무력에 의해서는 정복당했지만 사실상 정복자를 정복한 그리스와 중국을 통해서도 문화와 교육의 위대함을 충분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교육은 위대한 행위입니다. 그리고 교육이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위대한 일을 담당하는 사람, 즉 교육자, 교사들이야 말로 어떤 의미에서는 인류 역사의 중추를 담당하는 웅혼한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실제 많은 교사들은 째째하거나 쪼잔한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마냥 비난할 일은 아닙니다. 이는 그만큼 교사가 하는 일이 중요하고 섬세하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교육은 너무도 중요한 인류의 위업이며, 그 영향은 사물이 아니라 사람에게 가해집니다. 그러니 교육은 함부로 자신의 용기를 뽐내고 통큼을 자랑하며 객기를 부릴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교육은 오히려 항상 신중한 판단과 정교한 선택에 직면해야 하는 일입니다. 물론 저는 우리 나라 교사들이 지나치게 째째하다는 점에서는 동의 합니다. 그들에게 용기, 대담성, 창의성이 지나치게 부족함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것을 다 갖추기가 어렵다면 째째할지언정 신중하고 사려깊은 교사가 무모하고 대담하지만 째째하지는 않은 교사보다는 더 바람직한 교사가 될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교육자 뿐 아니라 심지어 장군들에게까지 적용됩니다. 용맹함과 신중함을 겸비하기가 어렵다면 그 중 하나만 가질 수 있다면 용맹한 장수 보다는 신중한 장수가 군대를 지휘하는 것이 더 좋은 선택이 될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예를 보십시오. 그 분은 결코 용맹한 장수가 아니었습니다.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서기 전에는 출격하지 않는 그의 모습은 소위 “째째”해 보이기도 합니다. 조선의 조정은 수군이 궤멸된 다음에야 그의 째째함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째째함을, 신중하고 사려깊음, 그리고 섬세하고 꼼꼼함으로 받아들여야지 결코 비겁하고 우유부단함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교사는 학생들에게 미칠 영향과 위험을 우려하여 째째해 보일정도로 조심스러운 선택을 하는 것이지, 다른 이유 -동료들의 비난, 행정적인 규제, 교장의 압력, 관행이나 관례- 때문에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오직 교육적 결과라는 잣대에 의거해서 째째하게 좌고우면해야 하며, 또 이 잣대에 의거해서 때로는 용감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젊은 여러분에게는 유감스러운 말씀입니다만 대개는 대담한 선택보다는 째째한 선택이 올바른 경우가 많습니다. 남이 뭐라고 손가락질 하더라도 교사는 결코 객기를 부려서는 안 됩니다. 교직생활의 대부분은 이 째째한 선택의 연속입니다. 하지만 흔히 있는 일은 아니지만 확신이 섰다면, 그리고 그것이 교육적으로 마땅한 것이라고 결정되었다면 여러분은 대담해 지는데 조금의 두려움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의 규범은 오직 하나 교육입니다. 교육이 여러분을 주저하게 만들고, 교육이 여러분을 대담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육적으로 올바른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명쾌한 답을 구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교육에 대해서는 상충하는 여러 주장들이 대립하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옳기도 하고 모두 그르기도 합니다. 이 중 한 관점에 입각해서 대담하게 행동하는 것이 옳을 수도 있지만, 그럴 경우 다른 관점에 의해 신중해야 한다는 반대 주장도 가능한 것이 교육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용감해지기 전에 먼저 째째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학생들의 현 상태가 어떤지 째째하게 살펴보아야 하며, 여러분이 처한 교육적 환경, 여러분의 선택이 가져올 결과, 또 다른 대안의 가능성도 째째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입장을 가진 교사들과도 째째하게 토의해야 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다 보면 여러분의 입장이 처음과는 상당히 달라져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도출된 최종 입장이 있다면, 이 때가 여러분이 째째함을 그만두고 용기있게 밀고 나가야 할 순간입니다.

사업가는 과감한 선택을 하지 않으면 엄청난 이익을 놓칠수 있습니다. 물론 그 선택이 잘못되었다면 막대한 손실을 입을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업가는 기대되는 이익과 예상되는 리스크를 비교합니다. 그래서 한 푼이라도 이익 쪽이 크면 용감하게 달려 나갑니다. 하지만 교사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이익이 손실보다 큰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이익은 크지 않더라도 손실이 없는 쪽이 교사가 선택해야 할 방향입니다. 그래서 교육에는 공리주의가 적용되지 않습니다. 교사는 학생들의 총효용 입장에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불리한 학생 입장에서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업가에게 안 팔리는 상품은 버려야 할 대상이지만, 교사에게 가장 불리한 학생은 오히려 가장 공들여야 할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사는 불리한 학생이 가장 적게 나오는 안이 나올때까지 계획을 수정하고 수정해야 합니다. 이건 사람을, 더군다나 미래를 짊어질 사람을 다루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사는 째째합니다. 하지만 그 째째함은 위대하고 영웅적인 째째함이며 인류의 미래를 밝히는 째재함입니다. 여러분은 째째해질 수 있는 용기와 그 째째함을 유지할 수 있는 끈기와 절제를 가져야 합니다.

이글루스 가든 - 자유로운 아이들, 아름다운 교육을...

by 부정변증법 | 2009/12/07 15:40 | 젊은 교사에게 드리는 편지 | 트랙백 | 덧글(2)

마르크스 강독 - 포이어바하에 대한 테제 3번

원문)
3

인간이 환경과 교육의 산물이며 따라서 인간의 변화는 환경과 교육의 변화라는 유물론의 학설은 인간이 환경을 변화시키며 교육자 자신이 교육받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따라서 이 학설은 사회를 두 부문―그 중 한부분은 다른 한 부분보다 더 우월하게 된다 ―으로 나눌 수밖에 없다. 환경의 변혁과 인간 활동 혹은 자기변혁의 일치는 오직 '혁명적 실천'으로서만 파악되고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The materialist doctrine that men are products of circumstances and upbringing, and that, therefore, changed men are products of changed circumstances and changed upbringing, forgets that it is men who change circumstances and that the educator must himself be educated. Hence this doctrine is bound to divide society into two parts, one of which is superior to society. The coincidence of the changing of circumstances and of human activity or self-change [Selbstveränderung] can be conceived and rationally understood only as revolutionary practice.

읽기) 여기서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하를 위시한 그 때 까지의 유물론의 공통된 결함을 다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개요는 테제2번과 동일하게 인간을 활동의 주체로 파악하지 못하고 다만 객체로, 수동적인 수용자로 파악했다는 점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이전까지의 유물론은 인간은 자신이 살고 있는 환경과 받아 온 교육(양육이라고 직역해야 하지만 양육, 훈육, 학습을 포괄하는 의미에서 교육으로 옮겼습니다)의 결과물로 보았습니다. 이건 사실 오늘날에도 많은 좌파들이 자주 빠지는 함정이며, 스탈린 시대 교과서의 '반영론(의식은 물질의 반영이다)'에서 극적으로 표현되기도 했습니다.

사실 여기서 마르크스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인간은 환경의 영향을 받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환경에 영향을 주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인간이 환경을 좌지우지 하는 것은 아니며, 다만 환경과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상호 변화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이 어떤 교육을 받았느냐에 따라 크게 영향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교육을 담당하는 교육자 또한 사람이며 그 과정에서 영향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망각하면 인간은 환경에 수동적으로 영향받고, 인간은 교육받은 대로 만들어진다는 그릇된 생각이 발생됩니다. 그렇다면 환경을 더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또 교육을 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지도한다는 전제적인 발상으로는 한 걸음 남은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과거 소비에트에서 마르크스의 사상을 마치 유물론인 것처럼 몰아 붙인 까닭이며, 변증법을 사유의 방법이 아니라 마치 자연의 존재법칙인 것처럼 호도한 까닭입니다. 이렇게 유물론적 측면이 기계적으로 강조될때 "법칙을 먼저 알고 있는" 지도자 동지의 자리가 마련되는 것입니다.

 마르크스의 인식론은 유물론이라기 보다는 유물론과 관념론의 지양이며, 그것은 바로 이미 정해진 외적 지식의 단순한 습득(유물론적 관점)과 자유 의지를 가지고 실제로 행하는 실천(관념론적 관점)의 결합입니다. 즉 테제1번에서 말했듯 인식론의 변혁적이고 능동적인 측면은 도리어 관념론에서 발전해왔기에 마르크스는 그것을 관념론의 것이라 하여 폐기하는 대신 보존하고, 다시 유물론의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측면과 결합하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리의 객관성은 인식 대상 그 자체, 혹은 인식 과정 혹은 방법론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론과 실천의 결합을 통해 현실 속에서 스스로 입증되어 나가는 데 있는 것입니다. 이는 공교롭게도 수십년 뒤 마르크스의 이 노트를 읽어 봤을 리 없는 미국의 철학자 존 듀이의 인식론과 일맥상통합니다. 듀이 역시 '철학의 재구성'과 '자연과 경험'에서 관념론적 입장과 유물론적 입장을 모두 비판하면서 사고와 실천의 결합으로서 '경험'을 진리의 기준으로 제시한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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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정변증법 | 2009/12/02 09:38 | 마르크스 읽기 | 트랙백 | 덧글(0)

마르크스 강독 - 포이어바하에 관한 테제 2번

정말 오랜만에 마르크스 강독을 올립니다. 요즘 너무 할 일과 읽을 거리가 많은 탓인지 마르크스 다시 읽기가 자꾸 뒤로 밀립니다. 어쩌면 이게 고전의 운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고전은 마치 언제 찾아도 그 자리에 있을 것 같은 오랜 친구처럼 느껴져서 그리 시급하게 느껴지지 않거든요. 하지만 때가 되면 반드시 다시 읽게되는 책, 그게 고전이겠죠. 이제 포이어바하에 관한 테제 2번을 읽어 보겠습니다.


원문)
2

인간의 사유에 객관적인 진리가 부여될 수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는 이론적인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인 문제이다. 인간은 자기 사유의 참됨을, 즉 현실성과 힘, 그의 사유의 차안성을 실천속에서 증명해야 한다. 실천에서 분리된 사유를 놓고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 하는 논쟁은 순전히 스콜라적인 문제이다.

The question whether objective truth can be attributed to human thinking is not a question of theory but is a practical question. Man must prove the truth — i.e. the reality and power, the this-sideness of his thinking in practice. The dispute over the reality or non-reality of thinking that is isolated from practice is a purely scholastic question.

읽기)
이 부분은 훗날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매우 선호했던 부분입니다. 그때 그들은 이 글을 "실천"이라는 부분에 강한 방점을 두어 읽었습니다. 이를 통해 지식인들을 비판하고 현실적인 투쟁을 외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실천을 지나치게 협소하게 파악하여 계급투쟁과 관련한 경제투쟁이나 정치투쟁을 강조한 오류를 범했습니다. 이 글이 '인식론'임을 유념해야 합니다. 그리고 제일 마지막 문장에서 '스콜라'를 대비시킴을 유념해야 합니다.

스콜라 철학은 100% 연역으로 구성된 철학입니다. 실체에 대한 정의로부터 출발하여 인간 만사 모든 것을 세밀하게 논리적으로 연역하는 체계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경향은 이후 독일 관념론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칸트의, 그리고 헤겔의 거대한 철학체계는 순전히 "곰곰히 따져도 말이됨", 즉 논리적인 정합성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이를 비판합니다. 그 거대한 체계가 아무리 꼼꼼하게 짜여 있어도 결국은 인간의 머리속에서 일어난 "사유"에 불과한 것이며, 그 사유가 참인지 거짓인지는 실제로 해 보아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마르크스가 덮어놓고 "실천"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유"는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사유는 "실제로 해 봄" 즉 실천을 염두에 두고 이루어져야 하며, 실천을 통해 검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마르크스의 인식론은 사실상 '이론수립-가설설정-경험적 증거로 검증'이라는 과학적 방법론을 채택하겠다는 선언입니다. 사회과학이 보편화된 오늘날에야 이게 너무 당연한 것이지만, 자연과학이 아니면 모두 철학적 사변에 의존했던 19세기에는 자연계를 대상이 아니라 인간계를 대사으로 과학적 방법으로 탐구한다는 것은 매우 생소한 아이디어였습니다.


이글루스 가든 - 맑스공부하기

by 부정변증법 | 2009/11/30 10:47 | 마르크스 읽기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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